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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로 인해 촉발되었지만 사회의 지적 향상과 왕들의 권력 증가로 인한 상황을 같이 보아야 한다. 개혁에 대한 자극은 처음에는 종교적이었으나 그 다음은 정치적이었다. <사회적 배경> 1500년대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물질과 문학과 예술로부터의 가치가 과거의 성스러운 가치들과 맞지않아 이상과 일상사이의 모순이 생겼다. 도덕적 이상은 청빈이었으나 더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았고, 교회안에서도 모든것이 돈을 받고 팔렸다. 이러한 내적인 변화를 부정하기 위해 외적인 종교적 열정은 더 강하게 드러났다. 성유물과 성소 순례가 현저히 증가했으며 수많은 성경책들이 인쇄되었고, 이것이 지나쳐 심지어는 수많은 마녀들과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정치제도가 체계화되고 군주들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교황의 권력은 약화되면서 교회의 특권이 제한되었다. 그러자 교황권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사면, 서임 등으로 재정을 낭비하면서 은행에 빚을 지고 있었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면죄부와 같은 수입원을 남발했다. <종교개혁의 진행> - 에라스무스 성직자들과 교황들의 부패와 독직, 미신과 우상숭배에 대한 성찰과 함께 신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유명론이 등장하였고 특히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신앙에 대해 명쾌하게 비판을 하여 엄청난 파급력으로 퍼져나갔다. 논리적인 해답을 탐구하는 분위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따르는 실재론자들에게 까지도 영향을 미쳤는데, 가령 천사들이 공간이동을 갖는다면 그들은 중간 공간을 통과하는 지 혹은 한천사가 한번에 그리고 동시에 한곳 이상의 장소에 있을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에라스무스의 이론은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 루터 루터는 면죄부 및 교회의 불합리함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었고,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성경은 기존의 라틴어로 쓰여 특권층만 공유하던 지식을 대중화 한것에 큰 의미가 있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의 강제징수로 분노하던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동시에 교황의 권력을 견제하던 군주와 귀족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냈다. (대중과 권력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것이다) (*역사는 대체로 대중의 지지를 얻은것은 반동, 중산층의 지지를 얻은것은 혁명, 상류층의 지지를 얻은것은 개혁으로 평가한다 - 그냥 내생각이다.) - 츠빙글리 루터와의 차이점은 성례를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수단이 아니며 , 믿음에 의한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표지이다" 이것은 이후 개신교의 바탕이 되었으며 그 형태중 하나는 칼빈주의의 교리이다. - 칼빈 칼빈 세대는 어느덧 종교개혁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문제는 교황권의 타도가 아니라 권력의 새로운 형태의 건설이었다. 「기독교 강요」로써 명확성을 갖춘 칼빈의 교리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예정되어있다는 것으로(예정설), 이것은 이후에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백인 우월주의가 합쳐져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옹호하고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청빈을 추구했지만 금욕주의는 아니었으므로, 재산의 축적은 악이 아니라 재능과 근면의 징표로서 권장되어 상인, 행정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며 자본주의의 기반이 된다. 칼빈주의가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청교도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결과> - 외적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 교황의 권력이 폐지되고, 군주들은 성직자를 관리하게 되었으며, 해산된 수도원들의 돈과 토지는 국가소유가 되었다. 국가는 당파적 이해와 교회재산의 소유를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지원하기도했다. 그 결과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화의로써 루터교는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칼빈교는 아님)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승인된 이후에는 루터교의 정열과 팽창력이 감소했다.) 프랑스의 경우 1598년 낭트칙령으로 칼빈교가 인정된다. - 내적 개혁 초기에는 가톨릭에 반대하여 싸웠으나. 차차 안정되어가면서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유익한것은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통신심을 받들어 교회법이든 세속법이든 모두 하나님의 자연법의 실질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논리로써 국가가 교회에 대해 가지는 권한을 정당화 했다. 개혁은 정통신앙을 무시하기보다 이용하면서 확실해진 것이다. <반 종교개혁>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국가들이 확장되어 가자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가톨릭 세력들의 연합동맹이 생겨났다. 가톨릭 내적으로도 경건한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였고, 체계를 갖추었다.
- 예수회 금욕생활을 하며 교회의 가르침과 법규에 순종함을 추구함으로써, 수도원의 옛이상들을 새시대의 필요에 적용시켰다. 프란체스코회가 빈민 사역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대학교 교수들을 배출했던거와 비슷하게 예수회도 빈민교육과 사역으로 시작했으나 곧 상류층 교육과 사역으로 진행되면서 가톨릭권에서 강력한 세력집단의 하나로서 개신교에 맞서는 세력이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일상생활 및 상당수의 문학에서도 라틴어가 쓰이지 않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런만큼 라틴어는 신성시 되어 성직자들의 언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의의> 종교개혁은 30년전쟁을 불러왔고, 30년전쟁은 종교로 묶여있던 유럽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분리시켰다. 종교개혁은 개신교의 인정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국가가 더이상 교회에 종속되지 않게 된것에 큰 의미를 가진다. *30년전쟁: http://blog.yes24.com/document/99534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