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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이 아니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해도 썩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은 구성이다.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를 궁리하지 않고서는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소설이기에. 제목이 인상적이다. 짧은 시간 피었다 지는 장미나 천 년을 산다는 주목이나 같은 값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 그럴 것 같다. 저마다의 생은 저마다의 시간만큼 귀중할 것이니 짧고 길고는 문제가 아닐지도.
이 작가의 글은 재미로만 읽어 나가다가도 금방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 속 인물 중 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면 관찰자가 되어서라도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혹은 어떻게 했던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시간적인 거리도 공간적인 거리도 아득히 멀기만 한 곳에서 남긴 이야기를 읽으며 골몰해 본다.
화자는 사고로 장애인이 된 휴 노리스다. 그의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고 때로 관여하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교류하는 존 게이브리얼과 관심을 갖고 지켜 보는 이사벨라. 화자 노리스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들과 스스로를 끝없이 탐색한다. 우리 모두 그러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해라는 문제가 온다. 이해하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했는가? 이해한다고 믿었던가? 그때는 이해했으나 지금은 이해가 안 되는가? 이해하는 일이라는 게 이토록 변덕스러운 노릇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믿고 지낼 수 있는 것일까? 다들 같은 수준이니까 그냥 그러고 사는 것일까? 이해했다가 안 했다가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고마웠다가 실망했다가 그렇게?
글쎄, 이 작가의 작품을 거듭 읽으면서 해 본 생각인데 작가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선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선하지 않은, 악한 본성을 더 잘 그려 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범죄에 관한 추리 소설이 주요 작품이다 보니 특별히 범인의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 것을 이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번번이 인간의 나쁜 의도에 대한 뛰어난 서술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정치도 사랑도 이 작품에서는 헛되기만 하다. 헛된 일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장미의 순간이나 주목의 순간만큼 내 생의 순간도 나 아닌 이의 순간도 똑같이 귀하고 의미 있다는 말, 깊이 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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