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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 앤 짐>의 원작 소설을 만났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프랑스 영화가 난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라는 걸 말이다. 자유로운 영혼과 육체의 상관 관계는 무엇일까? 두 남자 줄과 짐의 우정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여인까지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그것이 여인의 선택이란 점이 핵심이다. 그녀가 줄을 사랑했고, 그 다음에는 짐을 사랑했다. 줄과 짐은 그녀가 그들 중 한 명을 사랑할 때 나머지 한 명은 둘의 사랑을 축복했다. 그래야만 그들 곁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로 만난 줄과 짐 그리고 두 남자의 공통분모 속에 있는 여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유롭게 연애하며 사랑을 나누고 여행을 다니며 젊음을 즐기는 그 모든 것이 청춘의 증거라면 그들은 영원한 청춘들이다. 여리고 아름다운 루시를 사랑하여 청혼했지만 거절당한 줄은 루시를 곁에 두고 싶어 친구인 짐과 루시가 결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루시는 두 남자들에게 우정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오직 바라보는 것만 가능한 예술품 같은 여인, 루시는 남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여인상 같다. 평생 자유만을 즐길 것 같은 예술가적인 줄이 원했던 건 결혼이었다. 결국 그는 그리스 여신의 미소를 닮은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가정에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건 짐이 카트린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서로 어긋났기 때문에 카트린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결과였다. 이후 전쟁으로 인해 연락이 끊긴 채 살아가던 짐은 줄의 편지를 통해 소식을 듣게 된다. 줄은 카트린과 두 딸을 낳아 살고 있었고, 짐을 그들의 집으로 초대한다. 놀랍게도 줄이 짐을 초대한 건 카트린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새로운 사랑이 필요한 여인이었다. 짐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카트린과 그것을 지켜보는 줄은 아무런 갈등없이 함께 지낸다. 줄은 카트린을 위해 이혼을 해주고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마치 수도승처럼 글만 쓰며 조용히 살아간다. 짐과 카트린은 두 사람의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하지만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고, 그 와중에 오해가 생겨 헤어진다. 다시 줄과 재혼한 카트린을 보고 짐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 질베르트에게 돌아간다. 카트린은 짐이 다른 여자를 만나면 질투하고 그에 대한 복수로 알베르, 해롤드 등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이 복수한 사실을 짐에게 말한다. 짐은 줄과 달리 크게 분노하고 질투한다. 카트린은 열정적인 사랑만큼이나 질투를 삶의 에너지처럼 분출시킨다. 카트린의 삶은 자유롭다기 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본능으로 늘 불안정해보인다. 자신을 현실에서 붙잡아 주는 남자인 줄과 사랑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남자인 짐 사이에서 위태롭게 외줄을 타는 것 같다. 짐은 오래된 연인 질베르트가 줄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카트린은 절대로 질베르트는 줄이 아니라고 말한다. 짐과 카트린의 사랑이 정말로 운명적 사랑이라면 왜 그들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굳이 결혼을 한 뒤에 두 사람의 아이를 낳으려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운명의 장난처럼 짐과 카트린의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지만 말이다. 카트린은 두 딸을 낳고도 모성애에 연연하는 엄마가 아니었던 것을 보면 아이를 갖고 싶은 짐을 위한 카트린의 노력이었던 것 같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이들의 삶을 전혀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데 계속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다. 한 번 펼쳐든 책은 순식간에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된다. 앙리 피에르 로셰는 자신의 첫 소설 <줄과 짐>을 일흔네 살에 출간하며 작가가 되었다. 이십대 때 지녔던 작가의 꿈을 일흔 넘은 나이에 이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인생의 연륜이 농축되어 들려준 이야기라서 더욱 실감나게 몰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인생을 어떤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그냥 묵묵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줄과 짐의 만남은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 100년 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삶에서 연애와 사랑은 자유분방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까? 삼각관계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를 질투하지 않고 공평하게 사랑을 나눈다는 게 현실에서 가능할까? 놀라운 이국의 풍경을 바라보듯 치열한 사랑의 끝을 본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보다 더 솔직하고 적나라한 삶이 또 있을까. 다리 위를 신나게 달리는 세 사람. 원래 원서에는 여주인공 이름이 카트인데 워낙 영화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 영화 속 이름인 카트린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줄 + 짐 = 카트린?
"내가 꿈꾼 사랑은 아닐세." 짐이 물었다. "그런 사랑이 존재하기는 할까?" "물론일세. 루시에 대한 내 감정이 있잖나." '그건 자네가 그녀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짐은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 줄이 이어 말했다. "게다가 내가 날 잘 아는 데, 난 아마 어떤 여자가 날 사랑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 날 사랑한다는 건 타락했다거나 타협했다는 걸 의미하니까……. 루시는 용케 빠져 나갔지. 그녀는 나의 아주 작은 부분도 받아들이지 않네." 짐이 말했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네." 줄이 대답했다. "응, 생각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 "그렇다면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일일세. 어떤 의미로는 조금은 순교 같은 거니까. 그게 바로 자네 인생의 핵심일세. 혹시 루시가 자네를 사랑한다면 ……" 줄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루시가 아닐 걸세." (44-45p) 카트린은 만사를 축제로 만들었다. ...... "삶은 휴가의 연속이어야 해요." (111p) 어느 날, 카트린은 아픈 큰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말했다. "제 외동딸이에요, 선생님." 깜짝 놀란 큰딸이 동생을 언급했고, 의사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카트린이 대답했다. "그 애는 제 둘째 외동딸이에요." 아마 연인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리라. (138-139p) 카트린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순간 동안만 사랑하는 것 같아." 이 순간은 늘 다시 찾아들었다. "사랑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형벌이야." 줄이 말했다. (284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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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애욕과 본능이 오로지 자신의 형질을 자연계 속에 보다 널리 퍼뜨리기 위한 데에만 그 목적이 있다면, 이토록 복잡한 감정의 변화와 격동, 설렘과 아픔이 있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구애가 실패하면 다른 이성을 모색하면 되고, 거절의 두려움 때문에 접근을 주저할 까닭이 없습니다. 결합에 성공하여 자식을 보면 관계의 사명은 완수되었으니, 상대가 지겨워지면(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무엇이 지겨워지는 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럽습니다) 언제든 유대를 해소하고 다른 방향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뭔가 부끄러워지고, 타락했다는 자괴감, 죄책감을 떨치기 어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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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현실과 환상, 이성과 감성, 허가와 금기의 사이를 헤매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과 사랑해서는 안되는 대상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할 수 있는 행동과 해서는 안되는 행동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왜 현실에서 우리는 그 기준에 복종하고 살고 있을까? 우리는 문학의 주인공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여러 명의 애인을 두었지만,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목숨을 걸며 투쟁하는 그런 삶을. 아마 선뜻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나의 현실과 다른 문학 속 주인공의 삶의 들여다보며 나라면 어떠했을까 상상하며 색다른 기분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나라면 전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문학에서 만나는 그들처럼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과 이해의 지평은 조금은 넓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줄과 짐>은 단지 그것이 문학작품 속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작가인 알리 피에르 로셰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 줄은 <분노하라>의 작가인 스테판 에셀의 아버지 프란츠 에셀이며 에셀의 어머니인 엘렌 에셀이 줄과 결혼하고도 짐과 사랑을 나누는 카트린의 실제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1907년 파리에서 만난 독일인 줄과 프랑스인 짐은 우정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관계를 넘나들며(내가 읽기에 이 둘 사이의 애정이 더욱 애절해 보였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여자들을 두고 서로 공유하듯 사랑한다. 현실의 우리들은 부끄럽고 두려워 차마 꺼내놓지 못하는 금기된 사랑의 욕망이 이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여주인공 카트린은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너무나 사랑하는 여인(그녀는 고대 그리스의 미소를 지닌 여자로 거칠고 도발적인 매력을 지녔다)을 잃을까 두려워 그녀와 친구의 사랑을 오히려 부추기는 줄도 친구와의 우정도 그리고 매력적인 여인과의 사랑도 모두 함께 중요한 짐도 그 둘 사이에서 묘하게 살아가는 카트린도 너무나 독특해서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그들의 캐릭터가 머릿속에 남아있다. 이들의 경계를 넘는 독특한 사랑의 방식이 스테판 에셀이라는 인류의 생각의 한계를 깨는 위대한 사상가를 낳게 했을지도 모른다. -책 속 밑줄긋기-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거야. 영향을 끼치려고 해선 안 돼.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그가 변한다면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닌 거니까. 감화 건 강요 건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단념하는 게 좋아." "우리는 정말이지 순간 동안만 사랑하는 것 같아." 이 순간은 늘 다시 찾아들었다. "사랑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형벌이야." 줄이 말했다. 계약서도 맹세도 없이 오직 사랑에 기대어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의혹의 바람이 불어오면 그대로 허공으로 추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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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로 먼저 만난 경우 원작 소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잘 못할 때가 있다.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영화 광고에 원작 소설이 들어가겠지만 오래전에 출간된 소설이거나 대중에게 잘 알려진 소설이 아니면 그냥 조그맣게 표시될 뿐이다. 어떤 영화는 원작보다 더 유명해져서 원작 소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줄과 짐>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한때 영화를 미친 듯이 본 적이 있는데 이때도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봤지만 솔직히 보면서 많이 졸았다. 그러니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영화의 장면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줄과 짐이란 이름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인지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앞부분에 이 둘을 헷갈려했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를 정확히 몰라 그들의 연애생활이 특이하고 낯설게 다가왔다. 짧은 문장은 읽기는 편했지만 이야기에 몰입하는데 순간적으로 방해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체인데도. 하지만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역시 이 둘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이다. 자유연애와 연인이 뒤바뀌는데도 둘 사이의 우정이 전혀 흔들림이 없어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초반에 줄의 연애 상대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올 때는 ‘뭐지’하는 마음이 먼저 들 정도였다.
영화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인지 처음에는 여자 주인공을 루시로 생각했다. 줄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고, 청혼을 했다가 실패했고, 짐과 잘 되어 그녀를 늘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줄의 경우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고, 루시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면서 둘의 관계는 평행선을 유지한다. 이때 짐이 루시와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줄이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삶은 변수가 늘 생긴다. 바로 카트린의 등장이다. 독일에서 놀러 온 세 명의 여자 중 한 명인 그녀가 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둘은 독일로 돌아가 결혼한다. 그리고 제1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줄과 짐의 연락은 잠시 끊어진다.
전쟁 후 다시 줄과 짐이 만났을 때 짐이 사랑에 빠지는 인물은 카드린이다. 이때 이미 줄과 카트린의 관계는 단순히 두 아이의 아빠라는 것과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접점이 없던 시기다. 줄의 엄마 때문에 그녀는 결혼 전에도 외도를 하고, 전쟁 전후에도 다양한 연애를 한다. 줄은 그냥 지켜볼 뿐이다. 왜 이런 관계를 유지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짐이 다시 카트린에게 반하고 이 둘이 연인 관계로 이어지는 과정을 옆에서 줄이 지켜본다. 오히려 이혼한 후 이 둘이 결혼하는 것을 바랄 정도다. 이 심리 상태와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나의 의식이 그만큼 넓지 못하다. 그냥 지켜볼 뿐이다.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항상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그 지역에서 다른 연인을 만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이 기묘한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이들의 삶을 그냥 그대로 볼 뿐이다. 감정과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도 있고, 현실이 이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게 한다. 줄과 짐과 카트린의 삼각관계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짐과 카트린의 관계로 변하고, 카트린의 좀더 자유로운 연애가 짐을 불안하게 할 뿐이다. 어느 순간에는 카트린의 분노와 질투가 폭발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 순간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게 간단하게 묘사한다. 자전적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작가는 74세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첫 소설이다. 노년에 젊을 때의 욕망과 관계를 건조한 단문으로 표현했다. 바로 여기에 내가 이 소설에 깊게 빠지지 못한 이유가 있다. 노년에 과거의 관계와 욕망을 경험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먼 곳에서 지켜보는 마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감정과 욕망의 파편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지만 섬세하고 깊게 파고들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여운을 남길 것 같다. 영화를 다시 본다면 졸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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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피에르 로셰가 일흔넷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파격적 관계를 그리는 이 작품은 1961년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동명 영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원작에 깊은 감명을 받은 트뤼포는 영화 대사나 내레이션에 로셰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원작에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물 구조를 줄과 짐, 카트린, 알베르로 압축한 정도가 각색 내용의 전부였다. 이십대의 젊은 감독 트뤼포는 영화잡지 '아르(Arts)'에서《줄과 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현대소설 중 하나인 앙리 피에르 로셰의 <줄과 짐>은 끊임없이 재고되는 새롭고 미학적인 도덕 덕분에 평생토록 거의 충돌 없이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는 두 친구와 그들의 공통된 여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짐, 루시가 날 원하지 않네. 이대로 그녀를 잃을까 봐, 그녀가 내 인생에서 완전히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 짐, 그녀를 사랑하게, 그녀와 결혼해, 내가 그녀를 계속 볼 수 있도록 해주게. (본문 중에서)
영화에서는 줄과 짐이 공유한 연인을 '카트린' 하나로 압축하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루시를 포함해 여러 명의 연인들이 등장한다. 줄과 짐은 연인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규칙을 창조한다. 기존의 법칙이 우세하는 세계에서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는 이들의 사랑은 매순간이 모험이고 일탈이 된다.
카트린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순간 동안만 사랑하는 것 같아." 이 순간은 늘 다시 찾아들었다. "사랑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형벌이야." 줄이 말했다. (본문 중에서)
이성과 본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젊은 연인들을 통해 《줄과 짐》은 삶의 이중성과 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작고 통통한 독일인 줄"과 "크고 호리호리한 프랑스인 짐", 성녀 같은 루시와 마녀 같은 카트린 등 인물들의 대조적인 면모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카트린'은 여성의 이중성을 가감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카트린에게는 연인들 각각이 별개의 세계였다. 이 사람과 벌어지는 일은 나머지 사람들과 무관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그들의 여자를 질투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이 세계의 규칙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자기 안의 이중성을 수용하는 행위이다. 로셰는 이 소설에서 모순적 인간성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한복판에 내던져진 인물들의 투쟁과 좌절을 시적인 문장으로 담아낸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사랑 방식은 보통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정색(正色) 아래 감춰진 욕망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삶의 근원에 도전한 거야. 그걸 전투의 무기로 삼았고. 그래서 삶이 우리를 불임으로 만들고 자기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한 거야. (본문 중에서)
놀랍게도 이 소설은 로셰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줄과 연인을 공유한 소설 속 인물 짐이 로셰의 분신이다. 일흔이 넘은 로셰가 젊은 시절의 연애사를 소설에 담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결코 한데 묶일 수 없는 것들이 하나의 세계에 붙들려 있다는 삶의 모순, 거기서 빚어지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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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 조세핀 하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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