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요약 。。。。。。。 17세기 폴란드의 한 마을(샴고로드) 유대인 공동체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학살을 당한다.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베리쉬는 하녀인 마리아와 함께 주점을 운영하고 있고, 그에게는 당시 마을 주민들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변해버린 한나라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유대인들의 명절 중 하나인 부림절 즈음, 세 명의 손님(사실 그들은 명절을 맞아 공연을 하러 온 광대, 혹은 배우들이었다)이 그 주점을 방문했고, 그들은 여느 주인들과 다르게 까칠한 베리쉬 등과 대화를 하던 중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게 된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 신을 부정하는 베리쉬를 보며 신을 피고로 세운 재판이라는 즉흥연극을 제안하는 세 명의 방문자들. 모든 것이 허용되는 부림절의 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허용했지만, 여관 밖에는 또다시 폭도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실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살아남은 작가가 쓴, 인간의 잔혹함에 관한 이야기. 이야기의 중심소재는 신의 정의로움을 두고 벌어지는 재판이지만, 사실 이건 결국 인간들 속에 있는 온갖 거짓과 비겁함, 나약함, 그리고 ‘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였다.(실제로 재판의 결과는 나오지도 않는다) 즉 작품은 신론이 아니라, 인간론을 다루고 있다. 작품 속 폭도들은 신의 이름으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건 나치, 히틀러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가톨릭교회의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어디 교회만 그렇던가. 자칭 무신론의 강력한 옹호자라는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에서 발견되는 (종교인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노골적인 증오, 저주는 뭐 그리 또 다른가. 결국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뿌리 깊은 배제의식은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것 같다. 여기에 신은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당하고 있고. 물론 신은, 종교는 그런 행동과 마음을 교정하고 개선시켜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강력하고 타당하다. 신(혹은 종교나 교회)의 무능력은 공격자들의 좋은 무기이다. 하지만 (다른 신과 종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니) 적어도 교회는, 그 무능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조직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신의 아들이 스스로 무능력을 감수한 채 세상에 와서, 고통 받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 죽었다는 것이 핵심교리인 기관이니까. 기독교는 그 희생이 다양한 양상과 방향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의 신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제하기보다는, 기꺼이 모욕과 고문을 당하는 분이다. 아마도 이 여인숙의 재판에 피고가 직접 참여했다면, 스스로 변론권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우리 곁에는, 그분의 변호자를 자처하는 작품 속 샘과 같은 인물들이 지나치게 넘쳐난다.(문제는 그들이 대개 변변한 사유와 고민 없이 이 직분을 수행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샘이 그랬듯 그들은 유려한 논리와 말주변으로 신을 옹호하며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강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속 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자. 과연 그 끝이 무엇인지.
작품을 읽으며 구약성경의 욥기가 계속 떠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주인공(욥), 그를 찾아 온 세 명의 방문자들과의 입씨름(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갑자기 등장해 하나님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엘리후)까지.. 큰 틀에서 보면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과 거의 그대로 매칭이 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욥기의 엘리후 역을 맡은 작품 속 샘이었다.
시니컬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샘에게 처음부터 독자가 이입되기는 어렵다. 문제는 그가 하는 말에 딱히 논리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학살에서 살아남는 은혜를 입은 당신이, 그 은혜를 베푼 신을 공격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식). 어이없는 말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피해당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언사를 내뱉는 몰지각한 교계인사들을 자주 본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의 옹호자일 수 없다고 말한다.(마지막 페이지를 보라) 그들의 논리는 실제의 삶이나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갇힌 논리이다. 그것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그들이 옹호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 속에 갇힌 신, 철학자들의 신, 죽은 자들의 신일 뿐, 어쩌면 그들은 누구보다 강한 무신론자들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들었을 때, 욥과 세 방문자들 모두를 논박하던 엘리후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는 법이다.(특히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오직 대화로만 구성된, 희곡이라는 형식의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이 사실을 강하게 증명한다. 작품 속 주점 주인 베리쉬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백 마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
|
나이트 또는 흑야로 유명한 엘리 위젤의 희곡이다. 예전부터 위젤의 책들을 읽고 싶어도 국내에 발간된 것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었는데, 포이에마에서 오랜만에 좋은 책을 낸 것 같다. (요즘 이 출판사를 매우 눈여겨 보고 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삼고로드란 마을의 여관주인과 웨이터 마리아, 연극악단 유대인 3명과 개신교 성직자가 신을 피고로 세우고 신을 재판하는 내용이다. 여관주인은 신의 유죄를 묻는 검사 측을, 그리고 어떤 한 젊은 나그네는 모두가 떠넘긴 신을 옹호하는 변호사 측을 맡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주인공 여관주인이다. 이 사람은 그 사건이 있기전 매우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언제나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술집에 놀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는 그의 아내와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무리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유대인 살육을 시작했다. 그는 술집의자에 묶인채 자기 아내와 딸은 침입한 강도들에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는 울면서 절규하며 신에게 부르짖는다. '주여 우리를 제발 구원하소서!'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주인공을 맞는다. 그러는 그를 보고 약탈자들은 크게 비웃는다. 결국 저항하다 아내는 무참히 살해당했고, 딸은 정신병자가 되어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삼고로드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버렸다. 그는 생각한다. 왜 신은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면서 방관하였는가? 그는 우리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고통에 차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인가? 여관주인은 더이상 웃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냉소와 하늘을 향한, 신을 향한 맹렬한 분노뿐.. 여기서 바로 젊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매우 침착하며 감정이 없는, 그리고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다. 그는 여관주인의 모든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방청객인 다른 유대인들조차 이제 이 나그네가 신의 대리인이라고까지 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을 옹호하는 바로 그 젊은 나그네의 정체가 사탄으로 밝혀지며 막이 내린다. 작가는 아무리 인간사의 모든 부조리와 비극이 비록 그것이 온갖 현학적인 설명으로 논박이 가능하더라도 그 인간의 비통한 심정 자체를 공감하지 못하는 비인간성이 바로 사탄이라고 정의한다. 슬픔과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욥의 친구처럼 이것저것 잣대를 들이대며 괴롭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말보다는 그저 안아주고 위로와 공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을 갖다붙여도 설명이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논박이 가능하다. 일차적으로 그 죄는 강도가 저지른 것이지 신이 저지른것도 아니며, 신의 뜻도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또한 그들은 사실상 신이 복을 줄때만 나에게 의미있는 신이라는 실용주의의 신, 기복신앙의 신일 뿐이다. 잘 생각하면 그것은 댓가의 신이며 거래의 관계이다. 신은 진정한 사랑,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그것이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더라도 나를 사랑하느냐'와 같은 사랑을 바라신다. 마치 저 여자가 나의 돈과 힘을 사랑하는 건지 혹은 저 남자가 나 자체보다 내 외모와 껍데기 육체, 몸매만을 원하는 건지 의심하고 고민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신은 가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미친 명령까지 한다. 너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너의 가장 사랑하는 100세 이후에 가진 첫 네 소생까지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하느냐? 비신자들이 볼때는 이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짓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너의 어미와 친척 형제들 싹다 버리고 나만 따르라고 예수가 명령한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참 행복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가족보다도 더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버리면 모두가 죽지만 내가 진리를 받아서 내 가족까지도 진리로 이끌면 모두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절벽으로 달려가는 가족들을 말리려면 내 말을 들어야 한다'와 같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오히려 그들을 먼저 버리라는 모순적이지만 역설적인 진리를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이 가끔씩 우리 인생에 작은 일에도 개입하는데 왜 저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있지도 않은 듯,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아무 개입이 없냐고 한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그럼 신은 자기 맘이 가는대로 개입하기도 하고 비-개입하기도 하는 변덕쟁이란 말인가? 그러나 신은 기계의 사랑을 원한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고 그것에 따른 필요악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죽을때도 왜 우리를 죽게했냐고 따지거나, 세월호가 침몰할 때마다 신은 그것을 막아야하며 심지어는 '세계대전을 왜 안막았습니까?'처럼 끝없이 따져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도 신을 완벽히 유죄로 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신은 또한 우리의 믿음과 단련을 또는 믿음의 시험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주기도 한다. 혹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채찍이나 사랑의 매일 때도 있다. 자, 그러면 실제 저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것이 신의 뜻이니 잠자코 받아들이라며 그를 몰아붙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통과 역경과 부조리와 비극을 직접 맞은 사람에겐 그딴 소리가 얼마나 다 헛소리고 개소리로 들리겠는가? 나같아도 누군가 그렇게 군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 사람과 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커져갈 것이다. 나도 이렇게 머리로는 그저 머리와 짱구로는 다 납득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정말 나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욕하고 저주하며 온갖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주여 그저 나약한 나를 붙드소서! 나약한 우리 인간을 용서하소서)
저명한 소설가 조성기의 야훼의 밤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인이 선교하러 선교지에 갔다가 흑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귀국하게 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위젤의 나이트에서도 아우슈비츠 교수대에서 목이 졸려 바둥바둥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도대체 우리의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심지어 그 아이는 어린아이라 가벼워서 오랜시간 뒤에 혀가 흘러내리며 죽었다) - 이후 이 광경을 목격한 위젤은 완고한 무신론자로 돌아선다. 이 모든게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당신 자식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본다면? 혹은 내 딸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간 선교지에서 집단강간을 당하고 미쳐버린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한번 당신 마음에 물어보라 우리가 만약 삼고로드의 여관주인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래도 신을 꾸준히 사랑하며 '신은 숭배받기 합당하신, 지당하신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여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욥의 친구들 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저 여관주인에게 온갖 신학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을 들이대며 신을 원망하는 그를 나무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당신이 저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옳다며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당신이라면 저 필리핀 소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필리핀 방문 마지막 날인 18일 마닐라 산토토머스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교황은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다가 12세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울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다 문득 교황에게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왜 우리를 도와주는 어른들은 거의 없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교황은 소녀를 안아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AP통신은 “교황은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며 “교황은 미리 준비한 영어 연설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시간이 지난 뒤 대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마약을 먹는 아이들, 집이 없는 아이들, 방치되고 착취당한 아이들, 사회가 노예로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