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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앤 비티는 이번에 읽은 책<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전미 최고의 단편소설가라 불리는 그의 작품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제목에서 오는 끌림이 가장 컸다. 앤 비티의 여러 단편 소설 중 하나인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가 왜 각기 다른 9개의 단편 소설들을 아우르는 제목이 되었는지 책을 다 읽은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난쟁이 집, 도시의 저주, 늑대꿈 등 모든 소설에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작가는 그들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도,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도 구태연하게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답을 찾기 위해 읽지만,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글들에 점차 이해하게 된다. 알지 못한 것 투성이인 세상에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네 삶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 또한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도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매일매일 많은 일이 발생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에 온전한 의미를 알지 못한채 사라져간다 것,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느낀점이다. 앤 비티의 소설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해할 수 없다 함은 전적으로 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비정상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삶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하고. 모든 단편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이상해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한 실제 삶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이 글을 읽는 내내 더 슬프게 다가왔다. 글을 읽다 책 귀퉁이에 문득 적어놓은 글귀 하나. '우리는 모두 잘못된 걸 알면서도 모른 채 하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많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글 속 인물들도 자신의 삶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냥' 살아간다. 모르는 척 외면하지만, 알기 때문에 현재 불행하다 느끼고 자신도 모르는 행동을 하며 당황스런 일상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 모두들 온전한 나로 살지 않기에, 온전히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 않기에 매일 상처받기를 반복한다. 마지막 단편 '낱말 바꾸기'처럼 결국 세상 모든 이상한 일들이 곧 나의 일일 지라도 나에서 남으로 낱말을 바꿈으로서 나의 불행함을 외면하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걸 작가 앤 비티는 소설로서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온전한 나로 살 수 는 있는 것인가? 온전한 나로 살아간다면 지금보단 덜 상처받고 덜 아플 수 있는 것일까? 작가는 우리에게 해답을 주진 않는다. 그저 꿈꾸었고 소망했던 온전한 자신의 삶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고 경고할 뿐. 한 번뿐인 인생을 타인에 의해, 타인이 바라는 대로, 타인이 평가하는 대로 살고만 있을텐가. 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보며 이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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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남의 삶을 살짝 엿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짧지만 강렬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 마치 영화의 엑기스만을 쏙 뽑아낸 듯 하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그러한 단편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살짝 아쉬우면서도 떨떠름한 끝부분이 긴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최근에 읽은 책 역시 단편소설 이었다.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는지 이 작품처럼 전 작품도 책을 다 읽은 나를 찝찝하게 만들고 있었었다. 마음속에 잔재물이 남는 것 같은 결말로 일주일간 머릿속에서 그 애매모호하게 이야기를 맺어버린 마지막 문장을 원망했다. 그 일주일 후에 내가 느낀 건 그래도 재밌었다, 이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래도 재밌었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게 짧지만 강한 단편소설들의 묘미이다. 이 책의 소설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것 마냥 구불구불 길을 가고 있다. 올곧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들 뭔가 베베 꼬인 상황을 어설프게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니까. 키 작은 난쟁이도, 세 번째 결혼을 준비하는 여자도,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현재진행형 이야기는 긍정적인 미래를, 또는 우울한 현재의 진행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뒤늦게 이 책을 읽고 난 후 역자의 말에서 이 책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한, 나름대로 혁신적인 소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깜짝 놀라 다시 읽어보니 내가 무심코 넘어가버렸던 것들에서 그 힌트들이 나왔다. 다시 보니 상당히 대담한 농담도 섞여있어 놀랐다. 혹시라도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책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꽤나 많은 것들을 내가 지나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내가 그 시대에 산 것도 아니고, 미국이라고는 먼 나라 이야기인 내가 이 소설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 조금은 일상에서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에 있지 않나 싶다. 평범한 길만을 추구하다가 살짝 일탈하는 대리적인 만족감이 가득한 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이 달라서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인공들 또한 일상적인 루트를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려고 하는 모습이 이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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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늘 내게 어렵다. 그저 읽은 것이 많다고 자랑하고 싶던 철부지 때는 분량이 짧은 단편을 선호하기도 했지만, 깊이 있는 책 읽기를 하고자 결심한 다음부터는 유독 단편이 어렵게 느껴져 잘 안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기억을 되새겨 보아도 최근에 읽은 단편집이라고는 재작년에 읽었던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가 다일 정도로 마땅히 떠오르는 단편집도 없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읽은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도 처음에는 서평단 모집 글을 보고 그냥 지나쳤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단편을 모아놓은 단편집인데다가 작가도 외국 작가로 내게는 생소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이 책 제목이 자꾸 생각이 났고, 제목이 된 해당 단편 내용이 궁금해 결국 신청해 만나게 되었다.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은 저자 앤 비티가 1974년부터 2006년까지 발표한 작품들 중 주로 그의 초기작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시간적 배경이 지금으로부터는 약 40년 전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 수도 있는 음악과 영화배우 등이 많이 등장한다. 지금은 매체의 발달로 40년 전 대중문화를 영상이나 음원으로 접할 수 있기는 하나, 이 단편집을 통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어떻게 소비했는지 그 모습도 함께 접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역자가 주석을 통해 설명도 따로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록 음악 등으로 대표되는 히피 세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나도 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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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전미 최고의 단편소설가’ 라는 평을 받고 잇는 앤 비티는 다양한 사람의 군상을 진실하게 다루는 소설로 대중에게 공감과 사랑을 얻으며 미국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도 사람들에 관한 그의 최고의 단편들만 모은 소설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이 책의 제목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에 나오는 엘런 역시 도시속에서 자신을 지켜가며 타인과 함께 살고 픈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듯 하다. 엘런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과 이혼하였다. 이혼이 뭐 이상한것도 아니지만 더 불행한 건 엘런은 자신의 일이 그렇게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보람은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엘런은 직업이 필요했고, 직장이라 생각했기에 일을 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생활도 할 수 있으니 가르치는 일은 그저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선생에 대한 기대도 새로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기대가 아닌 자신의 생활비에 대한 업그레이드용 개발에 있었을거라 짐작된다. 엘런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열심히 일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하루 아침에 망할지 알 수가 없다.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의료보험도 안되는 나라에서 어디라도 아프기만 한다면 1년치 월급이 나갈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남편은 엘런에게 낡은 집이지만 집을 한 채 마련해 주었다. 재밌는 건 엘런이 샘이라는 대학교 3학년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동생의 집에서 잠시 하숙을 했지만 여동생의 남편과 맞지 않아 오게 된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어쩌면 엘런은 샘이라는 어린 대학생에게 끌린 것도 있었지만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데리고 있는 펫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문제는 샘은 엘런에게 그리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엘런의 생각에 따르면 남편이나 샘이나 둘 다 괴짜같은 구석이 있다고 하지만 스타일은 달랐다. 로스쿨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샘을 엘런은 도와주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샘의 진정한 마음은 엉뚱한데 있었다. 물론 젊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엘런에겐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결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나와 타인의 시선이 분산됨을 경험하게 된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서로의 시선들이 엇갈린다. 서로가 무엇을 왜 추구하는지 짐작만 할 뿐 진정한 이해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인가 보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지금 해야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전달해 준다. 엘런은 그러한 과정속에 놓여져 아마 여러 가지 생각과 갈등을 했을 것이다. 샘의 행복추구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책에서 확인해 보자. 어쩌면 지극히 단순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샘의 결정에 나는 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샘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뒤처져도 괜찮다. 이미 샘은 자신이 현재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깨달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후 엘런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과 가까워졌을 수도 있고,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가 무엇인지 발견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타인과 나의 시선안에서 자유로움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다. 타인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는 내가 나답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상처들은 나 뿐만 아니라 타인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어떻게든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 살아남는 구조로 되어 있기에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불신과 조롱과 냉혈함으로 바뀐다. 앤 비티의 단편소설은 이렇듯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과 타인이 불안정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넌지시 던진다. 난쟁이 집,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도시의 저주, 늑대 꿈, 콜로라도, 먼 음악 소리, 아내가 사는 집,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낱말 바꾸기 9권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책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귀한 메시지로 다가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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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비티의 소설 이후 ‘비티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작품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앤 비티. 과연 어느 정도 길래 이런 찬사가 붙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편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앤 비티의 9편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인 「낱말 바꾸기」만이 2001년 작품이고, 나머지 작품들은 그녀의 초기 작품들(1970년대)인 듯싶다.
다 읽은 후에 든 생각은 솔직히 ‘이게 뭐지?’ 였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일상의 한 단면을 잘라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들.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의아한 밋밋한 전개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앤 비티가 글을 쓰던 당시를 한 번 떠올려본다. 그 당시는 히피문화가 미국전역을 휩쓸 때였다. 그래서인지,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에서는 이러한 히피문화를 느낄 수 있고, 일면 동경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로스쿨 진학을 위해 애쓰던 샘은 어느 날 갑자기 진학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샘은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서부로 오세요.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시도해 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어요?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이 그에게는 아름다운 행복을 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창조성은 히피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인지,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에서의 샘이 음악교사인 엘런에게 해주는 아이디어들은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 영혼에 이러한 창조성이 감춰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야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이 대체로 정돈되지 않은 뒤죽박죽의 삶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니트족처럼 일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일하려 하지 않고, 그저 마리화나나 피워대는 모습. 게다가 이혼이 빈번하며, 배우자보다는 개나 고양이를 더욱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이 앤 비티가 당시 미국 사회를 향한 풍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이야기들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앤 비티의 능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 책에서 인용한 글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어 적어본다.
“우리는 늑대 꿈을 꿔서 겁먹는 것이 아니다. 먼저 겁을 먹었기 때문에 늑대 꿈을 꾸는 것이다.”- Samuel Taylor Coleridge (112쪽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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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나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과연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하는 의구심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제목이다. 사실 '앤 비티'라는 말(작가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다. 그의 쓴 글을 어떤 식으로든 읽었는지 아닌지는 솔직히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에 대한 글들을 보면 실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데 '전미 최고의 단편소설가'이면서 '시대를 담아낸 단편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 때문이다.
전미 최고도 대단한 표현이지만 시대를 담아내는 단편소설가라는 수식어는 찬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글을 쓰길래 이런 찬사를 받는 작가인지 새삼 이 책이 더욱 궁금해진다. 사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작가의 '앤 비티'라는 이름보다는 제목에 끌려서 선택하게 된 것이였기 때문에 우연한 선택이 놀랍도록 대단한 작가의 글을 읽게 만들어 준것 같다.
앤 비티는 1970년 중반에 <뉴요커>라는 잡지 등에 단편을 게재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오 헨리 문학상 최종 후보에 네 번이나 올랐으며, 2010년에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탑10 타이틀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경우의 책은 명성과는 달리 개인적으로는 '도대체 이 책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우도 가끔 있다.
사실 이 책도 그렇게 쉽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시대를 담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런 일을 잘 해낸 앤 비티가 대단하다고 사람들은 평가했을 것인데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코 쉽게 읽었다고 장담할 수 만은 없기에 조금은 음미하듯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는 하지 않으니 겁낼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총 9편의 앤 비티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시작이 그가 <뉴요커> 등의 잡지에 게재했던 1970년대의 글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으로부터 조금은 오래 된 시대적 배경의 이야기들이다.
비록 시대적으로는 많이 지난, 그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삶이란 것이 어떤 특정한 시대에도 세월을 아우르는 공통된 관심사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삶이 지금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그 당시의 문화사회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극찬하는 앤 비티라는 인물이 그려내는 단편을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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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 전경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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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비티가 1974년부터 2006년까지 <뉴요커>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묶은 <뉴요커 단편집>에서 아홉 편을 뽑아 번역한 작품집이다. 단편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점점 현재와 다른 장면과 상황을 마주했다. 알고 보니 발랄한 개성으로 주목받았던 초기작을 주로 골라 번역했다. 당연히 그 시대의 정치, 문화, 경제 등의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다. 후기작은 마지막 작품인 <낱말 바꾸기>(2001년)이 유일하다. 개인적으로 발표 연도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제목이나 마지막에 연도를 넣어주었다 조금은 더 쉽게 이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문장이 어렵지 않아 비교적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상황 등이 낯설었다. 명확한 결론을 내려 끝문장을 읽을 때면 ‘그렇구나!’ 하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뭐지?’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간결한 문장이지만 그 상황을 단순하게 보여주면서 하나의 결론으로 이야기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의 상황을 이어붙였거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곤혹스럽다. 그 상황이나 장면을 즐기기보다 의미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난쟁이 집>에서 동생 맥도널드가 형 제임스를 찾아온다. 형은 난쟁이다. 엄마가 요청해 간 것이다. 그런데 형도 이런 방문이 반갑지 않다. 이들의 관계가 간결하게 나온다. 형이 자신보다 작은 여자와 결혼한다. 이 결혼식 풍경이 낯설다. 표제작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사소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앨런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똑같은 괴짜지만 한 명은 자신의 수고에 감사하고 선물을 주는 반면 다른 한 명은 그냥 누릴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순간 선입견처럼 고정된다. <도시의 저주>는 마리화나 중독자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일상이 산만하다. 뭔가를 찾으려고 하면 자꾸 다른 엇나간다. 전 아내가 내뱉은 꿈 이야기는 관계의 균열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잘 알려준다. <늑대 꿈>은 세 번째 결혼을 앞둔 신시아 이야기다. 다이어트 이후 결혼을 원하는 신시아와 현재의 그녀를 사랑하는 찰리의 모습이 불안하게 보인다. 짧은 이야기 속에 신시아의 삶이 단편적으로 나오고, 현실의 그녀를 만든 삶의 장면들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세 번째 결혼에 대한 부모의 반대와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감이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어진다. <콜로라도>는 낯설다. 낯익은 지명이지만 잘 모르는 환경이 나오고, 이곳을 가고자 하는 페넬로페의 바람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이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볼 뿐이다. <먼 음악 소리> 속 샤론과 잭의 관계는 엇나가 있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뉴욕 시절이 음악으로 흘러나올 때 느끼는 감정이 따뜻하다. 쿨하다. <아내가 사는 집>은 관계가 약간 복잡하다. 꼬였다기보다 서로가 보는 관점이 달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전 남편에게 열쇠를 줬지만 그것이 일상 속으로 불쑥 들어오길 바란 것은 아니다. 이네스와 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는 다른 사람이 몰랐던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하게 보는 것만으로는 듣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낱말 바꾸기>는 비교적 최근 작품이다. 다큐 속 등장인물들은 과연 이름만 바꾸면 모를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당발 엄마를 찾아온 딸의 방문은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고 보기 힘들다. 자신의 마음이 편한 곳으로 가고자 하는데 이것이 형식적인 관심으로 표출된다. 마음과 실제 행동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