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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오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를 열심히 듣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언제쯤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안개낀 편의점처럼 진열되어 있던 추억들이 흐릿하기만 한 탓이다. 어쨌든 그 때 재개발에 들어가는 열여덟평의 아파트, 겹겹이 뜯어고친 마룻바닥이 철철 울리도록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를 들었다.
주말을 틈타 두 건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막내 동생의 그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소개한 선남선녀의 결혼식이었다. 두 건 모두 나에게는 꽤나 중요한 것이어서 어느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피곤한 주말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오랜만에 상경하신 부모님은 아예 집으로 돌아가실 생각을 하지 않으신다. (다시 생각해보니 오랜만의 상경도 아니다. 주말마다 결혼식과 모임이 끊이지를 않아서 최소한 두 주에 한 번은 올라오신 듯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시간을 쪼개어, 그러니까 동생의 결혼식을 앞두고 전통의 세레모니처럼 아버지와 새벽 목욕을 다녀오는 동안, 아버지보다 조금 먼저 나와 벌거벗은 사람들 틈에서 잠깐 읽는다든지, 여의도에서 있는 후배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2호선 지하철역을 타고 움직이는 동안 고개 흔들려 가며 읽는다든지, 해서 읽은 책이 바로 박청호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이다.
그의 단편을 읽고 좋아서 세종출판공사에서 나온 그가 나를 살해하다, 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작가의 두 권의 소설집이 나온 후이던가 그가 나를 살해하다, 라는 소설이 거의 개작의 흔적 없이 푸르, 어쩌고 해서 다른 제목으로 다시 나왔는데, 내가 아는 지인 하나는 그가 나를 살해하다, 가 아닌 다른 소설로 알고 잘못 샀다가 이를 박청호에게 항의하기 위해 출판사에 전화를 했으나 작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그만 둔 그런 기억도 난다. 그리고 이번의 소설, 어디선가 작가가 단편으로 발표했던 내용을 다시 장편으로 바꾼 것 같다.그게 아니라면 디엠지 안에서의 섹스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억이 이리 분명할 리가 없다.
소설은 모두 아홉개의 장으로 구별되어 있다.
1. 통음난무 - 초소 안의 정수와 철호.철호에게 사랑하게 된 여자를 내어주고 분개하다, 섹스 후의 여자를 이끌고 디엠지로 들어가고 그 곳에서는 북쪽 병사와의 섹스를 주선하는 정수. 휴가 기간 동안 짬을 내어 벌이는 은행강도. 뇌성마비로 죽음을 원하는 쌍둥이 형을 향해 발사되는 권총.그리고 형이 되기로 한 나, 정수.
2. 퀵서비스 - 부패와 살인. 즐비한 살인의 방법.살아있음으로 죽음에 가까운 획기적인 삶. 평화로운 구역으로 상징되는 디엠지에 들어갈수 없는 자들의 명단.
3. 매혹의 바깥 - 정수를 사랑하는 은채.은채와 J의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동성애. 소설 바깥의 나는 이것들을 향해 갈채.성의 구별에 대한 가슴 뜨끔한 충고 없어서 좋지만 작가가 남성이라는 혐의 누설.
4. 청색시대 - 언제나 가슴 현란하게 만드는 마스터베이션. 살인의 공유. 갱단의 아지트인 자우림. 친구를 사귀듯이 갱단을 모집하는 정수.
5. 빛의 동굴 - 철호의 살인. 디엠지에서 은채와 섹스를 나눈 북쪽 병사의 남하. 그 북쪽 병사가 기거 하는 디엠지 안의 아지트인 빛의 동굴.
6. 한국은행을 털기 위한 시민연대 - 개인적으로 가슴에 듬성듬성 불이 켜지는 것처럼 좋았던 부분.작가의 발칙한 상상력이 극대화 되는 부분으로 자칫 잘못하면 팬티를 저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도 됨.자본의 재분배를 위한 자지러지는 쇼. 한국은행으로 비롯되는 천민자본주의 (아직도 이런 용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를 향해 보내는 야유.
7. 감옥에서의 1인 2역 - 거사를 앞두고 붙잡힌 나.그런 나 정수가 형인 정호로 변하기 위해 형의 영혼을 자신에게 이식하는 과정. 정수와 정호, 그리고 남과 북이라는 쌍둥이 형제 사이의 비극적인 레파토리를 교환하는 과정이 순조롭지만 틀에 박혀 있어 조금 실망. 프란시스 베이컨이 비틀어대는 무언의 본질까지 언급.
8. 범죄적 사랑 - 분명하고 위엄있지만 서글프지 않고 그렇다고 낯간지럽지도 않은 정수를 향한 은채의 사랑. 한국은행 털기에 성공. 다이하드3편을 보는 것 같다.
9. Time DMZ - 정수의 환생. 정수는 죽은지 삼일만에 환생하였고,정수가 태어난 것은 팔십년 오월이라는 진술. 오, 환장할 노릇이다.이제 빚갚음을 빙자한 자기 연민과 자기 오독과 자기 방치는 끝내자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전화번호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내가 가끔 소설을 쓰겠다고 벼르고 또 실제로도 소설을 쓴답시고 어줍잖게 똥폼을 잡는 것이 따지고보면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읽어보려는 욕심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욕심이 과하다보니 소설도 재미있게 읽지 못하고, 그렇다고 소설을 쓸 수도 없는 그런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정신적 그로키 상태에 빠졌던 듯 하다. 정신차릴 수 있을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세상에는 어둠과 빛, 삶과 죽음, 시간의 흐름과 멈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뭐 이런 것들과 그것들의 경계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그 경계로 가서 겹쳐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경계는 비좁지 않고 늘 풍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