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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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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에 서 있으나 역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여인이 왕비다. 왕비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은 어떨지 궁금하다.《왕비로 보는 조선역사》는 태조 이성계의 비 선덕왕후 강씨를 시작으로 마지막 국모인 순정효황후 윤씨까지 29명의 여인들이 실려져 있다. 조선역사를 읽거나 볼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태종이 적장자 양녕대군이 아닌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워 보위에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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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에 서 있으나 역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여인이 왕비다. 왕비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은 어떨지 궁금하다.《왕비로 보는 조선역사》는 태조 이성계의 비 선덕왕후 강씨를 시작으로 마지막 국모인 순정효황후 윤씨까지 29명의 여인들이 실려져 있다. 조선역사를 읽거나 볼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태종이 적장자 양녕대군이 아닌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워 보위에 올린 것처럼 세종이 적장자 문종(세자 이향)이 아닌 아들중에서 출중한 수양대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했다면, 아니 문종이 아직 어린 아들(단종) 대신 능력이 뛰어난 동생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렸다면 왕실에 피를 부르는 비극은 생겨나지 않았을 터, 왜 양녕대군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을 지지했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적장자라 하여 능력이 부족함에도 왕위에 오르고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는 무능한 왕으로 살다 간 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왕이 되지 못한 왕실의 일원은 언제 무슨일에 엮여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속에서 살아야 했다. 태종이 잘 한일이 있다면 장자도 아닌 세종을 왕위에 옹립한 것이라면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의 잘못이라면 적장자에 연연 다음 보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장자원칙이 아닌 ​자식들 가운데 능력위주로 다음 왕을 뽑았다면 조선은 더 강력한 왕국이 되지 않았을까? 태조 이성계에게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다면 태종 이방원에겐 원경왕후 민씨가 있다. 두 여인의 공통점은 남편의 뒤에 숨어 안락함을 바라는 여인이 아닌 여걸이라 불릴만한 강골들이었다는 것, 태종 이방원은 외척 세력의 발호를 막는다는 이유로 처가인 민씨집안을 풍비박산내더니 다시 아들의 처가인 심씨 일가를 멸문시켜버렸다. 모두 왕권을 넘보려는 신권을 경계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그로인해 남편과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을 잃어야 했던 여인들의 슬픔을 어디다 이야기해야 할까? 두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그가 자신을 위협할만한 세력이 발호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리 없었다. 하지만 그(태종)가 피를 부르면서까지 그토록 노력했던 왕권 또한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지하에서 조선을 지켜보면 얼마나 울분을 토했을까? '계유정란'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정희왕후 윤씨)의 며느리이며 의경세자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하지만 의경세자가 세자시절 죽었고 아들 자산군이 후에 왕(성종)이 된 것이니 소혜왕후라는 칭호가 과연 맞는 것일까?

 

조선시대 남자들은 세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부인 이외의 아내를 둘 수 있었으나 여자들은 남편이 첩을 보더라도 근엄한 척하며 독수공방신세를 져야했다. (p.121) 내가 조선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 ​또한 일부종사라 하여 과부들의 재가를 금하는 것이며 출가외인이 되다 하여 재산상속에서 철저히 배제시켜 놓기도 했다. 조선을 제외한 어느 왕조에서도 있지않았던 유일무이하게 조선에만 있었던 일, 여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좋게 볼수없는 제도다. 한 남편(男便)만을 섬긴다는 뜻의 (一夫從事), 그렇다면 남자도 아내가 죽은 빈자리를 지키며 평생 혼자 살아가야 공평하지 않은가. 연산군 부인 신씨의 아버지인 영의정 거창부원군 신승선에게 중종(진성대군)은 손주사위다. 진성대군의 장인인 오라비 좌의정 신수근은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박원종의 뜻을 거절했고 그로인해 집안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생각해보면 여동생과 딸 중 어느편을 선택하기도 힘들었을 것, 결국 사위는 왕(중종)위에 올랐지만 딸이 왕후가 되지는 못했다. 딸을 왕실로 시집보내면 가문의 영광이 시작되지만 공주나 옹주를 며느리로 맞으면?

 

국모의 자리에 올라보지 못한 채로 쫓겨나야 했던 비운의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그리고 문정왕후 윤씨 등 3명의 정실부인을 두었으며 7명의 후궁을 두었고 그들 사이에서 9남 11녀의 자식을 보았다. 문정왕후에 비교할만한 여인이 정순왕후 김씨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명종)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면 정순왕후 김씨는 왜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일까? 정순왕후는 왕실에 시집온 여인으로서의 삶보다 가문을 위한 삶을 선택한 여인이었다.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을 읽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재미난 사실 하나, 왕실로 들어온 여인들이 친정가문의 힘이 되어주는 반면 출가한 공주나 옹주들은 철저히 출가외인이 되어 가문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결혼하면 시댁을 위해 살아야 한다던 그들의 법칙이 왜 왕실로 출가한 여인들에겐 적용되지 않았을까? 뭐든 자기들 멋대로인 남자들 탓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중 왕위에서 폐위되어 쫓겨난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며 적장자요 세자이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는 얼마나 되며 왕으로 살았으되 독살당했다는 설에 시달리는 왕 또한 얼마인가.

 

s*******1 2016.08.24.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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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를 바라보다,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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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    조선 왕조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당시의 왕을 기준으로 하여 시대를 구분하여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 등26대 조선의 왕을 기억하는 방법까지 따로 있을 만큼 왕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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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조선 왕조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당시의 왕을 기준으로 하여 시대를 구분하여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 26대 조선의 왕을 기억하는 방법까지 따로 있을 만큼 왕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관철되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를 호령했던 한 주축으로 하여 읽어 내려가는 역사.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익숙한 것이었기에 별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를 마주하는 순간, 500여년 동안의 조선시대 안에서 이름을 알고 있는 왕비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분명 그 시대를 함께 있었던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그녀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일까. 꿈틀거리는 궁금증과 그 뒤에 숨겨져야만 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책에 빠져들게 만든다.

 중국의 부녀자들은 문자를 알고 있어서 정사에 참여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은 부녀자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정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종실록>79(세종 19 11 12)에 실려있는 내용으로 1437년 세종대왕이 평상시와 같이 경연에 나가 시경을 강독하는 도중 신하들에게 던진 말이다. 
 
세종대왕은 여성들과 일반 서민들이 글을 모르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한글을 창제한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마저도 조선의 여성들은 문자를 알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에서 소외되었으며, 외부와의 접촉에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당시 사회를 주도하던 사대부들은 여성들이 외부와 접촉하게 되면 부덕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본문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을 비추어 보았을 때, 양반댁의 규수를 뛰어 넘어 시대의 국모였던 그녀들의 삶은 유교에서 말하는 여성관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그 모습대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그녀들의 삶의 전부였을 테니 말이다. 생존을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치밀하게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야 했고, 그 안에서 정치라는 두 글자 안에서 혼돈의 시간 속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했던 그녀들의 삶은 치열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조선 최초의 오아비인 신덕왕후 강씨를 시작으로 마지막 국모였던 순정효황후 윤씨까지, 이 책 안에서는 조선시대 안에 숨겨져 있던 그녀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정도전은 개국일등공신인 방원이 왕위에 오를 경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재상중심체제(의원내각제)의 지지자인 반면에, 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내세우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재상중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씨의 소생인 방번을 세자로 옹립하고 나섰다. 태조도 속으로는 강씨의 첫아들인 방번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더러 자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강씨의 청을 물리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중략)
 
방번은 사람됨에 광패합니다. 막내 왕자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 의견에 모두 찬성하여 태조 7(1398) 11세의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모든 것은 강씨의 정치력에 의한 결과였다. 왕위를 넘보고 있던 방원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문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경우 추후 자신의 운명을 내다 보았던 강씨는 태조 이성계에게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계속 요청하게 되는데 이 일은 추후 그녀의 소생인 방번, 방석, 경순공주 모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선택이었으며 그녀 자신도 300여년 동안 첩이라는 이름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 둘째 부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살기 위해 도모했던 방안을 결국 그녀의 목을 죄게 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 셈이다.

 폐비 윤씨에 관한 이야기는 드라마를 통해서도 익히 들어왔던 것이기에 그녀의 악행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 그녀가 사약을 받게 된 사유가 바로 투기라는 명목이었다고 한다. 후손을 이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당시 본처 이외의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릴 수 있었던 당시 풍속에서는 여성의 투기는 남성들의 시대에 반기를 드는 행동이었기에 이는 죽음으로까지 다스릴 수 있었는데 현대의 입장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당시의 모습들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던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여성의 목을 죄고 있었다.

후비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은 국가 성쇠에 중대한 관계가 있다. 왕비 윤씨는 후궁으로 들어와왕후의 자리에 앉았다. 그 후 아무런 내조의 공이 없고 도리어 질투의 마음만 잦아 지난번에 독약을 가지고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발각되어 즉시 폐위코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청으로 용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있은 후 개과하기를 바랐으나 지금까지 뉘우치고 고치지 않아 실덕만 늘어갔다. 이로서 윤씨는 위로 종묘를 받들지 못하고 아래로 국모가 될 수 없는 자격에 이르렀다. 이제 윤씨를 폐서인한다. 이는 칠거지악에 의거한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심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본문

 신숙주에 의해 궁녀로 입궁하게 된 윤씨는 성종의 눈에 띄어 숙의로 봉해지게 된다. 그녀가 후궁이 되고 나서 어머니 신씨 역시 전보다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데 정희왕후의 눈에 들었던 그녀는 왕비로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왕비에 오른 지 4개월 후, 그녀는 연산군을 낳게 되니 당시 조선은 그야말로 신명 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그녀의 삶에 있어서 따스한 햇살만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녀를 향하는 날카로운 화살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서슬파란 시간 속의 화룡점정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인데 이 일로 인해 그녀는 폐위자리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녀를 폐위 시키고 나서 성종 역시도 후대의 일어날 사건들을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폐비 윤씨에 대해 100년 동안 거론하지 말라고 하며 세상을 떠난 것에는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터질 수 밖에 없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난 역사의 사건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흘러가야만 했었는지, 과연 이 문제들은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인지, 마주하는 순간 또 다시 먹먹해질 뿐이다.

민씨는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들 간에 서로 쟁탈전을 벌이자 이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갑신정변 이후 신뢰가 떨어진 나라라 적대적으로 대했으며, 청나라는 자신이 재집권하는데 두 번이나 도움을 주었기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심어두고 민씨와 민씨 척족세력에 대해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씨는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이제부터는 러시아를 이용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본문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조선의 국모는 명성황후 민씨일 것이다. 한 시대의 국모가 살해되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났는데 민씨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원상태로 될 것이라 믿었던 일본은 믿을 수 없는 이 망극한 일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당시의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얽혀있는 관계가 이 모든 것들의 시발점이 아닐 수 없었는데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의 열강들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던 그녀가 이토록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나라 안에서 벌어졌던 수 많은 이해관계가 조선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것과 그녀 스스로 그토록 주장했던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을 믿었더라면, 그리고 그 힘을 믿었더라면, 이라는 안타까움이 계속 밀려들게 된다.

 그 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아니 그녀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조선시대의 이야기를 마주하면서도 이것이 조선의 전부인 듯 생각하고 있었다. 왕비라는 이름을 안고 살아야 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 왕비라는 자리가 그녀들을 얼마나 옥죄게 하고 있었는지, 국모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정치력과 암투를 견뎌내야 하는 것인지. 그녀들을 통해 바라본 조선은 그야말로 암투의 전쟁이 아닐 수 없는 듯 하다.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향한 모든 화살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이 책을 통해, 그녀들의 삶을 통해 또 한번 느끼게 된다.

 

 

아르's 추천목록

 

조선왕비실록 / 신명호저


 

 

독서 기간 : 2015.01.17~01.20

by 아르

 

p********1 2015.01.2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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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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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역사에 관련된 책들을 보면 왕을 기준으로하거나 중요사건이나 정치적부류나 업적을 통한 남성위주의 역사서들이 많았다. 아니면 팜므파탈이라 일컬어지는 여성들은 대부분 문학이라는 장르의 소설로 흥미위주로 다루곤했다. 그래서 그동안 왕비들은 00왕의 부인으로나 아니면 00왕의 왕비로서만 소개되었다. 그래서 조금 색다른 감도 있다. 그리고 국사시간에 외웠던 왕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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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역사에 관련된 책들을 보면 왕을 기준으로하거나 중요사건이나 정치적부류나 업적을 통한 남성위주의 역사서들이 많았다. 아니면 팜므파탈이라 일컬어지는 여성들은 대부분 문학이라는 장르의 소설로 흥미위주로 다루곤했다. 그래서 그동안 왕비들은 00왕의 부인으로나 아니면 00왕의 왕비로서만 소개되었다. 그래서 조금 색다른 감도 있다. 그리고 국사시간에 외웠던 왕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왕비들의 이름은 너무나도 생소하다. 다들 비슷한것같고 여전히 헷갈린다. 그래서인지 기억하는 왕비의 이름은 극히 소수다. 이책의 시선이 왕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고 반가운것은 이제는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보는 역사서라는 점에서 누구의 딸이나 누구의 부인이 아닌 점이 이제는 다양화라는 점에서 꽤나 맘에 든다. 조선의 역사를 살피다 보니 두툼한 책이지만 책장은 어렵지 않게 넘어간다. 그리고 연대별분류가 아닌 주제별로 선별해서 왕비들이 활약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선의 기반을 위해 희생된 국가초반의 왕비들 그리고 유교이념을 철저하게 시행하는 왕비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친정가문과 함게한 왕비들 국정을 주도하는 왕비들이라고 분류하여 소개한다. 국가초반에는 후궁들이 많아서 맘고생하던 왕비들, 남편의 뜻을 위해 순종하거나 아들을 대신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여인들,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뜻을 거스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장기판의 말이 되거나 반역으로 몰려 친정집안과 같이 몰살되는 경우도 있었고 말그대로 인덕을 갖춰 친송받는 왕비도 있었고 국정에 참여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거나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반사회적인 학살을 자행했던 왕비도 있었다. 또 남편을 도와 여장부로서의 역할도하면서 지략가의 위치를 누리기도 했고 그와 반대로 한편으로는 가족의 정치적 성향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되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누명을 써서 페위되거나 죽은 왕비들도 있었고 국력이 약해 희생되는 왕비들도 있다.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남자가 주도하는 사회속에서 여성은 숨죽여 살아가야하는 시대였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의 것을 찾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노력도 보였다. 그래서 여성들을 통한 조선시대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h*******0 2015.01.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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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비의 나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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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나라, 조선 근래 조선의 왕들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큰 흥행을 거두고 있다. 역사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 드라마와 영화들을 즐겨 보았다. 그런데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바로 왕 주변에는 어김없이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근래 본 영화가 <역린>이었는데, 이 영화는 조선의 22대 군주인 정조의 암살을 주된 내용으로 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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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나라, 조선

근래 조선의 왕들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큰 흥행을 거두고 있다. 역사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 드라마와 영화들을 즐겨 보았다. 그런데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바로 왕 주변에는 어김없이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근래 본 영화가 <역린>이었는데, 이 영화는 조선의 22대 군주인 정조의 암살을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정조와 권력 다툼을 하며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 바로 정조 임금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였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과연 누구의 나라였는가? 진정 나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짐짓 우문현답이 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궁금증은 풀고 가야겠기에...

조선은 만인지상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의 나라였을까? 왕의 권력을 지탱해 주는 신하들의 나라였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진정코 백성들이 주인인 백성들의 나라였을까?

생각하기에 따라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질문을 하나 더 해볼까 한다. 조선은 과연 누가 다스렸던 나라였는가? 왕이 다스렸던 나라, 아님 신하들이 통치했던 나라?

사실 자세히, 조금만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조선이란 나라는 왕도, 신하도 아닌, 제 3의 인물, 바로 제3삼의 인물이 정치에 개입하여 다스렸던 나라였으니 그 제3의 인물이 바로 왕비 혹은 대왕대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는 바로 이들 조선을 좌지락우지락 하였던 왕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희왕후 윤씨, 조선 최초 여성 정치가로 국정을 다스리다.

성종 즉위년 12월, 오늘이 바로 정희왕후 윤씨가 처음으로 수렴첨정을 하는 날이었다. 어린 성종과 꿇어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문무백관들을 보았다. 윤씨는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최고 권력을 가지고 섭정을 했던 여성이 되었다. 윤씨는 11세에 수양대군과 백년가약을 맺어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짐으로써 왕실의 여인이 되었다.(94~95면)

 

문정왕후 윤씨, 수렴청정으로 군주의 권력을 휘두르다.

몇 해 전에 문정왕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뭬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던 <여인천하>라는 드라마를 유심히 본 기억이 난다. “세상을 다스리는 이는 왕이지만, 그 왕을 조정하는 것은 바로 여인이다”는 말이 있는데, 문정왕후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때문인지 중종은 심약했고, 항상 신하들을 무서워하였다. 윤씨는 중종의 심약한 태도를 재빨리 꿰뚫어보고 자신의 발아래 그를 굴복시켰다.(183면)

 

이 책에 나오는 여인들은 진정 철의 여인들로 모두 다 하나같이 조선을 좌지우지하며 한 세상을 풍미했던 여인들이었다. 왕 보다 더 높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조선 최초의 대비로 왕을 정할 수 있었던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있던 정희왕후, 애비 없는 자식을 기어코 왕으로 만든 위대한 여인으로 성종의 모후이면서 조선조 전례가 없는 사화를 일으킨 폭군 연산군의 친모인 윤씨를 폐비로 만들고 끝내는 사약을 내려 사시시킨 성종의 모후이자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남편 중종과 아들 명종 위에 군림한 문정왕후, 15살 꽃다운 나이에 66세 노인인 영조에게 시집 온 정순왕후, 부부간의 즐거움 보다는 권력을 택한 여인, 그녀는 정조 사후 다시금 권력의 정점에 올라 죽기 전까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조선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에 이른 궁극적인 원인인 세도정치의 시대를 열였던 안동 김씨가의 순원왕후 등등, 이 책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가 다 왕의 권력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여인들이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왕이지만, 왕을 움직이는 건, 역시 여인이었던가. 가깝게는 왕과 한 이불을 덥고 자며 살을 섞는 중전, 그 중전과 대립각을 세우며 왕을 좌지우지하는 대비, 바로 왕의 어머니, 그리고 왕의 할머니까지 살아 있다면, 왕노릇도 이 보다 더 힘들 수는 없을 것이다. 여인의 정치참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등장을 하였다. 왕을 움직인 여인들, 혹은 왕과 대결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왕비로 본 조선왕조>는 아주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d*****h 2015.01.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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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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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윤정란 저 / 이가출판사]   이 책은 조선왕조를 왕비들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해서 참 재미있게 보았다. 우선 조선을 건국한 조선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자 조선의 첫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방원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 조선 최초의 여성정치가로 활동한 정희왕후 윤씨, 명성왕후 김씨, 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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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윤정란 저 / 이가출판사]

 

이 책은 조선왕조를 왕비들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해서 참 재미있게 보았다. 우선 조선을 건국한 조선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자 조선의 첫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방원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 조선 최초의 여성정치가로 활동한 정희왕후 윤씨, 명성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와 희민 장씨, 조선의 마지막 국모였던 순정효황후 윤씨까지 총 28명의 왕비들을 통해 조선왕조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역사를 접할 때면 항상 등장하는 것이 시대를 불문하고 여성들을 둘러싼 비극이 결정적으로 역사를 바꾸는 경우가 많았는데 제일 처음 소개되는 신덕왕후 강씨의 삶이 역사를 바꾼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전부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선 강씨가 이성계보다 21살이나 어렸고 아름다웠으며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위해 행동한 결과 너무나도 유명한 제 1차 왕자의 난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것만봐도 역사드라마나 역사소설에서 자주 만나는 욕망과 욕심으로 비극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비운의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강씨의 이야기를 조금 더 파헤쳐보자면 당시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였지만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관습에 따라 두 명의 정실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시골에서 젊었을 때부터 동거동락을 했던 아내를 향처, 남자가 높은 관직에 올라 개경으로 가게되면 형편에 따라 정실부인을 한 명 더 맞이할 수 있는데 이 아내가 개경에 있는 아내라 하여 경처라고 한다. 이성계의 향처는 이방원의 어머니 한씨였는데 한씨는 이방원이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죽었기에 조선의 첫 국모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경처가 바로 지금 소개하는 강씨인데, 이성계가 이름뿐인 허울 좋은 공양왕을 유배시키고 조선을 개국한다는 거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거사의 큰 걸림돌이었던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라고 한다.

 

모든 왕비들이 그러하듯 강씨 역시 자신의 아들들이 왕세자로 책봉되길 원했고 결국 태조는 사랑하는 강씨와 대신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강씨의 두 아들 중 막내 왕자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방원은 이를 용납할 수가 없었고 결국 가족들끼리 피를 보는 제 1차 왕자의 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죽은 향처의 아들과 젊고 아름다운 경처의 아들의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경처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것을 보면 강씨의 영향력이 그만큼컸음을 알 수 있다. 원칙없는 세자책봉을 한 이성계의 결정에 아무리 배 다른 아들들이지만 결국 가족들끼리 피튀기는 비극을 맞게 되고 왕이 된 이방원은 강씨가 죽고나서 아버지 이성계의 부인은 자신의 어머니 한씨 뿐이라며 강씨를 조선 최초의 왕비에서 아버지의 서모, 즉 첩으로 강등하였고 그녀의 자식들까지 죽음으로 몰았다. 어쨌든 개국일등공신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에서 서모로 강등되었지만 서모로 강등된지 3백, 즉 죽은지 3백 년만에 현종때 유교사상에 의해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 정비자리를 회복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싶다.

 

물론 역사를 보면 수많은 왕비들 중 뛰어난 통찰력과 판단력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처세로 왕을 내조, 보필하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살아온 위대한 왕비들도 많았지만 권력의 힘과 유혹이 참 무서운지라 시기와 질투, 욕망으로 인해 역사의 끔찍한 사건의 원흉이 되어 안타깝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왕비들도 많았다. 죽어서까지 이성계를 잠 못들게 했던 강씨도 참 비운의 여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들의 궁궐 속 세상, 대체 그 세상은 어떻길래 그렇게 욕심을 내고 사람이 변하는 것일까? 국정을 다스린 왕비, 모성애를 보여주는 왕비, 살해당한 왕비 등 그녀들의 삶과 상황, 사건들이 너무 흥미진진하여 빠져들어 읽었다. 이 책의 제일 뒷부분에는 조선시대 왕비 가족의 일람표가 준비되어 있는데 보통 왕족의 일람표는 왕이 우선시 되는 반면 이 책의 일람표는 왕비의 칭호화 생물연도가 먼저라 기준이 달라진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조선 왕비들의 삶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참 신선했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k***i 2015.01.2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032)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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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상 왕비로 추존되거나 책봉된 여인은 44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는 실록에 어느정도 기록을 남긴 30명의 왕비를 다룬 책이다. 남성중심적인 위계질서를 갖고 있던 유교사회, 조선에서 국모라 칭해지던 왕비로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동반자에서 점점 국정에서 배제되어 가던 왕비, 유교적 이념이 체계화되는 와중에 왕비의 입지, 안정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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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상 왕비로 추존되거나 책봉된 여인은 44명이라고 한다. 그리고왕비로 보는 조선왕조는 실록에 어느정도 기록을 남긴 30명의 왕비를 다룬 책이다. 남성중심적인 위계질서를 갖고 있던 유교사회, 조선에서 국모라 칭해지던 왕비로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동반자에서 점점 국정에서 배제되어 가던 왕비, 유교적 이념이 체계화되는 와중에 왕비의 입지, 안정되어가는 상황에서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매던 왕비, 국정을 주도한 왕비들의 이야기까지, 4가지 시기로 구분해서 다루고 있다.

존엄한 자리에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더욱더 유교적인 여성관에 사로잡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왕비의 삶이었다. 조선 15대왕 광해군의 왕비였지만, 광해군이 폐위가 되며 함께 폐위가 된 폐비 유씨가 다시는 왕실의 부인으로 태어나지 말게 해달라고 기원을 드린 것도 이해가 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공신세력을 숙청해 안정적인 기반을 세종에게 물려준 것처럼 외척세력을 숙청한 태종이 니 아비를 죽인 것을 원망하느냐는 말에, "제 아비는 죄인이옵니다. 신첩은 출가외인이라 오래 전부터 상왕 전하를 친가의 아버님으로 여기고 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해야 했던 세종의 부인 소현왕후 심씨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를 중시하는 유교이기에 왕비가 아닌 대비가 되었을 때, 즉 왕의 어머니의 역할이 되었을 때 더 강단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흥미로웠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여성으로서 실권을 휘어잡은 정희왕후 윤씨가 그러하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후에 왕의 자리를 결정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할 정도로 판세를 잘 읽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세조와 마찬가지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그 후에 이어지던 현덕왕후 권씨의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내명부가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궁에서 왕비의 자리에 올랐을 뿐인데, 그것을 아들이 왕의 자리에서 억울하게 내쳐진 하나의 빌미였다니,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왕비의 시점으로 조선왕조를 바라보니, 이 비극은 연산군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정희왕후 윤씨의 정치적인 계산으로 아들이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소혜왕후가 된 한씨는 아무래도 실권을 쥐고 있던 정희왕후와 맞서지 않고, 학문에 관심을 두고 부녀자를 위한 교양서 내훈을 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종이 친정을 하기 시작하자, 숭유억불정책의 조선의 통치이념을 내세운 젊은 유학자들의 공세를 물리칠 정도로 힘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를 폐비시키는데 앞장서게 되는데, 후에 이런 문제들이 얽혀서 연산군의 폐악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단종을 떠올리게 된 것은, 연산군은 자신이 강력한 정통성을 확보한 군주라고 생각해왔는데, 윤씨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정통성의 위험을 받게 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단종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유교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이 고단한 면도 있었지만, 또 그녀들이 확보하는 정통성이 왕의 정통성과 직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흥미롭기도 했다.   

 

a******e 2015.01.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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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조선왕조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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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통해서 조선왕조를 바라보는 내게는 꽤나 흥미로운 책이다.   지인을 통해서 선물을 받았다. 일반인들이 나는 나이가 있어서 조선시대에 관심이 있는가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이를 떠나서 조선시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책이나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챙기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에게 연말이라고 이 책을 선물해 주었으니 우선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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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통해서 조선왕조를 바라보는 내게는 꽤나 흥미로운 책이다.

 

지인을 통해서 선물을 받았다. 일반인들이 나는 나이가 있어서 조선시대에 관심이 있는가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이를 떠나서 조선시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책이나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챙기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에게 연말이라고 이 책을 선물해 주었으니 우선 감사한 마음이다.

 

이 책을 받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물론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한 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글을 남긴다. 그동안 읽어 왔던 조선시대 책들은 좀 어렵고 표현도 딱딱해서 내용을 이해하자면 사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배려했다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읽어내려가기가 수월하다. 뿐만 아니라 시대를 명확하게 밝혀서 읽는이로 하여금 그 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데 무리없도록 하였다.

 

각 시대별 왕비를 통해서 그 시대의 사건들을 일어난 배경 과정 맺음에 있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술함에 있어서 그 사건에 결부된 왕비의 시점도 놓치지 않고 기술하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남편인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수 있도록 일등공신이 됨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받도록 시대의 거목인 남편의 뒤에서 정도전과 손을 잡은 그 과정이 정말 섬세하게 씌여있다.

 

이 책 한권을 모두 섭렵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정말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다. 

 

 

 

 

c********7 2014.12.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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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 어떤 역할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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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정치 세계에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고 자란 왕비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남성들과 정치게임을 해야 했을 뿐더러 때로는 같은 여성과도 마찬가지였다. 이 게임에서 패배한 왕비들은 폐비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친정 집안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 '글을 시작하면서' 중에서         유교적 여성관에 순종하지 않으면 즉각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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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정치 세계에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고 자란 왕비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남성들과 정치게임을 해야 했을 뿐더러 때로는 같은 여성과도 마찬가지였다. 이 게임에서 패배한 왕비들은 폐비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친정 집안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 '글을 시작하면서' 중에서

 

 

 

 

유교적 여성관에 순종하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생존하기 위해서 남성들보다 훨씬 더 기민하게 지지세력을 만들고 권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왕비들, 과거 5백년 동안 조선 정치 세계에서 위태롭게 삶을 영위했던 그녀들의 처세술이 무척 궁금하다.

 

 

이 책은 1999년에 출간된 <조선의 왕비>, 2008년에 출간된 <조선왕비 오백년사>의 개정판인 셈이다. 특히, 2010년 9월 일본 출판사인 <일본평론사>에서 <왕비들의 조선왕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지금까지 많은 판매부수를 올렸다. 한편 2011년 일본 NHK에서는 이 책을 바탕으로 조선 왕비들에 관한 이야기를 특집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방송하기도 했다.

 

 

저자 윤정란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숭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강의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에 출강중이며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선시대 사회와 정치사로 본 역사 속의 여성을 탐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특히 조선시대 왕실정치와 정치 중심부에 있었던 왕비들의 생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방대한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2008년 <조선왕비 오백년사>를 저술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 여성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최고의 여성 정치권력에 대한 학계의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 자료들이 발표되었는데,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개정판을 출간했다. 특히, 책은 조선 후기 국정을 주도한 왕비들의 이야기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중국의 부녀자들은 문자를 알고 있어서 정사에 참여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은 부녀자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정사에 참ㅇ녀할 수 없는 것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 <세종실록> 79권 중에서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이 1437년 평소처럼 경연에 나가 <시경>을 강독하는 도중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에서 소외되었으며, 외부와의 접촉이 엄격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당시 양반 사회를 주도하던 사대부들은 여성들이 외부와 접촉하게 되면 부덕婦德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의 활동 공간은 집이었다. 가옥도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시키는 구조로 건축했다. 가족일지라도 남자하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독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 중문 안의 여성들과 접촉하기 위해 전도부인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사대부 집안의 여성으로서 조선 최고의 여류문필가였던 허난설헌도 자신의 고달픈 삶을 시로 표현했는데, 첫째는 왜 변변치 못한 남편의 아내가 되었을까, 둘째는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셋째는 왜 조선에서 태어났을까 였다. 이런 고민 속에서 살면서 훌륭한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결국 조선사회와 타협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성들 중에서 가장 큰 권리를 누렸던 왕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백성들의 이목이 집중되기에 더 많은 구속과 억압을 강요받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최고층의 여성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가장 철저하게 유교적 여성관을 지켜야만 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추존내지는 책봉된 왕비는 총 44위에 이른다.

 

이 책은 기록 자료가 남아 있는 왕비들을 중심으로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 등 조선 역사에서 족적을 남긴 30명을 선별하여 이들의 정치적인 삶을 살펴본다. 책은 4부 즉, 시대적인 특성을 고려해 기반확립을 위해 희생양이 된 왕비들, 유교적 이념을 철저히 실행하는 왕비들, 정쟁의 소용들이에 휘말려 친정 가문과 함께하는 왕비들, 국정을 주도하는 왕비들로 구성되어 있다.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끈 전략가, 조선의 여걸

 

 

"정안군이 자신의 집 앞 어귀 군영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이숙번을 불렀다. 곧 이숙번은 두 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다. 익안군, 상당군, 회안군 부자도 역시 말을 탄 채였고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정안군을 추종하는 자인데 이때 민무구와 민무질과 함께 모두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병은 겨우 10면뿐이고 보졸은 9명뿐 이었다. 그러지 부인(민씨)이 준비해 둔 철창 가운데 절반을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여러 왕자의 시중꾼들과 노복들은 10여명으로 모두 막대기를 쥐었고 소근만이 칼을 쥐고 있었다"

 

 

이는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의 거사 장면을 기록한 <태조실록>의 일부다. 태조 7년(1398) 경복궁 근정전 앞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초조한 기색으로 모여 있었다. 음력 8월이라 선선한 가을바람과 높은 하늘이 어우러진 청명한 계절이 계속되었는데, 이날따라 유독 하늘은 먹구름이 뒤덮여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왕자들은 환후가 깊은 태조 이성계의 호출로 모인 것이다. 모두 모여야만 궁궐로 들어갈 수 있다는 명령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는데 사실 이는 정도전 일파의 술책이었다. 왕자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면 몰살시키려는 음모였다. 하지만 다른 왕자들은 이를 몰랐지만 이방원과 그의 아내 민씨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원은 태연하게 경복궁에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내 민씨는 거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큰일 났사옵니다. 대군마마!

부부인 아씨께서 별안간 배와 가슴앓이가 일어난 듯하옵니다"

 

 

방원의 종 소근이 급히 이 말을 전하자 그는 급히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렸다. 이때 다른 왕자들도 눈치를 채고 하나 둘 모두 방원의 뒤를 따랐다. 민씨는 미리 친정집에 숨겨둔 병기들을 반출했다. 무장을 마친 방원이 궁궐로 향하자 민씨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몸조심을 당부했다. 이 날 방원의 곁에는 판단력과 대담성을 갖춘 민씨가 보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정도전은 전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들의 성공적인 거사를 미리 축하라도 할 요량으로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술을 마시다가 갑작스런 기습에 포위당한 채 쫓기다가 살해되고 만다. 이후 방원은 문제의 근원이었던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비롯해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와 그 남편까지 모두 죽인다.

 

 

민씨는 고려 후기 유교적 명문가인 여흥 민씨 민제의 여식이었다. 민제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직을 고루 거쳤다. 어머니 송씨도 고위직 아버지를 둔 온건한 인물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성장한 민씨는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성 그 자체였다. 1382년, 고려 우왕 8년 때 18세의 나이에 16세의 방원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시아버지 이성계가 정도전의 머리를 빌려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왕가의 일원이 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은 개국 후 두 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정도전을 필두로 재상중심체제를 꿈꾸는 집단과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권중심체제를 주장하는 무리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에 나서면서 많은 개국공신들을 소외시켰다. 당연히 이방원도 그랬다. 그런데, 왕비 강씨가 아들 방석을 후계자로 삼아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정도전이 말하는 재상중심체제의 지지에 동참한다. 한편, 방원은 어머니 한씨가 죽은 것이 강씨 때문이라고 늘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씨의 정치력에 밀려 세자 책봉은 더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이때 머리를 쓴 인물이 바로 원경왕후 민씨였다. 정도전이 사병私兵 혁파를 내세워 이방원의 힘을 무력화시키려 하자 그녀는 동생 민무구, 민무질을 이용해 사병과 무기를 친정으로 빼돌렸기 때문에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를 십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뿐 만이 아니라 이방원을 위기에서 여러 번 구해주었고, 왕위에 오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장부였다.

 

 

하지만 이후 태종 이방원이 왕권강화정책을 펼치면서 권세가 갈수록 커지는 민씨 집안의 견제에 나섰다. 또 그 세력을 분산시키고자 후궁을 계속 늘려갔다. 그녀와 태종의 불화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으며, 그 영향은 민씨 집안에도 미쳤다. 태종의 선위 파동으로 민씨 형제들이 귀양을 갔다가 결국 귀양지에서 죽고, 그녀 또한 폐비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아들 세종의 지극한 효심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인해 56살에 생의 일기를 마감했다. 마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남편의 행동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만 조선 여인의 고달픈 삶이 처량하기만 하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 태종과 원경왕후가 묻혀 있다

 

 

 

 

여성교양서 <내훈>을 편찬한 지식인

 

 

어둠이 짙은 궁궐, 모두가 잠든 시간에 대비전만 아직 촛불이 타고 있었다. 대비 소혜왕후 한씨는 뭔가 열심히 붓글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성종 6년(1475)에 완성된 <내훈內訓>이었다. 자신이 홀어머니이기 때문에 혹시 자녀들에게 누가 되어 잘못된 길로 나가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시작되었다.

 

 

왕실의 여성으로서 보기 드문 유학자였던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은 열녀전, 소학, 명감 등에서 발췌한 내용을 7장3권으로 구성한 교훈서로 당시 삼강행실도와 함께 여성 교육의 기본서로 꼽혔다. 이 책에는 여성이 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여성관이 담겼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세조3년(1457)에 21살의 나이로 청상과부가 된 한씨는 자신에게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도 남달랐다. 엄격한 궁중법도로 자식들을 대하고 가르쳤다. 그녀는 내명부의 기강을 위해 왕실어른으로서 호랑이 같은 위엄을 보였다. 얼마나 엄했던지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는 그녀를 폭빈暴嬪이라 부를 정도였다. 제헌왕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자 왕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고, 결국 폐비가 된다. 이런 엄격함 때문에 인수대비는 나중에는 손자 연산군에게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비바람에 떨어지는 무정한 모란꽃

그 붉은 꽃잎이 난간에 가득하구나

모란정 연회에서 놀던 양귀비 죽자

후궁의 여인들도 꽃을 돌보지 않네

- 의경세자

 

 

소혜왕후. 우리에게는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로 더 친숙하게 알려진 여인이다. 소혜왕후는 세자빈 시절,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출궁했다가 자을산군이 보위를 잇게 되자 왕의 모후 대비로 다시 입궁했다. 중전에 오르지 않고 대비가 된 유일한 여인이 바로 인수대비이다.

 

 

그녀와 덕종이 잠들어 있는 경릉은 다른 왕릉과 차이가 있다. 죽은 왕이 자리하는 오른쪽에 인수대비가, 왕비의 자리인 왼쪽에는 훗날 덕종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가 안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묘를 쓸 때에는 왕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오른 쪽이 상석이 되는데, 여인이 상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 까닭은 덕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비의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여자 대통령'으로서의 삶을 산 인수대비의 업적이 덕종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되었기에 여인으로서 상석에 위치할 수 있었던 셈이다. 덕종의 능과 인수대비의 능을 한 눈에 구분 짓게 한다. 서오릉에 묻힌 분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계급으로서 눈을 감았으니 그 능의 크기 또한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성리학이 대세였던 당시 선비사회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꽤나 혁신적인 릉이다. 조선이라고 해서 남존여비사상으로 똘똘 뭉친 꽉 막힌 사회는 아니었나 보다.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모셔져 있는 경릉敬陵

사적 제198호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소재해 있다.

 

 

소혜왕후의 리더십은 상대방에게 엄격했으나 자신에겐 관대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녀는 모든 여성들에게 유교적 여성관을 강요한 내훈을 편찬해 내명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실제 그의 삶은 여필종부와 거리가 멀었다. 성리학적 기준에 벗어난 며느리 폐비 윤씨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오늘날의 리더는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하되, 상대에게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수렴청정으로 군주의 권력을 휘두르다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는 왕비자리에 오른 후 차례차례 정적을 제거해나가며 친아들 명종을 왕위에 앉혔다. 그는 이후 20년 간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장악했다. 권력투쟁 속에서도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찾은 전략가, 냉철한 피의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돼 들어온 궁궐 안은 훈척신 세력들과 사림士林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왕비로 간택된 지 2년 만에 조광조가 훈척신 세력의 모함으로 제거되자 사림세력들도 연루돼 제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의 길을 걷는다. 중종이 아무리 후궁의 처소에 드나들어도 질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녀는 부녀자의 덕목을 강조하는 서적보다는 역사책을 더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사를 펼치는 이야기들을 더 재미있어 했다. 이와같은 독서는 그녀에게 왕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의 지혜를 안겨 주었다.

 

 

또 왕비가 된 그녀에게는 중종의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호(인종)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는 그녀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4명의 딸을 낳고 이어 아들 환(명종)을 낳은 그녀는 세자 호에게 적개감을 품게 된다. 한편으론 인간이기에 이해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직접 공적인 영역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남편, 아들 등에 의해 운명이 결정됐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들인 환이 왕위에 올라야 자신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위협할만한 세력은 모두 제거 대상이었다. 그녀는 인종이 세자였을 때부터 그를 죽이려 했으나 항상 실패했다. 중종 24년(1527) 2월 세자 생일에는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후원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작서의 변'이다.

 

 

"나야 말로 이제는 외로운 자녀 하나마저 보전치 못하겠구나! 대윤의 득세가 눈 앞에 있으니 앞길이 캄캄하구나. 나는 아주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겠다"

 

 

그녀는 효심이 깊은 인종이 계모인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고의적으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것이냐'며 이런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인종은 예상대로 강한 햇빛이 쏟아지는 5월 대비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했다. 인종의 석고대죄에도 그녀는 조금도 끄떡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인종은 쓰러져 몸져눕고 말았다. 6월에는 인종이 이질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인종은 재위 1년도 못 채우고 생을 마감했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얻기 위해 이외에도 많은 정적들을 일소했다. 만일 그녀가 다른 정적보다 처세에 능숙하지 않았다면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폐비가 됐을지 모른다. 여성에게 많은 제약이 있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권력기반을 다진 그녀는 이러한 면에서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된다.

 

 

그녀는 사대부들의 제거 1순위 대상이었다. 유교국가에서 여성으로서 정숙하지 못하고 모든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다는 이유였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도 조선의 다른 여성들과 같은 존재, 즉 삼종지도에 따라야 하는 아녀자로서 임금을 따라야 하는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렴청정을 마치고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윤원형을 통해 조정을 움직였고 환관과 궁녀를 시켜 명종을 감시했다. 직접 명종과 담판을 벌린 일도 부지기수였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그녀는 사대부들을 제압하기 위해 호불정책을 폈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입원이 필요했다. 왕실 재정은 각종 진상과 소유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이 대부분이었다. 이외에 왕실과 관련된 사원의 토지에서도 그 일부를 충당했다. 사원들은 왕실로부터 사회적 존립을 보장받으면서 왕실 불사를 담당하는 한편 왕실의 사재정 일부를 충당하는 공생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사대부들을 견제하는 한편 사적인 수입을 위해 불교계를 중흥하려 했다. 그러나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에서 그녀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교계를 관리할 새로운 인물 보우를 등용했다.

 

 

"윤씨는 가히 사직의 죄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 <명종실록> 중에서

 

 

그러나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녀의 삶은 죽는 그 순간부터 부정됐다. 그녀는 자신을 위협할만한 모든 세력들을 적으로 몰아 제거했기 때문에 조선 사대부들의 영원한 저주 대상이 됐다. 그녀의 지나친 집권욕은 명종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법 질서를 크게 해치는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카리스마적 리드십도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호불정책은 나름대로 역사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 정책의 결과로 증가한 승려들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활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왕비의 단릉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해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

 

 

 

 

세계화 시대로 나아갈 준비가 된 여인

 

 

인조의 며느리인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세자빈이었지만 병자호란 패전에 따른 인질 신세가 돼 수천 리 나라 밖으로 떠났다. 하지만 강씨는 인질생활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운데 기회를 찾고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자로 변신했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청의 볼모로 잡혀가 선양瀋陽에서 힘든 고비를 넘겼고 귀국 후 삶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결국 시아버지인 인조의 의심으로 누명을 쓰고 역도로 몰려 세상을 떠났다. 숙종 때서야 '민회'라는 시호를 받고 명예가 회복됐다. 강씨의 죄명은 조선의 세계화를 외쳤다는 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강씨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갔지만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았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굴욕당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청나라와 직접 교류하지 않고 소현세자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했다. 결국 왕권이 양분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중재과정에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자금을 대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던 사람이 바로 강씨였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으로 군사력은 강하지만 문화적 수준이 떨어졌기에 조선의 물품을 필요로 했다. 강씨는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양관에서 청나라인과 활발한 거래를 시작한다.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수행으로 선양관을 비우는 일이 잦았으므로, 강씨는 세자의 역할을 대신해 조선에 보내는 장계까지 직접 챙기며 선양관의 실질적 경영자가 된다.

 

 

이후 청이 선양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황무지를 내주자 강씨는 직접 농사를 지어 선양관 비용으로 사용했다.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속환해 농장에서 일하게 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생산량을 높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큰 수확을 이루며 한 해 필요한 양의 3배가 넘는 곡식이 선양관에 쌓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아가 그녀는 직접 사私무역에 뛰어들었고 선양에서 조선의 인삼, 약재 등을 파는 일을 주도했다. 그녀의 경영수완 덕에 선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을 진기한 물품과 바꾸는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조선시대 여성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또한 그녀는 조선시대 여성도 세계 무역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들 부부가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됐다면 분명 조선은 변화했을 것이었다. 우리 역사의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리더십을 가진 그녀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또한 그녀의 세계관은 조선에서 받아들이기에 너무 빨랐다는 평가다. 인조는 소현세자 부부를 늘 의심했다. 청나라와 손잡은 아들이 자신을 폐하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의심 탓에 인조는 그녀의 아버지 강석기의 사망 후 선양에서 잠시 귀국한 그녀가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인조 23년(1645)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던 소현세자는 부왕 인조의 냉대를 받고 귀국 두 달 만에 죽게 된다.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이었다. 인조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를 덮고 소현세자와 강씨의 아들인 경선군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새까맣게 변해있었고 7군데의 혈穴에서 피가 나왔다"

- <인조실록> 중에서

 

 

그녀 역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그녀는 소용 조씨 저주사건과 인조의 수라에 올린 전복구이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다. 세 아들은 유배되고 그녀의 어머니와 사형제는 처형당하거나 장살됐다. 17살 꽃다운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었던 조선 여인은 당시 사관이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에 위치한 민회빈 강씨의 무덤

 

못난 왕 인조는 병자호란 때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포위당한지 47일 만에 삼전도에서 삼배구도구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후 국력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소현세자와 빈 강씨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를 독살과 사사로 죽이고 만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을 한 전과와 자신을 부추긴 정치세력들에게 농간당한 셈이다. 왕의 열등감이 빚어낸 가슴 아픈 역사다.

 

 

 

 

여주女主를 자처하며, 천주교도를 학살하다

 

 

순조 즉위년(1800) 문무백관들이 용상 아래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을 한 앳된 11세의 순조가 앉아 있었다. 순간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금수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령은 각기 그 지역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 내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민가의 우두머리)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코를 베는 형벌)을 시행하여 진멸하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녀는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에서 최고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수렴청정을 시작했는데 이때 나이 56세였다. 그녀는 순조 즉위 초 정국 최대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학에 대해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개혁군주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信西派라 한다. 그리고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사학을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신서파를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세력을 공서파攻西派라 부른다. 정순왕후 김씨는 그 공서파의 가장 강력한 배후인물이었다.


15살의 나이에 66살의 영조와 결혼했던 정순왕후는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만들더니 정조 재위시에는 때만 노리고 있다가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본인 스스로도 여주女主, 여군女君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김씨의 전횡으로 개혁으로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몇 십 년 뒤로 물리는 흑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다. 조선의 정치가 당파중심에서 왕비 가문 중심의 정치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 인창동에 위치한 원릉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조선의 왕비들을 시대에 따라 크게 네 형태로 삶을 살았다. 먼저 조선의 기반확립을 위해 희생양이 되는 왕비들로서 책은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 강씨부터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끈 지략가이지만 친정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태종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 민씨가 대표적이다. 소현왕후 심씨, 현덕왕후 권씨도 그 뒤를 따른다.

다음은 정희왕후 윤씨와 소혜왕후 한씨, 폐제헌왕후 윤씨, 폐비 신씨, 단경왕후 신씨, 문정왕후 윤씨 등은 체계화되는 유교적 이념을 철저하게 실행한 왕비로 꼽혔다. 셋째로 인순왕후 심씨,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시, 폐비 유씨, 인열왕후 한씨 등은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친정가문과 함께한 왕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순왕후 김씨부터 순원왕후 김씨, 명성왕후 민씨, 순헌황귀비 엄시, 정화당 김씨, 순명효황후 민씨는 비운의 역사 속에서 국정을 주도했던 왕비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비, 즉 순정효황후 윤씨는 8월15일 광복, 6월25일 한국전쟁, 4월19일 혁명, 5월16일 쿠데타를 목도하며 조선의 '마지막 국모'로 살았다.

5****0 2015.01.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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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이든 한 가정이든 무엇이 다르리요? 엄마라는 존재나 왕비라는 존재나 뿌리는 같겠거니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는 점을 서두에 밝혀둔다. 감히 독자는 국모나 엄마나 차이가 없을것이다. 없어야만 옳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만나는 30명의 왕비들을 통해서 나의 순진스러움을 개탄하고 말았다.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고 세상을 너무 착하게 바라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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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이든 한 가정이든 무엇이 다르리요? 엄마라는 존재나 왕비라는 존재나 뿌리는 같겠거니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는 점을 서두에 밝혀둔다. 감히 독자는 국모나 엄마나 차이가 없을것이다. 없어야만 옳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만나는 30명의 왕비들을 통해서 나의 순진스러움을 개탄하고 말았다.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고 세상을 너무 착하게 바라보는구나 발등을 찍힌 기분에 한참을 먹먹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우리들이 흔하게 듣게 되는 여러분들의 왕비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이면서 대쪽같은 서슬퍼런 강단을 가진 그녀들을 더 많이 떠올렸기에 어쩌면 소리소문없이 죽어간 그녀들을 애써 외면한 것일수도 있다. 대표적 국모로 각인된 명성왕후 민씨와 왠지 보호해 주고 싶었던 인현왕후 민씨 이 두분을 생각하면 없던 애국심도 생기는 듯하지 않는가? 남존여비사상이 하늘을 뚫을 듯한 시대에 여자로 태어나 국모의 자리에 앉아서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 거기다가 애국심까지 발동시켰다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국모라는 이름에 지워지는 책임과 무게는 과히 상상을 뛰어 넘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국모나 엄마나 충분히 다를 것은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정이 살아야 나라가 살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만큼 집안에서 집안을 다독이며 세우는 일에 전념하는 분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 오늘 만나는 왕비들과 오버랩되어서 감히 나라의 뿌리가 단단하기 위하여 엄마들의 노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보고 싶었다. 왕비들은 구중궁궐에 갇힌 사람으로 남은 평생을 살아야한다. 지아비가 첩을 두어도 투기 할 수가 없다. 친정 식구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가 가문에 낭패를 당하게도 할 수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나마 목소리도 낼 수 없다. 그런데도 가문을 위하여 왕비가 되기도 하고 가문을 위하여 정치에 입김을 넣기도 한다. 유교적인 체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제일먼저 왕비들의 세를 죽이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왕비들은 구중궁궐에 갇힌자로 침묵하며 살아야했다. 시대가 여성을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만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가진들 여자이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그녀들에게 피멍든 가슴에 잔잔한 위로를 드리고 싶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하더라도 물론 조선시대를 잣대로 잡는다면 천지가 개벽할만큼 세상이 변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미약한 여성의 지위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비추어 다방면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 밑거름이 되어준 왕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진다. 나의 자손들 세대에는 좀 더 나은 모습이겠거니 기대해본다.

t*********8 2015.01.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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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관점이 새롭다. 성리학이 기본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여인의 위치는 늘 그림자에 불과했다. 물론 조선 중기까지는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상속권을 가지고, 처가살이가 당연한 일이었을 정도로 여자들의 위치가 조선후기와는 달랐다고 하더라도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예는 극히 드물었다. 그것은 비단 왕비라도 마찬가지다. 역사에 온전히 이름 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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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관점이 새롭다. 성리학이 기본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여인의 위치는 늘 그림자에 불과했다. 물론 조선 중기까지는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상속권을 가지고, 처가살이가 당연한 일이었을 정도로 여자들의 위치가 조선후기와는 달랐다고 하더라도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예는 극히 드물었다. 그것은 비단 왕비라도 마찬가지다. 역사에 온전히 이름 석자를 알린 왕비가 몇이나 되나. 생각나는 이름은 장희빈의 장옥정, 명성황후의 민자영이 전부다. 대부분의 왕비나 세자빈들은 그저 아버지의 성씨로만 기록되었고, 누구의 딸, 아내, 어머니냐에 따라 인생의 희노애락이 좌우되었다. 

물 론 왕실의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감정보다는 정치적인 실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봐야할 수 밖에 없는 왕실의 결혼. 그렇기에 왕비나 세자빈의 삶은 화려할지는 몰라도 앞날을 장담하기 어려운 바늘방석같은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해, 남편인 세자가 보위에 올라 왕비에 책봉되고,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라 대비가 된 이가 명종의 비인 명성왕후가 유일하다는 것을 보면 왕실의 삶이 얼마나 풍전두등화와 같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에는 태조 이성계의 비 선덕왕후 강씨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순정효황후 윤씨에 이르는 29명의 여인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왕실 여인들의 삶을 조선의 기반확립 위해 희생양이 되는 왕비들', '체계화되는 유교적 이념을 철저하게 실행하는 왕비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친정 가문과 함께하는 왕비들', '국정을 주도하는 왕비들'로 구분해 설명한다.

책을 읽으며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왕비들 대부분이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친정 가문과 함께하는 왕비들'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정을 주도하는 왕비들'도 비슷하다. 왕실의 혼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 통 결혼하면 그 집 귀신이 된다고들 한다,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집안의 중심이 되어 가족이 하나로 뭉친다. 그런데 왜 왕실의 여인들은 왕실로 출가한 이후에도 친정과 그 운명을 함께 한 것일까? 물론 조선이 왕권과 신권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대이기고 했고, 왕비들이 사림이나 소론, 노론과 같은 정치세력의 대변자라는 측면이 강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일단 왕실의 사람이 되면, 자신의 집안보다는 왕실과 국가를 먼저 생각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면 역사가 참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남편을 적극 보필해 거의 정치적 동반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 원경왕후 민씨, 정희왕후 윤씨, 소현세자빈 강빈의 이야기에 더 관심 깊게 보게된다. 그녀들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것은 아니지만.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대의에 의해 움직인 여인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뜻을 모두 다 이룬 것은 아니더라고 말이다.

왕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역사를 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한번 확인해본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이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자신의 영욕만을 위함이 아니라
국가라고 하는 큰 대의를 위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가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던 왕비의 관점에서 보니 그런 점들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저 우리가 알지 못하던 왕실여인들의 삶이라는 호기심이 아니라' 권력이란 무엇인가',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더 좋을 책이다. 명분이나 영욕을 위한 것이 아닌 진짜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져야 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d****a 2015.01.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