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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집까지 도보로 대략 15분 거리. 아파트촌이라 아파트상가들을 따라 쭉 걸으면 얼추 열 개가 넘는 커피숍을 보게 된다. 파리, 저리 가라다. 노상카페도 언제든 가능하다. 파트릭 모디아노 소설들을 연이어 읽으며 드는 생각이 왜 카페 모디아노(cafe modiano)는 없는 것일까. 다른 책은 몰라도 적어도 카페라면 모디아노 소설을 소장하고 있어야 될 것 같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도 어김없이 르 콩데라는 카페가 등장한다.
거기서는 이전의 나와 다른 임시적 관계와 정체를 형성할 수 있다. 닉네임 루키로 불리는 여자는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더 멀리 가고자 꿈꾼다. 책에서 내내 강조하듯이 젊을 때는 의심하지 않고 일단 믿는다. 잘 캐묻지 않는다. 관계를 비교적 쉽게 맺는 반면에 먼지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질 때가 많다. 여기저기 구멍들이 난무하고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 세월이 흐른 뒤 그곳을 애써 되찾아가는 경우가 간혹 있을 뿐이다. 누군가 함께 걸었던 그 길을 혼자 걸으며 마주하는 잔상들. 그나마 그곳이 자리보존을 하고 있다면 추억여행으로서 다행이다.
본래 루키의 이름은 자클린 들랑크였다. 물랭루즈에서 일하는 엄마를 둔 미성년자로 밤거리를 서성이다가 경찰에게 잡힌 적이 있다. 두 번의 일탈 후 들랑크는 영영 엄마의 집을 나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나쁜 친구들을 끊어내고 언덕의 더 높은 곳에 진출하고자 그녀는 슈로 부인이 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채 일년도 안 된다. 그녀 안의 보헤미안적 기질과 ‘진정한 삶’을 찾고픈 갈망이 남편의 집을 나와 그녀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한다.
한 해는 10월에 시작된다. 그때는 새학기가 시작되는 때이며 계획들을 세우는 시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10월에 ‘르 콩데’에 나타난 것은 자기 인생의 한 부분과 절연하고 소설에서 말하는 ‘탈바꿈’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24)
장례 계획이라도 짜면 좋을, 삶이 제로상태에서 다시 시작되면 좋을,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였다. (64)
루키는 일상적인 관계를 깨고 싶어 하면서도 아이로니하게도 깊숙이 내려앉고 싶은 이중적인 감정에 휘둘린다. 넘실대는 루키의 삶은 청춘의 양면적인 두 얼굴을 담고 있다.
이따금 이정표도 없는 넓고 막막한 대지처럼 보이는 이 삶 속에서, 모든 도피선과 잃어버린 지평들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턱대고 항해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지표들을 찾고, 일종의 토지대장 같은 것을 작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계의 실을 잣고 불확실한 만남들을 좀더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52)
그녀는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도망하고, 항상 더 멀리 도피하며, 난폭한 방식으로 일상적인 삶과의 관계를 깨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자신이 뒤에 놓아둔 단역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내 책임을 지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황상태의 두려움을 보였다. 언젠가 그 협박의 대가들을 피해 그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몸을 숨겨야 했다. (128)
그러다 작가지망생인 롤랑을 만나 과거와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는 미지로 떠날 계획을 잡는다. 알 수 없는 암흑물질로 이루어진 우주처럼 세상은 미지, 빈 공간으로 남겨진 곳이 많다. 어찌된 영문인지 바로 전날 밤 그녀는 베란다에서 투신한다. 어디로 가든, 누구와 함께 있든 완전한 자유와 떠남은 불가능하다고 직감적으로 느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루키라는 시작으로 끝을 내어 변질과 퇴색을 맞고자 한 것일까. ‘영원한 신인’으로 남고자 한 청춘의 발현이었을까. 그 시절, 이 연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기 드 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146)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는 찰나에 그 자유로운 상승 비행에서 자신을 끊은 루키의 파격적 행위를 토대로 청춘이 머무는 자리는 “하얀 공백, 내 앞으로 환히 펴지는 그 빛(161)”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듯하다. 알 수 없기에 ‘영원한 회귀’만이 열린 길이라고 암시하는 것일까.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는 자기결정력을 지니는 삶의 초입에서 느끼는 설렘과 도전의식 못지않게 앞뒤 문맥 없이 또 대책 없이 들이닥치는 감정의 회오리와 파란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 외에도 다성적인 화자들의 진술을 통해 루키의 삶과 죽음을 알아가는 여정도 흥미로웠다. 악역으로 남을 것 같던 케슬러가 예상을 깨고 루키의 뒤를 더 이상 파지 않고 덮어주는 장면에서 실로 감동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함께하는 것도 롤랑이라는 인물 이상으로 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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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르 콩데'는 삶의 단조로움에서 예견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피난처였다. 내가 언젠가는 놓아둘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일부-가장 좋은 일부-가 그곳에 있으리라. (30쪽)
나의 공간적 피난처를 굳이 꼽아 보라면 집 근처의 스타벅스다. 거리가 가장 가깝기도 하고 수많은 카페의 체인점 중에서 분위기나, 커피맛이 가장 입맛에 맞기도 해서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가장 좋은 내 일부를 놓을 만큼 편한 곳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카페에다 늘 사람이 북적이고, 철저히 개인주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 콩데'에 나 자신의 가장 좋은 일부가 그곳에 있을 거라는 말이 참 부러웠다. 나에겐 그런 공간이 없을뿐더러 나 자신의 가장 좋은 일부가 무엇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작품은『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은 게 전부다. 결코 녹록한 책이었노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안개에 휩싸인 듯 몽롱한 분위기에 저자의 작품을 더 탐독해보고 싶다는 열망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되면서 그의 작품이 국내에 더 출간이 되었고 그 작품들 가운데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먼저 읽게 되었다. 뭔가 사색적이면서도 사연이 깃든 추억이 있을 것 같은 카페. 그 카페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고 그 안에 펼쳐진 이야기 또한 궁금했다. 얇은 책이었지만 가볍게 페이지를 넘길 만큼 부담 없는 책은 아니었다. ‘르 콩데’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루키라 불리는 한 여인의 정체. 자클린 들랑크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으며 결혼도 했고 남편에게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다는 통보를 한 채 집을 나온 여인. 그 여인의 과거가 각각 다른 화자에 의해 드러나자 그 여인의 실체가 궁금해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당겨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문득 최근에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나란 무엇인가』에서 얘기한 여러 모습의 ‘나’, ‘분인’이 이 여인과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의 화자로부터 드러나는 루키이자 자클린 들랑크라는 여인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옮긴이는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을 통해 과거를 정립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 명의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보고 생각하는 바를 종합하여 전체적인 상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작품의 큰 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성을 지닌다.’라고 말하고 있다.『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전자의 구도를 취하고 있는 작품임을 경험했기에 각기 다른 화자로 드러나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르 콩데’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매력적인 여인으로,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갔으며, 미성년자일 때 보호자 없이 밤거리를 헤매다 경찰서 조사를 받은 일, 다른 여인과 친구가 되었지만 무언가에 홀리듯 마약에도 손을 뻗은 일. 이 모든 게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네 명의 화자의 이름도 섞이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도 섞여버리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파리의 수많은 지명들, 지리적인 위치들도 그런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런 요소들이 자칫 ‘기억의 파편’들일까봐 긴장을 하기도 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삶을 한 부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왕이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남길 바랐다. 그녀의 현재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지켜봤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길 원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갖기도 전에 그녀는 네 명의 화자뿐만 아니라 그녀를 지켜 본 독자의 눈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화자들과 얽혀있는 그녀의 이야기보다 앞으로 나아갈 그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던 그녀의 사라짐은 허망감을 주기도 했다. ‘르 콩데’에서 시작된 그녀와의 인연이 송두리째 날아간 기분까지 들었다. ‘오직 도망치는 순간에만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103쪽)’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관계를 만든다는 것, 안정적이 된다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 일상의 안온함 속에 마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란 옮긴이의 말이 그녀의 사라짐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그녀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한 마디로 말하긴 힘들다. 나 자신도 한 마디로 정의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정의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며 때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위를 지켜보면서,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혹시 놓쳐버린 게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또렷하진 않지만 이룩한 것보다 놓쳐버린 게 더 많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여전히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무언가가 나를 붙들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침울한 기분이 들어 루키이자 자클린 들랑크의 삶이 내 안으로 침잠해 버린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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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떠올리는 습관에 담겨 있는 마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현재의 행복과 불행과 관련이 있기도 하겠지만, 관련이 크게 없더라도 종종 돌아보는 기억 안에서 자신을 만나는 쓸쓸함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욱이 그게 젊음을 표방하고 있는 상태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영역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라면, 스스로를 기억에서 지워도 흐뭇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한 그리움이 좀 남아 있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여럿 있고, 그 사람으로 인해 함께 보낸 시간과 공간이 남아 있고,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는가 어떤가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이 작가는 왜 자꾸 이 길로 돌아가는 걸까. 무엇이 그의 의식을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나는 꽤 오랫동안 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의식적으로 물리치면서 부질없는 되새김이라고 여겼다. 지금이 중요하고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지나버린 시간과 인연은 되도록 살피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랬던지, 무의식 속에 있던 기억들이 가끔 꿈에 나타나는 바람에 시달린 적도 있지만 꿈조차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아릿하게 떠올릴 기억보다 애써 지워야 할 일들이 내 젊음에는 더 많았던 것이었을까.(특별히 나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러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것들이 나를 아쉽게 하는 탓이 크겠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의 내 삶에 불만이 있다거나 다른 삶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도 아니지만.)
썩 좋았던 소설이라고는 쓰지 못하겠다. 소설보다는 내 마음을 짚는 일에 더 신경이 쓰여 그랬을 수도 있다. 누가 나를 기억해 주기는 할까, 이 생각도 씁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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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삶의 길 중간에서,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우리는 그토록 많은 빈정거리는 말과 슬픈 말로 표현된 암울한 우울에 감싸였다 _ 기 드보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dans le cafe de la jeuness perdue 』를 읽기에 앞서, 모디아노가 책의 첫 페이지에 인용한 이 싯구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이는 이 책을 대하는 하나의 강령이 되어 페이지를 넘겨가는 동안 무시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한 줄의 언어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의 젊음과 이 책을 읽은 모든 개인의 젊음 안에서 가냘프게 울리고 있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순전 무구한 어린 시절을 벗어나 삶을 혼자 힘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그 어떤 젊은 날, 우선 열의에 찬 의무감을 느꼈고 앞으로 남은 나날을 진정한 삶으로 살 수 있느냐 아니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자각한다. 그러나, 곧 내외적으로 '빈정거리는 말'과 '슬픈 말'로 젊음은 우울을 맛보게 되고,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이 암울하게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예측에 사로 집힌다. 젊음을 무너뜨리려는 위협을 가해대는 이 우울을 교묘히 잘 헤쳐 나오기도 하고, 이 우울이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더 깊은 우울 안으로 빠뜨려지기도 한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 어느 경우에도 더 이상 '진정한 삶'에 대한 고민도 열망도 차츰 흐려지는 가운데, 그래도 각자의 삶은 계속된다. 이제는 문득문득 고개를 내미는 이 우울에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젊음에서 한창 멀어진 그 어느 날, 더 이상 잠재울 길 없는 비탄에 빠져든다: 젊음을 잃어버렸다고. 그때 우울을 알아버린 이후로 젊음은 영원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이 책에는 젊음의 한복판에 서서 '우울'을 서서히 알아가는 사람들, 충분히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날의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클린 들랑크라는 주인공에 대해서 (들랑크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화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들랑크를 둘러싼 정황을 풀어나가는데, 모든 문장은 우울함에 젖어있다. 흐느끼는듯한 슬픔을 동반하는 우울이다. 슬픔 역시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조금씩 스며들다가 마지막 언저리에서 아련한 아픔으로 굳어버리는 슬픔이다. 카페 '르 콩테'는 모든 이들의 우울함이 뒤섞여 미묘한 다정함을 자아낸다. 들랑크에게 '루키'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나름의 한 무리를 형성했던 보헤미안적인 사람들의 아지트이다. 대부분 20세 전후라서 아직 이렇다 할만한 과거가 없을 듯하지만, 모두들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현재에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는 과거에서 끝없이 도피하며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자 애쓰는 '루키'에게 더없이 적절했다.
루키는 '르 콩테'의 여느 멤버들과는 달리 옷을 잘 차려입으며 항상 손에 책을 들고 있지만, 모종의 사연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보잉이라는 카페 멤버가 쓰고 있던 노트가 그녀의 과거를 밝혀나가는 계기가 된다. 3년간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의 이름을 적었고, 매번 날짜와 정확한 시간도 함께 기록한 노트인데, '스쳐 지나가고 결국 거리를 따라가다 길을 잃고 마는 여자들, 남자들, 아이들, 개들의 그 끊임없는 물결 속에서, 때로는 얼굴 하나라도 붙들어놓고' 싶은 심정에서 시작되었다. '대도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몇 개의 정점들을 찾아야'한다는 필요성에서 출발한 기록이었다. 이 노트는 '르 콩테'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자칭 예술 수집가 (알고 보면 사람을 찾아주는 사립탐정 같은 일을 해 온 사람이다)인 '피에르 케슬레'의 손에 며칠 들어가 있는 사이, '루키'의 흩어져있던 과거의 정점들이 하나로 이어진다. (본명이 '자클린 들랑크'인) 루키는 물랭루주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몽마르트르에서 살았던 시절, '공포와 불안, 나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라는 압박감을 느꼈다. 이는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늦은 밤 시간 동안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 습관으로 표출되었고, 배회의 반경은 점점 넓어져 '서쪽으로의 야간 방황'을 일삼는다. 급기야 두 번은 '미성년자 방황'으로 경찰서에 넘겨진 기록도 갖고 있다.
이런 습관적 도피를 일삼는 도중, 약국에서 자신의 돈을 내준 '자네트 골'이라는 여성을 알게 되면서 들랑크의 도피는 더 과감해진다. 자네트가 일하는 '르 캉테'라는 레스토랑에서 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관계와 만남을 기대했던 들랑크에게 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했다. 그러나, 마약과 의심쩍은 행동 등에서 나타나는 이곳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알아가면서 들랑크는 이 사람들 역시 자신이 떠나 나와야 할 세계임을 깨닫는다. '르 캉테'와 관계된 모든 것과의 단절을 결심하며 들랑크는 '도망치는 순간에만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라고 말한다.
시간이 한참 지나 들랑크가 자리를 잡은 '르 콩테'도 사실은 어느 저녁 자행한 도피 여정에서 우연히 들어가게 된 곳이다. 몽마르트르의 어머니에서, 그 부근의 '르 캉테'에서 도피하여 단절된 삶을 꾸려가던 도중, 들랑크는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장 피에느 슈로'를 알게 되어 결혼한다. 이 결혼 역시 별 볼일 없는 단순 업무를 하고 있는 현재의 삶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모델하우스 같은 무미건조한 집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던 결혼생활도 결국 들랑크에게는 확실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찾아 나서면서 들랑크는 '관계'를 만들며 삶의 지표를 찾아보려 하지만 거듭 실패한 셈이다.
◆이따금 이정표도 없는 넓고 막막한 대지처럼 보이는 이 삶 속에서, 모든 도피선과 잃어버린 지평들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턱대고 항해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지표들을 찾고, 일종의 토지대장 같은 것을 작성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계의 실을 잣고, 불확실한 만남들을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52쪽
바라던 도피지가 아님으로 판명된 결혼 생활에서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면 '기 드 베르'의 모임이었다. 신비술인가 점성술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어떤 현실에서도 충족감을 발견하지 못한 들랑크에게 이제는 인식과 의식을 넘어선 이 미지의 세계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작가 지망생 '롤랑'을 만났고 이 역시 들랑크 자신처럼 뼈아픈 기억을 가진 동네에서 한참 떠나와 일명 파리의 '중립지대'를 부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어두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시작이 가능해 보인다. 들랑크 자신의 표류해오던 삶에서 하나의 지표 역할을 해줄 만한 관계를 찾은 것 같다. 무미건조한 삶의 현장인 결혼생활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들랑크는 어느 날 저녁, 기 드베르의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 날 우연히 들어선 곳이 오데옹 거리에 있는 카페 '르 콩테'였고, 남편이 없는 시간에 이곳으로 자주 도피해 온다. 처음에는 혼자 말없이 구석자리에 앉았지만 이곳의 보헤미안적 사람들에게서 자신과의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는지 차츰 그들 속에 섞인다. 들랑크는 '뇌이의 아파트에 있는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짐을 절감하게 되고 결국, 영원히 떠날 것을 결심한다. 롤랑과 함께 파리의 '부재자'로 선고된 사람들이 살만한 동네에 머물며 막 시작된 또 다른 도피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도망하고, 항상 더 멀리 도피하며, 난폭한 방식으로 일상적인 삶과의 관계를 깨고자 했던 것이다. 128쪽
십 대 중반부터 20대 중반까지 계속 도피를 자행해왔지만 들랑크의 '현재'는 항상 또 다른 어두운 '과거'로 전락해버린다. 이는 또 '도피'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찾던 관계를 발견하지 못한 실망감, 자신의 삶이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쌓이면서 점점 그녀의 삶은 자신이 바라던 '진정한 삶'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자신이 뒤에 놓아둔 단역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내 책임을 지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황 상태의 두려움을 보였다'라고 할 만큼 자신이 떠나온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결혼에서조차 도피를 결심한 이유는 '일상생활에서 남편을 점점 더 많이 비난'하게 될 정도로 '그녀 말로는 그건 진정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그림자와 도피 이후의 두려움이 새로운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어서 일지도 모른다.
거듭된 도피로 점점 무겁게 내려앉은 들랑크의 삶이 과연 '르 콩테'에서는 결정적 계기를 맞을 수 있을까? 과거를 외면하고 현실의 삶만 이야기하는 이곳 사람들과 하나의 그룹을 이루며 들랑크의 삶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동질적 사람들이 지어준 '루키'라는 별명으로 들랑크는 새롭게 태어난 셈이다. 관계가 이루어지고 지표를 얻게 되고 더군다나 비슷한 경험을 가진 데다가 자신을 잘 이해하는 롤랑을 만나게 되었으니, 더 이상 도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현저히 높다. 마침, '르 콩테'에서 밥 스톰스를 알게 되고 이 부유하고 학식 있는 사람은 이 젊은 커플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다. 파티에 초대하는가 하면 이들에게 마요르카의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며 열쇠를 건네준다. 이 선의의 행운을 받은 이후, 롤랑의 삶에는 희망이 일기 시작한다.
◆ 나는 그날 아침 행복했다. 그리고 가벼웠다. 약간 황홀하기까지 했다. 지평선은 저 멀리 우리 앞에 무한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157쪽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얽혀 머뭇거리며 '중립지대'라는 모호한 인생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던 롤랑은 이제 자신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들랑크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 나는 며칠 내에 아르장틴 가를 떠날 결심을 이미 굳힌 상태였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치유된 듯했고, 앞으로는 중립지대에 숨어 있을 어떠한 이유도 없는 듯했다. 158~159쪽
당연히 이 미래에 대한 계획에는 들랑크도 포함되어 있다. 서로의 삶에 드리운 과거의 불행한 흔적을 모조리 없애고 푸른 바다의 마요르카에게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들랑크 역시 자신과 너무 잘 맞는 사람과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어야 한다.
마요르카로의 출발을 앞두고 들랑크와 다섯시에 '르 콩데'에서 만나기로 한 날, 롤랑을 맞은 것은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다. 인사에도 묵묵부답이며'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이상한 시선을 나에게로 고정하고' 있던 그들 중 하나가 드디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키 그녀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어."
루키의 집을 허둥지둥 찾아가는 롤랑에게는 '부재'가 생겨났다.
◆ 그 순간부터 나의 삶에는 부재. 하얀 공백이 생겼고, 그것은 단순히 공허함만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걸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 새하얀 공백은 환히 퍼지는 강렬한 빛으로 내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끝까지 그럴 것이다. 160쪽
루키의 집에는 자네트와 피에르 케슬레가 있었다. 들랑크의 첫 도피를 도와주기도 했고 또다른 도피를 유발한 원인이기도 했던 자네트. 들랑크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의뢰인인 들랑크의 남편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던 케슬레. 이 두 사람 역시 말하고 싶지 않고 애써 잊고 싶은 과거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들랑크의 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들랑크의 마지막 도피를 막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반복이 없는 완벽한 도피를 성취하려는 들랑크의 발걸음을 누가 붙잡을 수 있을까?
◆ 그녀는 발코니로 나갔다고 했다. 그녀가 난간 너머로 한 발을 내밀었다. 자네트는 그녀의 실내복 자락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기 위해서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몇 마디 남겼을 뿐이었다. "됐어, 이제 마음대로 가렴." 161쪽
삶 속에서 어느 순간 불안과 위태로움을 자각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안정'을 바라는 것 아닌가? 지금의 삶과는 다른 '진정한 삶'을 막연히 확신하며,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무게를 벗어나려고 애쓰게 된다. 제일 먼저 소심하게 시도해 본 도피는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낳으며 또 다른 도피를 일으킨다. 점점 더 멀리 흘러가게 되며 뒤에 두고 온 과거의 무게도 더욱 중해진다. 과거를 버리며 꿈꾸는 '진정한 삶'은 혼자만의 고립이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토대로 한다. 관계는 좌표를 이루고 그 속에서 정해진 점에 머물며 더 이상 표류하지 않는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들랑크 처럼 관계의 좌표 속에서 찾은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버려둔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자신을 옭아매기도 하고 거듭된 도피를 해 오며 이미 '진정한 삶'에 대한 희망이 그 힘을 다했기 때문인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의 유효기간은 짧고 또다시 끝이 없어 보이는 불안과 무기력에 빠져든다. 이때는 어쩌면 '포기'가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진정한 삶은 없다'라고 긍정해버린다면, 현재의 관계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도 비교적 괜찮아 보일 수 있다. 소심한 받아들임의 자세를 취한다면, 힘들고 지치게 하는 방황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줄기찬 실패 후 자족하며 도피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현실마다 자신을 덮쳐오는 무게가 있기에 마지막으로 최선의 도피, 지금껏 모든 도피를 끝내 줄 단 한 번의 결정적 도피를 모색하게 된다. 들랑크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십 대 중반부터 이리저리 피해 중립지대로 숨어들며 살아온 파리를 드디어 떠날 수 있는 날.... 그토록 원하던 '진정한 삶'의 가능성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그녀의 선택은 '세상 밖으로' 몸소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 롤랑과 함께 하므로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이번의 도피마저도 그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는 듯, 이 역시 진정한 삶에 이를 수는 없을 거라고 단호히 말하는 듯, 들랑크는 더없이 온전한 도피를 선택했다. 이제는 그 어떤 도피도 필요 없는 최후의 도피였다.
삶의 여러 순간 수도 없이 도피를 꿈꾼다. 어렵사리 실행한 도피에서 또 다른 결핍과 무게를 맛보고선 하는 수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무게가 참을 수없이 중해지는 순간에는 비롯 덧없을지라도 또 도피를 감행하려는 음모를 세운다. 이 음모만으로도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짜릿한 복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소심한 나는 이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휘청거리더라도 빤히 내다보이는 이 자리를 사수한다. 한 번의 대범한 도피는 끝없는 표류를 유발할 것이며 이에 한번 휩쓸리기 시작하면 이 보잘것없는 자리마저도 잃게 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에 항복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밤 홀로 걸어가는 길거리 어디에선가 소심한 내 안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더 멀리 도망 쳐보아도 '진정한 삶'은 없다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지표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삶의 여러 모습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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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등장하는 카페, 그리고 주인공들의 일상은 그저 현실도 막막하지만, 미래조차 견디기 힘든 현실과도 같다. 작가는 기억을 더듬어 소설을 완성 시키지만, 모든 주인공들은 별 볼일 없다. 그저 마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말하지만,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반복의 니힐리즘 끝에 탄생하는 초인을 생략하고 있다. 아니면 루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려는 초인의 의지를 보여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체의 초인과는 거리가 있다. 60년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 작가는 이 시대를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6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면 20대 였을테니 당시 상황을 잘 알고 그 상황을 회고하면서 소설을 정리했을 수도 있다.
비록, 사회적 맥락을 소설을 통해서 알수는 없지만, 젊은 이들의 젊음을 잃어야 했는지를 그는 기억 속으로 들어가 더듬어 봤던 것일 수도 있다.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진다 해서 사실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60년대는 잃어버린 젊음이라는 사실 아래 정확한 사실이 아닌 픽션이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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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구조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신원 미상의 여자'는 세 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는 에피소드마다 챕터를 나누어주어서 그나마 조금 포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외의 소설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억이 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어내려가야 했다.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안개 속을 헤매며 그 속에서 어떤 뚜렷한 (구체적인) 상을 잡으려고 분투하는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겨우 읽고 나서 보게 되는 '옮긴이의 글'은 한 편의 보상같이 느껴진다. 내가 이런 소설을 읽었구나 하는 뿌듯함. 그러면서 동시에 이 분들은 참 대단하다.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런 주제와 시각을 포착해냈을까 하는 경외감을 느낀다.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모디아노의 소설을 계속 반복해서 읽어 그 이야기를 파악하는 방법보다는 대부분 모디아노 소설들이 반복적으로 파편처럼 아스라지는 시간 속에서 '정체성 찾기' 내용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하니 차라리 시중에 나온 소설들을 하나씩 다 읽어 '모디아노 소설의 정체성'을 파악하기로 했다. 항아리를 채울 때는 그 내용물이 보이지 않지만, 계속 채우고 채우다 보면 항아리 밖으로 넘치게 되어 그 내용물을 보게 되는 것처럼,,,,,, 계속 여러 책 읽다보면 모디아노의 글이 파악되고, 형상이 잡히고, 내 몸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대학생 때 이 작가의 책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 읽어보면 그때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아니 어떻게 이 작가의 책에 그토록 공감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지금은 등장인물의 부적응적인 모습에는 공감할 수 있어도 문체의 모호함이라든가 집요한 '기록 남기기' 혹은 '수집하기'가 별로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소설처럼 그들이 제시하는 뱃길을 따라 구조를 파악하며 읽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바다에서 뱃길을 찾아 가는 작업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교 저학년 때 좋아했던 헤세에 이어 대학교 2학년때 도서관에서 접한 모디아노의 글은 그 이후 5년이 넘게 내 (글의) 옷이 되어 주었다. 아마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기 전의 그 불안과 한시적으로 (입시와 취업 사이에 주어진 인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껏 만끽해보라고) 주어진 자유와 낭만이, 안개처럼 모호하게 드러나는 모디아노 특유의 회화적 문체와 그 속에서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그럼에도 '망각'되기 전까지(즉 소설이 종결되기 전까지 소설 속에서) 계속 살아나갔던 등장인물에 나 자신을 이입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게 아닐까.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책 속에 펼쳐지는 세상에서 존재의 완전한 충만감을 찾다가 소설이 끝나면 그 존재감을 잃는다. 근데 모디아노 소설에서는 그들의 존재감이 소설을 다 읽는데에서 끝나지 않도록 소설 말미에 이르면 그 세계에서 이미 실종되거나, 사라지거나, 죽거나 한다. 적어도 '주인공'들은. (파트릭 모디아노 소설의 화자는 주인공의 상을 형성하라고 주어진 등장인물이지, 모디아노가 그의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형상화시키는 '주인공'들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주인공이 기억을 잃어 자신의 잏어버린 정체성을 타자의 기억 속에서 '주인공'으로 형상화시키는 복합적인 구조로 되어 있지만.)
소설 읽기는 마치 축제를 즐기는 것 같다. 하지만 축제는 끝나기 마련이고, 축제가 끝나면 일상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지리멸절하게 계속 이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축제'에 있을 때 모습이 '일상'에 있는 모습보다 더 '나'에 가까운 것 같다. 적어도 축제에선 자아가 자유를 느끼고, 일상에선 자아가 구속을 느낀다. 일상과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는 어렵다. 환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일상의 '나'가 규정되는데, 치이고 꺾이고 잃어지고 넘어지는 나는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큰 고통이 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나에게서 계속 멀어지는 것을 본다. 단지 외부 환경에 방어할 수 없는 힘이 약해서, 속수무책으로 끌려간다는 점에서. 심지어 내 외부 환경은 나를 살짝 밀었을 뿐인데, 나는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하고 발을 헛디딘 것도 모잘라 계속 떼굴떼굴 굴러 이제 환경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궁창까지 스스로를 멈추지 못하고 굴러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환경과 만나면 나 자신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모습을 본다. 그걸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타인들은 아직도 어린 아이에 머물고 있다고,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아직도 없다고 말할 테고, 관념주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너질 수 있는 건 젊음의 특권이며 일정한 나이 시간대만 어른들이 그런 '속수무책'을 용납한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Dans le cafe de la jeunesse perdue> 제목부터가 무척 낭만적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어보니 내용도 인물도 무척 낭만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구성이 참 흥미로왔다. 4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모두 '루키'를 중심으로 구성된, '루키'를 위해 책 속에서 역할을 하기 위한 화자이다. 처음에 등장하는 '나'는 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에꼴 지역에 있는 광산학교 학생으로 십대와 이십대 초반 청년들이 주로 드나들던 르 콩데 카페에서 루키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느낀 그녀의 인상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등장하는 '나'는 피에르 케슬레로 과거가 모호한 (나만 잘 이해를 못해 모호한지?) 비밀 탐정같은 사람이다. 그의 '조사'를 통해 루키의 과거를 추적해 간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나'는 루키 그 자신이다. 케슬레가 수집한 정보 끝에서부터 그녀가 '화자'가 되어 시작되는 이야기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집에서 매번 가출하고, 우연히 소울메이트같은 친구를 만나 인공낙원에 빠져들었다가 그러면서도 안정된 삶을 찾아 일상에 몸을 담그는가 했더니 얼마 안 가 다시 '진정한 삶'을 꿈꾸며 일상의 관계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과거를 떠올려주는 과거의 장소들에서 일부러 멀리 떨어져 살고, 과거의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피하며, 그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는 장소에 가는 것을 강박적으로 피한다. 그녀의 독백 하나가 이 소설이 표상하는 세계를 아우르며 이 책을 대표하는 아포리즘으로 남았다. 네 번째 등장하는 '나'는 보헤미안적인 작가 지망생 롤랑으로 루키의 연인이다. 루키가 '망각'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녀의 '마지막', 즉 그녀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을 공유하는 동반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롤랑을 만난 후 그녀는 안정된 (그러나 케슬레가 그녀의 남편을 만나보고 느낀 바로는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결혼 생활을 뒤로 하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칠 힘을 얻게 되고, 심지어는 롤랑이 그녀에게 피하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그녀 옆에서 동반해주어, 과거의 사람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마비용 지역을 겨우 '자신감있게' 지나갈 수 있게 된다. - 하지만 결국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롤랑과 함께 '마요르카'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소울메이트(루키가 유일하게 떨쳐내지 못했던 '과거의 사람')에게 이 말을 남기고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됐어, 이제 마음대로 가렴.'
르 콩데 카페는 옮긴이의 글에 따르면 <좌초한 영혼들이 모인 곳>으로 '보헤미안(이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엔 이미 지나간 언어가 되어 카페의 몇몇 나이든 터줏대감들이나 이따금 되뇌는 언어가 버렸지만)'들의 아지트 구실을 했던 곳이다. 세기말 시대 오스트리아 비인의 카페가 그런 역할을 했다는데,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스스로 고립되기를 원하면서도, 또 사람들에게 섞이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역설이 통하는 곳이 카페라고 들었다. 즉 관계는 맺고 싶지 않으나 관계 속에 있고 싶은 (사람으로 태어나면 피할 수 없는) 본능을 해소시켜주는 곳이랄까. 세상에서 밀려나고 패배한 사람들이 자신의 패배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같은 불안 속에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피난처 혹은 안식처. 카페. 세파에 좌초한 영혼들이지만, 나름대로는 안정되고 평범한 생활, 즉 일상의 좌표가 그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인생을 살고 싶은 그들. 그러나 막상 그 좌표를 획득하고나면 전적이 보헤미안이었던 그들의 고질병이 다시 그들을 와해시킨다. 이 모순 속에서 롤랑과 루키가 본 타협은 '중립지대'를 찾는 것이다. '중립지대'는 세상의 피난처 르 콩데 카페이기도 하고, 신비주의 경향을 띤 기 드 베르가 '철학적(종교적?)' 모임을 주기적으로 여는 집이기도 하고, 기 드 베르의 모임을 처음 그들이 알게 된 서점이기도 하고, 우연히 그들이 만난, 그리고 자석같이 그들을 끄는, 인적드문 거리이기도 한다. 한편 롤랑은 루키를 잃은 후 그가 일생동안 집착했던 또 다른 주제 '영원한 회귀'의 흔적들을 찾는 '추억으로의 여행'을 한다. 여전히 좌표가 없이 살고 있는 건 마찬가지. 르 콩데 카페가 서 있던 자리가 이제 가죽을 파는 상점이 되도록 그 시절 파리의 모습이 모두 사라져버린 이 현재의 파리에서 롤랑은 용케도 옛날 사람 기 드 베르를 마주친다. 고맙게도 기 드 베르는 그 시절 '그'이고 있던 소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루키를 언급하며, 사랑은 그 사람의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시간을 따라 망각속으로 넘어가는 것을 그 경계선 너머로 넘어가지 않도록 붙드는 작업. 그것이 모디아노의 소설이었던 것 같다. 이 주제는 그의 전 소설에서 등장하고 있고, 이 소설 도입부에 나오는, 르 콩데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주소록과 그들이 카페를 드나든 시각을 노트에 기록하는 한 등장인물의 행위가 모디아노의 소설 작업의 의미와 가치, 정체성과 목적을 은유하는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가 어두운 상점의 거리의 대표적 어록이라면, 이 소설의 대표적 어록은 '오직 도망치는 순간에만 온전한 나 자신이었다'란다. 계속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졸고 있던 머리가 이 문장을 보고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명료해졌다. 쪽수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103쪽 상단. 도망치는 순간에만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있다면 아마 나도 저 말에 속하는 1인이 되리라. 하지만 소설 읽기도 그 도망치는 순간이 주는 온전함을 덮어쓸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내 글의 색체가 모디아노 문체와 비슷한 색체를 띠었던 그 5년 동안 내 자신이 그나마 온전한 내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엄밀히 따지면, 이 '온전한'이라는 말은 '바람직한'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고전이라는 분류보다는 모던 소설, 트렌디한 소설이라는 분류에 더 솔깃해지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도 '고전'으로 자리매김될 것 같다. 그 내용이 그 시절과 똑같이 이 시절에도 계속 '현재'로 살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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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를 읽는 사이 사이 조금은 가벼운(?)책을 읽어 볼 요량으로 골랐으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중간에 포기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용도 짧은 데다 나도 모르게 그만 오기 아닌 오기가 발동하고 말았던 것.그러니 이 책은 읽었어도 결국 읽은게 아닐지도 모르겠다.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읽으면 그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지난해 재미나게 읽을수 있었던 것처럼..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가길 바라야겠지만 지금의 기분으로는 다시 꺼내 읽게 될 자신은 없다.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마음으로 부터 울어 나오는 공감이 아닌 머리로 계산되는 이해였다. 문학적인 요소를 애써 배제하려고 한 건 아니였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로.건조한 느낌이였다.
"우편엽서를 집어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조금만 더 참아.곧 나아질 거야.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고 엽서에 우표를 붙였다.하지만 누구에게 부칠 것인가? 나는 각각의 엽서에 마음이 놓이는 몇 마디 말들을 쓰고 싶었다.'날씨가 좋아.난 멋진 휴가를 보내고 있어.너도 모든 일이 잘되길 바라.곧 만나자.사랑을 보내며.' 나는 매우 이른 아침 바닷가에 있는 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다.그리고 친구들에게 엽서를 쓴다." /96
루키 이자 자클린 드랑크이며 자클린 슈로 이기도 했던 그녀...그녀의 목소리를 통해,혹은 그를 알았던 각각의 남자들을 통해 기억을 더듬는 과정은 버거웠지만,그럼에도 이 책에서 '탁'하고 무릎을 치게 한 순간은 루카의 목소리에서 이방인의 뫼르소와 닮아 있다는 점을 발견하는 순간이였던 것 같다.왜냐하면 그녀의 기억을 따라가는 과정은 내게 낯설음이였기에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적었다면,도망치기를 바라면서도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그녀가 뫼르소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소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오직 도망치는 순간에만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나에게 유일한 추억은 도피 혹은 가출의 추억뿐이다."/103
뫼르소도 떠올랐지만 영화 와일드 속 그녀(셰릴 스트레이트)도 생각난다. 루키와 셰릴은 지우고 싶은 모든 것을 대하는 방식이 극과 극이였다는 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