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모로 "그리스 전문가"가 되어가시는 이윤기씨의 책이라 기대를 많이 하고 집어들었습니다. 조근조근 설명해 주는 듯한 경어체 문투도 좋고, 문장이나 내용 모두 이윤기씨답게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이 책은 "이윤기, 그리스에 길을 묻다"라는 책 제목에 맞추어 "신화에 길을 묻다" "역사에 길을 묻다" "현장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신화에 길을 묻다" 같은 경우는 이제까지 나온 이윤기씨의 글과 동어반복이 지나치게 많지 않나..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신화 관련 글을 많이 쓰셨으니 그렇겠지만, 뭔가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고 집어들었던 데 비해서는 "에이, 다 아는 얘기잖아"하고 김빠지는 느낌이 좀 있달까요. 그래서 책 내용에서 별 하나를 뺄 수 밖에 없군요. "역사에 길을 묻다", "현장에서 길을 묻다" 부분은 한층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현장에서 길을 묻다" 부분의 분량이 조금 더 늘어났어도 좋을 거 같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참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아이들에게 신화 다음 책으로 읽혀도 좋겠다는 싶을 만큼 알기 쉽고 친절하게 그리스 문화 전반을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내용도 좋지만, 더 감탄스러운 것은 풍부하고 적절한 그림과 사진 도판, 깔끔한 편집, 뛰어난 종이 질 등의 책의 외부 사양입니다. 12000원이라는 가격이 전혀 아깝지 않군요. 망설임 없이 책상태에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건 참 새로운 경험이네요. |
| 신화에 그렇게나 많은 의미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는 저자의 통찰과 분석,노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신화에 삶의 원형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의 신들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욕망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며, 파멸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신화에 빠져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화속의 신들 중 내 모습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그 누군가의 모습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인다. 그것으로 삶의 길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다면 신화의 몫은 충분하지 않을까.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 그에 대한 예리한 평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저자는 그런 의미로 그 작품들을 내놓았을까. 물론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작품은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 인해 그 작품이 더 큰 빛을 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가장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고, 신화의 다양성에 큰 빛을 밝혀준 사람들 중의 한명이 바로 저자 이윤기이다. 이 책은 바로 이윤기의 정교한 해부와 분석으로 인해 명쾌함을 준다. |
| 이젠 정말 그만 사야겠다고 다짐한게 도무지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또 이윤기의 신작이 나왔다는 말에 덥썩 사고 말았다. 내게 있어 이윤기 병은 만성질환으로 굳어진 듯 하다. 평소에는 잠복기에 드는 듯 하지만 신작이 나오면 어김없이 재발하고 마는... 이번 책은 내용 면에서 지금까지의 신화 중심에서 탈피해서, 그야말로 그리스의 문화에서 뭔가 배울 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이채롭다. 신화의 배경이 대략 3천년 전임을 감안하면, 주요 배경 시기가 대략 2천년 정도 늦춰진 셈이다. 소크라테스나 페리클레스로 대변되는 그리스의 황금시기를 차분히 되짚어 본다. 신화에서 역사를 거쳐 신화의 무대인 그리스 땅을 밟는 여정까지도 담겨 있다. 물론 유적에 대한 설명보다는 사람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이야기들이다. 원래 이윤기의 글이 긴 호흡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이번 책은 유난히 짧은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 특히나 나처럼 쓸데없는 상식의 조각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읽을거리임에 틀림없다. 색시에게도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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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세우스, 헤르메스와 야누스 신화적 상상력에 관한 게시판을 따로 여는 이유를 밝히는 앞글에서 고백했듯이, 우연한 사단으로 며칠 동안 울적하였습니다. 모든 게 귀찮은 탓으로 잠 안 오는 밤이면 빈둥거려 보았습니다. 빈둥거리는 것도 고역인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라운관과 헤드폰이 빈둥거리는 것을 결코 도와주지 못함을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포토샵을 열었다 플래시를 불렀다 포토앨범을 덮었다 대자보로 놀러갔다 북교보를 기웃거렸다 네이버뉴스를 뒤지다 겨우 잠드는 짓을 한 이틀 했더랬습니다. 진득하니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증세를 치료할 것이라고는 서가의 책들을 아무 것이나 꺼내보는 것이 유일하였습니다. 그런데 ‘너 딱 걸렸어’하는 외침이 내 속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윤기의 <그리스에 길을 묻다>였습니다. 이 책 저책 끌리는 대로 읽다가 방치하는 무책임한 제 독서의 습성으로 인하여, 얼마 전에 제게서 버림받은 그 책이 저를 확 끌어당기는 것이었습니다. 접혀진 부분을 읽다가 ‘앞의 내용이 뭐였더라’ 궁금하여 다시 맨 앞장으로, 페르세우스와 수퍼맨이 등장하여 저를 혼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치 앞도 못 보는 불쌍한 인생이 어디서 헤메고 있는거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세우스, 뉴욕에 나타나다’가 ‘페르세우스, 이목지기의 목을 치다’가 되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페르세우스 - 너의 눈빛이 너를 죽이는 거야
![]() 판도라의 상자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헛된 희망’, 혹은 이문열 식으로 말하면 비극적 소모만을 가져올 ‘불확실한 희망’에 대한 확신이 없어 벌벌 떠는 주제에, ‘어디 앞을 미루어 짐작하겠다고 건방을 떠는 거야’ 하는 송곳 같은 외침이 제 가슴을 찌르더군요.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치기 위해 아테나 여신에게서 세 가지 연모를 빌립니다. 메두사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돌로 변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테나 여신의 방패, 하늘과 저승을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가죽신, 저승의 신 하데스의 투구가 그것입니다. 나름대로 꼼수를 마련한 페르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의 청동방패를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닦고 또 닦습니다. 이제 방패는 청동거울 같아졌습니다. 헤르메스의 가죽신이 있는 이상 메두사의 거처까지 날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데스의 투구를 쓴 페르세우스는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살금살금 메두사의 뒤로 접근한 페르세우스의 기척을 느낀 메두사가 눈을 돌렸을 때 페르세우스는 방패를 비춥니다. 메두사는 무엇이든 바라보는 순간 돌로 만들어버리는 그 가공할 자신의 눈빛에 쏘여 돌로 굳어가고 맙니다. 페르세우스의 손에 들린 칼은 사정없이 메두사의 목을 몸통에서 분리시킵니다. 결국 메두사는 자신의 눈빛에 의해서 죽고 마는 것이지요. 페르세우스에 의해 잘린 메두사의 목은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집니다. 죽은 뒤에도 바라보는 모든 것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메두사의 눈빛은 이제 아테나 여신의 방패에 새겨지고 그 방패는 ‘아이기스’라는 이름을 가진 무적의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대공 대함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한 방어능력을 가진 꿈의 구축함이 ‘이지스’인 것은 바로 이 무적의 방패 ‘아이기스’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여전히 헤르메스의 가죽신을 신고 있는 듯한 페르세우스는 책 속에서 튀어나와 저를 조소합니다. ‘네가 죽는 것은 바로 네 자신의 눈빛 때문이야’ 하고 일갈합니다. ‘너도 메두사가 되고 싶어’ 이목지기가 뉴욕에 나타난 페르세우스를 보고 화들짝 놀란 사연입니다. 현재를 살면서 그 현재의 해답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현재에만 골몰하고 궁리하였습니다. 그러니 불안은 더욱 심해지고 공포는 그림자처럼 늘 따라 다닙니다. 더욱이 나를 병들이고 종내에는 죽음으로 이르게 할 것이 결국 나의 눈빛임을 이 나이가 되도록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참 한심한 인생인 것이지요. 문제는 그 한심한 인생들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자신을 자신이 죽이고 말 메두사의 눈빛을 거두는 것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최후의 방편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제가 신화적 상상력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기로 마음먹은 사정입니다. 내친 김에 헤르메스의 가죽신을 신은 페르세우스의 등에 올라타 보기로 하였습니다. 무한한 상상력의 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 투성입니다. 신의 아버지격인 제우스를 비롯하여 그의 아내이자 신성한 결혼의 수호신인 헤라, 바다의 신이자 곧 바다인 포세이돈, 저승의 신 하데스, 곡식을 다스리는 여신 데메테르, 헤라여신을 도와 인간의 가정과 부엌일을 돌보는 헤스티아 등 제우스의 형제자매들을 만납니다. 그들 곁에는 이들과 같은 12으뜸신인 태양과 음악과 의술을 관장하는 아폴론, 달과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제우스의 심부름꾼인 전령의 신 헤르메스(오늘 제게 날개 달린 신발을 빌려준 신인입니다), 만들지 못할 것이 없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지혜와 정의로운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 무지막지한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우스의 아들 딸입니다. 으뜸 신 중 유일하게 제우스의 자식이 아닌, 사랑과 애욕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도 보입니다.
헤르메스와 야누스 - 두 얼굴은 화해와 소통을 위한 것이랍니다. 기왕에 헤르메스의 신을 빌려 신고 날아다니는 세상에서 헤르메스와 인사를 터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스에 길을 묻다’의 맨 처음도 헤르메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그는 제우스의 심부름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를 전령의 신이라 부릅니다. 그는 또한 이 나라 저 나라 말을 통역하는 통역의 신, 외교의 신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물건 가진 자와 돈 가진 자를 이어주는 상업의 신이기도 하고 태어나자마자 그의 이복형인 아폴론이 돌보던 소떼를 훔친 도둑질의 천재이기도 합니다. 도둑의 신이기도 한 것이지요. 나그네의 신이기도 하여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의 경계에는 헤르마(헤르메스의 像)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것과 저것을 이어주는 소통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문들의 제호에서 헤럴드(herald전령)를 자주 보게 되는 것도 헤르메스가 전령의 신 소통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헤르메스는 이것과 저것을 바꾸게 해주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이윤기의 표현을 빌면 접속사 같은 신입니다. 우리의 말에 접속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말은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의 수단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양성인입니다. 때문에 그는 아름다운 여성의 완벽한 몸매와 도드라진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에르 그리말의 신화사전에 의하면, 그는 헤르메스와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에 대한 전설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헤르마, 즉 헤르메스의 상이 로마신화에 나오는 ‘야누스’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을 보면 양극단의 것을 이어주는 존재로서의 헤르메스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헤르메스가 오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양극단의 것들을 이어주는 ‘소통’이 없기에 현대의 위기가 초래되고 그 안을 사는 현대인의 불신과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헤르메스의 상, 즉 헤르마가 가진 두 개의 얼굴은,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양두구육의 두 얼굴이 아니라, 밖에 것과 안에 것을 통하게 해주고 상하좌우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교통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화해의 얼굴이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 속의 얼굴인 것이지요. 이윤기는 헤르메스를 바로 본 우리에게,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무엇으로 바꾸는 데 이바지 할 것인가?”하고 말입니다. 필자가 여기에 부언을 하자면, 헤르메스 상의 두 얼굴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우리는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야누스’의 두 얼굴에 대해서도 다시 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야누스의 두 얼굴은 대다수 우리에게 겉과 속이 다른 부정한 얼굴입니다. 그러나 로마 신화의 야누스는 가장 오래된 신들 중의 한 명입니다. 그에 관한 전설은 순전히 로마의 것으로 로마시의 기원 설화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몇몇 신화학자들에 의하면 야누스는 로마의 원주민으로, 이름만 알려진 신화적인 왕 카메수스와 함께 로마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학설은, 야누스는 테실리아 출신으로 로마로 추방당했는데, 그곳의 왕 카메수스가 그를 환대하고 자신의 왕국을 나누어주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야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야니쿨룸’이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자식 중의 하나인 ‘티베르’는 티베리스 강의 명조가 된다고 알려줍니다. 야누스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화에 의하면, 야누스가 다스리던 시대를 보통 황금시대라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그 황금의 시대는 사람들이 극히 정직하고 풍요로움과 참된 평화가 있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테실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오기 위해 배의 사용법을 고안해낸 것도 야누스이고, 화폐의 사용 역시 그가 생각해낸 것이라 합니다. 실제로 로마의 가장 오래된 청동화폐의 정면에는 야누스의 초상이, 뒷면에는 뱃머리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라티움의 첫 주민들인 아보리게네스족을 개화시켜 땅을 경작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도시를 건설한 것도 야누스였다 합니다.
![]() 야누스는 죽은 후 신격화 되는데, 그에 관한 전설 중의 하나는, 로마를 침략한 사비니인들의 정복으로부터 로마를 구해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비니인들이 카피툴리움(카메수스 사후, 야누스와 함께 로마를 통치한 사투르누스가 건설한 도시) 언덕으로 기어 올라와 수비군을 포위하려는 순간, 야누스신이 그들 앞에 뜨거운 샘물이 솟게 하여 침략자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 뒤부터 로마인들은 전쟁이 나면 언제든지 야누스신이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도록 야누스 신전의 문을 늘 열어두기로 했으며 로마 제국의 평화가 깃든 후에야 신전의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이 샘들의 신인 폰스 혹은 폰투스 신인 것은 이 전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시인 세네카가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야누스는 광장토론에 익숙한 연사였을 뿐만 아니라 앞쪽과 뒷쪽을 보는(다시 말해 문제를 모든 양상에서 관찰하는) 전문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로 진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야누스신의 성격을 소재로 아니러니컬한 문학적 비유가 만들어지고 사용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야누스의 두 얼굴을 부정한 의미로 사용하고 야누스적 인간을 경멸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헤르메스와 야누스는 이처럼 부정한 두 얼굴을 가진 못된 신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전체적인 양상으로 관찰하여 양극의 충돌을 방지하고 상호간의 이해가 가능하도록 연결해주는 아주 중요한 소통의 신인 동시에 하나와 다른 하나가 서로 자신의 것을 주고받음으로 해서 각자가 지닌 결점을 보완해주도록 하는 중개의 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헤르메스와 야누스를 만난 현재에는, 그럼으로,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라 상대를 공격하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헤르메스 혹은 야누스가 되어 다양한 양상을 관찰함으로서, 충돌하는 양극을 연결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의 내부에 늘 헤르메스와 야누스 신을 모시고 살며 스스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바로 이런 신화적 상상력에서 캄캄하여 보이지 않던 길을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신화 속 세상에서 상상력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꽃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15 jul 2004 |
|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던가요? 지금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되어 있는 이라크… 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바빌로니아등 세계 문명의 시초라고 하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 찬란한 꽃을 피웠던 곳이죠. 나중에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원정이라고 하는 오리엔트 정벌에 의해 명맥이 흡수되어 헬레니즘으로 재창조되고 말죠. 시대와 배경만 다를 뿐이지 이 지역을 둘러싼 동-서의 문명 충돌은 결국 몇 번의 밀레니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승부가 나지 않은 되돌이표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결국 이 곳을 점령하는 민족이 세계 패권을 움켜쥐게 된다는 것도 지금의 미국-중동 분쟁을 바라보는 여러 실마리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서양 문화의 뿌리라고 하는 그리스 문명. 이 그리스 문명의 가장 정수리 부분에 그리스 신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읽다 보면 이게 전설인지 역사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역사를 읽다 보면 어느새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신화를 읽다 보면 어느새 역사로 넘어와 있고,… 바로 그 헷갈리고도 재미있는 그리스 신화를 더욱 감칠 맛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윤기씨가 아닌가 합니다. 마치 어릴 적 동화책을 통해서, 또 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분한 상상의 세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을 특유의 이야기식 서술 구조를 통해 만들어 줍니다. 저처럼 쓸데 없는 상상의 조각들을 좋아하거나 현실의 영감을 다른 각도로 느껴보고 싶은 분들에게, 또는 신화를 잊고 사시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2>와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미있게 읽은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다.글의 구성이나 사진의 배치나 <길 위에서...>에 이은 이윤기식 그리스로마신화읽기 4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책은 그리스의 신화,역사,현장 등 세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내용상 신화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2/3 정도 되기때문이다. 경어체를 쓰면서 마치 독자들을 모아 놓고 옛날 얘기를 해주는듯한 문장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전의 세권에 실렸던 사진들 중 겹치는 사진이 꽤 된다는것과 얘기들도 몇몇은 반복된다는 점이 앞의 세권을 다 읽은 독자들에겐 아마도 불만이 될듯하다. 그러나 돌아서면 자꾸 신들의 족보를 까먹고 마는 나같은 독자들에겐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리스라는 나라가 주는 신비로운 느낌 때문인지 역사적인 실존인물에 대한 얘기도 마치 신화의 일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마도 이윤기라는 탁월한 신화얘기꾼이 쓴 역사이야기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이름만 보고도 주저없이 그 책을 고를수있다는 것은 얼마나 독자에게,또 그 작가에게 행복한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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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소 시칠리아노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
올해 초부터 관심을 갖고 읽게된 그리스,로마신화이야기 그리스,로마신화의 전도사 역활을 하고 있는 이윤기작가의 또 다른 책 '이윤기, 그리스에 길은 묻다.'라는 책은 서양사회 속에 묻어있는 신화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표지에 음흉하게 웃고 있는 이윤기 작가의 모습을 보며, 약간 설레임으로 책을 읽었다. 다만 '형 만한 아우없다'는 옛 속담처럼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보다는 흥미도나 흡입력은 못 미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이용해 영어단어를 공부한다면 참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한번 정도는 노트에 신들의 이름과 현재 사용되는 영어단어를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 였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나온 충격적인 그림을 보며, 기독교의 독선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최근 뉴스에서 부활절을 맞이하여 한 여신도가 산사의 불상을 훼손했다는 보도를 듣고 조금 놀랐는데, 이 그림을 보니 더욱 거북해 졌다.
높은 곳에서 밤에 보면 불은 십자가가 가로등 만큼이나 많은 서울의 하늘, 그러나 낮에 거리를 걸을땐 알 수없는 조각상들과 만난다. 어느 이야기에서도 만난적 없는 정체불명의 조각들.
다만 최근 미술학원 광고선전탑 위의 '미로의 비너스(아프로디테)'를 보고 조금 반가웠다. 내가 아들,딸에게 이야기 해줄 꺼리가 생겨서 말이다. 앞으로 그런 이야기가 있는 조각상들이 많이 생겨나 만날수 있길 바라며, 우리의 옛날 이야기도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재미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고 가득 차기를 바래본다. 길을 걷다, 담배피는 호랑이 조각상을 만나기 바라며..
나는 광명시에 길을 물어봐야 겠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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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화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늘 즐겁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가장 클 것이고,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신화의 여러 요소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매우 크다. 남의 나라 신화라고 무시하기에는 우리 사회에 그리스 신화의 영향 아래 있는 서양 문화의 흔적들이 너무 많이 유입되어 있기 때문에 싫건 좋건 그리스 신화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 신화를 직접 써 내려간 책은 아니다. 동서양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그리스 신화를 연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들과도 연결시키키도 하면서 신화를 읽으며 인간에 대해 탐색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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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7.03.06 00:53
비록 번역가로서이긴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장미의 이름으로 처음 이윤기라는 작가를 알게 되서 이젠 신화연구에 대해 내게 가장 완벽한 만족감을 주는 작가가 되었다. 이원복 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어떤 책이든 무한 신뢰가 가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나도 전작주의의 초기 징후인가.
사실 조희봉 著 "전작주의자의 꿈"도 결국 이윤기 작가로부터 시작했던 것을 보면 이윤기 작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 아닐까. 암튼 조희봉 씨에 대해서 놀라웠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고 생각을 하니 말이다. 이젠 신화서적 말고 다른 책들에도 욕심이 슬슬 난다는. 전작주의...거 괜찮네..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