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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방법이 없었던 70여년전 분단건국..
"피할 방법이 없었던 70여년전 분단건국.." 내용보기
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쓰는 해방일기는 이제 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1945년 8월 해방 전후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년 8월까지, 해방 후 3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총 10권의 책에 일기형식으로 담겠다고 한 그는, 이 책에서 1948년 1월부터 4월말까지를 담고 있다. 그가 약속한 해방일기가 딱 1권만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19
"피할 방법이 없었던 70여년전 분단건국.." 내용보기

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쓰는 해방일기는 이제 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1945 8월 해방 전후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 8월까지, 해방 후 3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총 10권의 책에 일기형식으로 담겠다고 한 그는, 이 책에서 1948 1월부터 4월말까지를 담고 있다. 그가 약속한 해방일기가 딱 1권만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1947년 하반기로 넘어오면서 미국은 조선문제를 미소공위가 아닌, 자신들이 확실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엔으로 옮기는 것을 확정했고, 그에 따라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남북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위원회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결의 하였다. 이어서 1947 11, 미국이 제안한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유엔총회에서 가결되었다. 이는 미국이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 없이 총선거를 치르기 위한 고육책으로, 소련과의 타협대신 조정이 가능한 유엔총회로 조선문제를 가져간 것으로 이남만이라도 확실한 자기세력권 안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서 철수한 소련의 대응방식 역시 이북만이라도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소련도 내심으로는 분단건국을 바라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과 소련이 조선문제에 있어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들기 충분하다.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 1월 초, 유엔조선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왔다. 단정수립을 목표로 한 미국은 이를 호도하기 위해 실현가능성 없는 남북총선거를 선전했고, 국내우익세력도 덩달아 이에 동조하면서 단정수립을 기정사실화 하고 나섰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단정추진세력은 이들 유엔조선위원단을 칙사처럼 받들었고, 이들의 이북지역활동은 소련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조사활동을 끝내고 그 동안의 활동결과를 유엔소총회에 보고하자, 미국은 가능지역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제안하고 226일 마침내 유엔소총회는 이를 가결한다.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의 막이 오른 것이다.

 

해방 후, 조선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세력은 김구, 이승만, 한민당의 세 갈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탁통치 반대와 좌익을 극도로 배척하는 극우라는 점이었으나, 민족주의 이념을 지키는 정상적인 극우는 김구뿐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연대를 목표로 전략적 득실에 따라 입장을 선택한 김구의 행보는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 했지만, 1947 2 10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 함' 이란 성명을 발표로 단정반대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구는 김규식과 연합하여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건국을 주창한다. 그는 북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한을 보내 협상제의를 하고, 마침내 419일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된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 즉 이남의 중도파가 생각하는 방안과 이북의 지도부가 원하는 것은 서로 달랐다. 이남의 협상파들은 통일건국의 희망을 되살리는 것 단 한가지 목표이었지만, 이북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통일건국이 되지 않더라도 이남에 수립될 정부의 명분을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처럼 1948 4월은 유엔소총회 결의를 기점으로 시작된 가능지역 선거추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고, 이에 맞선 남북협상이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그런가 하면 미군정에 대한 저항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제주 4.3항쟁은 이러한 미군정의 모순과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좌익의 우익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무고한 양민학살과 고문치사에 의한 살인에 분노한, 제주인들의 미군정과 육지인에 대한 항쟁이었다.

 

그러나 단정추진세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준비에 들어갔다. 선거등록기간 중 유권자의 92퍼센트 가량이 등록을 마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여론협회의 추정에 의하면 이 중 자발적 등록은 7퍼센트 미만이었다고 한다. 또한 조병옥은 모든 남성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향보단을 경찰의 지휘아래 두겠다며 5.10선거를 앞두고 조직한다. 이들로 인해 이남은 무법천지가 되며, 결국 선거가 끝나자 해산하게 된다. 이처럼 이승만의 단정세력이 분단건국으로 매진한 것은 당시의 조선현실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단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위해서였고, 그리고 그가 욕심을 채울 때 덩달아 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를 떠 받든 결과였다.

 

이렇게 성립된 분단건국의 문제점은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미진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일이 자연스러운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나누어 건국되면서 결국 독재와 전쟁을 향해 치닫게 될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엔조선위원단의 입국은 분단, 독재 그리고 전쟁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디딘 것이라 볼 수 있다. 1948년의 조선은 남북에 각각 국가를 건립하는 일만 남겨둔 셈이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우리가 그 때의 일들을 살펴보는 까닭은 과거를 한탄하고,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알아가는 사실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그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얼마나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알아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분단건국이 완성되는 일만이 남았다. 김기협의 해방일기 마지막 권인 10권에서 그려질 내용이다.

k*****1 2015.01.24. 신고 공감 4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