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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어지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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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존속했던 학교가 그 영향을, 폐교당한 지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도대체 그 학교에서는 뭘 어떻게 가르쳤던 것일까? 솔직히 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더군다나 현대 건축이나 디자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닌, 하나의 교육기관이 이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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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존속했던 학교가 그 영향을, 폐교당한 지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도대체 그 학교에서는 뭘 어떻게 가르쳤던 것일까? 솔직히 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더군다나 현대 건축이나 디자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닌, 하나의 교육기관이 이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책을 읽게 됐다. 뚜렷하게 세워놓은 학교의 교육 목표와, 각자의 개성을 지나칠 정도로까지 드러내는 교수들, 그리고 거기에 따라갈 수 있는 학생들 - 아마도 바우하우스의 영향력은 이 모든 것이 이루어낸 [교육의 성과]가 아닐까. 확실히 이 책에 실린 도판들만 봐도,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알겠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은, 바우하우스의 외형적 영향이 아니라 그 교육방식 아닐까. 항상 주요과목 보충이란 명목으로 대체될 수 있었던 미술시간, 얄팍하던 교과서, 열정도 개성도 없이 그저 좀 독특하기는 했던 선생님들 - 내가 미술이란 교과목에 대해 기억하는 것들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바우하우스 이상의 영향력을 미리부터 짓눌러버리는 건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구절]
이 학교의 첫번째 목표는 [각기 흩어져 있던 모든 미술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화가 및 조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기술을 결합시켜 협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선언문의 서두에서 '모든 창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이라고 밝혔듯이 이 프로젝트는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목표는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선언문은 주장한다. "미술가는 지위가 상승된 공예가이다.......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에 장벽을 이루는 계급 구분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길드를 조직하자!" 세 번째 목표는 앞의 두 가지보다 '프로그램'에 다소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바우하우스가 세워진 이래 점차 중요성을 더해간 것으로서 그것은 ['공예 및 산업체 지도자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4***e 2001.08.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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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교육 기관으로서의 바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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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프랭크휘트포드/이대일/시공아트/199920세기 초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이마르에 등장한 미술 학교였던 바우하우스. 그 당시 독일 내에는 여러가지 스타일로 미술교육을 하던 기관이 무려 81개나 있었고 그 중에서 공예를 함께 가르치는 곳도 60여곳이나 있었다는데  바우하우스는 마이마르 미술공예학교과 순수 미술을 가르치던 아카데미가 합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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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프랭크휘트포드/이대일/시공아트/1999
20세기 초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이마르에 등장한 미술 학교였던 바우하우스. 그 당시 독일 내에는 여러가지 스타일로 미술교육을 하던 기관이 무려 81개나 있었고 그 중에서 공예를 함께 가르치는 곳도 60여곳이나 있었다는데  바우하우스는 마이마르 미술공예학교과 순수 미술을 가르치던 아카데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학교로서 다른 학교와는 달리 순수 미술과 공예 미술 즉 이후로 보자면 산업 미술에 가까운 것을 함께 가르쳤던 최초의 학교였다고. 공예 장인들이 함께 하는 학교였지만 실제로는 이론을 가르치는 순수 미술가들이 선생으로 더 많이 초빙될 수 밖에 없었고 공예 장인들의 일터를 빌려서 쓰면서 이들을 또한 명인으로 두고 가르치게 했는데 초기에는 특히나 경제적인 이유로 제대로된 수업이 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순수 미술가들과 공예인들에 대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도제식 수업이긴 했지만 학생과 스승 사이의 관계도 민주적이었던 지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다양한 생각과 종교?를 가진 독특한 인물들이 수업을 맡으면서 점차 나름의 체계가 잡혀 가기 시작합니다. 요하네스 이텐,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게오르크 무헤, 화가로도 유명한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 등등... 이들이 만든 예비수업이나 기초 과정들은 아마 당시 미술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것들이었다고. 
바우하우스는 초기 교수 진 일부가 그만두면서  모홀리 나기, 요제프 알버스 등이 중심이 되어 가면서 보다 산업 미술 쪽으로 중심을 옮겨가게 되었고 특히 1923년 제대로된 최초이 전시회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지역 공예가들의 반감을 사고 빈약한 시 재정으로 인해 결국 폐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을 눈여겨 본 데사우에서 바우하우스 이전을 적극 추진하면서 다시 부활하게 되죠. 이곳에서는 보다 안정적인 재정 지원 하에 마침내 건축학부도 들어서게 되지만 바이마르 시대처럼 자유스럽거나 격의 없는 분위기는 다소 사라지고 다시 전통적인 학교 수업 즉 교수들이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전환되게 되었다고. 
개인적인 이유로 그로피우스가 사직한 이후 많은 이들의 우려 속에 건축가인 하네스 마이어가 새로운 교장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이전의 고집스러운 면모에서 탈피하여 상당한 혁신을 이루어내면서 정식 회화 수업도 보장하고, 인체 생물학이나 철학은 물론 물리학에서 경제학, 정치학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수업을 설계했고 공예 관련 프로젝트도 추진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고. 재미있게도 마르크스주의자인 마이어에 의해 자본주의적으로 돈을 벌게 된 바우하우스의 모습은 어딘가 초기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버렸고 더구나 좌익과 우익 모두 에게서 공격을 당하는 기이한 상황에 처하면서 결국 마이어도 물러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맡게 된 이는 미스 반 데어 로에. 대공황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학교 안에서도 정치 소요 사태가 벌어지고 미스는 주동자들을 내쫓고 학교를 건축과 위주로 재정비 하면서 부활을 시도했지만 결국 나치당의 압력에 자진폐교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지역의 작은 학교가 몇 년 존속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를 옮겨 또 몇년 유지되다가 사라져 버렸다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이곳을 거쳐간 이들의 족적과 이곳에서 벌어졌던 실험적이면서도 다양했던 교육 방식이 전세계적으로 펴져나가면서 지금은 그 실상보다 훨씬 더 확대되어 알려진 샘이네요. 그렇다고 해도 바우하우스가 별 거 아니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바우하우스에 관련된 책은 계속 출판되고 있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으니 말이지요. 
r*******n 2024.09.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