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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것을 굳이 일상에서 떠올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끔 어머니가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니 당신의 일을 치르게 된다면 수의는 어느곳에 있고 또 중요한 서류는... 하, 그러고보니 그런 말씀을 하실때마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제대로 새겨듣지를 않았구나.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준비를 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다친 팔은 뼈가 붙지 않아서 아픈 것으로만 알았는데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고 나서야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겨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를 듣고 두어달쯤 전에 입원을 하셨었다. 총체적으로 나이도 많고, 장기의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다 심장과 신장의 기능은 특히 저하된 상태고 빈혈에 저혈압이라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던 정형외과 선생님은 입원 후 검사결과들을 보면서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했다. 외과로 입원했다가 한동안 내과로 전과하여 내과에서 전담을 했는데 담당 선생님들은 계속 가족들에게 수술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2년 전 수술 후 중환자실을 거치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식사를 못해 위험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수술을 말리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통증이 지속되며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느니 수술실에서 죽는 것이 낫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팔의 골수염은 항생제 치료로 염증 수치가 많이 낮아졌고, 그것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위험의 수술을 강행하는 것은 누가 보나 이득이 없는데 어머니가 계속 고집을 부리신 이유는 오직 하나, 위험한 수술이라고 할수록 더 빨리 죽음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술 전날 밤, 자신의 부모님이라면 수술을 말릴 것이라는 담당의가 결국은 포기하고 어머니에게 수술의 위험성과 수술 후 중환자실로 가게 될 것이고, 수술도중이든 중환자실에서든 응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의학적으로 필요한 처치는 가족과 환자의 동의없이 시행할 것이라는 요지의 설명을 계속 해 나갔다. 그리고 예상되는 합병증과 징후들... 어머니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의사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고 어머니의 의식 여부와 상관없이 육체만을 살려놓기 위해 모든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수술을 말렸다. 우리는 누구나 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경우 그 죽음을 어느 곳에서 어떻게 맞이하게 될 것인가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수술을 말려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결국 헤어나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쓸쓸하고 아픈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조금이라도 더 우리와 함께 집에서 생활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자식들의 만류에 결국 어머니는 수술을 포기하셨고, 나름 '죽음'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준비하셨기에 그 공포와 긴장, 어쩌면 한편으로 느끼게 된 안도감과 앞으로 닥치게 될 고통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힘든 시간을 보낸 후 며칠만에 깊은 수면을 취하고 항생제 치료를 끝내고 지난 주 퇴원하셨다.
[의사, 인간다운 죽음을 말하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좀 복잡한 생각들이 얽히며 마음이 심란해졌기 때문이다. 의료 시스템의 문제뿐 아니라 실수를 하기도 하는 의사들의 진단, 어쩌면 운이라는 것이 따르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누군가가 재수없게 죽음을 재촉하기도 하는 문제들.... 사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근처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그곳에서 여러번의 수술을 했는데, 우리는 적어도 그 많은 수술을 다 했어야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담당의가 수술을 했는데 보름도 지나지 않아 원장이 직접 재수술을 해야한다고 했을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하는것인데, 치료 도중에 병원을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기에 그대로 그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이 결국 상태를 악화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아프다고 하는데, 왜 수술부위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며 어머니가 재수술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저 환자가 원하면 해야한다는 식의 대답만 하던 병원을 떠나 다른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했을 때 정밀검사를 해 보고 항생제 치료를 시작하니 통증이 한결 완화된 결과를 보니 더욱더 의사의 능력과 병원의 시스템과 환자의 '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라일리 선생님과 같은 어머니의 전담 주치의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지난 몇년간의 진료기록을 살펴보고 정기적으로 내과 진료를 담당하고 계시는 선생님이 계시다. 그분은 어머니에게 되도록이면 약처방을 안받는 것이 좋다고 하시는데, 짠음식과 밀가루 음식이 안좋기는 하지만 어머니 연세에는 기력회복이 더 중요하다며 맛있게 드실 수 있는 음식이 있다면 가리지말고 드시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다른 과의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오면 그것을 살펴봐주시기도 한다. 사실 누군가는 그것이 더 위험한 것 아니냐고 하는데, 처방된 약이 어떤 약인지를 아는 의사선생님이 환자의 종합적인 상태를 알고 있다면 다른 과의 약처방을 보류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더 확신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어머니 귀에 딱지가 생기며 낫지를 않아 이비인후과에 들렸는데 귀를 한번 쓱 보더니 두세번 더 와야 된다며 약처방을 하길래, 어머니가 내과에 다니시며 드시는 약이 있는데 약처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 확인을 했고 이비인후과 의사는 어이없다는 말투로 상관없다며 주사처방까지 내렸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는 몸이 이상하다며 계속 누워계셨는데, 저녁에는 갑자기 몸이 차가워지고 떨리며 식은땀까지 흘려 정신없이 응급실로 갔다. 어머니가 드시는 약, 그전의 진료 내역, 검사결과를 다 살펴보고 필요한 검사를 다시 했는데 그곳에서는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평소와 다른 것은 그날 이비인후과에서의 주사 처방 뿐이었다는 말에 그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다는 대답뿐이었다. 물론 그것이 원인이 아닐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치명적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다보니 점점 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인체의 장기를 따로 떼어놓고 각각의 기능에 대해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의학적인 진단과 처방을 단편적으로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수록 더욱 더 어머니의 내과 선생님에게 감사하게 된다. 사실 그 전에도 내과는 정기적으로 다녔지만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약처방을 하고 말았던 의사와는 달리 지금의 내과 선생님은 처방된 약의 역할과 그에 따른 징후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시고 어머니가 자꾸 다른 곳이 아프다며 이야기를 늘어놔도 잘 들어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신다. 보호자로 따라가는 내게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며 어머니 역시 언젠가는 그러하겠지만 그 시간이 오기까지 되도록이면 고통없이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라는 말씀을 해 주시니 더욱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자신의 체험은 표면적인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쓴 라일리 선생님의 '인간다운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에 깊이 공감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나의 노후를 의료시스템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인식하게 한다. 모든 것은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누구나 행복하게 죽을 권리는 있는 것임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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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아직 채 면허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내가 처음 의전원에 진학했을 때와 졸업하는 지금의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 더이상 학생의 신분이 아닌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한 명의 사회인이 된 나는 내가 선택하고 앞으로 평생 걸어나가야 할 이 직업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만난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의학을 배우다보면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또 반면 너무 과도한 의학에 의해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나 돌연변이가 생기고, 인간과 더 나아가 자연과 모든 생태계를 위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은 가장 좁게, 인간을 살리기 위한 의학이, 되려 인간에게 해가 되는 상황, 그리고 사회적인 구조에 의해 필연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연명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볼 때,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의사는 지켜야 할 생명윤리의 원칙이 있다. 자율성 존중의 법칙, 악행금지의 법칙, 선행의 법칙, 정의의 원칙이 바로 그것인데, 이책은 자율성존중의 법칙을 조금 더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라. 그리하여 너의 일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하여라. 의학은 시기심 많은 연인과 같아서 열정을 다 바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의학을 마치 새침한 한 여인에 비교하여 표현하였는데, 그녀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지않으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해할 듯 하면서도 완벽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많이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현대의학은 너무 많은 발전을 거쳐가면서 때로는 과한 치료로 또 다른 질병이 생기기도 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방문한 병원에서 병원감염을 얻고 가기도 한다. 그리고 보라매병원사건으로 유명해 진, 치료를 중지하면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 의사가 치료를 중단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김할머니가 안락사를 인정받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법은 일단 의학적으로 치료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모든사람들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치료를 받게하곤 한다. 이 책은 그런 현실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현대의학은 많이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너무 불완전하고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의사는 신이 아니고 전능자도 아니다. 따라서 무의미하고 불완전한 치료로 인간의 인간다운 죽음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고민. 그리고 인간다운 죽음을 누릴 권리가 있는 환자에 대한 고민이 다시금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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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10여 편의 의학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아직도 현직 의사로 활동하면서 무려 40여 년간 현장을 떠나지 않은 심장전문의가 이야기하는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국 의료계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다. 10여 년 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말콤 글래드웰의 책 "블링크"에도 등장하는 유명 의사라는 소개에 그 책을 다시 펼쳐보니 책 중간쯤에 20여 페이지에 걸쳐 이 책의 저자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범상치 않은 인물로 의학 분야에 정착하기 전에는 철학자의 길을 고민했다는 소개와 더불어 시카고 카운티쿡 병원에서 그가 도입한 응급실에서의 의사결정 간소화 작업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어쨌든 이 책은 저자가 현재 몸담고 있는 뉴욕-프레즈버티어리언 병원에서 2주 동안 벌어진 실화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자신이 담당한 응급환자들과 말기 환자들, 그리고 전이성 방광암으로 투병 중인 저자의 아버지와 알츠하이머병을 가진 어머니 등 많은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철저히 상업화된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테면 요새 병원에서는 더 아픈 환자들이 더 빨리 퇴원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퇴원이 빨라진 것은 더 이상 환자들 입원일수에 따라 수가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포괄 수가제 적용을 받는 병원들은 수익이 전적으로 환자 처리 수에 달려 있는 상황이라 환자들의 입원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전체 의료의 3분의 1이 불필요하게 행해지고 있다면서 필요 없는 MRI 촬영, 값비싼 신약 처방, 과잉진료 등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통의 결핍 현상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입원 환자 전문의는 수만 명에 달하지만 오직 환자들이 병원 내부에 있을 때만 진료하게 된다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부터 그들을 알고 있으며 퇴원 후에 다시 그들의 건강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환자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 교류하면서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진짜 의사는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진료는 제대로 된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결국 세부 전문의와 비용 효율이 높은 병원에 가치를 두는 비인간적인 의료 시스템에 발목이 잡혀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결코 부당한 시장 논리나 잘못된 의료 관행으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한다. 병원에 입원할 만큼 아픈 환자라면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의사에게 날마다 진료를 받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환자들 중에는 여러 명의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너무 많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비록 미국 의료계의 이야기이지만 잘못된 면들과 함께 다양한 의학적 배경들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의학계의 그랜드 마스터나 명의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병원이 명의보다는 재무 성과와 국가인증 기준 달성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의과 대학 역시 생의학 연구와 그저 만족할만한 수준의 의사 양성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 MRI 역시 오직 철저한 침대 머리맡 신경학적 검사로만 찾아낼 수 있는 일부 중요한 사실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 고3 이상의 읽기 능력 수준을 요구하는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오늘날 사망 진단서의 최소 3분의 1은 부정확할 것으로 추정한다면서 20세기 전반기에는 미국 내 병원에서 사망한 환자의 절반이 부검대에 올랐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체 병원들 중 5퍼센트가 안된다면서 부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등이 그렇다.
또한 의사들은 의학 분야의 모든 검사에 위음성 비율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음성 검사 결과를 받았을 때 진짜 음성 결과인지 의심해봐야 한다거나 노련한 의사는 의식적인 심사숙고와 본능적인 판단의 장점만을 취해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는 내용도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심폐소생술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영구적인 뇌손상을 입은 환자들도 4분의 1 정도라면서 심폐소생술의 위험성을 일깨워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체외심장마사지와 심폐소생술은 고령의 중증 심장질환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또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사진이 복선을 안겨주는 프레드와 마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짜인 실화라서 정말 인상적이었다. 전반적으로 의료행위,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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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존중은 전 인류의 보편적 생명윤리이다. 특히 의사를 직업으로 가진 이들에게 생명은 그야말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어 현대의학은 과연 축복인지 의문을 던진다. 뉴욕프레즈버티어리언 병원의 내과 의사인 부렌던 라일리는 철저히 상업화된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며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단 한 명의 의사도 없이 생의 마지막을 무의미한 연명 치료로 맞이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현대의학이 인간애라는 본질을 회복하고 환자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한 정보없이 무방비 상태로 고통을 주는 것은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무책임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 죽음으로 가는 세월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질환으로 하여금 서서히 죽음에 이를 때나 말기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죽음준비에 대한 장치를 비롯 현대의학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의학드라마나 소설을 읽듯이 실화를 바탕으로 죽음앞에 둔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의사들과 병원들의 상황, 선택의 기로에 놓여져 있는 순간이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 순간과 죽음앞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사람이라는 존재와 고통을 받는 환자 당사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늘 사람 보다 어떤 조직, 체계에 의해 시간만 끌고 낭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인듯 싶다. 저자는 지금의 의료환경이 그전보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인간이라는 존재와 우리가 함께 맞이했던 마지막 순간들을 그리고 내 연인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들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률적으로 그 환자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김할머니처럼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때 우린 안락사에 대한 용어와 의미에 대해서만 따지고 들었다. 생명존중이 우선이라지만 고통속에 죽음을 앞둔 사람앞에서의 생명에 대한 권한은 시대마다 변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이 의미가 있고, 인간 개인에 대한 생명존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도 해보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셋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 지었는데, 그 의미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죽음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다 비로소 죽음을 목격한 후 사람은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존중이라는 윤리만을 앞세워 무조건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통해 의료 시스템과 의료 자원의 할당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자연 수명을 다 산 환자들에게 값비싼 치료법을 시행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일인지 역설한다. 과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물론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현재 2015년에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한 의학적 혜택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하늘이 내게 준 운명의 시간들을 사용하여 내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다 무의미한 생명연장이 아닌 손을 쓸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사람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처칠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운동은 안 해, 절대, 하지만 위스키와 시가는 꼭 있어야지”. 의학을 무시하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처칠처럼 어느 것이든 그 선택에 의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비수처럼 밤에 찾아오는 죽음! 그래서 더욱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준비해야만 하는 이유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공호흡기와 심폐소생술, 심박조율기 등 무의미한 연명 치료로 수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과연 행복한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나이 많은 어른신들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우리 대한민국 모두가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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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 전 시아버지와 같았던 큰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셨다. 폐암 말기 선언을 받으시고, 항암치료를 하고 계시던 중 6개월을 조금 더 사시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그보다 1년 전 가장 친한 친구를 위암으로 잃었다. 그 친구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위암이 온몸에 퍼져버린 상태로 암을 발견했고, 2년의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두 사람 다 결국은 병원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큰 시아주버님은 병원을 떠나보지도 못하고 아니,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던 집에도 못 가보고 세상을 떠나야 했고, 내 친구는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필요에 따라 잠깐 입원을 하고 아니면 병원에서 진통제만 맞고 집에서 지내는 식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세상을 뜨던 날 새벽은 병원 응급실에서 있어야 했다. 둘의 삶과 죽음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더 존엄하고 덜 존엄한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이 올바른 치료를, 아니 적절한 치료를 받았는지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감히 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왜 우리는 모두 집이 아닌 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권리는 없는 것인지, 또는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 그리고 연명치료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과연 환자의 생명의 존엄성에 받쳐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얼마 전 존엄사를 예고했던 미국의 20대 여성이 작년에 자신이 예고한 대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스스로 죽을 권리와 생명의 존엄성, 안락사 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흔히 '보라매 병원 사건'이라고 불리는 소생 가능성이 희박했던 환자를 경제적인 이유로 퇴원하기를 원했던 부인과 그것을 허용했던 부인이 검찰에 의해 살인 혐의로, 의사 3명이 살인죄의 공범으로 기소된 사건과 폐암 말기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던 '김할머니'가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의 상태에 빠지자 가족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지만 병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소송을 제기했던 '김할머니 사건'이다. 이런 문제가 시장논리에서 비롯된 것일까? 의사소통의 문제일까? 아니면 불합리한 시스템의 문제일까? 자칫하면 의사들은 목숨을 잃을 상황에 빠진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으로 법적 처벌을 받으며 살인자로 내몰릴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환자의 주장 사이에서 과연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에 대해 <의사, 인간다운 죽음을 말하다>의 저자인 브렌던 라일리 박사는 자신의 경험을 마치 의학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독자는 마치 카메라의 눈이 되어 병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해 들여다보고, 때로는 환자가 되어 또 때로는 의사가 되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인간으로서 살면서 지켜야 할 아니 지키고 싶은 마지막 권리, 행복하게 죽을 권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문제의 해답은 '환자 중심'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명 연장과 생명 연장을 위해 감수해야 할 고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 것인지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당신은 생명 연장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불편과 고통을 감수할 용의가 있는가? 당신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수명을 희생할 용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옳은 답도 틀린 답도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답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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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죽음. 얼마전 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말이 있다. 존엄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단지 살아있음.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