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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윤승중 건축전 도슨팅 준비를 하면서 읽은 책이다. 윤승중 선생님의 일생과 한국 현대 건축의 발전사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 담겨있다. 윤승중 선생님 같이 195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세대는 한국의 전후 사회체제가 배출한 첫 번째 세대이며 지향점의 혼란 없이 이후 이어지는 고도 경제 성장기에 새로운 체제의 리더로서 왕성하고 풍요로운 건축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다. 이들은 현재 한국 건축계의 바탕을 만든 사람들인데, 이들의 선두에 서 왔던 건축가 중 한 명이 윤승중 선생님이다. 1937년에 출생하여 1960년 봄에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설계에 종사해온 한국 현대 건축의 생생한 목격자인 셈이다. 특히 1960년대부터는 한국 경제가 도약을 꾀한 시기로서 그에 따라 새로운 장르와 기능의 건축물들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시류를 타고 윤승중 선생님은 국회의사당 설계사무소, 김수근건축연구소,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환경계획연구소, 원도시건축연구소, (주)원도시건축과 같은 설계 팀을 이끌면서 새로운 장르와 기능의 건축물들에 도전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김중업 선생님, 이천승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 등과 같은 선배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총 10회에 걸친 구술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선생님의 출생부터 시간 순서로 채록되어 있다. 서울 중구 다동 103번지에서 태어난 윤승중 선생님은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도 사업을 하셨고, 또 외숙께서도 금강제약사라는 제약회사를 하셨기에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았다는 말이다. 또한 윤승중 선생님이 살던 곳이 서울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근대건축 초기 건물들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곳이 바로 놀이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특히 태평양 전쟁 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실제로 전쟁 경험을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이 시가전 준비로 너무 인구가 많으면 안되니까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시골로 피신하라고 소개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잠시 황해도 배천으로 가 있다가 서울로 돌아와 서울중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특히 윤승중 선생님이 서울에 다시 올라왔을 때 이사를 간 가회동 집 안채는 전창일 선생님이, 양옥 별채는 박길룡 선생님이 설계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좋아하게 되어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 시절에도 그런 음악을 찾아 들었다고 한다. 또한 부산 피난 시절 피난지 건너편에 있던 미국 공보원 도서실에서 건축 관련 책이나 잡지 등을 자주 접했다고 한다. 특히 윤승중 선생님의 집에 건축 관련 책이 굉장히 많았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건축과 관련 없으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구상해 내 집을 짓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건축 책과 잡지 등을 집에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건축을 접했고 건축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고 3때에는 서울대에서 제일 좋은 과에 가야 한다는 욕심이 생겨서 화공과로 진학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서울대에서는 지원한 과를 다 없애고 1학년 때 기초과목을 공부하게 한 다음 2학년 올라가면서 과를 정하도록 학칙이 바뀌어서 1년 정도 기초 과목들을 수강하며 마음을 건축으로 정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공대 입학성적이 3등 안에 들어 한 달에 만원씩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 서울 공대 건축과에는 이균상 교수님께서 학과장을 하고 계셨고, 김형걸, 김희춘, 윤장섭, 윤정섭, 김정수 교수님과 함께 이광노 교수님이 막내로 계셨다고 한다. 이 당시에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건축 교육 중 가장 부족한 게 건축 이론의 발전과정을 배우는 건축사 교육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따로 공부서클을 만들었고, 거기서 루이스 설리반, 브루노 타우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알바 알토를 나눠서 공부했다고 한다. 자신은 이 사람들 중 미스를 맡아 스터디 자료를 준비했다고 한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김중업 선생님 사무실에 실습하러 갔으나 자리가 없다고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방학 때부터 시작해 대법원 청사 공모 현상설계에 1등으로 당선되었고, 실제 30년 뒤에 진짜 사이트가 있는 집을 짓는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1959년도에는 국회의사당 컴페티션 때문에 다들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건축과가 모두 휴강을 했다고 한다. 졸업 시즌에 이천승 선생님이 다른 일을 줄 테니 일자리를 찾지 말라고 해서 졸업 후 좀 기다렸다고 한다. 한편으로 건축전문 잡지를 제대로 만들어보자 해서 시작한 게 바로 “현대건축”이라는 잡지였다고 한다. 졸업 후 5월인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아 간 곳이 바로 한국 국회의사당 설계사무소였다고 한다. 이 사무소는 당선작이 결정된 다음에 본격적으로 설계 용역을 하고 설계를 시작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1960년 5월쯤이었는데 박춘명 선생님이 대표로 취임했고, 당선작을 낸 팀은 다들 일본 동경대 학생들과 대학원생의 학연이 있었다고 한다. 현상설계안을 발전시켜 기본설계 안을 만들어가야 했는데 엄청난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한다. 전에 주어진 프로그램보다 응모 안이 50퍼센트 정도 규모가 더 컸고, 너무 일본풍이라 생각해 많이 고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천승 선생님의 다른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설계 도면을 만들어가면 그것을 검토해서 승인해주는 절차를 진행하는 국회 건축분과의 촉탁직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5.16 쿠테다가 일어나 그 날로 업무가 정지 되고 퇴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외숙께서 길음 시장 터에 가진 땅을 미래 지향적인 시장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추진하시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김수근 선생님을 소개시켜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시장 사람들의 반대로 기본설계까지만 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 후에 김수근 선생님이 따로 불러서 자신의 사무실에서 설계 치프를 하라고 해서 그 때부터 만 9년 동안 거기서 일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김수근 선생님에 대한 비판들에 나름대로 맞대응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가 바로 한국의 현대건축 또는 근대건축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김수근 선생님이 너무 일본적이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김수근 선생님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요시무라 준조와 밀접한 관계였지만, 일본 건축에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요시무라 준조의 철저한 완벽성을 칭찬했다고 한다. 아주 섬세한 디자인으로 명확한 설계를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훨씬 일찍 서양건축을 받아들였고, 그 때 한창 세계에 대해서 일본 건축이 발언하고 주장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하거나 매스를 만들어가는 방법 등을 활용해 일본 목조건축 기법들을 콘크리트로 재현시키는 경향과 같은 이런 일본 건축들이 한국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김수근 선생님 자신은 요시무라 준조를 통해 레이몬드와 연결되고, 레이몬드는 라이트와 연결되고 있기에 자신의 뿌리는 아마 라이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김수근 선생님의 작품들은 코르뷔지에의 어떤 시각적인 이미지에 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자기 건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감각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윤승중 선생님은 김수근 선생님 사무실에서 그 분이 스케치해주시는 걸 실제로 지을 수 있게끔 실현될 때까지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사무실 전체의 콘서트 마스터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굉장히 수련이 되었고 내공이 빨리 쌓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서로 굉장히 적대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들조차도 같이 모여 무엇인가를 만드는데, 거기에는 단게 겐조 같은 중심 인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단게 겐조도 훌륭하지만 그 본인보다는 팀으로 집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기에 김수근 선생님을 단게 겐조에 대입하고 김수근 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수근 선생님 산하 팀에다가 주변의 좋은 건축가들을 자꾸 초대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였던 분들이 유걸, 김원, 공일곤, 김환, 한성일, 이런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김수근 선생님 사무실 시절 만든 건축 설계들을 하나씩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가장 먼저 워커힐 설계 참여가 언급되고 있다. 김수근 선생님과 일본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김종필과의 인연 때문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워커힐 건설은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이 일본이나 하와이로 휴가를 가지 말고 우리나라에 와서 외화를 쓰고 가라는 목적을 가졌다고 한다. 대여섯명의 건축가가 함께 했는데, 김수근 선생님은 더글라스 호텔을 설계했다고 한다. 이 건축 프로젝트는 혁명 주체세력들이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쓸 수 없었으니 군에서 여러 특혜를 주었기에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국 현대건축에 굉장히 크게 기여했던 건축이라 평한다. 건축가들이 제대로 대접 받아서 자기 소신대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면서 말이다. 남산 서울 음악당 프로젝트도 도중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았지만 그게 보기 안 좋고 하니까 국제적인 수준의 음악당을 만들어보자 해서 김종필 씨가 계획안을 주문했다고 한다. 콘서트홀이었기에 대홀, 조그만 챔버, 음악도서관 등 세 개로 구성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에 김수근 선생님께서 주머니 모양의 스케치를 자신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런 스케치를 바탕으로 여러 안을 만들었는데, 자신은 어떤 자연 법칙이 있고 원리가 있고 질서가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규칙을 생각하며 세 가지 원을 각도를 바꿔가며 어떤 규칙을 주어 도안을 했다고 한다. 이 안을 본 김종필 씨가 좋다고 했는데, 그 뒤에 진행된 것은 없었다고 한다. 울산 공업도시 설계 컴페티션에도 참여했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한다. 김수근 선생님은 건축이 전공이었지만 대학원에서는 도시 계획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했고, 특히 다카야마 연구실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는데, 일본도 한참 전후에 발전하고 개방하고 그럴 때라 다카야마 연구실이 굉장히 일거리가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 배운 것들을 김수근 선생님이 도시계획에 많이 써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자유센터 건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이 소위 양극체제의 상당한 희생자이기에 아세아 반공연맹의 본부와 연수원을 지으려고 혁명주체세력이 기획한 것인데, 실제 거기로부터 강요나 간섭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기능에 비해 과다하게 규모가 컸지만, 그런 명분 때문에 지어졌기 때문에 이해할 만 한 것이라 말한다.
또한 남산에 짓기로 한 시립도서관 설계안도 내놓았다고 한다. 접근성 때문에 다운타운에 있어야 할 도서관을 남산에 짓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설계안을 제출했으며, 도서관 역할을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서구의 도서관 연구를 통해 어떤 책을 볼 지 지도해주는 그런 기능이 도서관 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람실이 있고 서고가 있고 그 사이에다가 라이브러리안 데스크를 쭉 둔 뒤 쉘을 씌웠다고 한다. 자신은 건축이라는 건 자꾸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여러 시도를 했다고 말한다. 우석대학 병원 게이트 빌딩은 게이트로 들어가는 벽면에 세라믹 조각을 해서 도시에 대해 뭔가 기여하는 그런 의미로 활용했다고 한다. 노출 콘크리트를 통해 정교하게 디테일을 만들고 거리의 오브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빌딩이란 것이다. 북창동 사우나탕도 한참 고민 중에 갑자기 자유로운 동그란 선들을 그리다 보니 몇 개의 커브 선이 튀어나오고 그 사이에 큰 욕탕과 작은 욕탕을 배치했는데, 이런 설계를 재미있어 하며 잘 살려보라는 김수근 선생님 말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메타볼리즘의 영향이 있었는지 몰라도 자꾸 변화할 수 있고, 어떤 기본적인 틀이나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거기에다가 자꾸 더해서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처음에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김수근 선생님과 충돌이 있었던 부분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김수근 선생님은 틀이 한번 정해지고 나면 그 안에서 주어진 필요한 공간들을 잘 쪼개 넣는 것이라고 생각하신 반면, 자신은 거기에다가 어떤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어떤 프로젝트를 위해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거기에 맞춰서 공간들이 필요하고, 공간들이 조직이 되고, 형태가 생기고, 상황으로부터 출발해서 형태까지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김수근 선생님과 함께 한 시절에 했던 주요 건물들 중에는 부여박물관, 신일중고등학교 교사 컴페티션, 엑스포67 한국관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것들을 하나씩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부여박물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에 박물관 측 요구가 거의 없었고 어떤 것들이 컬렉션 되고 어떤 것들을 들일지 정보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땅이 꽤 넓었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사원 배치라든지 밖에서부터 계단으로 올라가서 소위 일주문을 거쳐서 본관까지 가는 과정을 생각했다고 한다. 숲은 아니고 평지였지만 직선으로 가지 않고 구부려서 가면서 소위 오브제를 만들고 대문에 들어서면 본관이 보이는 게 아니라 본관이 비껴나고, 가운데 전시 마당을 만드는 이런 배치 안을 만들어 일단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자신은 공공건축에서 전체를 압축해서 하나를 보여주는 메이저 스페이스를 "당"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키워드로 삼았는데, 처음에 들어가면 이런 큰 스페이스를 만나고 다시 진입 과정을 거쳐서 전시하는 갤러리가 나오는 프로세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큰 공간을 만든 것은 그 실내에다가 석탑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앞으로 전시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일단 김수근 선생님이 주신 계획에 그걸로 배치를 한 것이라 한다.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것이 시메트리도 아니고 카운터포인트 같은 대위적인 스페이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지붕 밑에다 중앙계단을 만드는데, 계단이 지붕의 머리에 닿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붕에 구멍을 내자고해서 조그마한 창을 내었다고 한다. 이것과 함께 마지막에 끝나지 않고 튀어 올라나간 지붕 모양, 옥외마당으로 나가는 큰 대문, 이렇게 세 가지가 화근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문도 고민하다가 절에 있는 일주문처럼 두 개의 기둥 위에 양끝이 휘어져 올라간 콘크리트 지붕과 중간보, 이런 단순한 구조로 만들었는데, 앞의 계단과 결합해서 아래서 사진을 찍으면 일본 신사에서 신역과 속계를 구분하는 문인 도리이처럼 보이는 앵글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물관 부지가 원래 일본 사람들이 신사를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았던 곳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논란을 부추기게 되었다고 한다.
김중업 선생님이 부여박물관을 평하며 의도적으로 일본 신사를 디포메이션했다고 비하했고,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건축가 협회에서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직접 방문 후 결론 내린 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설계자가 일본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마 은연중에 일본풍이 드러난 것이라는 평이었다. 그래서 이후 좀 변형하라는 지시를 받아 몇 가지는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신일중고등학교 교사 컴페티션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잘 쓰신 육각형 조형언어를 썼지만 당선되지 않았고, 엑스포67 한국관은 문화전시로 컨셉을 바꿔 전시관 자체를 문화재가 되게 하자는 안을 내었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 목조 건물의 골격만 아주 추상화해서 만든 다음에 유리로 외벽을 만들자는 안을 내놓았는데,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금 더 한국적인 모티프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리를 쓰게 되면 전시를 할 벽이 없어지게 되어 나중에 불투명한 흰 벽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1966년 봄부터 시작하게 되는 기술공사 시절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1960년대 당시 미국에서 지원받은 충주비료공장 건설과정에서 엔지니어링 회사들의 고압적인 횡포로 피해를 많이 보았는데, 원조 중에 상당 부분을 그 사람들이 도로 가져가고 해서, 앞으로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거쳐서 그런 수준이 되려면 지금부터 엔지니어링에 대해서 준비해둘 필요가 있겠다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게 기술공사 설립이라 한다. 처음에 김수근 선생님 사무실 사람들은 기술공사로 편입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 회사는 토목이나 화공 등 엔지니어링 회사 아니냐면서 말이다. 한참 논란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김수근 선생님 말씀은 어떤 훌륭한 스타이든 공연하기 위해서는 무대가 필요한데, 그런 무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고 너희들이 도와줘야 되겠다, 그럼 나중에 10년 후, 20년 후에 너희들이 거기서 노래를 해라, 이런 식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사무실 사람들이 기술공사로 들어갔고, 윤승중 선생님은 도시계획부 부장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한 첫 번째 일이 바로 세운상가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수근 선생님이 서울 시장을 만나고 왔는데, 일제강점기 때 시내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 시가전을 치르기 위해서 버퍼존으로 소개시켜둔 폭 50미터, 길이 1킬로미터 땅에 해방 후 피난민들이 들어와서 판자촌으로 꽉 채우고 있기에 서울시에서 그 땅을 회수해서 활용하기 위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거기에 도로 기능하고 상업 기능을 겹쳐서 소위 페데스트리안 몰을 제안했는데, 당장 그려오라고 해서 그 과제를 자신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거리는 다른 블록보다 길어서 중간에 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당시 자동차와 보행의 분리가 전세계적 경향이라 보차분리의 방법으로 엘레베이티드 데크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 상업 기능만 가지고는 용적률을 높일 수 없으니까 하우징, 업무 기능까지 수용되어야 할 텐데, 그 때까지 종로3가만 하더라도 업무기능이 아니었기에 하우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 스케치에서 밑에 도로는 자동차를 위해서 쓰고 양쪽은 차가 다니고 가운데는 주차공간이며, 한 8미터쯤 위에다가 엘레베이티드 데크를 만들어서 거기가 메인 페데스트리안 레벨이 되는 것으로 했고, 일단 한번 종로에서 올라가면 쭉 걸어가면서 쇼핑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상업거리를 데크 위에 만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 거기가 1층이 되니까 위에 한 층하고 밑에 한 층은 2차 상업기능으로, 예를 들면 병원, 학원, 커피숍, 이런 커머셜 존이 되고, 5층 바닥에다 다시 또 인공 토지를 하나 만들어서 거기다 가드닝을 하고 거기서부터는 새로운 하우징을 짓는데, 그것이 전체적으로 너무 높아지면 안 되기 때문에 한 4층 정도로 하우징을 만들고, 블록과 블록을 건너가는 노드에 타워 같은 걸 세워서 도시적인 분위기의 오브젝트를 만들자는 설계안을 그려 냈다는 것이다. 마르세이유 유니데다비따시옹도 개념은 다르지만 복합적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참조했고, 좀 더 길게 보면 서울에 점점 인구가 늘어나고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이런 리니어한 블록들이 길게 늘어나면 그것이 하나의 도시가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은 전부 파괴된 것을 긴급 복구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도시가 아니었기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세포 조직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단 서울시가 땅만 내놓고 나머지는 업자들을 불러서 그들이 투자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시공에 들어가면서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설계안대로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페데스트리안 데크가 되려면 건물 간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청계천 고가도로가 위에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크로스가 되는 바람에 데크가 연속된다는 느낌이 상당히 사라졌으며, 건설사들끼리 비용부담 문제로 중간에 페데스트리안 데크가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일부러 8미터 높이로 올라가니까 그것이 결국 상가의 지붕이 되어 버렸고 일부러 가야 하는 곳이 되어서 이상한 뒷골목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 분양되고 나니 사업주체가 없어져 관리가 잘 안되었고, 결국 전국적인 전자상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도시 개발의 큰 원리 중에 하나가 소위 거점 개발이론인데, 도시를 개발시키는 과정에서 몇 군데다가 집중적으로 공공투자를 하면 그것이 거점이 되어 서로 간의 인력이 생겨 연결이 되고 전반적으로 퍼져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는 소규모 공장 등 도심에 있음직하지 않은 조그만 가게들이 꽉 차있는 그 곳에 투자를 해서 업그레이드 시켜 놓으면 주변에 영향을 주어서 쭉 확산될 것이라 기대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8층 높이의 이런 주거공간까지 생각한 것은 서울 도심이라는 게 적어도 그 정도의 볼륨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라 하는데, 결국 그 후에 주변이 너무 낙후했기 때문에 서울시에서 그 지역을 전부 재개발 지역으로 묶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확산이 일어나지 않고 주변이 끝까지 개발이 안 되는 바람에 독불장군처럼 된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좋은 컨셉으로 시작 되었지만 인프라 투자가 부족했고, 여러 가지 후속과정이 잘 안 일어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운상가가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아깝긴 하지만 한 10년쯤 지난 후에 제안했더라면 꽤 성공적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인식도 발전했고 그런 식의 수요도 생길 수 있었고, 10년쯤 지난 후에 롯데호텔 뒤쪽에 몰이 생겼는데, 거기 엘레베이티드 데크도 생기고 자본이 투입되어서 생활수준을 업그레이드 시켰다면서 말이다. 광릉에 지어진 KIST 설계에 뒤늦게 참여했던 것도 소개되고 있는데, 마스터플랜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다섯 개의 연구소와 본관 건물 중 본관 건물을 김수근 선생님이 실시설계 때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 고대 쪽 큰길로 나 있던 입구를 현재 남쪽 길로 바꾸는 등 마스터플랜에 있던 것과 다르게 바꾸었다고 한다.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 건축과 관련해서 벌어진 논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설계 공모 때 건물 자체가 한국식의 전통적인 방식이어야 한다고 아주 못을 박았고, 거기다가 우리나라의 우수한 고전 작품들이 많이 있으니까 몇 개를 조합해서 모방해도 좋다는 식의 단서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그걸 건축계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워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선례를 찾아보니 2차 세계대전 이전인 1936년에 일본의 도쿄 국립박물관이 그런 식으로 설계 경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건축계가 엄청나게 반대하고 그러니까 타협안을 낸 것이 당시 심사위원장으로 기획하고 추진하시던 정인국 선생님이 은밀하게 다른 안을 하나 설계해 그것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사실 그 안이 문제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 때까지만 해도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모든 것은 창작이어야 하고 추상적이어야 하지 어떤 전통적인 것들을 그대로 쓰는 것을 금했다는데, 그걸 깬 포스트모던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언급한다. 이어서 윤승중 선생님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이야기한 종합정부청사와 부산시청사 설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단 종합정부청사는 기술공사 이름으로 응모를 했고, 부산 시청사는 김수근 선생님의 양해를 받아서 밖에서 별도로 작업했다고 하는데, 그 두 가지를 통해서 앞으로 원도시에서 했던 여러 가지 작업들의 원칙들을 많이 주장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종합정부청사는 한국 최초로 2단계 컴페티션을 했다고 한다. 가운데 큰 오픈 스페이스도 그렇고, 전부 다 프리패브릭으로 해서 코어하고 기둥을 전부 다 슬라이딩 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해 본적 없는 것을 제안한 것인데, 영감을 얻은 건물은 그 당시 사리넨이 뉴욕에 지은 CBS빌딩이었다고 한다. 1미터 60센티 간격의 칼럼이 쭉 서있고 칼럼 속에 파이프가 있는데, 그 파이프를 계속 붙여가면서 콘크리트를 슬립 폼으로 쭉 올리는 구조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또한 메이저 스페이스란 것을 강조했는데, 윤승중 선생님이 주장하는 "당"이란 것이다. 일단 크다는 의미가 있고 중심이라는 뜻인데, 기능적인 것이 요구되는 스페이스에는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각자가 되기보다 하나에 집중해서 하나로 기억되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주 공간이라 칭하며 대표적인 경우로 교회당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과장된 스케일에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을 주는 "당"을 인상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실제로 "당"에서 보내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두 시간 밖에 안되고 다른 시간은 다른 스페이스에서 보낸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시청 같은 공공건축물을 보면 대부분 사무실인데, 사람들은 사무실로 기억하지 않고 시청하면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대상을 만들어주는 것을 "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공청사 가운데 그런 “당”을 만든 것은 실제로 1층 로비에서 사람들하고 만나기도 하고 그런 퍼블릭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만들어서 전체가 다 보이는 장소로 만든 것이라 언급한다. 한 개인으로 보면 관청은 집합으로 상당히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표하는 메이저 스페이스가 필요했다고도 설명한다. 부산시청사 응모는 김원, 김규오 씨와 함께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유걸과 변용 씨가 같이 삼주빌딩이라는 건물을 계획하고 있었고, 거기 삼주빌딩에서 사무실을 하나 내주어서 거기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2층이 비어서 거기서 자신들에게 작업하라고 내주었다고 한다. 유걸, 번용 두 사람 역시 부산시청사 응모를 개인적으로 따로 준비하고 있어서 아래 위층으로 서로 경쟁상대가 되었다고 한다. 서로 논쟁도 하고 안을 보여줘 가면서 설계안을 만들어갔다고 하는데, 워낙에 두 팀의 생각과 출발이 달랐기 때문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마침 김석철 씨도 기술공사 떠나서 따로 컴페티션 안을 만들면서 세 팀이 모여서 토론도 하고 했다는 것이다. 같은 건물에서 서로 준비하다 보니 밤 12시가 되면 야식 시간을 만들어 같이 모여 라면 파티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안은 집 밖에 광장을 만들고 안에 들어오면 메인 홀을 두며, 맨 뒤쪽에는 의사당이 있고 광장과 양쪽으로 전부다 오피스를 두는 식의 설계 안이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생각한 것은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집, 또는 도시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각각 스피드가 다르고 밀도가 다른 관계를 맺게 되는데, 집하고 직접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의 입장이 있고 또 지나가면서 그냥 집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개념을 적용한 것이라 한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보면 디자인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다르게 보는 생각을 적용해 광장 쪽에서 본 디자인하고 밖에서 본 디자인을 굉장히 다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밖에서 게이트 같은 걸 지나서 일단 시청 광장에 들어가면 거기서 양쪽으로 민원 오피스들이 있고, 또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서비스 기능이 있고, 큰 홀에서 의사당이 상징적으로 보이고, 이렇게 시간에 맞춰서 시퀀스가 생기는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즉, 자신은 어떤 장소에다가 형태를 만들기보다는 어떤 상황을 연출한다는 생각을 구현한 것인데, 처음 도시의 빈 땅에다가 시청이라는 상황을 만들 때 시청이라는 게 실제론 사무실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청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했다고 한다. 이어서 한강 개발 마스터플랜이라고 하는 여의도 개발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서울이 남쪽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한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 한강개발사업소 만들었는데, 여기서 여의도 개발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고 한다. 1961년에 이미 김수근 선생님이 여의도 개발을 제안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여의도에 둑을 쌓아가지고 땅을 만들어서 개발하고 서울 도심하고 시청 사이에 모노레일로 연결시키면 유용하게 쓸 수 있겠다고 자발적으로 제안한 것이라 한다. 그 때 서울시에서는 여력이 없었기에 그 안을 묵살했다고 한다. 그 때 국제적인 트랜드가 리니어 시티였는데, 서울에서 여의도를 거쳐서 인천까지 연속되는 벨트형 도심을 만드는데 여의도를 하나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여의도 개발을 다시 제안할 당시 주어진 조건이 서너 가지 정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국회의사당하고 서울시청, 외국 공관단지,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그 안에 수용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설계안에서 윤승중 선생님은 중심에다가 페데스트리안 데크를 만들고, 커머셜 벨트를 만들고, 국회의사당과 시청은 2개의 서로 다른 큰 대로에 뒤에 서로 마주보고 있긴 하지만 엇갈려 있어서 오히려 중심이 아닌 것처럼 설계했다고 한다. 이것은 마스터플랜이니까 그것을 먼저 만들어주면 앞으로 20년 동안 많은 건축가들이 채워 나가서 집이 만들어질 텐데,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의도 특별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건축을 할 경우 여러 가지 가이드라인을 지키도록 하자는 안도 제안했다고 한다. 이러한 여의도 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여러 개념들을 참조했는데, 프랑스의 칸딜리스, 트루즈 도시계획과 같이 지상에 도로가 있으면 그 위에다가 페데스트리안을 위한 도시를 새로 겹쳐서 별도로 따로 만드는 것을 참조했다고 한다. 메타볼리즘이란 개념도 고민했는데, 도시가 생물학적인 생명을 가진 도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도시 인프라를 정해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여의도 규모 정도 되면 자동차를 진입을 시키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고민했다고 한다. 인공 데크를 만들어서 길에 자동차를 세우고 그 위의 보도로 돌아다니는 입체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안은 실행이 안 되었고 도로 패턴만 유지한 채 다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김수근 선생님 사무실에서 나오게 된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별히 준비가 있었다든가 계기가 있어서 나온 건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1969년 김수근 선생님에게 했던 조언 중에 하나가 김수근 선생님이 기술공사 사장을 하시면서 실무에서 떠나있었기에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직접 하셔야 한다, 모든 걸 다 잊고 직접 작업하시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일단 환경연구소를 하면서 퇴계로에다가 사무실을 하나 얻고는 혼자 하기 힘들어서 김환이란 분하고, 김원석 씨, 이렇게 일단 셋이서 사무실 겸 작업장을 하나 만들었다고 한다. 조그만 주택 설계부터 시작했고, 그 때 한일은행 본점에 유영근 선배가 한일은행 신축본부를 하나 만들면서 직접 안에다가 설계팀을 만들어서 했으면 좋겠다는 유혹을 받고 자신의 개인 사무실을 잠깐 닫아 놓은 뒤 한일은행 본점 설계를 1년쯤 진행했다고 한다. 물론 이 안이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원도시에서 계획해서 새로 설계했다고 한다. 자신의 설계사무실의 이름을 원도시 건축으로 한 것에 대해 건축과 도시라는 것을 분리해보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언급한다. 역시 메타볼리즘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본래 메타볼리즘의 기본적인 생각은 건축, 도시조차도 식물, 생물처럼 성장하고 변하는 것이라는 개념이지만 어떤 위계를 만들어보자는 의도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 모더니즘의 영향이었을 것 같다고 언급한다.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대체로 아주 근원적으로 가면 뭔가 있다, 다 굉장한 체계 속에 있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걸 벗어나서 오히려 그런 체계를 해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설명한다. 현재 도시나 건축은 너무나 거대해지고 본래 인간 중심의 도시나 건축으로부터 상당히 문제가 생기고 변화 되었다고 보았고, 그래서 앞으로 도시나 건축에서 어떤 근원을 찾아보자는 의미에서 도시를 생각해보자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1969년 12월에 원도시 사무소를 등록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김수근 선생님의 틀 안에서 꽤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총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는데, 막상 독립해서 닥친 프로젝트들은 작은 주택이나 근생 시설이었고, 또 밑에다가 팀원으로 굉장히 쟁쟁한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일을 했었는데,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해야 하는 그런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앞서 이야기한 한일은행 본점 신축 설계안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 전세계적으로 은행들이 좀 더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합병하는 경향이 있었고, 우리나라도 은행들이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합병 이야기 나오고 과열되었기에 설계가 거의 다 진행이 되었는데도 은행감독원에서 승인을 못 받아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 자신과 김수근 선생님은 은행이라는 걸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상당히 생소한 프로젝트였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기회가 되어 많은 것을 공부했다고 한다. 또한 대학 캠퍼스 설계도 새로운 프로젝트였는데, 서울대 사회과학대 설계와 헌인릉 인근 30만평 부지에 캠퍼스를 설계했던 단국대학교 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진행되다가 운이 나쁘게도 부지가 그린벨트로 묶여버리게 되어 못하게 되었단다. 예전에 서울대가 관악산 자락으로 옮길 때 기본설계과정에 약간 관여했었는데, 나중에 전체 설계된 것을 보니 진짜 난센스라고 여겼다고 한다. 전체를 호모지니어스하게 디자인 했다는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이다. 백지에다가 대학을 하나 만드는데 그렇게 재미없는 집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어서 1973년 4월쯤 새롭게 출발한 원도시 건축사무소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건축가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디자인을 하고 실제로 건축이 되려면 상당한 퀄리티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을 갖춘 프로덕션 팀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조직체계를 만들자는 의도로 파트너십 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 김환, 김원석 등이 합류했다고 한다. 이 당시 하려고 했던 작업 중에 힐튼호텔 건이 있었는데, 대우가 인수해서 이 건물의 설계 책임이 김종성 선생님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증권거래소 컴페티션에도 작품을 냈는데, 당선이 되고 남을 만큼 뛰어난 안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김수근 선생님이 발간하는 "공간"지에 특집기사로 이 안이 실렸다고 한다. 증권거래소 설계안은 바깥에 보이는 스페이스를 굉장히 도시적인 스케일로 심플하게 표현하고 그 대신 안쪽으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시장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쪽은 전혀 다른 스케일을 만들고, 그런 식으로 해서 거리의 풍경을 만든 것이라 한다. 또 스페이스 프로그램 중에 증권거래소가 여의도에 처음 가는 거라 주변에 증권거래소 시장들을 만들기 위해 옆에다가 50평 단위의 작은 오피스를 수십 개 두는 것을 제안했으며, 옆에 있는 사이드 건물 두 개가 그런 증권거래소용 사무실인데, 이것이 아파트먼트 오피스란 개념을 써서 코어를 각각 가지는 아파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지난 다음에 보니까 이것이 오피스텔이란 이름으로 유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부이촌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뒤에 처음 한 일이 한일은행 본점과 연수원, 케미칼 빌딩(한국화학 본사 사옥으로 한일은행의 투자를 받음)이었다고 한다. 케미칼 빌딩은 땅이 별로 크지 않고 그냥 오피스여서 하나의 악센트를 주는 것이 상당히 고민스러웠는데, 그 때 색다른 키워드를 만들려 생각한 것이 좁고 긴 창을 도입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커튼월이라든지 수평 창이 한창 보편적이었기에 좁고 긴 패턴의 창은 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은 베어링 월 때문에 창문을 좁고 길게 낼 수 밖에 없어서 똑같이 좁고 길게 내다가, 몇 개 심심해서 지워보니 굉장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시청 앞 플라자 호텔이 지어졌는데, 오너가 한국화약이었고 일본 건설회사가 직접 설계 및 시공한 것이었다고 한다. 좁은 땅인데도 보통 일반 호텔하고 굉장히 다른 분위기의 호텔을 지었는데, 그 때 좁고 긴 타일을 특별히 디자인해서 만들어서 그 집을 지었다고 한다. 텍스처를 가지는 타일을 개발해서 거기다 썼는데 한국화약 쪽에서 그 타일이 맘에 드니 자기네들 집은 전부 다 그 타일을 쓰겠다고 강매를 했다고 한다. 케미컬 빌딩은 노출 콘크리트처럼 유리창으로 매끈하게 되기를 원했고, 설계도 매끈한 패널에다가 같은 면에 유리와 굵게 메탈로 윤곽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오너의 요구 때문에 지금 지어진 것처럼 되어서 아쉽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 마침 그 때 서울시에서 지상 주차, 의무 주차가 처음 발표되었는데, 지상 주차 때문에 땅을 메워서 쓰면서 할 수 없이 1층을 들어 올려 정면에 계단을 만든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도시와 만나는 길이 쉽게 접근이 되어야 하는데 계단으로 인해 그렇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 건물로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가협회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한일은행 본점을 하게 되었는데, 땅이 좁고 주차장 문제가 있어서 보통 원하는 것처럼 영업장을 1층에 둘 수 없어서 뒤에 있던 삼화빌딩을 구입하려고 애썼는데 못 샀다고 한다. 또 옆에는 롯데호텔이 있어서 꼼짝 못하게 되었고, 결국 에스컬레이터로 끌어올려서 2층 높이의 메인홀로 통합해서 하나의 큰 공간으로 느끼게 만들자, 그렇게 제안해서 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땅은 적은데 집은 많이 지어야 하고, 그래서 빔을 줄여야 되기 때문에 가운데 기둥을 촘촘히 박아서 그것의 스페이스 모듈이 3.6 X 2.4를 사용하였고, 가운데 기둥을 3.6으로 박아서 거기는 빔을 다 없앴다고 한다. 가운데 복도에다가 위에 덕트를 다 돌리고 그 사이 빔을 다 없앤 구조라는 것이다. 그렇게 층고를 크게 낮춰 21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남대문로가 별로 넓지 않아서 층고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하도록 차 진입로를 건물 아래로 끌어들이고 여러 기법을 써서 집을 만든 것이다. 또한 미도파 앞에 건물이 밀집되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코너링을 커팅해야 했다는 것도 언급한다. 도시 안의 집의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점에서 본점은 다른 오피스빌딩과 같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아이덴티티가 필요하기에 조형상의 모티프를 그렇게 만든 것이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건물은 몇 년 전에 롯데호텔이 인수해서 지금은 패션 몰로 바뀌었다고 한다. 골조만 남겨두고 형체도 없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집이 전체가 바뀌고 층고가 낮았기 때문에 두 층으로 한 층을 만들어가지고 다 솎아 내고 가운데를 구멍 내어서 지금 가보면 전혀 다른 집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 건물 설계로 1982년 건축가 협회상 받았다고 한다. 한일은행 연수원은 안성 대림동산에 터를 잡았는데, 시골 동네에 있는 현대적인 수도원 분위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의실, 강당, 식당, 편의시설, 기숙사, 이렇게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집인데 이걸 리니어로 놓으면서 그걸 분절시켜서 둘러 모으고 가운데 중정을 만드는 그런 모습을 갖추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안과 밖이란 개념으로 밖에서 볼 때는 언덕 위에 전체적인 풍경으로 보이고 안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네 면이 다 다른 분위기를 가진, 멀리서 볼 때는 보는 각도마다 좀 다른 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전체적인 통일감을 위해 전벽돌이라는 소프트한 색깔의 재료를 썼고 전부 다른 디자인을 갖는 외부를 만들고 또 내부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중정형 광장을 만들어서 안쪽 풍경을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건물 역시 1979년 건축가협회상 받았다고 한다. 한일은행 본점과 같은 시기에 했던 또 하나의 대형 프로젝트는 대한화재보험사옥이었는데, 남대문에서 남산 쪽을 바라보는 집으로 부대시설이 별로 없는 수수한 건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한화재 대표 김치복 회장 아들과 1년 선후배 사이인 변용 씨가 맡아서 대부분 설계했다고 한다. 성균관대 자연과학 캠퍼스의 경우 삼성재단 소유라 처음 마스터플랜을 삼성에서 해서 공과대학까지 지었고, 자신이 한 부분은 세 개 단과대학 건물이었다고 한다. 1978년 행정수도 백지계획에도 참여했었는데, 당장 땅을 정하지는 못하고 도중에 급하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백지에다 그린 것을 구체화 시켰다고 한다. 1950년대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메타볼리즘이라는 것이 있는데, 도시나 건축까지도 마치 생물 같은 변화를 하고, 변화하지 않는 부분과 변화하는 부분 부분 마다 에이징이 달라지고, 마치 도시가 생물적인, 식물적인 시스템으로 된다는 주장이라 한다. 윤승중 선생님 역시 거기에 동의하며, 특히 도시 자체가 자꾸 커지면 도심은 갇히게 되니까 부도심과 서로 간에 연속 시키는, 그런 것이 리니어 시티라는 것으로 어떤 경계를 두지 않는 것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보행자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구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차 타고 이동할 때는 건축을 만나지 않고 그냥 풍경인데 비해 건축과 접촉하는 건 걸어갈 때라는 말이다. 걸어갈 때 생기는 건축적 스케일과 차로 이동하며 바라보는 도시라는 측면은 어반 스케일에서 모든 것들의 기법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설계했던 여러 건물들에서 안과 밖, 투 페이스, 두 가지 다른 엑티비티에 대해서 서로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안과 밖이 속도가 다르고, 밖에서는 풍경으로 두 가지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중량구청사의 경우 바깥하고 안하고 풍경이 다른데 가운데 중정을 향해 대민 오피스가 있도록 배치를 했다고 한다. 서울 시청 설계안은 이것과 조금 다른데, 광장을 집 안에다가 집어넣었다고 한다. 윤승중 선생님은 위대한 건축가가 되려면 독재자 카리스마가 있어야지 이것저것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자신은 불행하게도 그런 기질이 전혀 없고 너무 민주적인 성향이 있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기 때문에 굿 아키텍트란 이야기는 들어도 그레이트란 말은 평생 못 들을 거 같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건축에서의 모럴을 주장해왔다고 말한다. 건축이 누구를 서브하느냐의 문제를 들여다 보았을 때 크게 네 가지 대상이 있다고 언급한다. 첫째가 돈을 내고 투자하는 클라이언트, 두번째가 그거와 상반될 수 있지만 집을 짓고 난 다음 사용하는 사람들, 세 번째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건축가 자신이라고 언급한다. 자신은 건축주를 잘 설득해서 결과적으로 도시적인 것에 기여한다든지, 건축주 돈을 이용해서 메이저 스페이스, 오픈 스페이스 같은 공공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또한 건축사무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젊은 사람들이 좋은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정도 된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원도시건축은 일단 큰 조직이라든지 메이저 회사가 되려는 욕심을 안 냈었고, 오히려 중견으로서 개성 있는, 처음부터 건축가들의 집합, 콜라보레토리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원도시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제일은행 본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에는 한일은행 본점처럼 앞으로 은행에서는 영업장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글로벌한 크기의 오피스 타워가 간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땅이 그렇게 생겨 어쩔 수 없이 앞에 영업장을 둔 것이 처음 생각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참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마침 거기가 지하철하고 만나는 곳이라서 지하철 레벨이 거기서부터 직접 들어와 선큰을 이용해서 지하층하고 1층, 2층, 3층까지를 전체가 영업장이 되게 통합하고, 또한 영업장을 부각시키지 않기 위해서 본점과 영업장 사이에다가 아트리움으로 4층 높이의 유리박스를 씌워서 광장에서의 파사드로 설계했다고 한다. 앞에다가 아트리움을 끼워 넣어서 실제로 대각선 정면에서 보면 아트리움이 오히려 그 집의 파사드가 되고, 아트리움은 두 매스 사이를 연결시키고 또 지하철 선큰 광장도 연결되어서 전부다 도시 공간, 실내 플라자 같은 개념으로 커먼플레이스를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하철역에서 보면 유리가 많고, 사람들도 거기가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들어가서 커피도 마시고 그럴 수 있는 좋은 장소로서 소위 커먼플라자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포항제철 중앙연구소 설계도 관여했었는데, 미국 사람에게 전체 마스터플랜하고 기본설계를 맡겼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언급한다. 1990년대 이후에 윤승중 선생님 자신의 역할이 어느 정도 줄어서 몇 개의 설계만 관여했고, 나머지는 다른 멤버들에 의해서 다양한 설계가 시도되었다고 한다. 원도시건축 설계사무소는 처음부터 건축가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생각들이 다 섞여서 우리라는 표현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한다. 장점은 건축 작품들이 주장이 좀 강하다는 것이었는데 컴페티션에 참여하느라 나중에 그게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컴페티션이라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있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심사위원의 눈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심사위원의 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경향이라든지, 자꾸만 어떤 트렌드에다가 자기를 맡기는 방향으로 설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사무실들이 사용하는 디자인 어휘들이나 소재들이 다 유사해지고 모든 것들이 자꾸만 트렌드화 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남의 눈을 의식해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기 주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1980년대 했던 것 중에는 무역센터 건물이 있는데, 니켄세케이가 기본 설계한 것을 원도시와 정림건축에서 실시설계를 했다고 한다. 이어서 윤승중 선생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대법원 청사 건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대학교 3학년 때 팀을 만들어 대법원 청사 백지 플래닝에 응모해가지고 대법원, 대법원장 공관 두 가지 다 당선되었다고 한다. 상 받은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1979년 한남동에 대법원장 공관을 짓게 되었는데, 사무처장을 만나서 쉽게 설계를 하게 되었고, 그 뒤 10년이 지났을 때 1989년에 정규 대법원 컴페티션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대법원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이 모이고 재판하고, 그걸 건축화 시키면서 코트란 개념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한다. 또 하나는 대법원의 판결 자체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대법관이라든지, 그런 인적 구성원들은 그럴 필요 없이 친숙하게 국민들, 시민들 편으로 깊숙이 들어가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사이트로 주어진 곳이 약간 언덕이었기 때문에 남쪽에서 진입을 하면 꽤 언덕이었고, 거기다가 집을 놓아야 할 텐데, 이 때 아크로폴리스라면 좀 올려가지고 집을 놓고 우러러보는 그런 식의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고, 아고라라는 개념이라면 법원은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땅을 다 깎아내고 광장을 만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 때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김용준 대법관을 인터뷰했었는데, 대법관 사무실은 샤워도 할 수 있고 편하게 한번 출근하면 저녁때까지 있는 아파트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법관이 다른 외부 사람을 만나면 안되기에 격리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신성시 되는 아크로폴리스적 제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같은 경우 시민이 법관을 뽑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고라를 택해 양쪽 길에 땅을 깎아 내려 광장도 만들고, 집의 구성이 대법관 오피스 컴플렉스처럼 거의 아파트 같은 곳으로 만들고, 대법관들이 최종 판결하는 대법정을 상징적으로 배치했다고 한다. 또한 법원행정처, 사법도서관 등 여러 가지 컴플렉스가 있고, 각각 독립적인 파사드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반포대로 쪽으로 법원 행정처가 정면에 있으면서 그것을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었고, 또 반대편으로 방배동 쪽에 사법도서관을 조용한 곳에 두고 정면에 광장을 두어 그것이 법의 광장으로 늘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고 중심에다가 타워를 세운 법관들의 아파트를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안을 가지고 법관들하고 10개월동안 씨름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지질조사를 하는데 전부다 강한 암반이 나와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길에서 1미터 높이로 땅을 깎아 내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반만 깎아 내고 반만 올리는 그런 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어차피 정면으로 누가 진입할 것이냐 했던 것도 천정에 스카이라이트가 있고 메모리얼 홀처럼 실내 광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대법원의 상징적인 메이저 스페이스, 이런 장소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내에 만들어진 이런 공간을 어떻게 누가 쓸 것이냐, 이런 게 문제가 되어 결국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거의 비워진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외관을 하면서 정면 지붕이 없이 개구부도 그렇고 날렵하고 가벼운 디자인을 생각하며 화강석을 곱게 하는 그런 마감을 원했었는데, 그것이 굉장히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거칠게 마감한 돌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외부 디자인에서 타워가 지루하니까 공중정원을 두자는 식으로 제안을 했는데, 법관들이 모인 미팅에서 전부 가든을 관통시켜서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안이 우세해서 타협점을 찾았다고 한다. 어쨌든 기본적인 어떤 형국은 지켜졌는데, 건물 이미지라든지 이런 것들이 뜻대로 안되었고 내부도 현대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생각이었지만 잘 안되었는데, 그런 것이 아쉽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사법부라는 것이 삼권 중 한 기관인데 그 당시 사법부가 존재감이 약했다고 한다. 대법원뿐만 아니라 행정처까지 복합되는 곳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과장되게 보이게끔 하고 싶었고, 지금처럼 저층부를 올려놔서 통합베이스로 만든 것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한 부분이라 언급하고 있다. 저층 행정처하고 도서관을 크게 만들고, 대법원을 높게 볼 수 있게 오브제를 만든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란 말이다. 그리고 법원에서는 또 하나의 키워드로 밸런스, 중용, 균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법행정처하고 사법도서관이 밸런스가 안 맞는 크기인데도 이걸 고려해 대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형이 서쪽이 좀 높았기 때문에 이쪽은 4층이고 저쪽은 3층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볼 때는 이것이 틀을 갖춘 대칭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말이다. 또한 대법정이라는 게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곳이기에 입구를 검찰 쪽으로 내서 검찰청하고 사이에 시민들을 위한 오픈 스페이스를 만들어서 검찰 쪽을 한번 보고 이쪽을 한번 보고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검찰 쪽하고 사이에 펜스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어서 1980년대와 1990년대 했었던 몇 가지 건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태영 마포사옥은 변용 씨가 태영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변용 씨 주관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국토개발연구원 사옥의 경우 체계적으로 연구원들에 대한 행태를 스터디해서 기본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전체적인 체계를 논리적으로 만들면서 중간층에다가 커먼 플로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전 층의 연구원들이 자기 방에서 나와서 모여들 수 있는 그런 층이 있어서 중심에다가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산업은행 본점 역시 정부종합청사 계획안처럼 가운데 큰 오픈스페이스가 있고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그런 플레이스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기상청 청사의 경우 기상 과학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크진 않지만 중심에 아트리움을 만들고 안에서 작업하는 과정들을 볼 수 있게 복도를 전부 유리로 설계했다고 한다. 이어서 공항설계 경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청주국제공항 설계를 원도시에서 맡게 되면서 공항 설계를 공부했으며, 이 때 했던 생각을 가지고 나중에 인천공항 컨소시엄에서 지금 현재 지어진 모양대로 제일 처음에 스케치한 것이 윤승중 선생님 본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종도공항 마스터플랜 작업을 했던 미국 쪽에서 H타입의 터미널 모양을 보내온 것을 활 모양의 유선형 패턴으로 스케치한 윤승중 선생님의 안이 채택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 전세계적으로 초대형 공항의 경우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는 지금 인천공항처럼 메인 터미널이 있고 지하로 연결되는 리모트 콘코스를 자꾸 증설해 나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이 2단계 계획에서 채택하고 있는 분동방식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적정규모 단위로 나누어서 순서대로 지어가면서 이걸 연계시키는 방식인데, 당시 영종도공항 마스터플랜 용역을 수행했던 벡텔과 유신코퍼레이션이 애틀란타 공항에 적용시킨 첫 번째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윤승중 선생님은 앞으로의 공항은 프로세스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대규모 공항의 경우 전체 모습을 한번에 볼 수 없으며, 승객들이 지나가는 수십 개의 루트들이 집합되어 공항이 되기 때문에 공항을 하나의 건축이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신 출발레벨의 메인 콘코스는 요즘 대부분의 공항들이 구조 디자인이나 실내장치들을 대단히 신경 써서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밀레니엄 게이트 설계경기의 경우 문화부 이어령 장관이 새천년을 맞이해서 300억 예산을 주고 서울의 상징이 될 만한 걸 만들자면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게이트라는 것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시작이라는 생각, 그리고 게이트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는 과학의 시대이고 하니 밀레니엄 과학관의 기능을 가지는 베이스가 있고 그것을 상징적인 게이트로 한다는 생각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단계가 되면서도 새로운 기술 시대의 하나의 상징, 그리고 거기다 시간이라는 축, 즉, 12시간이라는 것은 21세기의 새로운 시간이며 전 세계 새로운 장소의 중심을 이 자리에 둔다는 생각, 거기에 더하여 원형이기도 하면서 대문 형상이기도 한 빛의 대문을 만드는 것, 여섯 개의 게이트를 LED같은 발광판으로 만들어 항상 빛을 발사하게 하면 그것이 새로운 시대로 가는 하나의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이 오브제가 놓일 장소가 상암월드컵경기장 앞의 큰 광장이라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공간으로도 생각했다는 말이다. 2008년 윤승중 선생님이 은퇴 전 마지막으로 했던 광주 과학관도 소개되고 있다. 빛고을 광주라 빛이라는 주제와 함께 나로호 발사기지가 근처에 있어서 우주과학이라는 주제를 같이 접목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사이트를 처음 접하고 스케치한 이미지가 물 위에 내려앉은 우주선의 개념이었으며 거기다가 사방 120미터쯤 되는 호수를 만들고 우주선체 같은 메탈 스킨을 가지는 유선형 덩어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1965년 4월 1일에 창립한 프라이빗 클럽인 목구회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는데, 1999년부터 원도시 아카데미를 발전시켜 공개 세미나를 진행해왔고, 지금까지 계속 해당 사이트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는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윤승중 선생님을 일러 장응자 선생님은 우리 시대의 주도적 엘리트 건축가라 평했고, 민현식 선생님은 건축의 본성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심미적 이중주의자라고 평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종합적으로 윤승중 선생님이 논리로 건축을 설계하며, 또 논리를 통해서 한국건축을 세계건축의 궤도에 올리려고 시도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김중업 선생님과 김수근 선생님이 형태로서 한국건축의 세계화를 꾀하였던 것과 다른 시도라 언급된다. 이는 모더니즘의 "형태"와 "논리"중에서 무엇을 중시하여 취하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윤승중 선생님은 논리가 없는 형태란 거부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모든 것에 의미부여와 질서가 있게 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원도시건축연구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건축과 도시의 밀접한 관련을 처음부터 강조했는데, 건축은 물론 그 자체로서도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내지만 개개의 건축이 집적하여 만들어지는 도시는 도시로서의 생명력과 유기체적 질서를 가져야 되므로 도시와 건축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건축되는 도시라는 인식이 제기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서 윤승중 선생님은 김수근 선생님과 몇 가지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김수근 선생님은 어떤 아날로직한 오브제로부터 형태를 받아서 그거 가지고 스케치를 시작한다든지, 어떤 장소가 있으면 거기에 결정적으로 꼭 맞는 형태나 이미지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개 현장에서 한참 동안 구상한 뒤 영감을 드러내고 거기서부터 스케치하면서 기본적 구성을 하는 접근방식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윤승중 선생님은 집이라는 것이 거기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적 장소로부터 얻어지는 형태나 이미지 보다는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시스템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수근 선생님은 우선 형태가 정해지면 거기서부터 필요한 기능들을 잘 쪼개 나간 반면, 윤승중 선생님은 그거 보다는 어떤 상황을 먼저 만들어서 필요할 때 더해져 나가며 자라나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수근 선생님 사무실에서 근무할 당시 윤승중 선생님은 김수근 선생님의 생각을 충실하게 실현시켜야 하는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거기다 조금씩 숨겨서, 말하자면 김수근 선생님이 그냥 자유롭게 하신 스케치에다가 어떤 원리를 좀 만든다든지, 또는 그것을 실제로 현장에서 작업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 재미있는 언급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예를 들어 중국의 북경은 상당히 기하학적이고 의도적인 계획을 가지고 주거지까지 완벽하게 인공적으로 조성한 데 비해 조선의 한양은 궁궐과 몇 개만 배치해놓고 나머지는 아주 자연에 순응하는 소극적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좋게 이야기하자면 자연 환경에 순응했지만 서양식 개념으로는 도시적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청계천도 자연이라는 것에 대해서 존중하고 자연의 물 흐름을 지켰기 때문에 좋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상당히 무신경하게 내버려 두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변호사들은 밤낮 죄인을 보고 의사는 밤낮 환자들만 보는데 건축가들은 집을 지을 만큼 돈을 준비한 행복한 사람들만 보니까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변호사는 기껏 잘해봤자 얼마 전에 있었던 일에 접근하는 것이 최선이고 의사들은 고작 병이 나기 전 상태로 돌려주는 것이 최선인데 건축은 없던 데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라서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고도 이야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윤승중 선생님의 건축 인생,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현대 건축을 되돌아보는데 손색없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