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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당히 좋은 주제와 내용을 포함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가독률이 너무 떨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원작자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철저히 번역자의 문제이다. 최선을 다해 번역한 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출판사가 더 책임이 크다고 본다. 퀄러티 높은 번역을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므로 원가절감 차원에서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표지의 그림도 전혀 와닿지 않는다. 이 또한 투자와 직결된다. 심지어 독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인 책갈피용 끈도 달려있지 않다. 대체 이 출판사는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출판하는 것인가, 단지 장사를 목적으로 책을 출판하는 것인가.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책을 읽는 내내 한글판을 집어던지고 원서를 사서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퀄러티 낮은 번역으로 인해 본인의 책이 제대로 읽혀지고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원작자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상심할 지 생각만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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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신론자로서 이처럼 자기규정을 내리고 싶다.
무신론자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무신론자는 반종교론자가 아니다. 무신론자는 영성이 없는 냉철한 이념인이 아니다. 무신론자는 무신앙의 영성인이다. 무신론자는 뜨거운 인류애를 갖춘 휴머니스트다. 무신론자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지적인 교양인이다. 무신론자는 개인주의나 공동체주의라는 이분법을 떠나서 가치의 유대를 지향한다.
많은 이들이 현대를 무신론과 니힐리즘의 시대로 규정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명제는 보수적인 종교인들에게는 공동체의 붕괴와 윤리적 법률의 파괴, 도덕적 아노미를 의미했고, 무신론자에게는 진정한 개인의 탄생과 자유의지론자들의 인문적 각성, 그리고 자율적인 삶을 의미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 종교는 자본과 더불어 세속화되고 기업화되어 부패가 극을 달했고 이미 종교의 건전한 가치와 그 의미를 상실했다. 그래서 일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은 '과학'이나 '문화'로 종교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신론의 족보는 화려하다. 내가 접한 텍스트에만 국한지어 근대 이후부터 무신론자임을 공언한 유명인사들을 꼽자면 루쉰, 버트런드 러셀,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알랭 드 보통 등으로 이어진다. 특히 전투적인 무신론의 대명사인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를 일종의 정신바이러스로 간주하는데 그는 종교의 소멸에 환호작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종교의 소멸을 바라지 않는다. 종교의 소멸이 종교의 부흥보다 세상에 더 이로움을 미칠지 의문스럽기 때문이고 영적인 추구와 신비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무신론은 결코 반종교론이 아니다. 그리고 무신론도 일종의 영적 신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는 이미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무신론이야말로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다시 일신교에서 무신론으로 진행되는 영적 진화의 종착점일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청미래, 2011)에서 내가 바람직하게 보는 무신론자의 모습과 견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드 보통은 무신론자들을 향해서 기존의 종교가 가진 미덕들과 제도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유용하고 위안이 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 각자가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그 속에서 사랑, 믿음, 관용, 정의, 절제 등의 미덕을 배우고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천명을 부여받은 종교는 없기에 모든 종교는 인위적이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종교란 인간 조건의 불안감을 위로하거나 진정시키기 위해 발전된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종교는 '메멘토 모리'의 가장 대표적인 집단적 자구책인 셈이다. 프로이트의 종교발생설은 비록 소박하지만 종교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의 맨 밑에 놓이는 주춧돌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드 보통이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류의 기능주의적 입장이다. 비록 종교의 발생이유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종교의식이 가진 개인과 사회의 충돌조절적 역할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유기적 조화를 종교의 윤리적 기능으로 설명하는 모습에서 그의 기능주의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종교와 공동체 윤리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뒤르켐주의자의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자유의지론적 이론가들이다. 자유의지론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가치의 중립성을 지나치게 옹호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책에서 특정인물을 그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자유의지론자에 대한 저자의 글은 성급한 일반화나 허수아비 논쟁의 오류를 보여준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내 느낌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자유의지론자를 비판하는 저자의 모습은 중세시대 호교론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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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하면 떠오르는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글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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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는 3 종교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전반적인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담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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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종교서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통찰하는(되는) 종교의 모습이나 영향, 의미이다. 리뷰는 10개의 챕터 중 특히 감명깊게(쏙 들어오게) 읽은 8챕터 미술과 10챕터 제도 편에 치우쳐 작성되었다.
과감히 돌진해보자면, 보통이 썼기에 읽을 수 있는 주제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열린 마음으로 읽다보니 다양한 방면에서 종교를 통찰한(그럼에도 종교인이 아닌) 무신론자의 종교 인정이 맘에 들기도 한다. 이런 글쓰기는 다양한 소재에 대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써오던 작가의 역량이 한껏 발휘됐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사랑이 아니다. 여행이 아니다. 심지어 종교인이 아닌 사람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약간은 이질적으로 지루하게 느껴지는 게 이 책의 난이도나 동기가 충분치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역할은 대단하다는 점에도 퍽이나 공감한다. 나는 이 주제가 마음에 들며, 보통과 같은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무신론자로서 누구도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총대매고 긁어주는 보통의 글이 색다르고 용감하다고 느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아니, 관광객들이 꼭 한 번 보고 가는 그림은 단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다. 나도 그랬다. 손때와 훼손을 방지해 다른 그림과는 달리 유리벽 안에 한뼘 들어가 박힌, 추측하던 것보다 훨씬 더 작고 보잘 것 없어보이는 그 그림의 가치는 이미 내가 말할 수 있는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모나리자' 자체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 빈치가 그렸고 그림 속 여자가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것외 뭐가 있는가. 미술관에는 다른 그림도 있다. '수태고지'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모나리자'와는 다르게 종교(기독교)나 종교 속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종교의 역할이나 필요성까지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을 거라는 주장을 펼치며 다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거나 못하는 자기 주장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작가에게 종교란 '공동체 정신'과 '위안과 극복'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이롭다. 교회나 성당에 나가 예배나 미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 또한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타인과 어우러지는 지점을 중요시하며, 잘 모르는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며 위로하거나 위로받는 것을 세상사의 정(情)으로 여길 줄 안다. 종교가 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이 언급한 두 가지라면, 설사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또한 종교의 영역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와 교회에 가는 것, 미사를 드리는 것, 불경을 읽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강제가 못 미덥더라도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하느님을 통해 위안 받으려는 사람의 자세까지 헛된 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미술이 종교와 밀접한 영향을 가졌던 중세를 고스란히 재현하고서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유럽의 성당과 미국의 교회까지, 보통이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대입해봐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경 즉, 성서 이야기에 나타난 여러 사실들이 많은 그림들의 주제라고 해서 미술이 곧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에 의하면, 교회에 가서 무릎 꿇고 두손 모아 기도하듯, 일상이 아닌 어떤 손닿지 못할 프레임, 그러니까 그림 앞에 경건해지고 침묵하게 되는 까닭은 종교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며, 어떤 스토리와 동기를 부여하게 함으로서 일상을 살아가게 만드는 일은 종교가 하는 역할과도 같다.
1천 년 이상이나 기독교 미술가들은 가령 손바닥에 크고 녹슨 못이 박히고, 채찍을 맞은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 때문에 다리마저 부러져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과연 어떤 기분인지를 우리가 느끼게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쏟았다. 그들의 목적은 이런 고통의 묘상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묘사는 다만 도덕적이고 시미적인 발달을 의도하고, 우리의 결속감과 동정의 힘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의도한 것이었다. (p.235)
이처럼 종교와 미술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중세 기독교 역사를 비롯한 서양의 종교나 동양철학에 기초한 불교 같은 것들을 먼저 알아야 알 듯하다. 어쨌든 고통 받는 그림을 굳이 그린 이유는 상대를 겁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완화함으로서 위안삼을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의 제단 장식화' 또한 그렇게 그려진 회화다. 당신의 고통이 당신의 것만은 아니며, 내가 손을 내밀테니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 좀 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반대로 낯선 사람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동일시함으로서 타인을 용서하고 배려하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기독교는 결국 용서와 구원을 가장 큰 교리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다소 이질적이고 낯선 통찰 방식이지만 기독교 미술(화가)이나 성서나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었다. 종교는 종교인이 아닌 자에게 다소 불편한 단어이긴 하지만, 종교의 반대말은 반종교이지 무신론은 아닐 수도 있다. 교회, 성당, 절에 특별히 적을 두고 가진 않지만 신이 없거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신의 존재가 거추장스럽다고는 여기지 않는 나는 반종교인인가 무신론자인가. 종교 안에서 여러가지 문화들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신이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 한, 인간은 윤리도덕적 입장에서 한 번쯤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거나 나쁜 일을 저지당할 수 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신' 즉, 종교라는 이름 때문에 말이다. 사랑이든 관용이든 믿음은 신앙과도 직결된다. 소외를 극복하고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고, 공동체 정신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지혜와 희망은 종교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목표가 되거나 되고 있다. 일찍이 종교 회의주의자들은 종교를 특정인의 이데올로기로 봤다. 순결한 여성이 잉태하고, 천사가 도와줌으로서 전투에서 이기는 모든 불명확한 일들을 미신으로 치부하려 했었다.
종교에 대한 가장 쉬운 오해 중 하나는 종교는 세속적이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이미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수준의 가장 기업적인 수준의 극한까지 와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각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고 착각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보인 경력의 결정적 차이를 종교 제도가 주는 정신적 안정성으로 몰고 가는 점은 흥미롭다. 아퀴나스는 연구대학의 정신적,물질적 지지와 관대한 분위기 속에 성장했고, 니체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며 고독했다. 니체의 한계를 동료 조직망의 결여나 넉넉한 수입의 결여 혹은 안정적이지 못한 직업 때문이라 단정짓는 게 옳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인간의 발전가능성이 오로지 내면의 개인에게만 달려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 제도는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이처럼 예배의 표준 규정을 맥도날드 점원 지침에 비교해도 억측은 아니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안다.
종교를 그처럼 차별화한 요인은 매우 다양한 영역-엄밀하게 말하면 지적인 영역과 신학의 영역에서부터 심미적인 영역과 의상 및 요리이 영역에 이르기까지-에 걸쳐서 일관적인 브랜드 정체성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기독교, 유대교, 불교는 인류의 구원에 관한 위대한 사사을 오히려 저급한 물질적 행위, 즉 주말 휴가, 라디오 방숙, 식당, 박물관, 강연장, 의류업체 등의 운영 등과 연관시키는 데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p.310)
종교의식을 기업의 제도와 비교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현재 점점 비슷해지고 있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원래 종교와 기업은 달라야 한다. 평등과 동일을 부르짖는 종교가 이윤과 차이를 강조하는 기업과 같아질 수는 없는 법, 종교적 믿음이 없다면 우정, 공동체, 감사, 초월 같은 개념이 여전히 필요하다. 종교가 기업과 유사한 점 하나는 바로 이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제도라는 점에 있다. 종교의 초자연적인 측면에 대한 반감을 화해시키려 시도한, 공상가이자 괴짜로 취급되기도 했던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이렇게 말했다. 기존 종교의 부족한 점을 불평하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이 더 낫기도 하다.
종교가 반드시 그 종교라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자기반성에서 시작해 균형을 맞추고, 공동체 속에 잘 통합되는 것. 교회는 세속적이다. 종교가 세속적이지 않다는 말은 틀렸다. 내가 알기로 종교(신)는 실제로 무엇을 하거나 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있어도 극소수다. 대부분은 정해진 틀(제도) 안에서 결합된 사람들의 인격(성격)에 의해 흘러간다. 종교가 합리적이랄 것도, 특별히 비합리적이랄 것도 없다. 종교는 이 모든 의도와 의미에도 불구하고, 필요해서 인간에 의해 조작된 것일 따름이다. 초자연적이기도 하며, 세속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이고 옳지 못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종교는 필요하다. 보통의 이런 논증이 아니더라도 신(종교)에게 기대 위안하는 것이 신앙인들만의 것이라고 장담하기에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든다. 견디지 못할 일이 생길 때, 내가 신에게로 달려갈지 않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위안이다. 신과 종교가 정말로 동일어가 맞다면(보통은 줄곧 이 둘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분리하고 싶은 듯하다), 신(종교)이 그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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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불안' 을 읽다 말았다. 행간이 너무 좁아서 가독성이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댔지만 실은 내용을 곰씹어야 해서 읽기 힘들었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는 제목에 끌려 꼭 읽어보기로 했다. 제목 그대로 종교가 어떤 식으로 사회에 공헌을 했는지, 종교(특히 기독교) 의 영향력이 약해진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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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기도 한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고개가 갸우둥해졌다. 무신론과 종교라는 말 자체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종교)는 서양의 문학과 예술, 제도와 규범의 근간이 이루며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서양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서양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일신교 전통이 강한 서양에서 무신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할까? 무신론자인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서양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에 반하는 행위로 매우 반사회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곤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종교생활의 장점들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에 이르러 종교의 위상이 좁아지고 미래학자들은 미래에는 종교가 일종의 취미활동으로 남을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종교는 우리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어떤 역활을 수행했고, 인간은 종교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를 통해 종교가 가진 순기능들을 찾아내 종교와 무방하게 그것들은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한 다.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종교를 비난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장정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자는 실리적인 입장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종교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을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런 관점은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라고 본다. 우선 저자는 사회의 개인화와 인간관계의 단절로 인한 공통체 의식의 상실과 도덕적 가치관의 회복을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본디 종교가 개개인의 믿음의 산물인 동시에 공동제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경험은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불교나 일본의 다도와 같은 자기 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책은 교리가 없는 지혜,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관점, 미술, 건축, 제도로 나누어 종교를 바라본다. 책에서 다루는 열가지 항목들은 대부분 우리 문화의 대부분의 산물들이다. 결국 종교 역시 인간 문화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점에서 신앙과 종교를 구분짓는 것도 필요해보인다.) 종교를 신앙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종교의 순기능뿐 아니라 우리가 종교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책은 종교서적이라기 보다는 인문, 역사서에 가깝다.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거나 종교가 우리에게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 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모두 유용한 책이라고 본다. 가독성이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한 장 한장 관심있는 주제들을 찾아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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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로서 종교의 장점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책에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영어를 단어 그대로 직역을 해 놓으신 건지,
한글 문맥상에서 문장의 의미가 전혀 전달이 안됩니다.
참 안타깝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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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철학자라고 불리는 알랭드 보통의 책들을 좋아합니다. 철학에 관심은 있지만 어려움을 느끼는 저로서는 대중 철학, 일상에서 발견하는 생활의 철학을 이야기 하는 알랭드 보통의 책이 기호에 맞거든요. 비록 그의 책을 천천히 읽어야 이해를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요. 알랭드 보통은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나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저하고 비슷한 면이어서 더 호감이 가네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를 열심히 다녔으나 교회에 환멸을 느껴서 지금은 무신론자거든요. 사실 따지고 보자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말은 말이 안되는 말이죠. 술마시고 운전은 했으나 음주운전은 아닌 자를 위한 안전운전처럼.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해석은 문학적 아이러니라는 것을 설명 안해도 모두 아실것이고, 이 제목은 바로 신은 없다고 믿지만 종교를 믿는, 즉 종교의 장점들을 인간의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많은 비극을 낳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등 중동산 일신교들로 인한 생명의 희생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종교인과 신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죠. 철학이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삶에 많은 교훈을 주듯이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종교철학의 관점에서만 종교를 바라보는, 철학자 다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몇몇의 성인이 행한 철학적 행로에 더해 수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노하우가 더해져 값진 지혜를 만들어 내온 것도 역시 종교아니겠습니까?
허나 지금의 종교는 어떻습니까? 정말 취해야할 본질은 취하지 않고 표면적인 것, 종교집단 자체의 이권과 개인의 구원만 따지고 있질 않습니까?
종교와 자본이 더해져 종교의 진리가 아닌 상품화된 가치를 판매하는 잡상인 내지 싸구려 영업사원으로 전락하고 내세의 삶을 판매하는 종교지도자, 그것에 현혹되 정작 중요한 가르침은 따르지 않고 양심과 죄를 몇푼의 헌금으로 탕감하려는 깊이 없는 신자들. 그것에 의해 발전되어가는 권력화 되가는 종교. 대한민국의 대형교회와 불교의 현실 아닙니까? 그렇지 않은 종교인들도 물론 있지만 내부의 이런 문제들을 비판하는 종교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부의 암적인 것을 방관만 하면서 사람들이 종교를 비판하면 '다 그런것은 아니다'라는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변명을 전자나 후자 모두 애용하고 있다는 거죠.
제가 무신론자라서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들도 한번 읽어보세요. 비록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쓴것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의 본질과 장점들을 종교인들도 참고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에 활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교를 반대하는 서적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신앙을 돈독히 하는 계기를 종교인이 아닌 제 3자의 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타적인 것은 모순이 많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볼게 아니라 거슬리는 것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왜 비판을 하는지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본다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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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과 독단을 버리고 타인의 의견에 관용의 자세를 취하는 게 현대인이 집요하게 요구받는 미덕이다. 평소 유머를 섞어가면서도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알랭 드 보통 책을 좋아했기에 나도 관용을 가지고 읽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이 책을 고민 없이 주문했다. 2000년대를 사는 서양 무신론자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책을 펴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당혹스러웠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가 비꼬기 위한 유머인지, 진지하게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저자는 진지하다. 그는 무신론자도 종교가 주는 좋은 점들을 '취사선택'해서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구분법에 따라 유신론자인 나는 세속과 종교에 양다리를 걸치고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 근본 원인을 알 수 없을 불안감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노력이 좀 불쌍했다.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읽으면서 그가 주장하는 방향은 이미 무신론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리뷰에서 썼듯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말은 이미 모순처럼 반대되는 두 개념이 결합한 단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가 설득력 있고 재미있었다. 특히 옛날 종교에서 인간이 얻었던 좋은 점들을 현대 세속으로 끌어와 사진을 합성하서 적용해본 작업이 재미있었다. 보통의 책을 읽을 때마다 재미있는 지점인데 항상 논문처럼 진지해서 웃겼다.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공동체적 식당을 만든다든지, 자기계발적인 대학을 만든다든지, 세속적 영웅들을 성인처럼 만들어 그들의 동상을 세운 박물관을 만든다든지, 다도나 유대인의 목욕 의식을 세속적으로 적용하거나 심리치료를 일종의 브랜드화 한다든지 하는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거꾸로 생각했을 때 미국에서 메가처치들이 자기계발적인 설교를 하고 카페와 함께 교회를 운영하고 각종 문화사업을 하면서 종종 본질을 흐뜨러뜨리는 행태와 비슷해보였다. 메가처지의 '경영법'이 현대 사회에서 먹혔듯, 아마 보통이 주장하는 바에서 통찰을 얻고 어떤 이는 이미 움직이고 있을지도.
보통의 책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여행, 예술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예쑬, 건축에 각각 한 장을 할애한다. 목차를 살펴보면 종교 이야기를 하는 책에서 진, 선, 미, 성을 다 만날 수 있다. 그 네 분야를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의 삶 안에 혼재되어 있는 정신적 가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성'으로 취급하여 아름다움 자체가 인간을 성스럽게 초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숭고한 아름다움이 인간이 신에 가까이 가도록 돕거나 우리가 더 중요하게 여겨야할 가치 가까이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는 보통의 주장에 동의한다. 아래 플로티노스 주장에서 볼 수 있듯 미는 선을 표상한다. 미와 추는 (윤리적 가치와 연관된) 쾌, 불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작품이나 건축물을 통해 인간은 윤리적 측면에서 영향을 받는다. "가톨릭이 아름다움을 존경하게 된 근거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 플로티노스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간다. 3세기에 살았던 이 철학자는 아름다움과 선의 명백한 연관 관계에 대해서 논증했다. 플로티노스가 보기에는 주위 환경의 성격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게으르게, 또는 부도덕하게, 또는 방종하게 "매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사랑, 신뢰, 지성, 자비, 정의 같은 미덕을 암시하고, 우리를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선의 물질적인 버전이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만약 우리가 아름다운 꽃이나 기둥이나 의자에 대해서 공부한다면, 우리는 그런 대상 속에서 어떤 특성들을, 곧 도덕적 성질과 직접 비교되고, 우리의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마음 속에서 이런 자질들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아가서 플로티노스의 주장은 우리가 추함을 얼마만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데에 기여했다. 추함은 단순히 불운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악함의 부분집합으로 다시 범주화되었다. 추한 건물은 윤리적 수준에서 우리에게 불쾌함을 준다는 것이었다. 사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건물에 대해서도 잔인하다, 냉소적이다, 자기만족적이다, 감상적이다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우리는 나쁜 의도를 가진 지인으로부터 악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는 것처럼 건물로부터도 악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양쪽 모두 우리의 가장 불길한 측면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 양쪽 모두 우리가 나쁘게 행동하도록 미묘하게 조장했다." 270-271쪽.
아무튼 이 책은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적인 서양 문명 속에서 자랐고, 영혼과 명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각종 종교에 대해 공부한 보통이 다양한 종교들을 조망하면서 쓴 책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재미있는 독서였다. 책 전체는 무신론자들이 인격신의 도움이나 종교적 제도를 누리지 않고도 세속적으로 종교가 주는 좋은 점들만을 취할 수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안은 인간 내면에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합법적으로 해소해보려는 노력이다. 종교를 가진 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100% 완벽하게 해소될 수 없는 노력 같아보이기는 하지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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