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지>는 간척지에서 최소한의 노동조건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막노동꾼들의 삶에 대한 투쟁과 그에 대항하는 감독관과 소장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의 대항, 그리고 출동한 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사회풍자 소설이다. 특히, 작가는 소설에서 하층민들이 기득권층에 대항함에 있어 보여주는 나약함, 즉 그들의 기만적인 술책에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같이 허무하게 분열되고 찢겨지는 하층민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진자의 악랄함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어느 바닷가의 간척 공사장에서 노동 쟁의를 벌이던 일단의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새로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합류한다. 그 중 한 명인 동혁은 5함바에 속하여 일을 하는데, 처음 듣던 것과 달리 노임도 지나치게 싸고 거기에 십장(감독)의 착취가 더해져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는커녕 도리어 빚에 시달리고 있다. 하는 일도 험하여 심한 부상을 당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사측은 깡패들로 이른바 감독조를 구성하여 노동자들의 불만을 강압적으로 억누른다. 동혁은 대위 등과 함께 쟁의를 준비하며, 마침 곧 국회 답사단이 오기로 되어 있어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와 순식간에 쟁의로 발전하지만, 회사측의 회유 공작으로 노동자들이 동요하여 결국 쟁의는 실패로 돌아간다. 동혁은 극한적인 행동을 하려는 각오를 한다. 이 글을 읽고서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현실적인 문체로서 70년대의 사회상을 드러내고 지금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노동쟁의 등 각종 쟁의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우리 정부나 아니면 고위관리층이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지를 얘기하고 있는듯했다. 한번 고개를 돌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응하는 댓가를 지불해주고 배려를 해야한다. 소위말해 못살고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아마 눈꼽만큼의 시선도 아니고 그냥 웃음으로써 대충넘기며 그냥 구조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처분하고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서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네들 자신뿐이 아닐까 우리도 한번쯤 객지에서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 힘든 짐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객지> |
| 노동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정하며 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보장 방법으로써 보충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여기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 - [세계인권선언 제 23조의 3.4항]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당시 22세)은 서울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焚身自殺)했다. 그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합리한 착취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투쟁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친구의 지하 층계방에서 낡은 라디오를 통해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전해들은 청년이 있었다. '전태일 사건'에 충격을 받은 청년은 그 길로 한달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부랑 노동자들의 밑바닥 삶을 다룬『객지』를 발표한다. 『객지』는 운지 간척 공사장에서 일어나는 부랑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언제나 자기가 다루려는 현실의 한복판, 그 현장에 있는 자라야 한다'고 믿는 황석영은 신탄진 연초공장에서의노동 경험과 친구의 섬진강 간석지 공사장 체험을 바탕으로 『객지』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황석영은 소설 속 노동자들의 절박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독한 노동의 현장, 회사측의 횡포에 짓밟혀야만 하는 노동자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 투성이의 현실... 고향을 등지고 평생을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노동자들은 노동현실의 모순 속에서 언제나 고통받아야 했다. 그들은 제 한 몸 세상에 붙이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하루하루 절실히 느끼며 살아간다. 일용 인부로 고용된 사람들, 그들이 하루종일 뼈빠지게 고생해서 벌어들이는 몫은 '꼭 하루를 살 권리가 찍힌 전표 한 장'이 전부이다. 그러나 노동의 대가로 받는 '전표 한 장'마저도 서기, 감독, 십장 등 중간관리의 착취로 전부를 빼앗기고, 자신들의 손에 들어오는 건 십 원 한푼도 없다. 힘겨운 노동으로 돈을 모으기는커녕 아무리 일을 해도 늘어가는 건 빚더미뿐이다. 그런 노동자들의 삶에 '희망'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회사측은 '치안유지를 맡는다는 구실'로 '감독조'라 불리는 깡패들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억압한다.'장씨'를 비롯한 늙은 노동자들은 '개선이니 진정서니 서명이니 하는 짓들이'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며 체념하지만, 삶의 막바지까지 내몰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분노와 함께 조금씩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결국, '대위'와 '동혁'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끌어 모아 빼앗겼던 자신들의 피땀을 되찾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파업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성숙하지 못했다. 이성적 투쟁과 조직적인 행동이 아닌, 감정적인 충동으로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은 회사측의 거짓약속에 쉽게 타협해 버린다. 어느 누구도 엄연한 현실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결국, 회사측의 회유와 노동자들의 배반(타협)으로 파업은 실패로 끝나지만, 동혁은 혼자 산에 남아 공사장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미래를 다짐한다. '꼭 내일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들이 받지 못하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은 채, 동혁은 남포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어두웠던 70년대는 지나고,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노동운동의 불씨를 지핀지도벌써 32년이 흘렀다. 노동운동은 질곡의 세월을 보내며 고통과 좌절을 겪었고,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많은 것을 얻어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아직까지도 보호받지 못하고 정말로 소외된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이나 일용 막노동자들이 남아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 중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60%를 차지한다는 통계는 현 노동문제의 심각성의 상징한다.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은 정규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법이나 사회보험법의 혜택을누리지 못하며 비인간적인 삶에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땀 흘려 일하며 얻는 노동자로서의 긍지보다 노동에 대한 모멸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언제까지 노동자들의 고통을 모르쇠하고 있을 것인가...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노동자들의 소리에 이제라도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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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고향의 발견 - 황석영 단편전집 황석영 소설은 고향 상실이라는 원초적 공간과 분리된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향, 구체적으로는 농촌을 떠나 “건조한 먼지만이 떠도는 황량한 빈 도시”에 내던져진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피까지 팔아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하는, “희망은 눈곱만큼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거나(「이웃사람」), “우리의 고향이 아”닌 “남의 땅”에서 “도피로가 차단된 일곱 마리의 쥐새끼” 신세(「탑」)가 되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마저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고향-농촌에서는 살 수 없어 그들은 고향을 떠났지만, 그들이 살아가야 할 도시는 “나는 당신네가 싸지른 똥”이 되어야만 편입될 수 있는, 고향만도 못한 각박한 세상이다.
그래서 도시의 메마른 삶에 황폐해진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난 고향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조건을 마련할 수 없기에 떠난 고향이, 황량한 도시의 삶을 경유하면서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떠오르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향은 단순히 생존할 수 있는 터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섬”(「삼포 가는 길」)이라는 표현처럼 공간적 아름다움의 세계, 곧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고향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향의 미적인 변화는 실제적인 고향을 관념화하는 양상을 동반한다. 도시의 삶에 절망한 인물들에게 고향이 희망의 공간으로 비치는 것은 고향이 도시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도시에서 추방된 그들이 갈 곳은 고향밖에 없다는 비극적 인식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사물화가 진행된 도시적 삶의 방식은 상대적으로 그들이 고향에서 경험한 인간적 친밀감의 정서를 그리워하게 한다. 문제는 이 그리움이라는 삶의 감각이 현실적인 조건과 결부되지 못할 때, 그것은 주체의 관념 속으로 스며들어 절대적인 이미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도시의 삶에 치일수록, 그들은 과거의 절대화된 고향을 생각하고, 그 세계에 집착한다. 그리하여 절대화된 고향은 도시의 삶에 지쳐버린 그들이 최종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삼포 가는 길」에서도 표현되듯, 그들이 찾아가는 고향 이미지는 그들의 내면에만 내재되어 있는 폐쇄된 세계에 가깝다. 10년 만에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복귀하는 그들이 목격하는 고향의 현실은 이미 도시화의 길을 걷고 있는 고향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도시가 이미 변화가 완결된 세계라면, 고향은 변해가고 있는 ‘진행형’의 세계이다.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 매”던 곳에서 지금은 “관광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단일한 안식의 공간이 복잡한 근대의 공간으로 변하면서 안식-희망으로서 고향의 이미지는 절망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이처럼 도시의 삶에 절망한 주체들이 위안의 공간으로 삼고 있는 마음속의 고향 역시 근대적 시선을 피해갈 수 없다. “마음의 정처”라고 표현되는 고향의 세계는 “어두운 들판”으로 변하여 그들의 귀농을 거부한다. 그들이 고향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의 삶(공사판 일)을 반복하는 일밖에는 없다. 이제 고향은 정주할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길 위의 한 공간일 뿐이다. “바다 위로 신작로”를 건설하는 근대화의 물결 앞에서 고향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고향은 주체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로 변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과거’의 아름다운 고향은 추억 속의 한 이미지로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도시와 농촌 그 어느 공간에도 정주할 수 없는 분열된 주체를 양산한다. 고향이 있다고 생각해왔던 ‘정씨’나, 고향이 없다고 생각해온 ‘영달’이나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공통적으로 고향을 상실한다. 그 상실의 대가가 바로 관념적 고향, 곧 미학적 대상으로서 고향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모든 대상을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근대적 힘의 한 측면을 나타낼 것이다.
황석영의 초기 소설에 나타나는 남성적 세계-원시적 생명의 이미지는 이러한 고향 상실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소설의 전경에 배치된다. 「장사의 꿈」이나 「돼지꿈」에서 구체화되는 원시적 생명력의 이미지는 자본주의라는 천민적인 삶의 방식에 거세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나름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지만 「장사의 꿈」에 등장하는 “내 키는 백팔십에 가슴둘레는 일미터가 넘고 삼두박근이 고릴라”와 같은 “균형이 꽉 잡힌 늘씬한 사나이”는 그러한 이미지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썩는 용”이 될 수밖에 없다. 그가 태어난 세계는 원시적 힘이 중시되는 세계가 아니라, 그와 같은 원시적 힘을 억압하거나 길들이려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늘씬한 사나이”라는 주인공의 이미지는 상품화-대상화라는 매개항을 통과하지 않으면 현실화될 수 없는 기호이다. “늘씬한”이라는 표현에 나타나거니와 그의 상품화는 시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 대상-상품이기에, 그는 “문화 영화”로 지칭되는 포르노에 출연하여 그의 몸을 관음의 대상으로 만들며, 한편으로 “명함판 사진”을 매개로 유부녀들에게 자신의 성을 판매한다. “장사”라는 힘의 소유자-주체가 “날씬한”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부여받으면서 자본주의의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 같은 상품화-대상화에 저항하는 황석영 소설의 전략은 남진우의 지적대로, 상승지향적 상상력, 구체적으로 ‘발기’의 상상력으로 집중된다. 자본주의라는 천박한 세계에서 거세당한 “자지가 호랑이 앞발처럼 억세게”(「장사의 꿈」) 일어난다는 말 속에 나타나는바,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이면에는 주체의 ‘거세’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황석영의 초기 소설은 이 ‘거세’를 일으키는 상황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발기’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도식화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에서 자본주의적 근대는 무엇보다 주체의 ‘거세’를 야기하는 부정적인 세계로 나타난다. 부정해야할 세계가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기에 황석영 소설은 그 부정의 세계와 반대되는 세계로 똑바로 나아갈 수 있다.
「입석 부근」에 표현되는 “내가 학교와 여자뿐인 집안의 폐쇄적인 훈련소에서 그리워했던 것은 야성이었다. 들짐승 같은 놓여난 활기였다. 사내의 긍지였다”와 같은 원시적이면서 남성적인 힘 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근대라는 부정의 세계가 정립되어 있기에 가능한 의식이다. 요컨대 황석영 소설에 나타나는 근대의 형상은 남성적 생명력을 내재한 상승-발기의 세계를 억압하는 부정성의 표상인바, 이 근대의 표상이 부정됨으로써 남성적이며 원시적인 상승의 이미지가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황석영 초기소설의 주조인 원시적이며 남성적인 세계는 근대 세계를 타자화하는 정치적 세계이며, 근대 세계의 의미망을 따라 새롭게 ‘발견’되는 세계로 드러난다.
근대의 형상을 통해 역설적으로 재발견되는 원시적-남성적 세계의 이미지는 “아름다운 섬”으로 표상되는 미적 고향의 이미지를 계승하는 공간이다. 도시적 삶과 대별되는 원초적 공간으로서 고향의 이미지 자체가 근대적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근대적 고향의 변형인 원시적 세계는 관념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 원시적 세계는 현실-일상 세계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理想鄕, Utopia)의 세계이거니와, 현실과 이상 사이에 나 버린 이 거리감이 황석영 소설의 이분법적 구조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현실의 삶이 열악할수록 그것을 대체하는 이상의 세계는 그만큼 “고요한 휴식”이 있고, “평안한 조화”가 있는 세계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입석 부근」의 배경이 어느 산의 가파른 암벽이듯, 그들이 향유하는 휴식과 조화는 철저하게 암벽이라는 밀폐된 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현실과는 분리된 세계이며 그렇기에 평안한 휴식의 세계가 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 표현되는 대로, 그 세계는 “내 마음 속”에만 “우뚝 서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바위”에 한정된 세계일 뿐이다. 현실에서 이탈하여 이상을 추구하는 주체는 이 지점에서 내면적인 주체로 변화되고, 그 내면적 주체에 의해 원시적 힘의 세계는 비로소 근대적 고향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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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울 엄니, 내가 떠나올 때에 객지 나가 고생 말라구 하시더니...어이구 울 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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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황석영의 『객지』와 고리끼의 『어머니』를 함께 읽으며 노동소설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그땐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을 읽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꽤 충격적이었다.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란 물음의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고, 사회주의리얼리즘 문학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바탕은 두 소설이 뛰어난 문학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주제의식의 집착으로 인해 문학성을 상실했다면 문학의 역할이 부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이 글을 썼던 이유(우리 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동물농장』,「나는 왜 쓰는가」, 141쪽)처럼 두 작가는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서 승화시킨 대표작가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객지』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대표작이자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고, 당시만 해도 입 밖으로 내뱉는 자체가 금기시 되었던 사회적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한계가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소설이 아닐 수 없었다. 8편의 단편 ‘입석 부근’, ‘탑’, ‘돌아온 사람’, ‘가화’, ‘객지’, ‘줄자’, ‘아우를 위하여’, ‘배운 사람’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은 체험 속에서 그가 보고 느낀 바들이 문학적인 관점으로 승화된 것들이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 해병대로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공사장 막일부터 시작해 가출, 도보여행, 산악등반 등 다양한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여 사회의 문제의식들이 글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강요되지 않으며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고 상상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그의 소설들은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사회 비판적이다. 인간의 삶 곳곳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적이지 못한 현실들을 비판한다. 비판의 흐름은 크게 세 가지이다.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을 통해 본 전쟁과 제국주의의 허상, 사회 하층민의 모습을 통해 본 인간소외, 경제발전에 따른 물욕화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을 통해 본 전쟁과 제국주의의 허상은 ‘탑’, ‘돌아온 사람’에서 이야기된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훗날 『무기의 전쟁』을 통해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두 번째로 사회 하층민의 모습을 통해 본 인간소외의 모습이다. 그의 대표작인 ‘객지’를 비롯해 ‘아우를 위하여’와 같은 작품 속에는 일용직 노동자, 공장 노동자 등 하층민들의 생활상이 다양한 형태로 그려진다. 여기서 작가는 직접 주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주인공을 통하여 주인공의 삶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 거부감없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고, 문제의식에 쉽게 동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발전에 따른 물욕화이다. ‘줄자’, ‘배운사람’ 등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주제의식은 돈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이웃 간에 싸우고, 물질화되어가는 사회현상들이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황석영 작가는 여전히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글쓰기의 행태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간과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심판의 집’ 작가 서문(1977년)에서 밝힌 글을 쓰는 이유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런 점에서 그의 초기작 『객지』는 그를 상징할 수 있는 그의 대표작이라는 믿음 또한 강하게 밀려왔다.
“소설은 보여주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동을 수반한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내일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 뒤에야 오늘의 문학이 후세의 문학에 넘겨줄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by 꽃다지, 2008년 8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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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개월의 새 등 <삼포 가는 길>에 백화가 있다면 <몰개월의 새>에는 미자가 있습니다. 다 같이 술집의 작부지요. 칼럼에서 소개한 대로 백화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배 위로도 남자들 사단 병력은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몸을 팔고 인생을 저당 잡혀 겨우 번 돈으로 베트남으로 떠나는 군인들의 뒷바라지며 옥바라지를 합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처럼 달러에 몸을 팔러가는 불쌍한 신세임을 걱정해주는 것이지요. 이렇듯 노동자 작부 떠돌이 등 시대가 만들어낸 가련한 민중의 한스런 삶에 천착하는 작가는, 그러나 그들을 증오와 원망에 휩싸인 사람들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 증오와 원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창조해 냅니다. <객지>의 동혁이나 <한씨연대기>의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월남한 의사 한씨, <돼지꿈>의 근호와 <섬섬옥수>의 아파트 배관 수리공 상수 등, 자본주의와 성장 일변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밀려나고 쫓겨난 밑바닥 인생일망정 작가는 그들에게서 오히려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민중의 에너지를 찾으려 애씁니다. 아니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지요. 황석영의 리얼리즘이 한(恨)의 토로에 있지 않고 건강한 전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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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자아가 어느정도 자리잡기 시작하면 읽어야 한다는 소설이 있다.. 난장이가쏘아올린작은공.. 객지...그리고 광장..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나도 아이들에게 이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요(?)하며.. 덩달아 다시한번 보기 시작하였다... 먼저 선택한 책이 황석영의 객지다... 객지를 보겠다는 생각에 황석영의 중단편을 다시한번 읽게되니 느낌이 다르다...
간척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기득권에 대한 나약함을 섬뜩하게 그려낸 이소설은 오늘날의 작가를 만든 원동력이자 이땅에 수많은 동혁이 태어나게 한 모티브를 제공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이소설을 읽고 얼마나 많이 좌절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밤을 번민속에 지냈는지... 한때나마 그시절로 돌아갈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이들은 이소설을 읽고 무얼 느낄까????? |
| 황석영씨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촉촉히 젖는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소설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 가난하지만, 성실히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재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소설가가 반드시 현실참여적이어야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여문학은 참여문학 나름으로 가지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순수 문학은 또 그 나름의 존재의 가치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자신도 한명의 사회 구성원인 소설가를 비롯한 문인들이 그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문학이외의 도구를 이용해서 밝히는 것을 터부시 하는 것에 모아진다. 이점에서 바로 우리 문단에서 황석영씨가 차지하는 소중함이 있는 것이다. <객지>는 간척지에서 최소한의 노동조건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막노동꾼들의 삶에 대한 투쟁과 그에 대항하는 감독관과 소장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의 대항, 그리고 출동한 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사회풍자 소설이다. 특히, 작가는 소설에서 하층민들이 기득권층에 대항함에 있어 보여주는 나약함, 즉 그들의 기만적인 술책에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같이 허무하게 분열되고 찢겨지는 하층민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진자의 악랄함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다. 책을 덮을면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체루탄 가스냄새로 전국의 거리가 매웠던 군사정권시절, 현대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의 편에서 정권의 부당성과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을 어루만져 주었던 노무현이란 사람이다. 왜 자꾸 나는 황석영씨와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가깝게 느껴질까? 마치 강원래와 구준엽의 클론처럼 말이다.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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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황석영의 대표작으로 당시 매우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어떠한 구조로 공사장 노동자들이 시달림을 당하는지를 잘 그리고 있으며, 그에 맞서 쟁의를 준비하지만 공장 노동자들과 달리 조직화가 어려운 관계로 쟁의가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도 긴장감 있게 그려졌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어느 바닷가의 간척 공사장에서 노동 쟁의를 벌이던 일단의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새로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합류한다. 그 중 한 명인 동혁은 5함바에 속하여 일을 하는데, 처음 듣던 것과 달리 노임도 지나치게 싸고 거기에 십장(감독)의 착취가 더해져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는커녕 도리어 빚에 시달리고 있다.
하는 일도 험하여 심한 부상을 당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사측은 깡패들로 이른바 감독조를 구성하여 노동자들의 불만을 강압적으로 억누른다. 동혁은 대위 등과 함께 쟁의를 준비하며, 마침 곧 국회 답사단이 오기로 되어 있어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와 순식간에 쟁의로 발전하지만, 회사측의 회유 공작으로 노동자들이 동요하여 결국 쟁의는 실패로 돌아간다. 동혁은 극한적인 행동을 하려는 각오를 한다. [인상깊은구절] 백화는 뭔가 쑤군대고 있는 두 사내를 불안한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달이가 말했다.'어디 능력이 있어야죠'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쨌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원짜리 두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뒷차를 탈 텐데......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에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않을께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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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었다. 정말 멋진 소설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세계들에도 빠져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러던 차 우연히 황석영의 중단편전집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황석영의 중단편전집 1권인 '객지'. 이 소설에 대해 지금까지 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정수라는 수식어로만 들어 왔을 뿐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깔끔한 편집과 함께 독자들을 찾아 온 전집 시리즈가 고마울 따름이다.
'객지'는 '객지'라는 중편 소설 외에도 여러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주로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들이 담겨 있는 이 책은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문학세계 출발점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가 된다. 작가 초기시절 작품의 완성도는 약간 부족한 듯 하지만 대신 미래를 향한 작가의 강렬한 염원과 불타는 듯한 열망이 생생히 전달되어 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작가의 관념이 너무 과도했던 탓일까.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랄까 상징성은 다소 떨어지는 듯한 생각도 든다. 1권에서 2권으로 넘어가면서 창작 시기와 맞물려 이루어질 작가의 변신을 지켜볼 수 있는 것도 독자의 또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될 듯. [인상깊은구절]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고 나서 동혁은 다시 남포를 집어 입안으로 질러넣었다. 그것을 입에 문 채로 잠시 발치께에 늘어져 있는 도화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윗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엇 떨리는 손을 참아가며 조심스레 불을 켰다. 심지끝에 불이 붙었다. 작은 불통을 올리며 선이 타들어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