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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질병이나 사고처럼 자연스럽게 맞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때는, 대개 더는 살 수 없어서이다. 갈 곳이 없어서이다. 거대한 운명의 사슬이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그 어떤 틈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옴짝 달싹할 수 없게 가로막고 서 있기 때문이다. 심청이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 임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축약된 형태의 이야기로 만났을 때에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그 이야기에 설득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우리는 조금 더 현실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심청전의 여러 판본들에서 이미 심청이 아비의 눈을 뜨게 한다는 공양미 삼백석의 미끼가 사기란 걸 짐작하고 있다는 암시가 뚜렷하다는 학설이 지배적이지만, 그걸 믿건 안믿건 어쨌든 선택은 심청 자신이었다. 그녀는 눈먼 아비를 혼자 두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꿈 속에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는 앞못보는 아비의 덧없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윤상과 떠날 수도 없는 15세 소녀의 마지막 선택.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죽음의 진짜 이유다. 동냥과 품팔이로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 살더라도, 만일 내일을 꿈꿀 수 있다면 목숨을 공양미 삼백석과 바꿀 수 있었을까. 설령 아비의 눈이 번쩍 뜨이는 기적을 99% 믿었다 한들, 사랑하는 윤상과의 미래가 가시적으로 보인다면 깊은 물 속으로 몸을 던질 용기가 생겼을까. 소경이라고 하나 욕망을 붙잡지 못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음흉하다는 소문까지 몰고 다니는 아비를 봉양해야 하는 그녀의 심경이 되어 본다면, 윤상에 대한 사랑이 커질 수록, 앞못보는 아비를 버리고 싶은 욕망과 그러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생기는 좌절감과 죄책감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사랑하는 윤상이 있다. 그를 따라가면 그는 그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었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그러나, 그녀는 아비를 봉양해야 하는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친부모처럼 젖물려 키워준 귀덕어미와 그의 아들을 배반할 수도, 어엿한 양반 자제가 상놈과 붙어먹을 수 없다는 아비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다. 어떤 다른 선택이 있겠는가. 눈먼 아비의 낡은 도포 자락을 잡고 구걸을 하던 유아기를 거쳐, 온갖 잡일로 아비를 봉양해야 했던 날들, 그 고단한 삶의 맨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엇일까.사랑에 눈 뜨지 않았다면, 만일 윤상과 둘이서 행복한 날들을 소망할 수 있는 잔인한 가능성마저 없었다면 그럭저럭 아비의 수족이 되어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운명에 저항해볼 기회조차 없었을런지 모른다. 내 삶은, 운명이라 생각했고 체념했던 삶의 한 자락 끝으로 차마 아비를 버릴 수 없기에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지개처럼 내것이 될 수도 없는 사람. 나의 몫이 아닌 사랑. 이승에서는 꿈꿔볼 수 없는 행복. 그 모든 것이 헛되지 않더냐. 본디 선녀임을 자각해가는 심청의 마음은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적 허무주의로 가득하다. 환상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저변에 깔려 있는 불교적 사상이 편안하고 아득하게 다가왔다. 어릴 때 축약본으로 읽었던 심청전 스토리에 이승에서의 사랑과 천상계에서의 사랑이 결부되어 불교적 색체를 띈 사랑 이야기로 치닫는 연인 심청은 돌고 도는 윤회의 늪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잘 배합되어 있다. 한국어판 위키백과(2월1일자)에 의하면 심청전의 원전 판각본은 여러 버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은 그 중 송동본 계열의 판각본 원전에 가까워보인다. 윤상과의 사랑과 천상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가미되었다고는 하나, 원전의 기본 스토리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실성있고 빠른 전개로 때로 숨막히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 공모전 수준의 독후감 대회가 열린다. 1등은 천만원이고, 2등 3등도 상품이 상상도 못할만큼 크다. 어마어마한 상금의 규모에 움찔하지만, 응모하는 데 돈받는 거 아니므로 모두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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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알고 있던 아버지를 향한 '효녀 심청'은 옵션이요, 자신의 한 목숨 희생하여 모두를 구원해 내고자 하는 '만인의 연인 심청'으로 거듭났다. 그녀의 아비인 심학규는 단순히 심약한 노인만으로 그려져 잇지 않다. 타고난 천성으로 야망은 크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절망 또한 커서 나날이 타락해가고 있는 인물인데다가 육신의 눈이 먼 것과 같이 욕정에도 눈이 먼 인간이며, 심청에게 기생하는 몰염치한 노인네인데 이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한다. 또한, 위태로운 슬픔의 질량을 청이만큼 가늠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청이에게 주는 상대 남성은 '윤상'이란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심청과 심학규의 질긴 인연이 실상은 반드시 실행해야 할 과업에 지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는 고려국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불교에서 당연시하는 윤회 또는 환생에 근거한 업에 있을 것이다.
혼돈은 남해 왕과 북해 왕이 사람처럼 일곱 개 구멍을 뚫어주자 그만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일곱 개의 구멍이란 눈이요 코요 귀요 입이다. 이것이 모두 합쳐 일곱 개 구멍이라 하여 칠공이라 한다. 그러면 심봉사 자기가 정녕 혼돈 같은 괴물이라면 눈을 뜨는 순간 자기는 죽어버리고 마는 게 아니냐. 어둠 속에서라야 살고, 어둠이 끝나면 삶도 끝나버리는, 자기는 정녕 끔찍하고도 기이한 운명을 타고난 괴물인 것은 아니냐. 그러면 자기는 어둠으로 집을 삼고 옷을 삼고 몸을 삼아 한평생을 어둠의 꿈같이 살다 가야 하는 게 아니냐. -p260~261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천대를 당하기란 앞을 못 보고 가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동거지가 깨끗하지 못함을 청이는 알고 있다. 아비가 지붕이 되고 울타리가 되는 것이 순리인 세상인데 거꾸로 아비를 봉양하며 살아가야 한다. 윤상이는 친아버지인 장 상서 댁이 남편이 있는 계집종을 건드리면서 얻은 자식이라 공식적인 그의 아들이 못된다. 이렇듯 윤상이와 청이는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를 두어 서로의 슬픔이 크다는 것을 깊이 동정하면서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투전판 뒷전에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천덕꾸러기 손을 덥썩 잡아준 뺑덕 어미로 인해 혼란스러운 심학규는 급기야 발을 헛디뎌 개울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때마침 지나던 몽운사 화주승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심봉사의 처지를 안 화주승은 부처님 전에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뜰 거라는 바람을 집어넣고, 청이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심봉사는 오로지 자기 처지만을 늘어 놓는다. 동네 처녀를 농락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상태에서 장가를 들고도 애어른 같은 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덜컥 눈이 멀어버린 심봉사다. 때맞춰 중국 뱃사람들이 남경으로 가는 뱃길이 험하여 인당수에 제물로 바칠 열다섯 살 처녀를 사겠다는 소문을 듣게 된 청이는 그 댓가가 쌀 삼백 섬이니, 그것은 아버지가 몽운사 화주승에게 약속한 공양미가 아니던가! 안 가지는 게 아니고 못 가져서, 못 가진 괴로움이 평생의 한이 되어, 한시도 한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아버지다. 뱃사람들은 청이가 마음을 정하자 그녀의 효심을 알고, 공양미 삼백 석 뿐만 아니라 심봉사가 여생을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웃돈을 얹어준다. 하지만 심봉사는 하나뿐인 여식이 슬하를 떠났어도 염불보다 젯밥인 격으로 마음이 돌아가니, 재물이 자기 손에 들어오자 돈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여자와 노름과 술이 떠날 기미를 보이질 않고, 심지어 공양미 삼백석에서 절반을 뚝 떼어 자신의 욕정을 위해 탕진하고 종국엔 성병이 온몸을 창궐한다. 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용왕의 제물이 되고 사나운 바다는 고요해졌으며, 덕분에 남경으로 향하는 배는 건강부 남경에 닿을 수 있었다. 청이의 죽음을 목전에서 본 윤상이도 어엿한 뱃사람이 되어 자기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지 내일이 꼭 일 년째, 청이가 환생한 듯 수평선 바다 한가운데 커다랗고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가 윤상이 탄 배를 향해 다가온다. 이에 뱃사람들은 평소 꽃을 사랑하시는 자애로운 고려국 나라님께 진상하고 연꽃 속에서 나온 청이는 죽은 왕비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왕의 아내가 된다. 서해도 황주 땅 가난하기 짝이 없는 눈먼 선비 딸이 한 나라의 국모가 될 수 없다는 죄책감에 빠진 청이였건만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는 어진 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의 근심을 덜어줄 생각만 한다. 이에 궁궐에서는 행방불명이 된 심학규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눈먼 장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다. 뺑덕 어미에게 돈 뺐기고 버림 받아 처참한 몰골에 여전히 맹인인 아버지를 마주한 청이는 죽음을 문턱에 둔 심봉사를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어 감긴 눈을 뜨게 하고 생사를 넘나들던 그에게 생명을 솟게 하며 농창들까지 사라지는 기적이 벌어진다. 한편, 희빈 정씨의 질투와 야망에 의해 궁지기가 된 윤상이에게 불똥이 떨어지니, 결국 청이는 또다시 아비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해 버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총 상금 3,000만원 『연인 심청』 독서감상문대회
응모 방법 ▪대상 도서: 『연인 심청』(방민호, 다산책방) 다산북스 블로그 http://blog.naver.com/dasan_books ※ 원고 말미에 성명,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기입
시상 내역 1. 개인 부문 2. 단체 부분(20명 이상 참가한 학교, 대학 동아리, 독서토론회 등. 개인 부문에도 자동 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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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권선징악으로 이뤄진 전래동화를 읽으라고 한다. 그때가 사회규범과 규칙을 알아가는 시점이기에. 하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많이 읽어주지 않았다. 지나치게 비뚤어진 시선도 많고, 일방적인 생각을 강요하는 것도 많지만, 그것보다 세상은 동화처럼 결론 나지 않았다. 악한 사람들이 더 부자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다. 동화의 결말과 현실은 이렇게도 많은 차이가 나니... 씁쓸하다고나 할까? 나는 어린 시절 심청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죽 못났고, 능력이 없으면 자신의 딸을 그런 식으로 죽음에 몰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심청을 효녀의 표본인양 말하는 게 지나치게 가식적이고 껄끄러웠다고나 할까 이번에 내가 읽은 ‘연인 심청’은 새로운 인물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혀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말에 혹해 읽게 되었지만 뭐 이건 동화보다도 더 우울하니...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동화 심청보다 더 우울하고 더 고통스럽다. 도대체 뭐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건지... 심청은 희생만 하다 죽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짜증이 난다. 이 책은 심 봉사의 무능하고 혐오스러운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시원한 면도 있지만 그렇기에 나는 심청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줄 알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없는 시간동안 심봉사는 저질스럽고 양심도 없는 행동을 한다. 저것도 아버지 일까 싶은 행동을 하는 그가 다시 심청에 의해 눈을 뜨고 목숨을 건지는 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심청은 다시 사람이 되어 부활해 왕비가 되었지만, 제기랄... 꽃다운 처녀가 죽기 일보직적(?)의 왕과 결혼이라니... 동화책에는 ‘젊은 왕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을 내지만 이건 뭐... 심청이 노인정도 아니고... 아버지와 늙은 왕까지... 도대체 도움을 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동네 오빠 윤상이 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설정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이 여인을 만인의 연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도 홀로 구원받음에 기뻐하지 않는 여인. 사랑의 힘으로 모든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여인. (중략) 나의 심청은 과거가 아니라 차라리 미래의 여인이다.’ 이런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똥 싸고 있네’다.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만인의 연인으로 만들고 싶어? 죄는 아버지가 지었는데 제대로 구원받지 못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절망을 이겨낸 여인일까? 그리고 이런 내용이 과거가 아니라 차라리 미래의 여인? 웃기지 마라. 여인이, 딸이 희생해야 하는 이런 이야기가 미래의 여인이냐?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 아버지도 아버지 같아야 하고 부모도 부모 같아야 한다. 이런 아버지를 위해 얼마나 희생해야 만족할까? 심봉사는 만족이라는 걸, 아는 인간일까? 아버지가 이렇다면 적어도 이후에는 행복한 삶을 주던지... 어디서 다 죽어가는 왕을 남편으로 만들어 아내로 사는 행복마저도 무시해 버린 걸까? 그렇다면 그냥 선녀로 살게 내버려 두던지... 읽는 동안 이렇게 화가 나보긴 처음이다. 심청전을 그냥 심청전 그 자체로 놔두던가. 그러면 그나마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을 냈을 텐데.. 희생과 불행의 3단 고개도 아니고.. 읽는 사람 짜증나게 하는지... 이런 식의 현대적 해석은 하지 않았음 좋겠다. 간만에 책 읽으며 울화가 터졌네.. 아무래도 난 성격이 유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을 읽으면서 ‘욱’하는 걸 보면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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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열기를 식히기 위해 강물에 퐁당 뛰어들어 친구들과 멱을 감으며 물장구치는 열다섯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집안일과는 거리를 두고 애오라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에 빠져 지냈던 때도 어리다는 이유로 용인되던 일들이 많았고 공부보다는 자연이 더 친숙한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강과 들판으로 몰려다니며 자연을 놀이 삼아 지냈던 시절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면 하루해가 짧다고 아쉬워하는 철부지 열다섯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별일 아닌 데도 크게 웃으며 깔깔거리던 소녀들과 비껴난 자리 눈 먼 아버지 곁을 지키는 열다섯 살 심청이 손을 재게 놀리는 장면이 연상된다. 결핍은 한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곡절을 겪으며 성장하게 만드는 동인이기도 하다. 눈 먼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짐으로써 아버지의 욕망을 실현시키려 했던 딸은 효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고대 소설 심청전과 채만식의 현대 소설 ‘심봉사’를 탐독하여 읽고 고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적 소재를 재해석하여 작가는 ‘연인 심청’을 창조하였다.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충족하며 이루고 싶은 세계를 동경하고 욕망하는 삶을 지속하는 인생에서 어떠한 선택 결정권도 없이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는 슬픔은 삶이 지속될수록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분별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심학규를 보면서 어른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행간을 좇아 읽어갔다. 그는 스무 살에 눈이 먼 이후에도 양반의 후예라는 허세에 갇혀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에 매달리며 사서삼경을 매일 읽고 외워 보지만 뜻한 만큼의 효용적 가치를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가난한 살림에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일상에 불만을 드러내기보다는 통찰력 없이 행동하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심청은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양식을 얻어와 정성껏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색정에 물들고 색욕에 눈멀어 주색잡기를 가까이 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며 측은해 하는 딸이기도 하였다.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운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천대받고 살아가는 청년 윤상과 어머니의 목숨과 바꿔 세상 밖으로 나온 심청은 슬픔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 지체 놓은 이들은 가진 권력과 돈으로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갔지만 청과 윤상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우며 부족함을 채워 성장하는 가운데 공동 운명체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사랑을 그려 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정을 품고 사는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운명은 헤살을 놓아 이별의 시간을 배태하여 결별을 예고했다. 심청이 아비의 삶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사느라 자신의 내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낼 수가 없었다. 공양미 삼백 석에 하나뿐인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심청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이승의 질긴 인연의 사슬이 동여맨 밧줄처럼 옴쭉 달싹 못하게 하였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육도 윤회하는 세계관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승에서 생활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육체는 현세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현세적 부속물이고, 이승에서 지은 과보에 따라 윤회하는 순환의 틀에서 관계가 형성된다. 이승으로 오기 전 연인이었던 심청과 심학규는 천상의 규범을 어겨 인간 세상으로 내쳐져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고 효심이 지극한 심청이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는 생활로 현세적 삶을 이어갔다. 양반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는 출생의 결함으로 넓은 세상으로 나가 역량을 발휘한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며 버텨야 했던 일상에서도 현재의 괴로움을 감내하며 살아갈 힘은 사랑에서 뻗어 나왔다. 어릴 적부터 심청이 곁에서 그녀의 일상을 지지하고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버팀목으로 자리했던 윤상은 일찍 철이 들어 앞가림을 잘하는 심청에게 울타리로 작용했다. 오늘 가진 것보다 내일 가질 것을 꿈꾸는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심청은 아버지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은 내려놓고 푸른 물을 들인 무명천에 사랑하는 이의 옷을 지어 그에게 건네고는 이별을 고해야 했다. 옹색한 처지였지만 심청이 곁에 있어 마음이 푼푼하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뜻을 만들기도 전에 운명적인 이별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 고통의 원천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철벽처럼 다가오는 운명은 헤쳐 나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현세에서는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내세에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리라는 바람을 안고 살아간다. 아버지 심학규는 심청이 인당수 제물을 자청한 대가로 받은 공양미를 욕구에 이끌려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급기야는 몽운사에 올리기로 한 공양미까지 축내며 몹쓸 병까지 얻어 건강을 회복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윤상은 사리분별 못하는 늙은이 때문에 죽어가야 하는 심청의 희생을 막아 보려 애원하여 보기도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목숨을 값어치 있게 쓰는 일의 숭고함을 알고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생명을 앗아간 바다를 일터로 삼아 노동하며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 화중군자라 불리는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은 정갈함을 지닌 꽃으로 고매한 정신을 표상하여 가까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꽃을 사랑하던 왕은 일상의 탄력을 잃을 때 화사한 이미지로 기쁨을 주는 꽃으로 위로를 받을 때도 있었다. 연꽃 속에 요정처럼 자리한 심청을 보고 왕은 아리따운 처녀를 왕비로 삼았고 연꽃을 바친 일을 계기로 윤상은 경계가 삼엄한 궁에서 궁지기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청은 왕비로 간택된 뒤 궁궐에서 윤상과 재회한 뒤 그와의 못다 한 사랑에 괴로워하며 속내를 털어놓아 보지만 이들의 재회는 윤상을 지옥으로 밀어 넣어 치명상을 입게 하였다. 희빈 정 씨의 흉악한 고문을 모질게 버티며 권력자들이 술수를 부릴 때에도 윤상은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를 살피어 생각의 방향을 정한 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심청을 지켜주었다. 불의 힘을 빌려 자백을 받아내려는 희빈 정 씨의 극악한 형벌을 안간힘으로 버티며 심청과 내통한 일을 자백하지 않은 윤상은 굳건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였다. 윤상은 궁지기로 들어와 멀찍이 떨어져서라도 왕의 아내로 발탁된 심청의 모습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인연의 한계를 수용하였다. 그는 송나라로 향하던 뱃전에서 인당수로 뛰어들려 했던 심청을 지켜주지 못한 회한으로 그녀의 안위를 염려하고 남은 생의 행복을 빌어주는 넉넉한 사랑을 발현하였다. 모진 고문 아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며 주검으로 사랑을 지켜낸 윤상의 지순한 애정은 극악무도한 정 희빈을 자기 파멸로 이끌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맹인들을 위한 잔치를 연 연회에서 심청은 노쇠한 몸으로 병약해져 곧 생명이 다할 것 같은 현실의 아버지를 보면서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꿈속에서 본 훤칠하고 글을 잘하는 풍류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던 심청은 개안하였지만 안쓰러운 유기체로 사위어가는 촛불 같은 모습에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생명을 다해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희생하였던 심청이 이제는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생명의 불을 지피기 위해 정성을 들였다.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바라며 생명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동안 사랑해온 윤상은 죽음으로 치닫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려야 했다. 이승에서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참혹한 고통에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면서까지 윤상은 사랑하는 여인 심청을 지켰다. 상여가 나가는 날 망자의 혼은 심청이 머무는 공간 앞에 머물다 그녀의 다정한 소리를 듣고 움직여 이승에서의 못다 한 사랑의 한을 갈무리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살아 있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갈구하며 또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왔다. 부지기수의 이별을 겪으며 삶은 알고 있던 이들과 이별하며 고독을 배워가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청춘 시절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새로운 얼굴로 떠올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며 사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죽을 고비를 넘긴 심학규는 무명의 어둠을 밝혀내는 마음의 눈을 뜨고 그동안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점을 뉘우치며 속죄양 의식을 실천이라도 하듯 세속을 등지고 유랑하는 삶을 선택하였다. 선택할 수 없는 탄생으로 슬픈 운명적 삶을 살면서도 궤도 내에서 수정하는 생활로 변혁을 꾀하였던 윤상은 죽음을 다짐하고 선택한 길에 충실함으로써 현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를 승화하여 갔다. 유랑의 길을 선택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올리며 선업을 쌓아 복을 짓는 일로 자기 구원을 실현했던 왕비 심청은 약자들을 향한 사랑을 생생하게 표하며 슬픔으로 어두웠던 마음도 씻어내어 자기 정화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을 구가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날라.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도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도 재앙이니까. 사랑과 미움이 없는 사람은 집착이 없으리.’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 것은 평범한 이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상을 떠나보내고 상실의 아픔에 젖기보다는 생자필멸의 법칙을 받아들이며 범속한 삶을 초탈하여 애욕을 넘어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로 이승에 존재하지 않는 이를 그리며 남은 시간을 보내는 심청의 마음을 가늠키는 힘들다. 풍요로운 현실에 안주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대변하며 살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써 이타적 삶을 잇는 심청은 자비의 화신처럼 여겨진다. 마음 좋은 귀덕 어멈이 갓난아기 심청에게 젖을 나누어 주었고 좀 더 자라서는 일감을 챙겨주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돕고 홀로 남은 심 봉사가 애욕에 눈이 멀어 애랑에게 넘어 갔을 때도 그의 건강을 살피며 보살피는 자비 행을 실천하였다. 탐심을 버리고 애착 관계를 벗어나 무상 보시를 행하며 살아갈 때 큰 과보를 얻어 궁극적으로는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갈증 많은 세상을 지혜롭게 열어나갈 때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과 조응하는 삶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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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초반부의 심청은 내가 알고 있던 심청전의 심청이었다. 그녀 이름 앞에 늘 붙어 다니는 ‘효녀’. 교묘하게 위장한 정책의 방편일수도 있었던, 효를 강조했던 조선시대가 요구했던 바로 그 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심봉사는 달랐다. 눈이 멀어 무능했지만 심성 착한 아버지 ‘심학규’가 아니었다. 초반부터 심봉사가 심상치 않았다. < 바로 우리의 모습인 심봉사 > 한 때 꿈꾸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세상을 굽어보며 세상을 평정하리라. 사람들 위에 우뚝 서는 그런 날이 오리라. 때가 되면 나비의 날개를 펼치고 멋지게 날아오를 것이다. 그런 포부를 가져보지 않은 자 몇이나 될까. 심봉사도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런 때를 기다린다. - 본문 15쪽 - ‘아아, 심봉사는 그 아득한 창공을 나는 새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저 아래 올망졸망 인간 세상이 굽어보인다. 어쩌면 저렇듯 누추하게 사는지. 어쩌면 저렇게 어리석게 사는지. 매미 따위나 작은 새들의 좁은 품으로 어찌 뜻을 헤아리랴.’
그러나 온다는 그 때는 어디로 갔는지. 탓만 늘어나지 않았던가.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돈이 없어서. 가족이 도와주지 않아서. 세상이 나를 알지 못해서. 꿈만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에 공짜가 없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공짜만 바라고 살지 않았던가. 하기 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나! 아니 실천에 게을렀던 화려한 꿈들. 그게 바로 공짜심리였던 걸 깨닫기가 그토록 어려웠을까. 돌이켜 보면 나도 심봉사였다. 인격의 주체가 되어 주인으로서 나를 이끌어 왔다고 착각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뜻을 세워 한 일은 별로 없고 부화뇌동으로 사회의 이익을 쫓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재미난 일을 추구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바라던 일이 그냥 이루어져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바란 적도 있었으니, 참 거지같은 심정이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 또한 내가 너무 커 세상을 못 보는 눈 뜬 소경이었을 뿐이다. 눈 뜬 나도 이럴진대, 보이지 않는 심봉사가 눈만 뜨면 벼슬길로 나아가 입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싶다. 심봉사는 볼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눈을 뜨고 싶은 욕망에 정말 눈이 멀고 만다. 그래서 공양미 300백석을 절에 시주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청에게 털어놓는다. 심청의 목숨과 바꾼 심봉사의 처지의 변화. 딸 심청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죽음의 이별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받는 대접이 달라지자 그동안 억눌러 두었던 욕망이 꽃 같이 피어오른다. 그는 한껏 즐긴다. 눈만 뜨면 이루겠다던 포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로지 쾌락을 쫓는다. 노름판에 끼기도 하고, 떠돌이 기생 ‘애랑’에 푹 빠져,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눈뜸’에 대한 믿음과 스님과의 약속도 의심하며 당장의 쾌락을 위해 급기야 절에 바친 공양미 일부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백중 날, 애랑을 탐하며 체력을 소진해 기도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호랑이 꼬리를 잡은 심봉사. 애랑이가 재산을 가지고 도주를 하고, 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애욕은 그대로다.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정념을 불태울 꿈을 꾼다. 심봉사도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있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간절히 구원해 주길 바라지만 결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그에게 구원의 여인을 구별할 능력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타락의 지옥에 핀 꽃, ‘뺑덕어미’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목줄을 매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꼴이 된 것이다. 그는 목줄에 매인 채로 뺑덕어미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남은 전 재산을 힘겹게 등에 지고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재산을 지키고자 생선을 탐내는 고양이를 데리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 여행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훤하지만 눈이 먼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급류로 뛰어든 꼴이었으니까. 우리들도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다. 그저 알량한 재미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나를 사랑으로 감싸 건져주길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수호신이 나타나주는 동화의 세계는 더구나 아니다. 어른들에게도 동화가 필요하지만 인간만사는 그렇게 인자하지 않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물에 휩싸여 흘러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노를 저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쾌락에 휩싸여 모든 것을 다 잃어 인생의 마지막을 향하던 심봉사는 나라에서 베푼 봉사들을 위한 잔치에 참가하고 있다. 그나마 쥐꼬리만큼의 운이 남아있어 가는 길에 ‘마음의 눈’을 뜬 황봉사를 만나고 그를 통해 영성이 깨어난다. 그 또한 심청이 몸을 헌신하여 얻은 공양미 덕분이겠지만.... 심봉사를 위해 만들어진 잔치. 그 잔치 역시 심청이 만든 잔치가 아니던가. <구원의 연인 심청> 심청은 지극한 효성을 지닌, 어른 같은 소녀다. 그녀는 출생부터 아프다. 자신을 낳고 죽어버린 엄마와 눈이 먼 아버지. 그런 아픈 환경 때문인지 일찍 철이 든다. 어린나이임에도 집안의 가장으로 아버지를 봉양하고 힘든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효성이 지극하다는 칭찬도 받는다. 하지만 심청에게 그 칭찬은 날이 갈수록 족쇄가 된다. 생활이 힘든 것을, 마음이 못된 것을 나타낼 수가 없다. 때로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의 반찬 투정과 신세 한탄에 속이 상하기도 하고, 꼬질꼬질 늙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미울 때도 있지만 그런 심정은 연민으로 상쇄하며 그래도 사랑하는 윤상오빠가 이웃으로 있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느 날 심봉사의 공양미 삼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심청은 폭풍같은 번민에 휩싸인다. 심청은 혜안을 가졌고 삶을 통찰하고 있다. 번민 속에서, 꽃상여에 실려 저승길을 가던 장 상서 어른을 생각해 낸다.
- 본문 89쪽. ‘그렇구나. 기름지게 살아도, 없이 살아도 삶은 끝나게 마련이구나. 이런 게 삶이라면..... 청이는 자기 삶에 미련을 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단 하나, 가엾은 아버지만은.’
심청은 결심한다. 제물이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무거운 출생의 고뇌를 내려놓는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했다. 인당수 바다. 뱃전에서 그녀는 모두를 위해 염원한다. 심청은 인당수 바다에 생명을 버림으로써 전생의 업보를 씻는다. 전생에 유리선녀였던 그녀는, 현생의 아버지인, 선관 유형을 사랑한 죄업을 물로 정화한다. 하늘의 뜻을 거스른 유리와 유형. 금기를 어긴 그들에게 내려진 벌은 부녀지간으로 인간 세상에 태어나, 그 땅에서 유리는 힘들게 유형을 받들고, 유형은 얻어먹으며 살아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환경에 처해 살아가는 것. 심청은 인당수 물길을 따라 용궁에 도착하고 용왕으로부터 죄업을 다 씻었으니 하늘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현생의 아버지가 궁금하다. 전생에 선관 유형이었던 아버지. 혼자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은 죄업을 벗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여 인간세상에서 떠돌고 있는 아버지. 자신만의 죄업을 닦는 것만이 업보를 없애는 길이 아니라 죄업을 씻지 못한 유형을 건져야 그 업이 끝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하늘 세상을 버리고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
심청이 효녀 심청에서 만인의 ‘연인심청’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작가는 심청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자신을 희생하는 일. 안락보다는 책임을 다하는 일.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할지라도 태어난 이상 책임과 의무는 행해야 한다고. 그것이 나를 구하고 주변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그건 인간도 몸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동물처럼 생명을 지키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성은 영혼에 있고, 영혼은 분명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아닐까. 나는 본능을 넘는 그 무엇을 책임을 다하는 것, 달리 말하면 이타심이라 하고 싶은 것이다. 심청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몸으로 행한다. 심청의 인간 세상 귀환은 개인을 넘어 사회에 대한 책임 실천이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고전 소설의 특징은 권선징악. 교훈적이며 윤리적이다. 하지만 현대는, 심청을 통해 ‘효’만 강조해도 충분했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대가족과 효를 강조하고 ‘우리’를 강조하던 우리의 문화는, 서구 유럽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란 개념이 사라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개인화 과정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 결과로, 우리, 혹은 개인의 의무나 책임보다는 ‘나’라고 하는 이기심이 우리의 정서를 덮어버렸다. 굳이 통계를 들이대지 않아도 ‘나’를 나타내는 문화는 가족해체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가정을 유지하는 힘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강하다. 가부장적이며 여성의 자아를 옥죄었던 관습이 힘을 잃게 되자, 여성들의 ‘나’가 강하게 드러나면서 가족의 해체는 더 빨리 진행되었다. 점점 느슨해지는 가족의 결속을 바라보며 작가는 간절히 자비심이 가득한 관세음보살의 출현을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구원의 상징인 <연인 심청>을 그렸던 것인가. 사람들은 ‘무한 리필’ 음식점을 좋아한다. 무한 책임을 다하는 보험을 선호한다. 성실하게 축구장을 뛰면서 어떤 포지션에서든지 책임을 다하는 ‘박지성’을 올그라운드 플레이어라 칭하며 사랑한다. 하지만 개인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은 절대 손해 볼 수 없다. 사랑을 맹세하고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를 서약한 결혼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혼수 문제로도 결혼 약속을 엎는 판이니 ‘너는 나를 나만큼 사랑하지 않아’,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돼’ 라는 마음의 손해를 주장하며 이혼을 하는 정도는 애교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전생과 이생을 통해 무한 책임을 다하는 심청에게서 구원의 상을 보았다. 그리고 효녀 심청을 만인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잘, 잘못을 따지지 않는 심청이란 소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세상. 그 세상에서는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된다.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불국토를 이루는 곳. 마음> 작가는 인간 세상의 불국토는 마음이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이었던 ‘심봉사’도 잔치에서 ‘심청’을 만나 눈을 뜬다. 물리적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뜬다. 소원이었던 눈을 뜨고 딸을 직접 보게 되었고, 딸은 그 나라의 왕비다. 옛날의 심봉사였다면 어땠을까. 돈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렇게 휘둘리며 욕망만 쫓아 살았는데, 권력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뜬 심봉사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깨닫고 회한과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새 삶을 찾아 오히려 안락한 삶이 보장된 궁궐을 떠난다. 불법에서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심봉사의 ‘개안’은 바로 그 증거인 모양이다. 소설의 막바지. 심청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상제에게 올리는 아비 목숨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 소리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죽어 아비를 구하겠다는. 결단코 아비를 살려 그 업에서 구하겠다는 심청의 기도소리는, 이번 생에 생명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시비를 가리는 업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염불로, 은은한 침향으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
연인 심청 사랑으로 죽다 저자 방민호 | 다산책방 | 2015.01.12 | 페이지 400 | ISBN 9791130604510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읽은 심청전. 그때 심봉사를 엄청나게 싫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아버지란 사람이 자기 눈 뜨고 싶은 마음에 어린 심청이 앞에서 주절주절 그런 뉘앙스를 내뱉을 수 있을까? 진저리쳤었거든요. 심청이가 인당수 제물로 나서지 않았더라도 그 어린아이 앞에서 그렇게 한탄을 할 수 있느냔 말이지요. 그때부터 심청전은 저한테서 아웃이었어요.
서울대 국문학과 방민호 교수님이 새롭게 현대소설로 재해석한 <연인 심청>은 '연인'이란 단어가 솔깃합니다. 효녀 심청이는 지금 세대에게는 공감력이 떨어질 수 있는데 그렇다면 만고불변의 진리인 사랑 이야기는 어떨까요. 그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재해석해 새로운 인물도 등장시켜 살을 붙인 <연인 심청>은 확실히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연대, 작자 미상인 심청전은 경판본과 완판본 외 수많은 판본이 있는 한국 고전소설입니다. 주 흐름은 같아요.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용궁 세계에 갔다 연꽃에 싸여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왕비가 되어 아비를 찾느라 맹인잔치를 벌이고. 하지만 경판본은 유교적, 숙명론적이라면 완판본은 다양한 판본을 중재한 느낌에다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 더 많다 합니다. 완판본이 우리가 아는 뺑덕어미도 나오고 등장인물이 경판본보다 더 다양하다네요. 어쨌든 우리는 '효녀 심청'에 대해서만 익히 들어왔습니다.
방민호 교수님의 <연인 심청>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는데 '윤상'이라는 인물입니다. 비중이 참 큽니다. 심청이의 정인이지만 결국 연을 맺지 못한 윤상은 그 사랑의 깊이가 심청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습니다. <연인 심청>의 부제가 '사랑으로 죽다'인데 저는 윤상이를 먼저 떠올릴 정도였거든요.
심봉사는 역시나 무능력자에다가 욕망이 과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투전방에 놀러 다니고 식탐 많고 여색까지. 타고난 천성이 야망이 큰 인물이어서 눈이 멀게 되자 그 절망이 그에게는 엄청난 독이 되어버렸지요. 딸 심청이가 없으면 무엇 하나 제 손으로 해낼 수 없는 심봉사. 그러면서도 그 고마움을 모릅니다. 딸이 제물로 팔려나가며 받은 재물을 노름과 여색 잡기에 탕진해버리고 몸까지 엉망이 되고맙니다. 주변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눈멀고 마음마저 먼 애어른입니다.
심청전은 판타지에서 볼 수 있을법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요. 용궁도 있고, 옥황상제가 있기도 하고. 하이라이트는 심청이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현실적이되 현실이 아닌, 그럴 법한 일이 아닌 믿지 못할 법한 이야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매력이 담겨 있는 소설입니다.
<연인 심청>에서는 기막힌 전생이야기가 나와요. 심청이와 심봉사의 관계가 전생에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때문에 심청이의 지고지순한 행동들이 이해됩니다. 오히려 좀 과할 정도다 싶을 때는 솔직히 얘는 자존감이 어쩜 이리도 낮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긴 하더라고요. 전생에서도 난봉꾼 기질이 있던 심봉사는 그 욕망을 현세에까지 붙잡고 있던 것이었고요.
심청이는 이번 생애에서 인간의 원죄를 구원하는 이타적 사랑을 보여준 셈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한 생애를 걸고서야 이룰 수 있었지요. 심청이는 심봉사를, 윤상이는 심청이를.......
『 서로의 슬픔이 커서, 서로가 상대방이 안고 있는, 제 것보다 더 큰 슬픔을 동정해서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다. 』 - p43
비뚤어진 마음에 갇힌 심봉사에게 마음의 눈을 떠야하는 이유를 알려준, 맹인잔치 가는 길에 동행한 황봉사의 말이 기억 남습니다. '마음이 눈 뜨면 어떤 괴로움도 내 것 아닌 게 된다. 한 줌의 기쁨이지만 그것은 내 손안에 있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보람'이라고요.
심청전을 재해석한 <연인 심청>의 청이는 그래도 전통적인 효녀 심청보다는 훨씬 더 이유다운 이유로 살긴 한 것 같아요. 어찌됐든 여전히 심봉사는 좋아할 이유가 없네요. 나쁜 남자에게 끌린 심청이가 불쌍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심하게 자기희생하는 심청이의 삶이 못마땅합니다. 게다가 윤상이라는 인물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던 것 같아요. 전생의 연인이었던 아비를 살릴 것인가, 이생의 정인을 살릴 것인가 갈림길에서 특히 불편했네요. 심봉사의 운명은 청이가 개척해 준 셈이지만, 전생의 연을 끌고 와 이생에서 풀어내려는 청이의 사랑만큼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심봉사의 행동거지때문에 화가 나기도, 지고지순한 청이의 사랑을 보며 나쁜 남자는 집어치워! 소리가 나오기도, 한결같은 윤상이를 보며 바보같은 녀석! 이라며 감정 폭발을 일으켰던 <연인 심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요, 아름다웠어요. 오히려 이런 방식의 사랑은 못하는 나이기에 청이에게 시샘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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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고 최고의 가치를 위해 희생되어질 때 독자는 그저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아마도 작가는 이런 의구심으로 이 책을 써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심청의 이야기는 시대가 변하면서 수없이 형태가 바뀌었지만 '효녀심청'의 캐릭터만큼은 고스란히 전승되었다.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결국엔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부모를 향한 효심은 어떤식으로든 보상될 것이라는 유교적 메시지를 함께 전하고 있다. 설화나 전설처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추구했던 가치나 신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숨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심청은 그녀의 행위 하나 하나가 그저 '효'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편입되어버리는 자신의 인생에 수긍할 수 있었을까. 연인 심청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그녀는 이제 겨우 열다섯이고 마음에 두고 있는 가까운 마을 오라버니 윤상이 곁에 있다. 비록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살펴 준 귀덕 엄마 때문에 그녀의 아들에게 시집가야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은 비슷한 처지의 윤상에게 오래전부터 끌렸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불합리하다. 그도 그럴것이 어릴적부터 동냥젖으로 자신을 키워준 심봉사는 이제 평생을 먹여 살려 달라며 버티고 있다. 청이의 의지와 성취될 결과물 사이에는 지나치게 큰 간극이 존재하고 이는 점점더 벌어질 것이 확실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뱃머리에 선다. 우리는 그 갈림길에서 여지껏 청이의 고민은 외면했다. 청이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멀어지고 바다의 압도적인 파도와 소실점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스토리는 전설이 된다. 심봉사의 입장에서 보자. 그에게는 갑자기 잃어버린 시력과 낳자 마자 세상을 뜬 청이 어미 때문에 원망스러운 운명만이 남아 있다. 양반집 자손으로 권위와 체통만이 배어있던 몸에 상놈의 인생만도 못한 환경은 그에게 헤쳐 나갈 수 없는 장벽이다. 사실 심봉사가 눈을 뜨기 바랐던 것은 단순히 제 두 눈으로 투전판의 패를 보거나, 여인네의 젖가슴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 받고자 함이었다. 사람들의 속닥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물이 움직이는 소리에 놀라지 않아도 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돈을 손에 쥐게 되면서 애랑이의 사랑을 받으면서 돈으로 지위를 보상받는 장면에 그 답이 있다. 작가가 원했던 것은 과연 딸을 판 돈으로 여자 품에 들어가 있는 심봉사를 비난하고 청이의 기구한 운명, 혹은 열 다섯 소녀의 꺽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고귀하게 승화시키기 위함이었을까. 청이가 하나의 캐릭터로 고유하게 살아나길 바라면서, 심봉사를 욕하는 것은 또다른 역설이다. 청이가 인격체라면 심봉사 또한 개성을 가진 개체이기 때문이다. 청이가 단순히 사람들 입맛에 맞게 ‘효녀’로 분장되어 보여지는 것에 반기를 든다면, 심봉사가 쓰레기처럼 자기 인생을 위해서 사는 것에 대해서도 수긍해야 한다. 청이가 관념을 위해 희생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심봉사도 청이의 고귀함을 위해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이렇게 보면, 작가가 원했던 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발견이나 반전의 묘미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신념에 의해 말살되어버린 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다. 전체가 중요시 되고 특정한 프레임이 정해져버린 사회라면 개인은 단순히 객관적 지위만을 가질 뿐이다. 누군가는 자수성가의 스토리를 위해 희생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의인의 삶의 표본으로 남을 것이다. 사회는 이들의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 하면서 이와 같은 행위가 최고의 가치임을 구성원들에게 주지시킨다. 작가는 단순히 효녀심청으로 고착되어버린 이미지에서 그녀의 사랑이 더욱 고결하게 승화되는 것만을 바라서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감정이 묻혀버린 다수의 관념, 개별성이라고는 가질 수 없는 시대적 조류, 존재로서 존재할 수 없는 개인의 무의미함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 보고자 글을 썼다. 결국, 답은 서로의 감정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심청의 눈물에, 심봉사의 방탕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듯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러한 구성원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감정을 읽는다는 것,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소통과 교류의 출발점이다. 이 소설은 어떠한 글보다 이런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하고 있다. 전통의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 넣는 것,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일이 가볍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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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고 많은 겻이 빠르게 변화하지만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삶의 근본적 이념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래서 고전은 자칫 진부하게 여겨지지만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연인 심청>을 보고 얼마 전 심청전을 새롭게 해석해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영화 <마담 뺑덕>이 떠오른다. 사실 영화를 보지 못 해서 특별히 할 말은 없지만, 고전이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사랑받는 것은 그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인간 근원에 대한 탐구, 권선징악적 주제, 올바른 삶에 대한 질문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을 벌을 받는다'라는 이 단순한 진리가 지켜지는 유일한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연인 심청>을 읽고 나서 어렸을 때부터 쭉 알아왔던 이야기임에도 새로운 이야기를 읽은 듯 마음이 묵직해지고 가라앉는다. 어린 심청의 삶과 갈등이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와서일까. 눈먼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사랑하는 남자를 택하기보다는 결국 아버지를 택했던 그녀. 어쩌면 운명이 그렇게도 모질었는지... 그리고 그 운명은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남자, 윤상에 대한 또 다른 업보를 남기지나 않으려는지... 심학규를 보며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해 드글거리는 내면의 욕망들을 차마 떨쳐내지 못해 딸을 사지로 내몰게 되고, 어느 순간 쾌락에 눈이 멀어버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그가 마치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것을 원하고 탓했던 심학규. 그에 반해 자신보다는 오직 아비만을 가엾이 여기며, 어쩌면 체념하고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인 심청. 사실 그렇게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 정말로 현명한 것인가에 대해 나는 의문이 든다. 일단 나는 결단코 나를 떠나 남을 먼저 생각할 수는 없는 범인이기에. 하지만 또 저런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있기에 세상이 보다 한 걸음 선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거겠지. 그들로 인해 삶의 비극성은 사라지고 위대함의 단면들로 삶은 경이로워지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슬픔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윤상의 청이에 대한 애끓는 사랑도 안타깝다. 운명을 개척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 했던 윤상이. 그러나 끝내 청이를 지켜줌으로서 그 역시 어쩌면 고결한 희생을 맞이한다.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희생했듯, 윤상이는 심청을 위해 희생했다. 삶이란 어쩌면 그래서 또 의미가 있는 것일는지 모른다. 저마다 가진 숙명, 업보라는 것이 있는 법. 묵묵히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게도 되는 것. 그러나 그런 자신을 위해 바라보는 또 다른 인간의 숙명. 비록 그 숙명들이 서로 맞닿지 않더라도 모두 제자리에서 묵묵히 살아낸 것 자체만으로 삶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 생애를 걸고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지극하고 거룩한 이야기, <연인 심청>.
심학규와 청이의 천상에서의 인연과 죄로 인해 지상에서 아비와 딸로 만나게 되었다는 설정, 사실 청이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이야기 등 소설적으로 재탄생한 <연인 심청>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결국 사랑이 죄가 되었으나 더 높은 사랑으로 인해 죄를 씻어낼 수 있었다는 거룩함. 그 전형적인 메시지가 전혀 공허하게 들리지 않고, 마음 깊이 와 닿는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살았다 한들, 여자로서의 행복을 버리고 자기희생적인 삶만 살아온 그녀의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고민되는 걸 보면 역시나 나는 개인적인 사람인가 보다.
참, 이 책은 현재 5월 31일까지 출간기념 총상금 3천만 원 독서감상문 대회를 열고 있다고 하니 한 번 도전해 보심은 어떨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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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각이 남다른 소설이다. 참신하게 다가왔다. 심청전의 이야기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는 근원이 되는 시절을 찾아 상상력을 동원해 살을 붙인 작품이다. 심청을 오늘의 현실 속에 재현해 잘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다. 본 내용의 줄거리는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러기에 기존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쉽게 읽을 수 있다. 그 줄거리에 다시 가미시킨 인물들과 그들과의 관계를 살펴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국문학을 하는 저자가 야심차게 고전을 현대어로 살려낸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채만식이 쓴 소설‘ 심봉사 ’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채만식은 상상의 세계를 최대한 지우고자 애를 쓴 작품을 만들었다면 저자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자 한 모습이 보인다. 저자의 작품 구상의 근간이 되는 내용이 사실적인 내용에 멈추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탐구를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신선들의 세계가 여과 없이 작가의 상상 속에서 펼쳐진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가는 곳이 용궁이며, 그곳의 질서는 인간 세계와 다른 시간 흐름으로 되어 있다. 가령 심청이 용궁에서 1주 있었는데 그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1년의 시간이 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인간계로 나오는 과정이 연꽃 속에 들어가 중국으로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는 그 배에 맞추게 된다. 시간 설정이 절묘하게 연결되도록 구성한 것이다. 또 심청을 신선계의 선녀 유리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가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야기를 그대로 수용하여 그려낸 것은 작가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것에 긍정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감정 매파 역할을 한 심청 이야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말을 해나간다. 심청에게는 어릴 때부터 같이 성장한 두 명의 이웃 오빠가 있다. 그들의 도움과 영향으로 심청은 연정을 느끼면서 예쁘게 성장한다. 그 두 인물 중에 허균의 친구들 같은 인물도 등장한다. 능력은 있지만 서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뒷전에 있어야 하는 윤상이란 인물이다. 이야기는 심청이 이 인물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봉사로 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야기 구성이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는 사실도 바꿔지진 않는다. 심청은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로 가게 된다. 그 뒤를 윤상이 쓰린 마음을 안고 따른다. 그리고 심청과 같이 배를 타게 된다. 중국으로 가는 배에 동승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상황에서 극대화된다. 윤상은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어, 남경 선인들과 함께 중국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픈 마음을 달래면서 세월을 보낸다. 이야기는 1년 후 그가 돌아오는 길에 인당수를 지나면서 연꽃을 발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꽃을 좋아하는 어진 왕에게 진상하게 되고, 윤상은 왕의 배려로 궁궐에 문지기로 남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가 지속된다.
심청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1주를 보낸 후 다시 꽃으로 환생하게 된다. 꽃 속에 잠이 든 형태로 그려져 있다. 왕은 그때 왕비를 잃고 허허로운 상태였는데 그 꽃을 지극히 예뻐했다. 그래서 그 꽃을 자신의 방에 두었고, 꽃봉오리 속에 잠들어 있는 심청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심청의 어진 모습을 본 왕은 그녀를 왕비로 삼는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나 악인은 있게 마련, 희빈 정씨가 그 역할을 감당한다. 그녀는 시녀 요화를 통해 심청과 윤상이 만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일을 드러내어 심청을 쫓아낼 궁리를 한다. 정씨는 윤상을 왕과 왕비 몰래 잡아 문초를 한다. 그래서 그녀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혈안이 되고 취조는 더욱 심해진다. 윤상은 자신이 심청과 연인 관계라는 것이 밝혀지면 모두가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입을 꾹 다문다. 결국 그 문초를 이기지 못한 윤상은 죽음을 당한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심청은 마음이 다급하다. 그때 기존 이야기의 방향대로 맹인 잔치가 행해지고 아버지가 눈을 뜨는 상황이 함께 진행된다. 두 상황 속에서 심청의 마음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아버지를 만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고 결국 윤상 구출에는 실패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정씨는 왕비를 모해했다는 사실로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윤상의 상여는 나가게 된다.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윤상의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이야기의 일부를 황진이의 내용에서 가져온 듯하다. 결국 몰래 그곳에 온 심청이 윤상의 한을 풀어 주자 상여는 떠나게 된다.
고전 소설 심청의 이야기를 연인이라는 관점에서 각색하여 우리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게 하는 소설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다양한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특히 연모의 인물을 제시해서 극적 긴장감을 주고 있는 구성을 특별했다. 또 저자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오늘날에도 생각해볼 수 있게 표현하고 있는 점도 신선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만이 진실을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만지고 있는 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세계가 있을 수도 있고, 그 세계에 대한 상상과 기대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폭을 넓혀 준다. 우리 선인들도 그러한 기대감으로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그런 소망이 있어야 현실이 더욱 풍족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재인식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고, 고전을 새로운 각도에서 읽어볼 수가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감사한 읽기가 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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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욱'과 울화통을 터트려준 책. 와...이걸 어떻게 리뷰를 쓸까.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일단 관점의 비틀림은 신선했다. 어릴적 동화책에서 보던 효녀 심청. A4 용지로 타이핑해보자면 채 1장이 되지 않을 분량이었던 전래동화는 작가에 의해 각 인물들의 심리묘사, 주로 청이와 심봉사의 시점이었지만, 에 주를 이루어 전개된다. 거기에다 새로운 인물인 윤상이 추가되고, 전생의 '연'에 대해 그리고 부제처럼 '사랑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각자의 삶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그저 불쌍하게만 여겨졌던 심봉사를 비틀어 새로운 인물상을 만든것 까진 좋았지만 나로서는 그 시도가 결론적으론 좋지 않았다. 괜히 미움이 생기고 읽는 내내 분노에 휩싸였으니까. 꽃처럼 여겨준다 했던 노년의 임금과 정신적 합궁으로 왕비가 되는 설정 역시 애틋한 로맨스를 기대하긴 어렵고 뭔가 뒷끝이 씁쓸했다. 윤상이 고문 끝에 죽는 과정은 몇 년전에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고 그의 상여가 차마 연인이 있는 궐을 나가지 못해 움직이지 않던 설정역시 온달과 평강공주에서 모티브를 얻었던 건지... 못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왠지 읽는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글쎄....'라는 혼잣말로 마무리가 되었던.
국문과 교수라는 작가의 이력만큼이나 삶에 대한 깊은 고찰은 숙연해질만큼 꽤나 인상적이었다. 지루함과 잔잔함의 경계, 묘한 흡입력, 고요함 속에 휘몰아치는 격정과 격랑에 기가 빨린 걸까, 읽고 나니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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