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가계 소박하고 서늘한 우리 옛글 다시 읽기 저자 이상하 | 현암사 | 2015.01.15 | 페이지 328 | ISBN 9788932317168 냉담가계는 주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먼저 경서에 뜻을 두게 하는 편이 좋을듯하니, 사서는 요열하고 경서는 냉담하네." 라며 경서와 사서를 함께 공부하게 하는 방법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요. 역사서는 흥미를 끌기 쉽지만, 경서는 맹물처럼 냉담하여 맛이 없다. 즉, 냉담가계는 경서와 같이 재미없는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옛글의 원전을 해석해 원문과 함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소개하고, 그 글에 담긴 의미를 풀이하는 구성의 책 <냉담가계>. 순서 상관없이 어느 이야기를 먼저 읽어도 됩니다. 옛글이라 생소한 단어도 많지만, 냉담의 맛을 참고 곱씹으며 읽어야 삶의 참된 깊이를 얻을 수 있다 합니다.
<냉담가계>에 나오는 여러 옛글의 소재가 참 다양해요. 정치, 경제, 사회 등 대외적인 부분도 있고 내밀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글 속에 인용된 고사들이 상당히 많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글도 있고 날카로운 비판이 있기도 했어요, 편지글이 대부분이라 읊조리며 읽으면 앞에서 이야기 듣는듯한 느낌이라 더 맛깔나더라고요. 70세의 퇴계 이황이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한 어린 제자 이함현에게 보낸 충고 편지로 부부 사이에 관해 조언을 얻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경서를 인용하는 글을 통해 명언을 함께하기도 합니다. 조선 학자의 글이 대부분이고 그중에서도 퇴계 이황의 일화가 많이 소개되어 있어요. 연암 박지원의 편지글은 게으름 피우는 나른한 일상 편지인데 한 폭의 그림이더라고요. 『 사흘을 연이어 내린 비에 가련케도 필운방의 흐드러지게 피었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녹아서 붉은 흙탕물이 되고 말았네. 』 - p153 99세를 살았던 홍유도는 건강 비결을 언급하기도 했고요, 이쪽저쪽 숨바꼭질 같은 토론 자세를 경계하라는 퇴계와 고봉의 편지글을 통해 전체와 부분을 고루 보는 자세를 배우기도 합니다. 성균관 학생의 출석 점수도 언급되는데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식당에서 먹고 도기에 서명하면 1점이래요. 300점이 되어야 식년시에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하니 이렇게 편지글을 통해 당시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 학자는 먼저 몸과 마음을 수렴하여 냉담가계를 애쓰는 공부를 하여, 이 책에서 연찬하고 곱씹어 음미하기를 오래도록 그치지 않아야 비로소 그 맛이 참으로 좋은 글을 알아 학문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걸세. (중략) 뱃속의 탁한 기운을 씻어내고 일반 사람들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맛을 들인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으랴. 』 - p204~205 냉담가계 책 제목이 바로 한 편의 글 속에 있더라고요. 퇴계 이황이 제자 금계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여기서 말한 이 책이란 "주자서절요"인데요, 이황이 편찬한 주자학문의 정수가 담긴 책이죠. 이황 스스로도 이 책은 재미는 없지만 꼭 곱씹으며 읽어야 할 책이라 말한겁니다. 이것때문에 궁금해서 주자서절요를 한글로 해석한 책이 있나 찾아봤는데 마땅찮군요. 원전은 한문이니 요즘 우리가 읽어내려면 한글화 작업이 필요한데 생각외로 우리 옛글의 해석작업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웠습니다. 우리나라 고서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면 좋겠어요. 퇴계 이황도 냉담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저렇게 말했듯, <냉담가계>의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 고전은 재미없지만 고전을 읽지 않으면 늘 삶의 중심에서 일탈하여 변방을 헤매고 뿌리는 잡지 못하여, 종당에 인문학이란 것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인간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조금만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 책을 손에 쥐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매우 효율적으로 책을 읽는다. 지식을 선별해 가질 뿐 책에서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 - p208 책을 읽는 자세를 이야기한 부분도 기억 남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상태에서 읽으면 자기가 고전을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전을 자기에게 맞추는 우를 범하고 만다고 해요. 이렇듯 <냉담가계>는 옛글을 통해 사색하는 자세, 온전한 삶을 살아내는 힘을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소재 때문에 지루할 틈은 없네요. 이황조차도 경서는 맛이 없다 했습니다. 하지만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고전이 우리에게 남기는 효력이 이토록 당연한데 이만하면 꼭꼭 씹어 삼킬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냉담가계>에 소개된 글은 일상을 담은 편지글이지만 그 깊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처음엔 삼키기 힘들어도 자꾸 읽다 보면 우리 고전만의 정갈한 맛이 확 느껴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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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방법 - 그 하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래서 몇 개의 장을 읽어가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1. 이 책을 이렇게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20 쪽의 <외로운 나무에 핀 꽃>을 읽을 때에 먼저 20 - 22 쪽에 저자가 풀이해 놓은 한글번역을 읽어보는 것이다. 읽어가면서 연필을 들어 지금껏 읽어온 동양 고전 중에 떠오르는 것, 혹은 기억을 떠오르게 해주는 구절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는 것이다. 예컨대, 21쪽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밑줄을 그으면서, ‘흠, 이 말은 논어에서 본 적이 있지’ 하면서 잠시 논어의 위기지학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분명 위기지학을 설명하는 말일테니, 자기가 알고 있는 위기지학의 의미를 보충 또는 확인하는 글로 되새김을 하는 기회로 삼아보는 것이다. 다음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것이 목적을 두어 작위하는 바 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증거이다. 학자가 모름지기 이 이치를 체험하여 바른 의리를 지키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으며 정도를 밝히고 공효를 따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흠, 이것이 위기지학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적용을 하라는 의미구나, 그런데 ‘공효’는 무슨 의미인지 그래서 다시 공효라는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 정도로 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첫째 줄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덕흥이 묻기를 “이 시에는 기수沂水 가에 노니는 즐거움이 있어 일상생활 중에 천리가 위 아래에 다 같이 막힘없이 유행하는 오묘한 경지가 있습니다.”>(22쪽) 여기 기수가 라는 말에 밑줄이 그어진다. 역시 논어에 나오는 말이군! 그렇게 일단 저자가 번역한 한글 문을 읽고 난 다음에는 한문으로 이루어진 원문이 등장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한글 번역문에 별 의문이 들지 않았기에 그냥 한번 훑어 보고 넘어간다. (한문 원문을 살펴야 할 경우는 2 를 참조) 그리고 이어지는 저자의 해설! 이 부분을 읽을 때에는 아까 한글 번역문을 읽을 때에 밑줄 그은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나오는가 나온다. 위기지학에 대하여 언급을 한다. < 생각해 보면, 이덕홍의 말처럼 해오라기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자신을 깨끗이 목욕하는 것이 아니요, 꽃은 찾아주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향기를 풍기고 있으니, 진정한 위기지학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간명하게 묘파한 말이 또 있을까?(23쪽) 그렇게 한글번역을 읽을 때에 밑줄 친 부분에 대하여 저자가 해설한 부분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기억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다음 또 이런 말이 이어진다. < “바른 의리를 지키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으며 정도를 밝히고 공효를 따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는 것은 한나라의 학자 동중서의 말이다.>(23쪽) 아, 그 말이 이덕홍의 퇴계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퇴계가 동중서의 말을 인용하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또 하나의 기쁨이다. 그리고 이어서 기수(沂水)에 관한 언급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기수가에 노니는 즐거움은 공자의 제자 증점의 고사에서 온 것이다.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말해 보라고 하였는데, 증점이 “늦은 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면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 곱 사람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하였다. >(24쪽) 논어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비록 저자가 논어의 정확한 출전(논어, 선진편.11-27)을 밝히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그 정도야 뭐! 그런데 해설에 이런 것이 등장한다. <고반 考槃은 시경 詩經 위풍 衛風의 편명으로 은자 隱者가 사는 곳을 뜻한다, 여기서는 도산서당을 의미한다.>(25쪽) 아니, ‘고반’이란 말이 어디 나왔지? 내가 읽으면서 그냥 지나친 곳이 있는 모양이다. 다시 한글 번역으로 돌아가 살펴보니, 퇴계가 읊었다는 시에 등장한다. <한가히 산 앞에 이르러 고반考槃을 바라본다.>(21쪽) 시경에 나오는 말이었구나. 내가 그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니 그저 지명중에 하나라 생각하고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다시한번 깨닫는 기쁨도 이렇게 읽어가는 중에 얻게 되니, 이 책을 읽어가는 기쁨이 그렇다 할 것이다.
2. 이제 이 책에서 한문 원문을 살펴 봐야 할 경우를 보자. 27쪽이다. 이런 말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어찌 하여 밝다하지 않고 환하다 하였는가?” “텅 비면 빛나고 빛나면 밝음이 생기니, 밝음과 환함은 같은데 환함은 밝음의 극치이다.”>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글을 쓴 성현이 자문한 바와 같이 밝음과 환함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 때에 원문을 찾아보면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보니, 이렇게 되어 있다. <然則何 不曰明而 曰白? 虛則光, 光而生明: 明與白一般, 而白是明之極也> (29쪽) 그러니, 원문에 의하면 ‘밝음’은 明이고 '환함'은 白이다. 우리가 아는 흰 백(白)이 밝을 명(明)보다 더 환한 것이다. 이런 것을 알아가는 재미, 이게 바로 이런 글을 읽는 기쁨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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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 교수의 『냉담가계』는 현암사 관계자로부터 서평 제의를 통해 받은 책이다. 책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는 몹시 반가웠다. 『냉담가계』라는 제목이 좀 생소하기는 했지만, 이 책의 성격이 ‘우리 고전을 연구한 학자가 대중에게 알기 쉽게 들려주는 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우리 고전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런 책이라면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대가 많았던 책을 완독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의외의 전개에 허를 찔린 듯한 책이었다. 이 말은 책에 대해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책장을 넘기면서 느낀 마음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고전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소설, 향가나 시조 또는 한시 같은 시집, 파한집이나 어우야담 같은 수필류, 좀 어렵게는 퇴계나 율곡 또는 다산 같은 학자의 경서나 논저 등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어떤 책이고 어떻게 읽으면 될 것이라는 알려주는 입문서 정도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내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 글에는 역사서나 소설류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퇴계나 율곡 또는 다산의 글이 언급되었고, 시문도 자주 소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했던 것은 나로서는 처음으로 접하는 고전 시문과 사상을 내게 익숙하지 않은 형식으로 이끄는 길잡이 글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의외였는가? 이 책에는 퇴계나 이황 또는 다산 같은 대학자 외에도 책에서 이름 정도 알고 있었던 주자학의 대가나 조선 당대의 문인들의 글이 원문과 함께 수록되었고, 그에 얽힌 풍부한 일화와 저자의 풀이가 있었다. 이런 형태의 책은 거의 처음으로 대하므로 신선하기도 했지만 곤혹스럽기도 했다. 둘째, 고전에 대한 나의 식견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퇴계나 율곡 또는 남명이나 고봉 등이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주자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고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영남학파나 기호학파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두 학파의 차이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갈등이 있었는지에 대한 상식이 내게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했다. 그런 나로서는 퇴계나 남명 등의 이름을 대할 때는 고향의 어른을 보는 듯 반가우면서도 그들의 학설을 들을 때는 그야말로 머리가 터지는 듯했다. 이 책이 그렇게 어려운 고담준론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계(이산해)의 글이나 시문을 읽으면서 그가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계에 대한 나의 상식은 동서당쟁 때는 동인인 대북의 영수로 붕당의 원인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영의정으로서 시국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으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장인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가 당대에 문장8대가의 한 사람으로 거론될 만큼 빼어난 문인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고전에 대한 나의 지식이라는 것이 반쪽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는 이름이 나오니 반가우면서도 그들의 문장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책장을 빨리 넘길 수 없었다. 셋째, 『냉담가계』의 뜻을 몇 번이나 되새겨야 했다. 이 책의 제목인 『냉담가계』는 주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먼저 경서에 뜻을 두게 하는 편이 좋을 듯하니, 사서(史書)는 요열(鬧熱)하고 경서(經書)는 냉담(冷淡)하네."에서 따왔다고 한다. 역사에 대한 책은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같아서 사람의 흥미를 끌기 쉬운데, 사람이 꼭 읽어야 할 경서에 관한 책은 냉담하여 맛이 없다는 뜻이다. 즉 경서는 읽기 어려우니 더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좀 더 쉽게 고전과 가까워지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펴낸다는 것이 저자의 집필 의도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발타자르 토마스의 『우울할 땐 니체』가 떠올랐다. 그 책을 펼칠 때는 우울할 때 읽으면 마음이 상쾌해질 정도로 니체에 대해서 명쾌하게 알려주는 책으로 알고 기대가 컸다. 저자는 서문에서 대중에게 니체의 철학이 무엇인지 쉽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뜻이 명쾌해지기는커녕 앞 문장은 가물거리고 뒷 문장은 파악이 안 되면서 이해가 힘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은 어렵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우울할 땐 니체』는 니체에 대한 『냉담가계』였다. 니체에 대해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나의 배경지식이다. 그러니 『우울할 땐 니체』가 아무리 쉽게 썼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니체의 철학이 냉담을 넘어서 암담하게만 느껴졌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냉담가계』라는 제목의 이 책도 그랬다. 고전에 대한 쉬운 풀이를 기대했는데 생전 보지도 못한 예문이 나오고, 그에 대한 설명마저도 선문답을 듣는 듯 더 혼란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다. 스스로 답답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으니 곤혹스러웠다. 다시 두세 번 되풀이 하여 천천히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 않을까? 초등학생 정도의 수학실력을 지닌 학생에게 미분과 적분을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피차 답답할 뿐일 것이다. 이 책의 모든 부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아계의 시문이나 휴정대사의 글은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읍취헌 박은 부부의‘천재시인 부부의 슬픈 사랑’은 그 애달픈 사연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그 대목은 한편의 시이자 아름다운 소설이기도 했다. 저자는 독자의 고단함을 배려해서 내용과 깊이의 완급(緩急)과 심천(深淺)을 조절하면서 책을 구성한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는 해도 급한 부분에서는 따라가기가 힘겨웠고, 깊은 부분에서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글쎄……, 고전과 인문학에 대해서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고, 관심이 많으며 끈기까지 겸비한 독자에게 적합한 책일 듯하다. 제목 그대로 냉담한 책이다. 그러나 무조건 냉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뭄에 단비처럼 감미로운 대목도 자주 만난다. 또한 냉담하게 보이는 구절도 사실은 수박같은 단맛을 지니고 있는 책이다. 수박의 껍질은 맛이 없고 두텁기만 하지만 쪼개서 빨간 속을 맛본다면 얼마나 달고 시원한가? 더구나 적당히 시원하게 온도를 조절해서 시식을 한다면 삼복더위를 쫓기에 이에 비할 것이 없을 것이다. 수박을 쪼개서 속을 먹을 인내를 가진 독자라면 이 책에서 다함없는 열락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경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이 뜻이 있는 독자에게는 무궁무진한 기쁨을 줄 책이라는 확신은 얻을 수 있었다. 혹시 이 책을 만나는 독자가 기대했던 만큼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자나 출판 관계자가 실망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경서는 냉담하므로 읽기가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럼에도 뜻 있는 독자를 위해서 만든 책이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독자가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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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빈민가의 인문학 학습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를 창안한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라는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더불어 사는 '공생'의 방식 대신 파멸적인 성장을 향해 질주해 온 인류는 경제위기와 환경위기가 중첩된 총체적인 난국에 직면해 있다. 성장과 함께 파괴된 것은 지구 환경 만이 아니었다. 인문학도 함께 몰락했다. 애초부터 '인간의 근본은 무엇인가'를 묻는 인문학은 자본주의적 성장과 어울리지 않았다.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자 '대안'을 찾던 사람들은 다시 인문학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관공서, 기업, 학교 등에서 인문학 강좌가 빈번하게 열렸다. 서점에는 인문학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부활'이 아니냐고 했지만 이는 성급한 판단이다. 한쪽에서는 인문학이 유행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인문학 관련 학과가 통폐합되고 인문학이 스펙쌓기의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들이 심화됐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결과적으로 인문학의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여전히 인문학은 위기이고, 인문학의 지적 토대위에 서 있지 않은 정치 경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인간의 삶을 유린한다.
이상하의 <냉담가계 : 소박하고 서늘한 우리 옛글 다시 읽기>는 인문학의 간판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자기계발서', '처세서'에 불과한 짝퉁들이 넘쳐나는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책이다. 제목부터가 생소한 '냉담가계'는 퇴계 이황이 제자인 금계 황준량에게 답한 편지에서 나온다.
학자는 먼저 몸과 마음을 수렴하여 냉담가계(冷淡家計)로 애쓰는 공부를 하여, 이 책에서 연찬(硏鑽)하고 곱씹어 음미하기를 오래도록 그치지 않아야 비로소 그 맛이 참으로 좋은 줄 알아 학문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는 데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문장의 모본(模本)이 되지도 못하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의 학문은 글자를 새기고 글귀를 외는데 힘을 쏟지 않으면 반드시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정신이 팔리니,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억누르고서 이 책을 읽어 뱃속의 탁한 기운을 씻어내고 일반 사람들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맛을 들일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으랴. (중략) 만약 세상 사람들의 취향에 영합함으로써 자기 책이 세상에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면 성인의 말씀을 모독하고 우리 도를 욕되게 하는데 가깝지 않겠는가. (204~205쪽, 퇴계 이황이 제자인 금계 황준량에게 답한 편지 중에서)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퇴계는 학문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화려한 문장에 정신을 팔지 말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을 곱씹고 또 곱씹으라고 충고한다. 흔히 고전이란 재미없고 딱딱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서점에는 고전을 재미있게 접근하기 위한 해설서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재미만 찾다보면 고전의 참 의미를 놓치기 쉽다. 아니, 퇴계는 처음부터 재미를 찾으려면 뭣하러 공부를 하느냐고, 세상 사람들의 취향에 영합하는 것은 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꾸짖는다.
주자도 "경서와 역사서를 학습하는데 있어, 먼저 경서에 뜻을 두게 하는 편이 좋다"(206쪽)고 했다. 후생들은 심지가 안정되지 못해 바깥쪽으로만 쏠리지 않을 사람이 드무니 요열(鬧熱)한 사서보다는 냉담한 경서를 읽어야 한다는 강조다.
<냉담가계> 저자 이상하는 "인문학이 고전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옛날과 지금이 결코 다를 수 없다. 고전은 재미없지만 고전을 읽지 않으면 늘 삶의 중심에서 일탈하여 변방을 헤매고 뿌리는 잡지 못하여, 종당에 인문학이란 것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인간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게 되지 않을까"(208쪽)라고 했다.
과감하게 재미를 버리고 딱딱하고 서늘한 글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정면돌파' 한다? 배짱 두둑하지 않나. <냉담가계>에 소개된 50편의 글이 비록 재미는 없다고 하더라도, 오랜만에 공부다운 공부를 하는 셈치고 끈기있게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양고전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마음 공부'다. 마음 공부를 하자는데 대체 그 '재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맨밥을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는 것처럼, 처음부터 재미는 제쳐두고 오롯이 글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샌가 고전의 글 가운데서 단맛이 베어나오지 않을까.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공부가 재미있어 질 것이다.
장자는 또 "마음이 바르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텅 비고 텅 비면 의식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장자)고 하였고, 송나라 주렴계는 "욕심이 없으면 마음이 고요할 때 텅 비니, 고요한 상태에서 텅 비면 밝아지고, 밝으면 통한다"(근사록) 하였으며, 주자도 "마음이 전일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절로 마음을 덮어 가리는 어리석음이 없게된다"(주자어류)하였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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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으며 마음이 서늘해짐을 느끼니 과연 고전이 ‘냉담하다’는 말에 새삼스레 공감하게 된다.
‘고전’이란 말은 예로부터 전해온 글이나 작품을 의미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널리 읽어왔다는 뜻도 지닌다. 옛 글이지만 오늘 날에도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오히려 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고전의 특징인 셈이다.하지만 오랫동안 널리 읽혀왔음에도 현대에 이르러 고전의 의미는 크게 퇴색되고 말았다. 고전 자체가 지닌 의미의 퇴색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여러 사정으로 고전을 멀리함으로써 고전이 현대생활에서 멀어졌다는 말이다. 급기야 고전은 학자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읽는 ‘어려운 책’ 혹은 ‘난해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현대인과 고전이 멀어진 것을 두고 저자는 성현의 말을 빌려 ‘고전은 냉담하여 맛이 없다’고 하였고, 제목을 ‘냉담가계’라 적었다. 냉담가계는 “경서와 같이 재미없는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고도 적었다. 아쉽지만 사실과 다르지 않으니 부정할 수도 없다. 실제로 고전은 냉담하여 맛이 없거나, 우리가 너무 멀어져 맛을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혹은 우리가 너무 먹기 쉽고, 맛있는 것만 좇는 일에 지나치게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결과적으로 고전은 맛이 없고, 어려워 가까이 하기 힘든 것이라는 게 보통의 고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게 고전의 현주소다. 그렇다면 고전은 맛이 없으니 읽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일제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해방 이후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한자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되어 수천 년 간 지속됐던 한자의 사용이 ‘청산하고 개선해야 할 구식’의 낡은 것이 되었다. 고전의 쇠락이 시대적 흐름에 의한 필연적 결과라면, 정말 고전은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정말 그렇다면’이라는 이야기다.
고전을 멀리하게 된 경향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인문학 열풍과 함께 불어든 ‘해설서’의 흥행 바람이다. 딱딱하고 어렵다고 느껴졌던 옛글과 작품을 작가의 현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해석한 책들이 꾸준한 인기를 보이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고전’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맛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고전은 냉담하여 맛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냉’과 ‘담’에 ‘차다’와 ‘맛이 없다’는 의미만 있는 것일까 ‘냉’하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번잡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다. ‘담’하다는 것은‘잡스런 것이 없고 깔끔하다’, 혹은 ‘자극적이지 않고 담담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냉담하다는 것은 번잡하지 않고 담담하다는 뜻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냉담가계>의 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소박하고 서늘한 우리 옛글 다시 읽기” ‘담담하지만 그 안에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서늘함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교과서니 뭐니 하는 것들을 통해 접해왔던 대의명분과 같은 거대한 사상에 대한 담론보다 우정을 나누고, 이해를 구하며, 깨달음을 전하려는 성현 간의 교류를 담은 글들을 담고 있다.
냉담가계라는 제목의 이황의 글 한 부분을 발췌한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의 학문은 글자를 새기고 글귀를 외는 데 힘을 쏟지 않으면 반드시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정신이 팔리니,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억누르고서 이 책을 읽어 뱃속의 탁한 기운을 씻어내고 일반 사람들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맛을 들일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으랴._205쪽」
‘역사서는 사람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와 같아 흥미를 끌기 쉬운데 경서는 그 내용이 냉담하여 맛이 없다’고 한다.이황이라는 대학자의 책과 글도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를 잃고 만다. 삼국지니 수호지니 하는 고전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고 권장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역사서와 경서를 대하는 우리의 온도차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학, 그 중에서도 주자학은 우리나라의 발전을 저해한 해로운 학문으로 인식되어 이제는 그 연구자가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불과 100여 년 만에 수천 년의 명맥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시대적 흐름에 의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 우리 문화의 뿌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부정하고 외면할 수 없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하나다. 그 하나의 태도란 ‘조금씩이나마 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 모르고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잘못되었다면 왜 잘못되었는지, 잘 되었다면 어떻게 본받을지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유교와 주자학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국운을 좌우하기도 했고,시대착오적인 주장과 유연성을 잃은 고지식함으로 곤란을 초래한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반면교사라는 교훈도 있다. 옳지 않은 것을 통해 옳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기분 탓인지 이 책에는 탄식과 아쉬움이 담긴 글이 많았던 것 같다. 고전은 혼자 읽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다. 고전을 해석한 책이 쏟아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이 책도 어렵고 밋밋해 맛이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옛글의 자취를 좇는 첫걸음에 맛있는 책을 찾는 것이 오히려 멀리 갈 수 없게 발목을 잡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히 나쁘지도 않을 책이다.
우리 고전보다 서양 고전이 오히려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걸까 국어사전에 실린 한자어가 여전히 무수하고, 우리 사회에 유교의 뿌리가 여전히 굳건한데, 우리 옛글을 읽는 이는 학자 혹은 학생뿐이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아직은 한 겨울, 무척이나 냉담한 계절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도 냉담한데다 더욱 더 냉담해져 가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냉담하다는 우리글 읽기를 시작할 때가 아닐까 35쪽 고전을 읽다 보면 두 번씩 놀라곤 한다. 옛 성현들의 말들이 너무도 서로 비슷함에 놀라고, 한편 서로 같은 듯하면서 너무나 다름에 또 한 번 놀라곤 하는 것이다.
47쪽 허망한 집착은 버려야 하지만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좋은 것은 좋다 하고 싫은 것은 싫다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106쪽 명색 학자가 어느 사상의 신도가 되어 무턱대고 다른 사상을 배척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112쪽 주자는 맹자처럼 토론에서 결코 지지 않았고 그 어조도 결연하여 상대가 끝까지 수긍하지 않으면, 심지어 “천하에 단지 하나의 이치가 있을 뿐이다. 이쪽이 옳으면 저쪽이 그르고 이쪽이 그르면 저쪽이 옳으니, 양쪽이 병립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양시양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240~241쪽 학자들은 대개 자득을 좋아하고 중시한다. 자득은 스스로 터득한다는 뜻인데 주자는 자득의 ‘자自’는 ‘독자獨自’의 ‘자’가 아니라 ‘자연自然’의 ‘자’인데 학자들은 ‘독자’의 ‘자’로 알기 때문에 굳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고 하였다. 즉 자득이란 사색하여 그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지 홀로만 아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264쪽 글은 단지 자기 견해를 드러낸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사실을 만들어내어 남을 해치며 종잡을 수 없는 싸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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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 : 냉담한 생활로 이어지는 냉담한 독서
제목을 통해 저자가 요구하는 것
먼저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그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이 책을 읽을 때에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저자가 그 책 제목을 통해 우리에게 이 책을 읽어가는 방향을 미리 지정하여 두었기에 그렇다. 냉담가계(冷淡家計)! 그 말은 이 책 206쪽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말이다. <냉담가계는 가난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주자가 친구인 여조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서와 사서를 함께 공부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먼저 경서에 뜻을 두게 하는 편이 좋을 듯하니, 사서(史書)는 요열(鬧熱)하고 경서(經書)는 냉담(冷淡)하네. 후생들은 심지가 안정되지 못해 바깥쪽으로만 쏠리지 않을 사람이 드무니, 이 점을 미리 방비해야 하네”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역사서는 사람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같아서 사람의 흥미를 끌기 쉬운데, 경서는 그 내용이 냉담하여 맛이 없다는 뜻이다.>(206쪽) 즉 경서는 읽기 어려우니 더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냉담하게 경서를 읽으면 어떻게 될까 <삼산 유정원은 젊은 학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대가 이러한 재주와 자질을 가지고서 일찍이 과거 공부의 굴레를 벗고 냉담가계에 뜻을 두어 지기가 안정되고 식견이 풍부하니, 젊은 이 중에서 내가 드물게 보는 바이다.>( 206-207쪽) 즉, 냉담가계에 뜻을 두고 경서를 읽는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기가 안정되고 식견이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러한 주자의 뜻을 이어받아 독자들로 하여금 냉담가계에 뜻을 두고 글을 읽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냉담가계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등장한다. <이때 그대들 몇 사람이 급변하는 세상 풍파 밖, 한적한 초야에서 서로 어울려서 경서를 읽는 냉담한 생활을 하면서 옛 선왕의 유택을 노래하고 육경의 유지를 강론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크게 기쁜 일이요, 좋은 소식인가.>(243-244쪽) 순암 안정복이 녹암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글에 등장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편지의 수신자인 녹암 권철신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냉담하게 경서를 읽어가면서 그런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니 무척 기쁘다는 것이 안정복의 소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 권철신이 그렇게 냉담가계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인용한 편지글에서 ‘이때’가 언제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때'는 “세상은 쇠퇴하고 학문은 단절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인욕에 함몰되어 버린” 때이다. 그런 때가 분명 있었다. 굳이 우리 역사를 들쳐보지 않더라도 '이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때'에 냉담가계의 태도로 경서를 읽어 그런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지금은 그 ‘이 때’와 얼마나 다른가? “세상은 쇠퇴하고 학문은 단절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인욕에 함몰되어 버린”정도가 그 ‘이때’에 비교하여 어떠할까? 대부분은 현재 지금이 그 ‘이때’보다 더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냉담가계에 대한 필요성은 더 증대하고 절실할 터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오늘 날 사람들은 조금만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 책을 손에 쥐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매우 효율적으로 책을 읽는다. 지식을 선별해 가질 뿐 책에서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208쪽) 그 ‘이때’에는 ‘인욕에 함몰되어’ 있었는데 지금 역시 (자기 필요를 따라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경서를 언제 냉담하게 읽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경서와 사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고전’이라 칭하면 어떨까?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고전은 본래 냉담한 것이니 그 냉담한 맛을 참고 씹으며 고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인문학을 할 수 없다.> ( 208쪽) 결국 경서 사서를 포함한 고전을 냉담하게 읽지 못하는 현 세태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이 이 책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선인들의 독서법을 자주 거론한다. 어떻게 하면 현대의 독자들이 고전에 심취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선인들의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몇 개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주자는 문인에게 독서하는 법을 말하면서, “글은 차라리 얕게 볼지언정 너무 깊게 보아서는 안 되고, 차라리 낮게 볼지언정 너무 높게 보아서는 안 된다”하였고...>(242쪽) <퇴계 이황도 고봉 기대승에게 자신의 독서 방법을 말하면서 “얕으면 얕은대로 두고 감히 파고들어 깊게 보지 않으며, 깊으면 깊은 데까지 나아가고 감히 얕은데 그치지 않는다.”>(245쪽) 사족, 하나 저자가 주자의 글을 인용하여 경서와 사서를 읽을 때의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했는데, 그런 구분과 관련하여 남회근의 흥미있는 발언이 있어 소개한다. <문학 속에는 철학이 있습니다. 이 생각을 한번 활용해 보십시오. 어떤 상황이라도 좋습니다. 사회든 정치든 어떤 방면이든 거기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이럴 때는 독서를 하십시오. 『역경』이나 사서오경을 읽어 보십시오!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무료하거나 침울할 때, 또는 졸릴 때는 역사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투지와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강한 날에는 경서를 읽고 부드러운 날에는 사서를 읽으라고 한 것입니다. 강유(剛柔)의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 (<주역 계사 강의>, 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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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한 글의 참맛을 느끼다 사람의 사귐, 그 사람들의 사귐의 내용이 되는 멋과 풍류에 관심을 갖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것이 옛사람들의 그림과 글이다. 이중 그림이야 시각적 표현이 중심이 되다보니 글 보다는 쉽게 접하게 되고 또 그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글은 높은 장벽으로 인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장벽이란 현실적으로 한자문화권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한자로부터 소외된 교육으로 인한 것이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눈 밝은 사람들의 노력에 더불어 어렵사리 얻어 보는 글로나마 그 내용을 짐작하게 되고 그 속에 담겨진 멋과 풍류를 쫒아가다 보니 더딘 걸음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어딘가? 하지만 그 역시 만만찮은 벽에 부딪치고 만다. 그 첫째가 해설자들의 편견에 싸인 해석이거나 어설픈 주석에 의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옛사람이 쓴 고전을 지금의 시선에 맞추어 바라보며,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데 주력하는 바람에 고전이 내포하고 있는 정확한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용케고 이런 벽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읽는 이의 무딘 감성으로 인해 원문이 담고 있는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상하의 ‘냉담가계’는 옛사람들의 글에 대한 현대인들의 태도를 보고 옛글이 너무 쉽게만 도구적으로 읽히는데 대한 아쉬움으로부터 출발한다. 고전이란 원래부터 “맹물처럼 서늘하고 담담”한 고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책, 옛글 특유의 ‘맛없음’마저 깊은 맛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고전 길라잡이’를 꿈꾸며 출간한 책이다. ‘냉담가계’는 이상하 교수가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의 향기’ 코너에 2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해서 꾸려졌다. 그렇다면 ‘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해서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는 고전’을 왜 읽는 것일까? 그것은 옛사람들의 글이나 삶의 방식에는 지금 이곳에서 얻을 수 없는 깊은 지혜와 울림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인다. ‘텅 빈 마음에 빛이 생기나니’,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살구꽃은 봄비에 지고’, ‘고전은 원래 냉담한 법이니’, ‘세상은 물결이요, 인심은 바람이라’등 총 5부로 엮은 글은 ‘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해서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는 고전’의 글맛을 알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산해, 이황, 홍대용, 임억령, 남효원, 김시습, 김정희, 안정복, 권철신, 김창협, 박지원, 퇴계와 고봉 등이 벗들과 나눈 편지글이 중심이기에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진솔한 내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름 있는 선비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부인과의 말다툼 등과 같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나 학문하는 학자로써의 자세, 선비의 삶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다. 책에 담긴 50편의 글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옛글 읽기의 즐거움과 옛글을 읽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맹물과 같이 심심하고 냉담’하다는 옛글에 담긴 사람의 따스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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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가계(冷淡家計) 옛날의 선비들도 딱딱한 고전에서는 좀처럼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던가보다. 오죽하면 냉담(冷淡)하다고 했겠는가. 동서를 막론하고 고전의 글들은 대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서점에 가보면 이제 고전들도 각양각색의 자태로 단장하고서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고전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닌 것들도 있다. 고전은 고인(古人)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 맛없는 맛을 곱씹어 느껴가며, 조금은 옷깃을 여미고 읽어야 오히려 독서하는 맛이 나지 않을까. 이 책의 요점은 오로지 학문을 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굉장하고 대단한 말이 강물을 기울이 듯 쏟아져도 문장을 잘 지으려 그렇게 쓴 것이 아니며, 은미하고 오묘한 뜻을 짧은 글에 담고 있더라도 가르침을 숨기려 그렇게 쓴 것이 아니다. 구구절절이 사우(師友)간에 주고받는 진정한 학문의 뜻 아님이 없으며 또한 서로 절차탁마하고 책려(責勵) 권면하는 말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학문의 길로 인도하는 힘이 다른 책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학자는 먼저 심신(心身)을 수렴하여 냉담가계(冷淡家計)로 애쓰는 공부를 하여, 이 책에서 연찬(硏鑽)하고 곱씹어 음미하기를 오래도록 그치지 않아야 비로소 그 맛이 참으로 좋은 줄을 알아 학문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전처럼 재미없는 책을 읽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옛 선비들도 딱딱한 경전에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문을 게을리 하곤 했는데, 성현들은 이런 세태에 대해 '경전이란 원래 맹물처럼 서늘하고 담담한 것이니 거듭 곱씹어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냉담가계》라는 말을 썼다. 책의 뒷 표지에 보면 두 가지의 재미있는 질문이 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옛 글이나 문서에서 우리가 읽어 내려오면서 깨우쳐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한 우리에게 옛것을 보고 배우고 글로서 옛 사람들의 지식을 습득하면서 지혜의 글들을 우리는 배운다. 이런 책은 옛사람이 쓴 고전을 지금의 시선에 맞추어 바라보며,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데 주력하는 바람에 고전이 내포하고 있는 정확한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고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옛것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바탕에는 옛사람들의 글이나 삶의 방식에는 지금 이곳에서 얻을 수 없는 깊은 지혜와 울림이 있다는 믿음, 현대의 지식이 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얻겠다는 의지가 자리한다. 고전이 힐링과 처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권하는 책이 있다. 고전의 대중화도 좋지만, 맹물처럼 서늘하고 담담한 고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책, 옛글 특유의 ‘맛없음’마저 깊은 맛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고전 길라잡이’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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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고전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국내 고전 소설이나 인문학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다. 고전은 늘 고리타분하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다는 편견을 내내 가지고 있다, 18세기 활동했던 백탑파의 글을 읽고 조금 깨트린 게 전부다. 이후로 고전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지만 남다른 식견이 있는 건 아니고 거부감을 조금 덜어낸 정도다. 최근 소설 위주로 읽은 터라 나름 지쳐있어 오랜만에 만난 고전이라 이 책을 잘 읽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옛글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쉽게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었는지 이 책의 묘미를 발견한 건 중반부에 들어섰을 때였다.
우리 마음도 지혜의 밝은 빛을 비추지 않으면 어두컴컴한 무지 속에 탐욕과 아집이 도둑처럼 숨어 살아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내면은 보지 못하고 바깥세상만 보는 사람들은 마음을 헐떡이며 한사코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 불행해지고 만다. (26쪽)
마치 나를 향해 하는 말인듯 정곡을 콕 찌르는 문장을 보면서 이 책에 실린 옛 사람들의 글이 내 마음에 밝은 지혜의 빛을 비춰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전은 담담하여 처음 읽으면 맛이 없다. 그러나 곱씹어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더욱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냉담가계는 담담한 고전 읽기를 뜻하는 말이다.’란 이 책의 뜻처럼 처음부터 나에게 고전의 ‘맛’을 선사해 주는 듯하더니 이내 ‘담담함’이 심심함으로 다가왔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과감히 책장을 덮고 글이 내게 와 닿을 때 펼치다보니 읽기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더 곱씹을 수 있었지만 이런 담담함이 나에게도 깊은 맛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었다.
담담히 읽어나가며 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에 메모지를 붙이며 다시 한 번 음미하는 동안 내 추억을 꺼낼 수 있는 옛글을 만났다. 바로 소동파의「전적벽부」에 대한 설명으로 동파가「적벽부」를 읊을 때는 7월 기망(음력 16일)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는데, 몇 년 전 정민 선생님과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흔적을 찾는 강진 답사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가 7월 16일이었는데(여건 상 음력까지 날짜를 맞추기는 힘들었었다.) 바다 위에 배를 띄워놓고 달구경을 했었다. 소동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서 괜히 반가운 마음이 일어 그때부터 좀 더 마음을 열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총 다섯 개의 제목으로 묶인 글이 실려 있는데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연유든 간에 서간을 주고받으면서 나이를 떠나 지식으로 서로가 친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주고받은 편지들이 모두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깨우침을 주는 글이었다고 할 수 없지만 예의를 갖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지식인들의 모습이라 인상 깊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서간을 주고받는 것밖에 연락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말이든 글이든 쉽게 할 수 있고 순식간에 퍼트려지는 것을 보면 당시의 신중함과 배려, 포용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드는 것이다.
또한 책읽기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채찍질도 많이 한 셈이었다. 책을 좋아하게 되면서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 읽으면서도 제대로 읽을 때가 흔치 않고 책을 더 알아 가면 알수록 내 취향에 맞는 책만 읽기 마련이라 편중된 독서를 한 것도 사실이다. ‘즉 자득이란 사색하여 그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지 홀로만 아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고 이치를 사색하다 보면 이치가 미처 마음에 와 닿기 전에 자기 생각으로 지레짐작하여 우격다짐으로 알아버린다.(241쪽)’란 문장을 보며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나의 직업이 학문을 닦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크게 이루겠다는 뜻도 없지만 단순한 독자더라도 한 권의 책을 만날 때마다 곱씹고 음미하면서 제대로 읽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겉핥기식 혹은 보여주기 위한 독서와 오독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이 책을 읽으면서 고전은 여전히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단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면 이런 글을 읽고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글은 말보다 정제되어야 한다. 말을 할 때는 가끔 실수하고 또 그 자리에서 고칠 수도 있지만 글로 기록되면 많은 사람에게 오래 전파될 수 있으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글이 말보다 더 가벼워졌다. (263쪽)
이 책에 실린 글 이외에도 서로간의 대화가 오갔을 거라 상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정제되지 못하고 말보다 가벼운 글을 많이 찾아볼 수는 없었다. 나와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자신을 낮추고 포용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 책 속의 글을 읽다보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면서도 요즘 시대에는 대중 앞에 서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글 속의 지식인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로 보는 식견과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잣대를 대기 위해서는 정진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지식이든 삶의 방식이든 간에 옛 성현들을 통해 내가 받은 가르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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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가계
현암사
이상하 지음
냉담가계 (冷淡家計) 고전은 담담하여 처음 읽으면 맛이 없다. 그러나 곱씹어 음미하면 음미할 수록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냉담가계는 담담한 고전 읽기을 뜻하는 말이다.
나에게는 얼마나 그리운 고전인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옛 선인들의 글의 맛을 이제야 알겠되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옛 선조들의 글,그림,동양화의 맛,묵의 농도를 느끼며 그 속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진다.
작자는 이 책에서 역문(譯文)에서 해설을 덧붙여 사용하고 고전의 글을 소개할 때,그 시대를 떠올리고 느끼면서 단상 (斷想)을 써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시대적인 배열이기 보다는 재미있는 글들을 뽑아 선별해 놓아서 부담을 가지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기에 좋은 책이다.늘 가까운 곳에 두고두고 보고,사전처럼 자주 찾아보는 책으로 곁에 품어두어도 좋을 것이다.고전은 우리를 크게 만들고 깊고 깊은 숲으로 인도한다. 머리가 복잡한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는 시간으로 이끄는 고전문학의 맛을 알아가는 시간이길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에서 먼저 살았고 이 땅을 밣았을 선조들의 삶과 희노애락이 담긴글들은 만날 것이다.학창시절의 밑줄치고 별★표하던 시험을 보기위한 학습이 않인, 자연의 소리,바람의 소리를 옛 선조들의 정취를 느껴보는 시간 이였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지고 의식주 문화가 달라져도 인간이기에 인생을 살아가는 길은 다르지 않는가보다 .
이 책은 2015.01월이 초판인 올해 들어서 따끈따끈한 책이다. 크게 1부-5부까지 나누어서구성되어있고 각 부아래는 10편의 글을 수록한 구조로 이루어진 글이다 차례목록을 보면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빼뺴로과자를 먹는 것처럼 끌리는 제목을 뽑아서 읽는 재미가 있다.순서에 얽매이지말고 눈길가고 마음가는 글의 제목부터 읽어보는 재미도 있다. 고전을 학습하는 마음이 아닌 그들의 글에서 인생을 배우고,자연을 느끼자. 요즘은 영상이 많이 차지하는 이른바 비디오의 시대이다. 모든 매체가 텔레비젼,인터넷,스마트폰...등의 우리의 마음과 시건을 사로잡는다. 자연,공기,소리의 오염으로 우리는 자연과 먼 도시 생활에서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찾기는어렵다. 고전에서 우리의 영혼을 찾는 시간을 가져본다.한 권의 냉담가계의 고전책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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