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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병명은 다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안는 고통 직접 당해 본 사람만이......당해본 사람만이. 책 여백에 적어둔 친구와의 대화 내용을 리뷰로 대신 하고자 한다.
12 . 4 . 2000
나 또한 운명에 대한 겸손을 배웠다.
고통에 대해 원망한 적은 없다.
고통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만들어 주었기에 감사한다.
난 지금의 내 모습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12/17 자정넘어....
지금의 널 있게 해준 지난 네 아픔도 고맙고 네가 힘겨웠을 때 곁에서 지켜 봐준 네 부모님께도 고맙다. 책 잘 읽었어...... 네 고통의 1000분의 1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널 지켜줄 꺼야. 네가 자랑스럽고 또, 사랑스럽다 모든 것 마음으로 보길...... [인상깊은구절] 시력 때문에 인감힘 쓰다보니 시간이 없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맛보게 된다.영광이 시디는 아테네 앞으로 몸이 떠느느 그리스인들과 동족의식이 느켜지기도 하고, 지혜를 얻는 대신 눈을 내준 오딘과 도 동감하게 도니다......(중략) 나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반만보는 것이,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징인 듯싶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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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안경을 낀지 15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안경을 벗어도 칠판 글씨를 보는 일을 제외 하고는 일상생활 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지만 해가 갈수록 늘어가는 안경의 갯수만큼이나 시력은 점점 떨어져 갔다. 그리하여 본인은 시력때문에 군입대시 전혀 해택은 없으나 그래도 정상적인 신체는 아니라는 3급을 받기까지 했다. 참고로 6디옵터이다. 이 정도면 얼마나 시력이 안좋은지 아실랑가? 시력 검사를 하기 위해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안보인다. 흐릿하게 맨 윗줄이 보일때도 있다. 실내조명이 좋은 곳에 간다면.. 그런데 요새는 본인처럼 시력이 나쁜 사람이 부지기수인지라 군입대 신검을 받으면 어김없이 시력에 관한한 맹인이 아닌이상 1급을 받는 시대가 왔으니 이제 안경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신체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이 책은 시력이 약한 독자를 배려한듯이 글자체의 크기가 일반서적의 2배 가까이 된다.
"나는 마음으로 봅니다"하는 책의 제목이 말해주는 것은 비록 정상적 시력은 잃었지만 시력이 온전하던 시절에 보지 못하던 많은 것을 새롭게 볼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화가는 사물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현실 너머의 무엇을, 화가의 영혼이나 다른 영역 속에 깃들인 뭔가를 화판에 옮기는 것처럼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해서 세상의 전부를 보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족함이란 우리 모두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인생의 법칙임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 드리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만족함이라는 더 큰 보상을 준다. [인상깊은구절] 다음날 내가 볼 수 없다면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려 하지 않고 익숙한 것들을 다시 돌아보겠다 |
| 한 때 <타임>지의 편집장이었던 헨리 그룬왈드는 황반 변성증이라는 병으로 시력이 아주 약해져서 거의 실명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저널리스트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글을 많이 읽고 써야만 했던 그로서는 이런 상황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동안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들조차 그의 병의 고통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 황반 변성증과 씨름하는 이야기를 글로 써서 <더 뉴요커="">에 게재했다. 이 칼럼이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백 명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딸 맨디로부터 이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한 고백을 듣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겪는 고통이 결국 그 자신만의 것이며 결코 주위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자신의 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황반 변성증 협회의 창시자이자 회장인 스티븐슨은 그 자신이 황반 변성증을 앓고 있지만 “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을 앓으니까 세상이 우리를 도울 의무가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세상이 속도를 늦추고‘ 당신의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우리가 당신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귀한 존재이니까요’하고 말해주길 바랍니다. 하지만 세상은 절대로 그렇게 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빨리 돌아갑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자기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자기 처지를 받아들일 것을 충고한다. 그룬왈드도 그런 그의 말에 동의하고 점점 더 개방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기 시작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면서 그들에게서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연대감은 일상 생활의 고달픔을 비롯한 어려움과 다른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삶의 즐거움까지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거의 볼 수 없는 시력을 갖고서도 그는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고 그동안 관심 없었던 미술관 안내 테이프에 귀를 기울이기도하면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부분까지 마음의 눈으로 상상하며 그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몇 년을 보내며 그는 눈이란 게 대단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또한 한계 속에서 살며 부자유를 극복해 나가는 법을 배우며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눈은 우리들 외적 세계에 대한 것을 보게 해주지만 마음의 눈은 혜안으로 삶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룬왈드는 시력을 잃어 가는 힘든 과정에서도 마음의 눈을 떠가는 변화를 저널리스트답게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눈일까, 마음의 눈일까. 둘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육체가 건강할 때는 그것을 우리는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약에 그룬왈드처럼 병을 앓게 된다면 그처럼 마음의 눈을 밝혀 통찰력을 얻는 지혜로움을 가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통해 너무나 당연한 행위 ‘본다’ 는 것에 대해 무한한 은혜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장애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무한한 축복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항상 비교하고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하지는 않았던가. 행복이란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룬왈드도 “우리는 나름의 견지에서 자기 인생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실패든 성취든 자신의 존재 안에서 가름해야 한다.” 고 했다. 그리고 그는 “반만 보는 것이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징인 듯 싶다.”고 역설한다. 내가 감히 그런 결론에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그의 말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책표지에서 바버라 월터스가 “ 이 감각적이고 아름답게 쓰여진 책은 우리에게 세상의 큰 기쁨에 눈뜨게 해준다.”라고 했는데 그녀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더>타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