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여년 전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꽤나 재미있는 사람이 있었다. 야단법석 스타일인 그의 집을 방문한 어느 날, 난 전혀 그답지 않은 스타일의 물건을 하나 선물로 구경할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지도였는데, 2절지 크기 대형 종이의 약 십분의 일 정도가 그려진 상태였다. 꾸불꾸불한 해변과 섬, 대륙, 바다에 정박한 상태의 배들, 각종 군사기지와 산과 호수, 강과 도회지까지가 아주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게 무언가, 라는 내 질문에 그는 그 지도가 자신이 상상한 세계라고 말했다(당시로서는 환타지 문학이란 것이 크게 소개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각각의 섬에는 나름의 명칭이 있고 정박한 배며 그 배에서 내렸음직한 사람 군상의 모양이 그림자처럼 그려져 있었고, 산해경에서나 보았음직한 상상 속의 동물들도 여기저기 진을 치고 있었다. 눈이 나쁜 이들은 미루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한 이 지도 앞에서 그의 또다른 면모를 발견하고는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다.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을 보는 일은 조금 얕잡아 본다면 그 세밀했던 지도를 그리는 일 또는 그 지도를 살펴보는 일과 비교된다. 6부 9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본문만 800페이지에 달하고, 등장인물의 연표와 이야기 목록, 추신으로 이루어진 부록 부분만도 40페이지다. 그러니 소설 한 권 값이 삼만원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인생 사용법의 무대는 한 아파트이다.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재의 주민들과 과거의 주민들, 그리고 이들 주민들이 살아낸 인생을(그러니까 시간을) 소설의 대상으로 함과 동시에 이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과 그들이 돌아다녔던 세상의 곳곳(그러니까 공간을)을 소설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작가는 세밀하고 위대한 정신과 블랙 유머를 유유히 섞고, 그것을 정물화나 인물화의 엄격한 세심함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주인공이라 생각할 수 있는 바틀부스는 '너무 세심한 나머지 거의 서투를 지경이 될 때까지 병적으로 정확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그려지며, 바틀부스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세상 전부를 포착하고 묘사하고 철저히 규명하는 것-발설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지기 쉬운 계획-이 아니라 세상을 이루는 한 조각을 포착하고 묘사하고 철저히 규명하려는 한 남자'를 떠올려야 한다.
이 장대한 소설에는 사건들이 있을 뿐 사건은 없는데, 그나마 소설의 전편을 관통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의 중심에 이 바틀부스의 계획이 있다. 바틀부스는 십년간 세르주 발렌에게 수채화를 배웠다. 그리고 이십년 동안 세계의 항구를 여행하면서 각각의 공간을 수채화로 옮긴다. 그리고는 이 그림들을 윙클레에게 보냈는데 이 윙클레는 타고난 손재주를 지닌 퍼즐 제작자이다. 그는 바틀부스와의 계약에 따라 각각의 그림을 퍼즐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틀부스는 여행을 마치고 온 후 750개의 조각으로 바뀌어 있는 자신의 수채화를 힘겹게 조립하고, 그것을 다시 애초에 그것이 그려졌던 공간으로 가지고 간 다음 세척 용액으로 지워 없앤다. 이 계획은 수채화 그림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해 무려 5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진행된다.
"1925년에서 1935년까지 10년 동안 바틀부스는 수채화 그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1935년에서 1955년까지 20년 동안 그는 세계를 돌아다닐 것이며, 항구들을 주제로 15일마다 수채화 한 점씩, 동일한 크기의 해양화 500점을 그릴 것이다. 이 해양화는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전문 기술자에게 보내질 것이며, 윙클레는 이 해양화를 얇은 나무판 위에 붙인 후 750조각의 퍼즐로 잘라낼 것이다./1955년에서 1975년까지 20년 동안, 프랑스로 돌아온 바틀부스는 이렇게 만들어진 퍼즐들을 다시 15일에 한 개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조립할 것이다. 완성된 퍼즐들이 쌓여감과 동시에 해양화들은 '재조직'되어 퍼즐의 나무판에서 원래의 모습들로 떼어내질 것이며, 이어 그것들이 글졌던 - 20년 전의 - 바로 그 장소로 보내질 것이고, 그 곳에서 사용되지 않은 깨끗한 와트만지 한 장으로 남을 수 있도록 세척 용액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계획의 핵심에는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바틀부스에 의하면 이 퍼즐 맞추기 작업의 순간들은 이렇게 표현된다.
"...그것은 육체와 이루어야 할 목표에 대한 일종의 깊은 망각, 완벽하게 텅 비었고 열려 있고 자유로운 정신, 그리고 실존의 고뇌와 퍼즐 조립의 우연성, 퍼즐 장인의 함정들 너머로 자유롭게 떠다니는 순수한 집중의 상태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순간이면 바틀부스는, 퍼즐 조각들을 보지 않고도 각각의 섬세한 나무 절단면들이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을 보았으며, 그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어쩌면 몇 시간 동안 물질적으로 도저히 서로 결합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두 개의 조각을 집어들고서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조립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우리들 인생이라는 것도 일종의 퍼즐 맞추기 같다. 어느 순간 자신을 휩쓸어 갈 것처럼 몰아치는 역정 같은 것도 잠깐 눈을 돌려 맞는 조각만 찾으면 새로운 국면 전환의 기회로 이용될 수 있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앞에서도 또다른 기회로서의 다른 조각이 발견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의 움틈을 경험하게도 된다. 또한 이러한 많은 일들은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누군가에 의해(소설에 의한다면 퍼즐 제작자인 윙클레에 의해, 만약 신을 믿는 자라면 신에 의해) 이미 완성된 모양이 존재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완성에 도달했음에도 커다란 성취감 대신 일종의 무위를 체험하고, 아무것도 존재치 않던 시작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의 강박에 시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페이지가 많고(어떻게 이런 분량의 책을 분권하지 않고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양장인데다 어디 들고 다니면서 읽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게 되는 이 책은 다른 이의 인생을(우리들의 인생과 비슷하기도 또는 전혀 다르기도 한) 염탐하는 데에 적당하다. 물론 이들의 인생에서 교훈이나 감동을 얻기보다는 아주 건조한 삶의 일회성이나 덫같은 일상의 진부함을 느끼기 쉽겠지만 이 또한 마땅히 통과해야 할 또는 알아야 할 삶의 일면일 터. [인상깊은구절] 사물에 대한 이러한 세심한 묘사는 페렉이 말하는 "일상의 사회학"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일상의 사회학을 가리켜 "분석이 아닌 하나의 묘사의 시도"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의 일상적 사물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살면서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하는 것,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진술"이다. 즉 일상 속에서 일상에 의해 눈멀어가는 우리의 맹목성을 고발하는 것이다.인생> |
|
「인생 사용법」 LA VIE MODE D'EMPLOI
時間과 空間... 그리고 人間.. 이들 사이에서 "흐름"이란 공통 언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절대적으로 때론 상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머뭄과 움직임.. 출입이 있는 공간... 그리고 지배당할 수도 지배 할 수도 없는 인간의 삶 - 인생...
이 책은 첫인상에서 이 흐름이란 어감이 주는 "무상함"을 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책의 상식을 깨는, 900 페이지가 넘는 두께의 하드 커버... 왠지 딱부러지는 성공적인 삶의 비결을 알려 줄 것만 같은 「인생 사용법」이라는 제목... '조르주페렉' 이라는 다소 낯선 프랑스 작가... 제목 아래 '소설들'이라고 쓰인 작은 글씨처럼 이 책 안에서도 곳곳에 여러 작가의 글들과 역사, 다양한 문학들이 숨어 있고, 독특한 구성방식이 시도된다. 이 소설의 기준은 1975년 6월 23일, 프랑스 파리의 시몽크뤼벨리 거리의 작고 허름한 아파트, 영국인 백만장자 바틀부스이다.
하지만, 무심하게 존재하는 일상적인 '사물'과 아파트 안의 좁은 공간의 묘사에서 시작된 작가의 시선은, 200년을 넘는 과거와 전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사가 10×10 체스판을 나아가듯 건물의 단면을 따라 99개의 각 장에서 전개하다가, 99장- 바틀부스의 임종, 마지막 퍼즐 구멍의 공간에서 일탈로 멈춘다.
바틀부스는 영국인으로, 상속받은 돈을 평생 맘껏 쓸 수 있는 백만장자이다. 하지만 이 돈은 바틀부스의 인생에서 가치의 중심에 놓이지 못한다. 어느 날 인생의 무상함을 자각했기에.. 바틀부스는 다소 엉뚱한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게 된다. 세상을 이루는 한 조각을 포착하고 묘사하고 철저히 규명하려는 대단히 오만한 욕망을 품고, 그의 삶 전체를 오직 자의적인 필연성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독특한 계획에 따라 구성해 나가기로 결심한다.
"25세부터, 10년동안은 발렌에게 회화 수업을 받아 수채화를 익히고, 그 다음엔 지도에서 우연으로 결정한 세계 500곳의 항구를 여행하며 20년동안 2주에 한 장씩 해양화를 그린다. 그 그림을 우편으로 윙클리씨에게 보내면 윙클레씨는 그 것으로 750조각 짜리 퍼즐을 제작하여 500개의 상자에 밀봉해 둔다. 여행에서 아파트로 돌아온 바틀부스가 다시 20년동안 2주에 하나씩 그 퍼즐을 맞추고, 이렇게 맞추어진 퍼즐은 정교하게 복원되어 다시 그림이 되고 20년전의 그림속의 그곳으로 보내어져 세척액에 씻겨 한 장의 깨끗한 종이로 남는다." 이것이 한 인간의 평생에 걸친 작업이자 삶이다. 무상한 인생처럼 無에서 無로...
이 아파트는 지상8층 지하2층이고 각 층은 열칸으로 되어 있다. 로비에서 수직계단이 있고, 마르시아, 알타몽, 드 보몽, 바틀부스, 풀로, 마르키조, 로르사슈, 윙클레, 댕트빌, 발렌 모렐레, 위팅, 스모프 등이 살고 있는 각 공간이 중복되지 않고 무심하지만 세세하게 묘사된다.사물들과 공간의 이미지, 그리고 그 들의 삶이...
책을 읽으며 그 묘사를 따라 머릿속으로 공간을 상상하며, 작품 안에 마련된 같이 따라가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게 즐겁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도 물가까지는 갈 수 있지만 작가가 물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연속되어 있지 않은 99장.. 각 장의 공간들.. 사물들.. 사건들.. 인물들은 의미를 찾기엔 너무도 일상적으로 느껴지기에.. 퍼즐을 맞추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퍼즐 맞추기... 퍼즐에서 중요한 것은 한 조각을 자세히 보았을 때 알수 있는 외형과 색깔이 아니라, 하나의 퍼즐을 다른 조각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 조각이 다른 조각과 연결되고 나면 조각으로서의 존재는 멈추고 다시 새로운 혼란과 기대의 예상점이 된다.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완성되어 가면서 동시에 말소된다. GESTALT(형태 심리학).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인간, 우리의 두뇌는 패턴과 완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전체 유기체로서 느끼고 사고하는 존재이기에,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순간으로부터 영원을 찾는다. 완성을 추구하지만 결여와 초과의 "일탈"이 늘 존재한다. 이 일탈이 바로 삶의 묘미이자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바틀부스는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시력을 상실해 가고 결국 439번째 퍼즐, 마지막 W모양의 퍼즐 한 조각을 손에 든 채 채워지지 않은 X형태의 구멍- 그 결여와 초과.. 미완성의 아이러니에서 인생을 정지하고 만다. "나는 순간과 동시에 영원을 쫓았노라." [인상깊은구절] 대단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그 부가 일반적으로 가져다 주기 마련인 것들에 대해 무관심한 남자, 그리고 세상 전부를 포착하고 묘사하고 철저히 규명하는것-발설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지기 쉬운 계획-이 아니라 세상을 이루는 한 조각을 포착하고 묘사하고 철저히 규명하려는 대단히 오만한 욕망을 품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보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의 모순에 맞설 때는, 아마도 제한적이겠지만 동시에 그만큼 전체적이고 온전하고 환원될 수도 없는 어떤 계획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날 바틀부스는, 그의 삶 전체를 오직 자의적인 필연성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독특한 계획에 따라 구성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