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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이다.- 르네 샤르
추억이라는 단어는 낭만성을 내재한다. 간혹 추억에 젖다, 라는 말로 아련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추억이라는 것도 점점 바래진다. 현실적으로만 보자면 추억은 별다른 힘이 없는 게 맞으니까. 이렇듯 흐르는 시간이란, 내가 지나왔던 흔적의 추억마저도 집어삼키는 잠재적 폭력성이 있다. 인간은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없고 속절없이 내몰리기 때문에 그렇다. 이 책의 원제는 '호적부'이다. 호적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문서적 수단이다. 원제를 알고 나면 이 책의 절반은 이해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소설은 '나'라는 화자를 통해 지난날의 특정 시점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이 화자가 특정 한 사람인지 불특정 다수인지는 모호한 인상을 풍긴다. 저자인 파트릭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거론되지만 15개의 챕터를 훑다 보면 그가 그인지 모호할 때가 잦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은 변화하기 때문일 거다. 나조차도 어떤 시기에 어떤 에피소드를 떠올리면, 전혀 내가 겪은 일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삶의 각 장면은 순간에 의해 직조되고 순간에 의해 휘발되는 습성이 있어서이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순간이 있고 절체절명의 위기가 여러 번 찾아오는 게 인생이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의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파트릭), 갓 태어난 딸의 호적 신고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서 과거로의 회귀는 포문을 연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생되어 자기 아버지, 부모의 존재, 행적을 좇고 살아오면서 그를 지나쳤던 여러 사람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반복이 주를 이룬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름과 행적에 집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기억하고 각인하며 익숙해지려 애쓴다. 그러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에서는 상당한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름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기억회로가 오작동을 일으킬 만큼 수많은 이름의 집합에서 기억하려 애씀과 망각의 경계에 놓이고 마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무엇인가가 끝장나버린 것을 느꼈다. 나의 청춘일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게 모든 것이 변하게 된 순간을 나는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 그것은 서점을 나서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각에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른바 '위기'라고들 부르는 것이 시작되고 우리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 바로 그날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98~99쪽
무수한 과거가 모여 현재가 집결되지만 이 또한 완성이 아닌 나아감 혹은 흘러감을 담보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추억 앞에서 어떠한 선택도 불가능하며 안타까움을 표출하거나 체념 정도로 끝맺는다. 저자는 이런 추억을 낯선 불확실성, 단편적 편린들로 재조명하고 있다. 표면적 소재는 전쟁의 상흔이다. 독일 점령기 당시의 어머니 시점, 중동 전쟁 당시의 나의 삶 등. 그렇게 흘러가는 속에서 '나'가 겪는 특이하거나 단조로운 일상, 부정확성 등은 전쟁이 시작되고 진행되며 끝난 당시의 상황과 부정확한 기억의 시점이 교차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단조로움 속에서 삶을 정통으로 관통하는 부차적 소재이다.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전쟁의 잔인한 폭력성과 잔인함 같은 건 소설에서 딱히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의 발발은 삶을 피폐하게 한다. 전쟁의 종식은 끝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삶은 걷잡을 수 없이 균형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게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전쟁통에 뿌리를 잃어버리고 이름도 잃어버린 것쯤은 그나마 다행이다. 호적 자체가 말소되어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유령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여러 작품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의 근본이 불투명한 인물을 다룬다. 이 소설에서도 예외 없다. 보태어 족보, 호적부, 세례증명서 같은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단 문서들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인 뿌리를 명확하게 찾고 싶어함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파트릭……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결산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좀더 단단한 기초 위에서 다시 시작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단 말이야. 알겠어?" "네" "사람이 언제까지나 뿌리 없이 떠돌며 살 수만은 없는 거야." -177쪽
각각의 단편 같은 이 소설은 크게 보면 우리의 인생을 압축해놓은 것이다. 잊고 지냈던 어느 시점, 어느 상황이 깜빡거리던 전구에 불이 파팟하고 켜지듯 불현듯 떠오를 때, 분명 인생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별것 없던 에피소드가 사실은 운명의 끈처럼 꼬이고 꼬여 있었던 거다. 그렇다. 사소하게 지나치는 무엇도 사소한 게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소한 점들이 모여 커다란 원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또 그 원을 무수히 겉돈다. 그렇게 살아지는 거다. 그리고 가끔, 뇌를 강타할 때, 기억의 조각을 하나둘 소환하며 추억에 잠긴다. 1년 전 이맘때는 향수에 젖어있었다. 떠나온 곳에 대한 향수, 그런데 또 1년이 지나가는 지금은, 퇴색했다. 망각은 망각을 불러오고 아련함도 점차 빛을 잃어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과거 살았던 집, 만났던 사람들, 있었던 일 등을 회상하며 그 시절 기억을 환기한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어서 완전한 복구라는 것은 없지만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떠올린다 믿으며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합리화하거나 삶의 전환점으로 보게 된다.
화자로 '파트릭'이 여러 번 거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전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고있는 소설이다. 1945년에 태어난 저자는 전시의 참상은 보지 못했어도 그 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참상은 수없이 보고 자랐을 것이다. 특히 저자의 아버지가 유대인이었다고 하니, 누구보다 아픈 과거사를 낱낱이 전해 들었을 거로 본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점령기 직후에 태어난 사람이라서인지 그 시대를 유독 많이 다루고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인물을 주로 다룬다. 유년 시절을 평화롭게 회상할 수 없는 이유는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부모로부터 전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워낙 두문불출하는 작가인데 인터뷰에서 눌변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된다. 글로써 자기를 표현하는 게 더욱 수월하다고 말하는 작가, 그래서 그의 글에는 진정성 외에 맹목적인 절실함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담담하고 유려한 필치 뒤에 쓸쓸함이 느껴지는 이유 또한 말이다. 오늘의 조각, 각각의 편린들이 훗날의 추억이 된다. 하지만 이 추억은 어떠한 힘도, 어떠한 낭만성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폐허의 시기에도 살아 남았다는 족적만이 다시 살게 하는 동력이 되어 삶을 밀고 나간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세 통의 필름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어린 시절 이후로, 사람과 물건들이 어느 날인가는 우리를 떠나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내게는 이미 친숙한 공허감을 느꼈다. (…) 오직 나를 제외하고는.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직 프랑스의 작가가 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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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너의 뿌리, 너의 가정, 너의 보금자리란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먼저 읽었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잔상 때문인지 구체적인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인상과 풍경만으로 따라 읽을 수 있었다. 화자를 중심으로 한 과거 행방 추적이라 비교적 단조롭고 이해하기 수월했다. 이와 달리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읽자마자 재독에 들어가야 했다. 연대기순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의 연관성과 영향력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기에 뭔가 많이 놓쳤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흩어진 시공간의 이야기들이지만 아기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단란한 세 가족의 산책으로 갈무리되는 점이 뭔가 기승전결을 찾게 만들었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어떤 면에서 작가의 서른 살까지의 생애, 즉 전기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애아버지와 작가로서의 성장을 그려 그의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과 사건을 본격적으로 추적하게 이끈다. 전작과 다른 점은 신생아의 탄생과 새로운 역사를 평온한 잠의 시간으로 열어두고 축복하고 있다. 1장의 공시적인 호적부에 담을 수 없었던 개인적인 호적부, 즉 애아버지이자 소설속 화자인 작가의 지난 시간을 한편의 추억으로 완성해낸다. 작가를 중심으로 부모님과 자식으로 이어질 역사를 뒷받침할 사건과 인물을 호출하여 조각이불처럼 깁는다.
딸이 자기처럼 정체성의 혼돈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을 뿌리 마련에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화자 파트릭 모디아노는 삼촌의 충고대로 (상징적인) 산림개발업자가 될 운명에 처한다. 인간은 한그루의 나무에 비유될 수 있으니까. 그 나무들이 모인 공간이 공동체를 상징하니까, 비록 삼촌은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집(방앗간)을 찾지 못하고 그의 모든 노력이 무용으로 끝나지만 조카가 삼촌의 허망한 꿈을 기억하며 그 점에서 삶을 시작하고 이어가니 그들은 희미하게나마 연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당시의 어떤 인물들, 자질구레하면서도 마음을 뒤흔드는 세세한 일들, 그리고 어떤 역사책에서도 언급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뒤로 잡아당기는 저 무거움을 물리치려고 애썼고 저 유독한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기억을 잃어버릴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렀을 것이다. (132)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재독하며 어떻게 감상을 풀어갈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에 아주 우연히 인생극장 <엄마 찾아 삼만리>를 시청하게 되었다. 제목이 촌스러워 무슨 신파극일까 싶었는데 보는 내내 가슴 시리게 훌쩍여야 했다. 루크도 이제 막 애아버지가 되었고 태어난 줄리아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친부모를 찾고자 한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자유롭게 날고 싶은 삶이었지만 어느 순간 돌처럼 날개를 내리누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출생에 대한 의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애타게 바라는 것은 친부모 혹은 그들을 아는 이와 차 한 잔이라도 나누는 것이다. 정확한 생년월일과 진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앞이 아닌 뒤를 자꾸 돌아보게 되나 보다.
입양이라는 제2의 탄생을 통해 명실상부 미래가 보장되고 안정된 삶의 기반을 다지지만 구멍으로 남아 있는 유년시절과 고향에 대한 미궁은 그를 결정적인 순간에 헤매고 떠돌게 했다. 인생 시작점을 알 수 없는 그는 평생을 연극적인 자아로 사회적 가면을 쓴 채 힘겹게 버티어온 듯하다. 진짜 평온한 자신으로 자유로워본 적이 없다. 그렇게 시작된 친부모 찾기는 요행히 지금의 가정을 일구는 계기가 된다. 부모를 찾아 나선 한국방문에서 지금의 아내와 딸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루크는 안다. 아무리 애타게 노력해도 자신의 생애에 뻥뚫린 구멍의 시절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앞으로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토대로 아내와 아기와 함께 새로운 삶을 꾸려갈 것이다. 건강한 가정.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거나 그늘로 얼룩지지 않도록 그는 자신의 몫의 역사의식을 치르는 것이라 생각된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의 화자 파트릭도 딸에게는 유독한 역사의 그늘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 본연의 빛으로 가득한 삶을 만끽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무관한, 뿌리는 그들이되 그들로부터 자유로이 더 인간답게 더욱더 멀리 나가면서도 돌아올 집이 분명하게 자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적 부채의식을 털어내고 자신의 지난날과의 화해할 때 비로소 그는 진정한 성인 남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다르게 딸의 출생이 막중한 역사적 사명감과 함께 불투명한 현실에 맞설 든든한 아버지를 기대하게 만든다. 뿌리 없는 나무로, 부박할 곳 없는 나비로 살아야했던 부모와 선조대의 유령의 삶이 아니라 선명한 빛과 안식이 보장된 삶을 차세대에게는 건네주고 싶은 부정이 깔려있다. 아기의 방해받지 않을 잠과 멸균실 신생아실이라는 설정이 이를 대변해준다. 비록 마지막 장에 세 가족을 실은 택시가 도착하는 곳이 화자의 아버지가 숨어 지냈던 유독한 역사를 반증하는 승마장일지라도 이어진 숨결의 역사라 덜 쓸쓸할 것이다. 화자는 다음과 같이 딸의 시간과 미래를 환하게 열어두고 축복한다.
이 조그만 여자아이는 어떤 의미에서 미래에 우리의 대표자가 될 것이었다. (30) 시계는 너의 어린 잠을 지켜주고 저기 섬들 가까이서 깜빡거리는 빛처럼 너를 보호해주는 구나. (105)
서른의 애아버지이자 작가로 거듭나는 화자 파트릭은 많은 인물,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지금의 그가 되었다. 젊은 날의 향수에 젖어 중국 바라기가 된 앙리, 검은색 서류가방과 불편해보이는 외투로 기억되는 아버지, 아버지를 대신해 총 다루는 법과 폭력성을 경험하게 한 레이놀드, 느닷없는 카페에서의 낯선 노인의 죽음, 소설가가 되는 물밑작업이 되어준 시나리오 작업과 전기쓰기, 한 줄의 대사를 위해 무대상영이 기약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 기억의 중압감을 잊기 위해 찾아간 스위스에서 만난 친구들의 질풍노도, 아내를 만나기 전에 스친 간헐적 여자들, 점령기 파리의 폭군 D일 수 있는 로베르 제르보, 인생의 결산시점을 알려준 알렉스 삼촌, 어떤 이야기도 단독적일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드니즈와 보낸 시간, 옛 집에서 떠오른 유년의 기억, 결혼과 첫아이 출산을 겪으며 관심이 포개지는 부모의 연애기... 우후죽순으로 펼쳐지는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며 독자는 주인공의 2막 인생이 펼쳐지는 시점을 함께 하기에 이른다. 어찌 보면 청춘의 끝, 성숙한 남자로서의 첫 발 내딛기 일 수 있는 곳을 덕분에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파트릭...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결산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좀더 단단한 기초 위에서 다시 시작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단 말이야...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말이야. (177)
자식이 없는 나는 요즘 조카들에게 나란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라는 질문을 가끔 던진다. 내가 죽고 나면 남겨진 존재에 의해 나는 희미하게 기억될 것이다. 나도 알렉스 삼촌처럼 조카가 나보다는 멀리 가고, 다져진 땅에 더 깊숙이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직업 등에 대한 충고를 곧잘 한다. 파트릭은 삼촌과는 무관하고 독립적이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삼촌의 마음은 그저 한낱 인간의 미련이고 핏줄을 향한 조급함임을 안다. 나의 숱한 말들도 조카의 기억 속에 원하는 집(안식처)을 찾지 못한 이모의 애환이자 한계로 옅어질 것이다, 그나마 인간적인 향수를 머금은 그리움으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우리는 왜 알렉스 삼촌이나 앙리처럼 되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나 가질 수 없는 이상을 후대들에게 암묵적으로 이상화하고 그것이 정석인 것처럼 확신하는 것일까. 우리도 겨우 살아낸 것 그 폭 안에서 삶을 보고 말하면서 섣불리 후대의 미래를 재단하려드는지 우습지만 그 충동을 막을 수 없다. 적어도 너만큼은 시간낭비하며 돌아가지 말고 고속으로 내달리길 바라는.
아버지는 감히 당신의 공포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발붙일 곳 하나 없는 두 명의 뿌리 뽑힌 자였고 그늘에서 너무 환한 빛으로, 빛에서 그늘로 그리도 쉽게 옮겨다니며 점령기 파리의 밤 속에 떠 있는 두 마리 나비였다. (236)
소설 속 화자가 하리라는 인물의 전기를 쓸 때 느꼈던 막막함과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구멍은 작가의 인생에도 적용된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작가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스며든 인생 방정식일 것이다. 겨우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부분은 상상력과 존중으로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을 잇는 것이다. 화자가 하리의 딸에게 들려주는 천일야화처럼 일시적이나마 전체로 온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이야기 짓기다. “인간의 어렴풋한 형상, 시시각각 흩어지는 한줄기 수증기”(209)를 그나마 오래 붙잡는 방법이 글과 말인 것이다.
작가는 무늬만 다르게 계속 되어온 전쟁과 학살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죽은 군대의 장군>같이 시체를 나열하고 악몽으로 분열되지도 않는다. 문득 이렇게 구체적인 회고록을 썼기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자전적 소설을 쓰고 나면 어깨의 힘을 뺀 자연스럽게 강도를 조절하는 유영하는 글쓰기가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점령기의 사랑과 결혼을 말한 포근하고 서정적인 소설일 수 있다.
그가 정말 D라고 치더라도 ― 나는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 내가 내비치는 말을 들으면 흐릿한 눈으로 쳐다보리라는 것을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 말은 그에게 아무것도 상기시키지 못할 것이다. 기억 자체가 산화되어 그 모든 고통의 비명소리, 과거의 겁에 질린 그 모든 얼굴로부터 남은 것이란 이제 점점 더 나지막해지는 부름과 희미한 윤곽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의 스위스. (163-164)
1975년부터 45년으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정치적인 혼돈과 위기, 폭정의 시기를 파헤치고 있지만, 화자가 자신이 D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가 아닐 수 있고, 이제 와 설명을 요구해도 그에게는 휘발된 순간일 수 있다며 향하던 걸음을 멈추는 장면에서 역사적 문책과 처벌을 우선으로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거대해 보이는 그들도 폭력을 행사하며 부르는 시대의 하수인일 뿐이고 세월 속에 무참히 쓰러질 나약한 몸을 가졌다고 말한다. 노년의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삶이 단편적이고 필멸하며 서서히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을 법칙으로 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그런 가운데, 안개로 뒤덮인 풍경 속에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있다면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발생되는 사랑과 결혼, 출산일 것이다. 마음의 스위스 말고 현실의 스위스는 나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질 자식(혹은 그 유사물)이라는 형체를 통해서 일 것이다.
엊그제 음악회에 가서 느낀 점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과 삶, 세계, 철학, 가치관, 존재방식 등을 접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게 문학임이 자명하지만, 총체적인 인생에 대해 말 건네는 여러 소리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을 읽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들을 더듬는 방법으로 좋지만 한 작곡가의 인생철학이 통으로 내려앉아 있는 클래식에 귀와 가슴을 열어보는 것도 알찬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도서관에 갈 때면 아무도 찾지 않는 책들을 보면 속이 쓰리고 속상할 때가 있다. 그게 활자든 말이든 소리든 이미지이든 애써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 늘 함께하면 좋겠다. 사진을 촬영할 때 주로 풍경에 집중하는 편인데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인물 위주로 삶의 렌즈를 재조정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마도 인간이 머무는 자리에 대해 생각이 오래 머무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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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부>라는 제목을 바꾸고 싶었다면 <존재를 완성하기 위하여>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1945년에 태어난 프랑스 남자아이들을 대표하는 이름 파트릭, 그중 한 파트릭을 통해 그와 그 양친 시대의 프랑스를 읽는다. 단절적 구성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배열로 이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