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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쿵쿵 뜀박질하는 전개가 이루어지거나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게 되거나 결말이 궁금해서 못 견디는, 이런 순간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과 별로 상관없다. 느리고 균일하여 아늑하다. 햇빛이 느껴질락 말락 하는 늦가을 또는 냉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초봄의 어느 날, 산책에 나섰다가 돌연 모든 것이 낯설게 다가오는 정서와 비슷한 분위기...내가 모디아노의 글을 읽을 때는 늘 서글프거나 막막해진다. 그럼에도 그의 책이 끝나면 며칠 동안은 여운에 흔들 린다. 인생과 인간의 비밀을 하나 더 알아버린 데서 오는 슬픔 같은 게 뒤섞인다.
『청춘 시절』은 혹시나 밝고 경쾌할까? 푸르른 시간들을 얘기하므로 어디에든 희망이 있으려니와 풋풋한 사랑과 막무가내식의 열정도 있을 테고. 스위스의 한적하고 평온한 산속의 오두막에 사는 부부와 자녀가 등장한다. 결혼과 가정이라니 한창 청춘은 아닌가 보네. 이번에는 아이들도 있고 친구 부부도 놀러 온 걸로 보니 '정상적인' 부부인가 보군. 『신혼여행』은 정상적 의미의 신혼여행이 아니었고 『8월의 일요일들』에도 가짜 부부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책의 부부에게도 일단 경계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로 부부 맞다. 따라서, 『청춘 시절』은 한참 전의 청춘으로 회상하며 들어간다. 『신혼여행』처럼 현재와 대과거, 과거와 마구 혼재하는 전개가 아니고 순전히 먼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의 숲속에 미치기까지의 직전적인 타임라인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모디아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행복한 가족사와 거리가 멀다. 부모가 없거나 집을 떠나 나온다. 이 책의 주인공 루이도 아버지가 한때 유명한 경마 기수였지만 부모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여자 주인공 오딜은 아예 집을 나와 미성년자로 경찰에게 여권을 빼앗긴 전력이 있다. 이들의 청춘은 암울하다. 루이는 군대를 제대한 후 마땅한 직업도 돌아갈 곳 도 없다. 오딜 역시 가수 지망생으로 정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위태로운 청춘들을 어찌할까... 우연히 알게 된 어른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자력으로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친절한 어른들의 만남은 과연 행운일까.
어른이라고 모두 온전한 인간인 것도 아니며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똑 부러지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루이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가 하면 일도 맡겨 주는 어른들이 있고 이 중 한 명은 탄탄한 재력을 갖추고 있다. 오딜도 운이 좋아 보인다. 늘 가던 카페에서 어느 날, 아마추어 뮤지션을 발굴하러 온 레코드 회사의 사장에게 픽업된다. 과거의 화려한 작곡 이력을 가진 이 어른의 도움으로 곡을 녹음하고 여기저기 앨범을 소개할만한 사람들을 소개받는다. 당장 정식 가수는 되지 못하지만 카바레 가수로의 일자리를 알선 받는 등 당장 살아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이 정도만으로는 이야깃거리가 없다. 갈 것 없고 할 일도 없이 표류할 것 같은 이 젊은 남녀에게 순순히 도움을 베푸는 어른들 한 명 한 명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남녀도 읽는 나도 미궁에 빠져든다. 이 어른들은 각각 어둡고 사악하기까지 한 그네들의 인생에 묶여 있다. 루이를 돕는 브로시에는 브자르디와 루이를 연결해 루이에게 범죄의 가능성이 있는 일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했다. 브자르디는 루이와 오딜에게는 실체를 백 퍼센트 드러내지 않지만, 그 주변의 어른들에 의해 가장 위험한 인물로 점점 부각된다(살인 사건에 연루된 적도 있다). 아마 최종 미션을 마치게 한 후, 그의 본모습이 나타났을 수 있다. 결국, 모두들 브자르디를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그의 심복과도 같던 브로시에마저 자신의 연인과 함께 할 학업의 청량한 세상으로 나가 버린다. 오딜은 더욱 답이 없어 보인다. 선의로 다가왔던 벨륀은 자신의 과거의 영예를 되찾지 못하는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전적으로 일자리를 알선해 주던 비에티는 처음부터 노골적인 성적 요구에 거침이 없다. 가수가 되기 위해 또한 아무도 막아서줄 사람이 없는 형편이라 여긴 오딜은 금전적으로 약아지는 대신, 이 어른에게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굴복한다. 어찌 보면 이 청춘 남녀는 암울하게 무너져 내린 어른들의 세상에서 적잖게 '이용'당한 셈이다.
그들은 무엇엔가 좀 든든한 것에 매달리고 싶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 시련의 한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물어볼 상대가 없었다. 155쪽
한 번도 누가 그들, 오딜과 루이에게 조언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늘 그들 자신들뿐이었다. 191쪽
이처럼 무방비 상태의 맨주먹으로 삶이라는 거센 물결 앞에 서 있는 젊은 청춘들 앞에 나타나는 저 수상쩍은 중년의 '안내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옮긴이의 말> 중
당장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안갯속에서 그들에게 다가온 어른들을 처음에는 무턱대고 믿고 따른다. 인생이 내뱉는 우울한 노래를 듣기 시작할 때, 누구나 두려움에 빠진다. 이때는 어떤 도움이든 부여잡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행동들과 사건 속에 점점 깊숙이 밀려 들어가게 되면 이 순수하고 여린 청춘도 낌새를 차린다. 갈등하게 된다. 온갖 위험으로 얼룩진 어른들의 인생을 모른 척하며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편한 길을 갈 것인지. 이 정녕 아닐 것 같은 세계로부터 단호하게 탈출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진짜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부정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의 관계가 서서히 해체, 정리되는 상황을 이들도 감지한다.
이제 마지막 한 번만 더 할 것인가? 여전히 그 목적과 이유를 알지 못하는 미션을 부여받고 루이와 오딜은 안시로 향한다. 이틀 후 제네바에서 브자르디와 만나면 이제껏 모든 일이 끝난다. 제네바행 버스의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루이는 브자르디가 맡긴 작은 트렁크를 연다. 돈다발을 센다. 이제 마음의 결정을 하는 거다.
그러나 오늘로 그 음울하고 비 오는 세월은 그 끝에 닿았다. 이제부터 그 시절은 너무나도 아득한 옛날만 같아서 감미로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당장 그날 저녁 그들은 니스행 기차를 탔다. 중간에 리옹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 그들은 니스에서 보름을 지냈다. 큼직한 미국산 무개차를 한 대 세내어 그다음 몇 달 동안 코트 다쥐르 해안을 돌아다녔다.(---) 루이는 날아갈 듯한 가벼움과 몽롱함이 한데 섞인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딜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244쪽
청춘의 쾌거라 할만하다. 자신들의 삶조차 엉망진창으로 부수어가던 어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른은 자신의 삶을 되돌이키기 위해 (브자르디는 모든 일을 청산하고 아르헨티나로 갈 계획이었다)가장 중요하고 절실했던 순간에 그만 된서리를 맞은 격이 되었지만, 청춘들의 삶을 뭉개어놓을 자격은 없다. 지금 나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다. 주변의 청춘을 부러워하면서 그 유약하고 흐릿한 청춘의 태도가 이해 안 되기도 한다. 청춘의 저 헤매는 저 시간을, 목표가 불분명해 보이는 젊음의 저 에너지를 나에게 다오,라고 그들을 한심해 하기도 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훈수라도 둘 태세를 내보이기도 한다. 이 얼마나 무익한가?! 나의 청춘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고마운 어른들이 있었다. 때로는 밥을 사고 때로는 시간을 내어주면서 이렇게 해보면, 저렇게 해보면 등등 그들의 삶의 지혜와 경험의 빛을 나에게 하사해 주려고 무던히 애쓰는 어른들 말이다. 그들의 안내와 지도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나의 탄탄한 앞날을 꿈꾸었으리라. 하지만, 나의 청춘이 더 짙게 물들어 갈수록 어른들의 말은 내 관심사에서 벗어났다. 그들의 말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아내는 데에는 별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답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움에 젖어 있는 청춘, 역시 답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중년 혹은 그 이후의 어른의 시간들... 이 둘은 어쨌든 만나고 섞여든다. 젊거나 나이가 들거나 똑같이 인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고 변함없이 해답이 없다. 다만, 나이듦이 청춘보다 한발 더 앞서는 것은 있다. 문제투성이의 청춘은 자력에 의해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었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나오니, 이 사실이 그제서야 보이는 게다. 『청춘 시절』의 엔딩처럼 청춘은 언젠가 자신의 바윗덩어리를 내어던지게 된다는 사실을 나이 들어서 역력하게 알아먹게 된다.
그 무엇이, 훗날 그게 다름 아닌 자신의 청춘 시절이 아닌가 자문하게 될 그 무엇이, 그때까지 그를 짓누르고 있던 그 무엇이. 마치 어떤 바윗덩어리 하나가 천천히 바다를 향해 굴러떨어지다가 마침내 한 다발의 물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지듯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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