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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40여 년 전만해도 세계 저개발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사회가 이젠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원조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 과정에 대한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근대화, 산업화라는 서구열강의 흉내를 낸 것이 지금의 외형적 성장을 이룩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결국 제한된 자원 하에서 여전히 성장을 도모 할 수 있는 지역적 환경의 덕을 보아왔으나 이젠 값싼 노동을 구하기 위한 이전의 틈새도 점진적으로 고갈되어 가고 있어 양적 성장만을 추구 하던 경제기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고려하여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한없이‘성장’을 밀고 나가기만 하려는 사고방식은 심한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 그 하나는 기본적인 자원의 제약이며, 다른 하나는 경제 성장에 의해 초래된 간섭이 자연이 감내 할 수 없는 한도에 이르러 있다는 점이다. 무한한 전면적 성장을 지향해도 수용되던 과거의 환경은 지나갔다. 더구나 끝없는 팽창주의로 자원과 환경의 양면에서 자연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한편,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창조성을 억압하여 인간소외를 진행시켜온 결과는 인류 문명의 다양한 부문에서 붕괴와 몰락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와 같은 기계화, 산업화를 통한 유물주의적 철학이 판치는 경제지상주의의 세계가 야기하는 인간과 자연의 심각한 손상과 인간을 배제하고 양(量)이 지배하는 시장논리로 질(質)을 논하지 못하는 실증주의의 과학을 비롯한 19세기 대사상의 비판과 이의 대안으로서 인간중심의 기술인 중간기술과 새로운 소유의 형태 등 인류사회의 영속적 존재를 위한 제안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을 서로 다투도록 만드는 원인인 탐욕과 질투심을 의식적으로 조장시킴으로써 성립되어 있는 자본주의경제를 기초로 하여 평화를 이룩하려는 것은 二重의 환상”이라고 오늘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사상을 비판하는 저자는 수량화의 발달로 놀라운 학문적 발전을 이룩한 듯한 근대경제학이 질적인 가치를 도외시하거나 파악치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일례로 국민총생산과 같은 수치의 신장을 단순히 선(善)으로만 바라보도록 하는 왜곡된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 “그 신장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하고 질문하면” 답변을 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신장한 것이냐 라든지, 그 이익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냐 라는 문제 등은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5파운드의 석유, 5파운드의 밀, 5파운드의 호텔비”등과 같이 총량에 한계가 있는 재생될 수 없는 재화와 반복 재생 될 수 있는 재화의 구분과 같이 본질적인 질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근대경제학의 무분별한 합리성의 판단이란 것이 오직 공급하여 얻어지는 이윤율뿐이라면 이는 진정 합리적 신호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질적 가치를 희생시키고 양적 가치, 다시말해 돈의 형태로 충분한 이익을 올리지 않는다면‘비경제적’이라는 기이한 사고를 정착시킨 오늘의 시장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이념은 오직 부를 손에 넣는 것만이 현대의 최고목표라는 물질 하나로 수렴되어가는 전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물질적인 것이 본래의 정당한 지위인 종속적인 지위로 돌아가는 생활양식을 역어내는 것, 탐욕을 무장해제하고 기술과 조직의 틀을 바꾸고 새로운 생산과 소비 생활시스템을 만들어 노동의 인간화를 꾀하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속성을 지니는 경제를 살려내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최고의 과제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나 자연까지 단순한 생산도구 이상으로 고려하지 않는 현대의 대량생산, 규모의 경제와 같은 거대(巨大)신앙은 윤리를 삼켜버리고 경제이외의 가치인 인간적 관점을 봉쇄해 버렸다. 또한 논리적으로 아무리 따져 봐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확산 문제)와 해결 가능한 문제(수렴문제)에 대한 구별없이 수렴되는 문제만 상대하고, “탐욕과 고리(高利)와 경계심(경제적 안전)을 신(神)으로 삼고”있는 오늘의 경제세계는 덕(德),사랑, 절개 등의 말조차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역사가 보여주듯 문명의 숙명을 좌우했던 토지의 이용 역시 경제적 효용가치로서만 인식될 뿐 생명, 목숨이 있는 무한한 살아있는 물질로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농업과 공업에 대한 차이인식의 결여, 재생불능 천연자원에 대한 오만한 태도, 근본적으로 자동차와 동물조차도 효용의 가치로만 구분하는 중대한 형이상학적 오류로 인한 위험, 즉 존재의 차원을 간과하고 있기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인간으로부터 창조적 일을 빼앗고 파편화된 일을 떠넘긴 현대기술, 과학이 야기한 세 가지 동시적인 위기 - 기술, 조직, 정치 등이 인간성을 거역하여 사람의 마음을 침식하고, 생물계라는 환경 손상과 부분적 붕괴의 징후,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낭비 극도화로 인한 고갈 가능성 - 의 지적과 함께 인간중심의 기술로서 거대기술보다는 소박하고 값이 싸며, 제약이 적은 자립, 자주, 민중의 기술로서 중간(中間)기술에 대한 피력은 오늘의 남반구에 집중되어 있는 저개발국 및 농촌지역의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示唆하는 바가 높다하겠다. 그러나 이 저술의 꽃은 단연 3부 5장의‘새로운 소유 형태’라 할 수 있다. 사유와 공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자유와 전체주의를 매트릭스화 하여 오늘의 우리가 궁극으로 지향하여 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장으로서 사기업의 국영화에 대한 치밀한 제언들, 사적소유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경제적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그만의 새로운 견해의 피력은 매혹적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적정규모의 소비로 인간으로서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간소와 비폭력, 모순되어 보이는 자유와 질서의 조화, 인간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고체계에 근간하는 대중생산체제에서 중간기술까지, 그리고 새로운 형이상학체제의 구축에 이르는 슈마허의 제안들은 오늘을 걱정하는 인류 모든 이들에게 중대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다. “생명이 없는 물질은 우아한 것으로 만들어져 공장을 나오지만, 인간은 거기서 부패하고 타락한다.” |
| 세계의 선진국가,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민족과 사회는 역사에서 이야기 하는 근대화 과정을 밟은 사회들이다. 이 과정을 밟지 못한 사회가 역사를 이끌어 나간 경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구의 근대화가 시작된 시기를 르네상스 이후로 보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화 과정은 시대적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인간, 사상, 가치관의 문제를 취급하며 문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었던 250여년간의 기간이다. 그러다가 역사의 큰 두 사건을 맞게 되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개인과 종교, 사상에서 사회라는 공동체로 옮겨가게 된다. 그 두 사건은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다. 이 두 사건은 개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의 관심을 사회문제로 돌려놓게 하였다. 이후 150년간은 사회, 역사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회 과학의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19세기를 맞이하면서 서구사회는 갑작스러운 경제 개발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었던 시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러 사회의 경제 개발에 대한 관심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E.F.슈마허는 -인간중심의 경제학-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출간하게 된다. 우리는 E.F.슈마허라고 하는 사람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의 독특한 통찰력을 통한 사회분석내지 현대기술문명 비판에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E.F.슈마허는 현대 사회의 문명비판에 따른 어떠한 대안도 제공해 줄 수 없는 비관주의자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의 분석적 비판이 보여주는 바가 오늘의 현실을 극명하게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지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비관주의자로 낙인찍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자신의 의식을 살펴보고, 어떤 근거로 그러한 판단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부지런히 활동은 하고 있으나 그 활동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제 목적에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우상의 노예들일 뿐이다. 슈마허는 이러한 수단에 얽메여 목적을 상실한 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방향을 설정해 주는 작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의 말처럼 인류가 자연을 거역하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없이는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이 인간에게 생활의 안락함과 편리함, 그리고 일단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동시에 그 기술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키며 결국에는 인간을 단순한 매개자의 수준으로 떨어드린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슈마허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방향설정의 작업은 너무나도 중요한 과업이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과학자들의 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한다. 슈마허는 이러한 방향을 결정하는 일은 일반 유식(有識)자들이 맡아야 하며 이러한 사람들이 대중에게 작용하여 여론을 움직임으로써 여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정부가 왜곡된 경제주의를 스스로 극복하고 기본문제에 대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슈마허의 이러한 관점은 나에게 안타까움과 부러움이라고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안타까움은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속에서 이러한 선각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데서 오는 마음이다. 현대문명이 우리에게 안겨준 축복에 마음을 뺏겨 그와 동반되어 찾아온 여러 부작용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서구 사회도 우리와 같은 시기를 거쳐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문제들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것은 슈마허와 같은 선견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나의 부러움이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슈마허가 말하는 것처럼 ‘성장’만을 최고의 지상목표로 삼고 지난 30년을 살아온 결과다. 이를 통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고 세계 역사속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주어진 작은 행복에 비해 우리들이 지불해야 했던 댓가는 너무도 컷다. 그것이 너무도 컷기에 사람들은 도리어 그것을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리어 경제발전이 우리에게 안겨준 발전,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헤멜 때에 현대의 기술문명은 우리 인간의 삶 깊은 곳에까지 침투해 그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숙명처럼 된 현대문명의 발전에 인간은 점점 더 소극적으로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인간은 슬롯머신에 투입되는 가짜 동전처럼 되어가는 듯 하다. 현대문명은 매우 객관적이며 개인의 의견을 무시한다. 그것은 개인적, 심지어 모든 집단적인 의사표현 양식을 무색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인간소외 현상이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이 바로 이와 같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 슈마허는 위기의식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경제논리에 속박되어 있던 인간이 다시 역사의 주역의 위치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너무도 짧은 근대화 과정 속에서, 깨닫지 못했고 도외시 되어 왔던 우리 인간에 대한 관심은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과정을 규명해 나감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질 뿐 아니라, 이 민족의 정체성을 확실히 해 나가는 일의 ‘작은’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이제 우리 민족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 기술문명의 역사속에서 대중으로 존재할 것인가, 문명을 선도해 나가는 주역으로 소리를 발할 것인가 이 선택은 이제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지금 이 순간 기술문명속의 ‘나’를 찾는 술래잡기는 시작된 것이다! |
| 현대는 점점 사람 살 곳이 못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 그것을 잘못 판단하고, 모르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답게 산다”는 의미에서의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존재를 위해 소비를 줄여 나가는 것, 대량 생산이 아닌 대중 생산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현대 경제를 비판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려 한다. 그러나, 후반부의 조직과 소유권에서는 제도나 기구의 문제를 다룰 뿐, 근본적인 대책이 없어 보인다.그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잘못을 늦추거나, 절충 보완할 뿐이다. 내 생각은 이보다는 좀 더 빠른 큰 변혁을 바랬는데, 욕심이었나? 자꾸 빠져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깊이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현대의 삶은.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선을 행하는 데는 현실을 잘 아는 일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사물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 ‘충분한 고려’나 ‘선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선을 행하려면, 우리의 행동이 현실의 상황, 즉, 구체적인 인간 행동을 위한 환경을 이루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합하고, 또 우리가 이 구체적인 현실을 편견 없이 객관성을 갖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전제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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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 F. 슈마허(Ernst Rriedrich Schmacher) 저, 김진욱 역 <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utiful :인간 중심의 경제학 >를 읽고 / 1999. 12., 338쪽, 범우사 1973년에 출간된 이 책은 발간 이후 현재까지 수 많은 다른 책과 보고서, 논문에 인용되고 있다. 책의 제목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녹색연합'이라는 한국의 환경단체가는 자신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제목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까지 정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세계인의 관심을 꾸준히 받고 있을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궁금하여 읽고 싶었지만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리스트 순서에 따라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빠르게, 높게, 멀리".... 이 구호는 올림픽 구호만이 아니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빠르게, 높게, 멀리, 그리고 크게 만드는 것이 '발전'이고 '진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경향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기원전 2,500년 이집트인들의 피라미드가 그랬고, 그리스인의 파르테논 신전이 그랬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본격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가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자본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신격화했다. 사회주의 주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인류의 행복과 발전의 첩경이라는 신앙에 빠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초음속 제트기와 바벨탑과 같은 마천루, 은하계를 벗어나는 우준선을 만들었고 거대한 도시, 거대한 항공모함, 거대한 운동장 등 물리적인 '거대함' 뿐 아니라 거대한 교통체계, 통신체계, 물류체계, 생산체계, 에너지체계 등 시스템에 적용되면서 거대한 관료조직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무한한 생산은 무한한 소비를 불러 온다.
슈마허는 근대의 사상, 과학, 기술에 의해 형성된 세계는 세 가지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본성은 비인간적인 기술과 조직 속에서 질시하고 쇠약해져 가고 있다. 둘째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활환경이 파괴도이어 절반쯤 붕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셋째로, 인간 경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재생이 불가능한 자원, 특히 화석원료 자원의 고갈이 눈 앞에 보이고 있따. 슈마허는 이런 현상의 근원이 되는 것은 "물질 지상주의와 거대 기술 신앙, 그리고 탐욕과 질투심에 다름 아닌 풍요의 추구"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가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오류 중 하나를 "인류에게 '생산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생산'에서 인간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을 무가치한 것으로 다루었고 중세 이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했기(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생각)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는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학자들은 생각하는 '자본'의 대부분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생산의 문제는 재생가능하지 않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거대한 생산에 따른 자연의 허용 한도,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고 결국 인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인류의 파국의 위기에 대해 저자는 '영속성'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생산 방법과 소비 생활에 의한 새로운 생활 양식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한다.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사회 구조와 인간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는 과학적 내지 기술적인 '해결'은, 그것이 아무리 능란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쓸모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도출하는 과제가 바로 "값이 싸서 거의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고, 작은 규모로 응용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방법이나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중간기술"이다.
저자는 또한 '규모'의 문제를 중요하게 제기한다. 그는 "거대주의와 기계화의 경제학은 19세기의 환경이나 사고의 '유물'로서, 오늘의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전혀 새로운 사고의 체계가 필요해지고 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고 체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자연히 뒤따라 온다."고 말하면서 "대량 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을 제시한다.
저자에게 '대중에 의한 생산'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기도 하다. 대규모 산업사회는 대규모 조직을 만들어내고 대규모 조직은 관료주의와 비능률, 생산성 저하 등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영국의 석탄공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대규모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 저자는 책 속에서 불교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너지 위기를 다루면서 원자력의 이용이 인류에게 저주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원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쟁점인 '사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소유' 등 '소유권'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을 가하면서 새로운 소유의 형태를 제시한다.
1970년대 전반과 후반의 두 차례 석유위기는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준 바 있다. 이 위기를 10여 년 전에 예견해 경고했던 인물이 슈마허였고 그러한 경고의 사상적 바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공업문명을 그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슈마허가 제기한 산업사회의 문제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가 한쪽에서는 더욱 거대해지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더욱 파편화되고 있다.
유한한 자원을 무작정 써버리는 일, 인간의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일, 대규모 조직을 무조건 선호하는 일 등이 비판의 대상이다. '성장' 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달려온 우리의 경제 개발도 그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중간기술'과 '새로운 조직'의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제가 보여 주고 있듯, 그의 주장은 경제 체계에 속박되어 버린 인간을 다시 주인공의 위치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며, 그것만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부터 구해내는 방법인 것이다.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이반 일리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반 일리히 역시 1970년대에 산업생산사회와 제도화, 그리고 거대 전문관료체계의 폐해를 지적했다. 일리히는 경제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운송, 노동 등 전반적인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성장을 멈춰라!"라고 선언했다. 슈마허가 '중간기술'과 '인간 중심의 경제'를 제창했다면, 일리히는 '자율적 공생사회'를 제창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명제는 일리히의 대안과 연결된다. 나는 일리히의 방향에 좀 더 공감이 된다.
[ 2012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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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라고 하지만 삶과 문명 전체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한다고해도 이렇게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도 더 전에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중요한 문제들로 남아 있다. 인간사와 문명의 깊은 부분까지 근본적으로 문제삼았기에 3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짧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표현대로 3-4대가 지나야 해결될 수 있을까. 하지만 3-4대가 지나기 전에 유한한 지구와 삶을 유지하기에도 버겁게 가난한 이들은 버틸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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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드넓은 세상이 현재처럼 너무나도 유사한 모습을 한 적이 역사상 과연 있긴 했을까? 오늘날의 유사성은 마치 모두가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아주 오래 전과도 흡사하지 않을까란 생각마저 든다. 그 중심엔 자본의 이익추구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더 많은 부의 증식을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들. 그렇지만 그렇게 거대해진 파이는 정작 노동이라는 고귀함을 제공한 이들의 몫이 아니다. 여느 때보다도 벌어진 빈부의 격차, 누군가는 살을 빼기 위해 과학적이라는 식이요법을 따르고 의학을 도움마저 받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진정 먹을 게 없어 죽어야만 하는 영혼들이 넘쳐나는… 그들은 죽어야만 할 정도로 이 세상에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일까? 같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내가 아닌 남이라는 이유로 외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고민한다. 무엇이 옳은 질서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E. F. 슈마허는 오래 전에 사망한 인물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 그가 사망한 후 흐른 30년의 시간을 고려하면 이 책은 실효성이 전혀 없을 법도 하다. 그렇지만 놀라운 점은 30년 전에 그가 우려했던 바를 현재 고민한다 하여도 누구 하나 나서서 손가락질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시도가 행해졌던 그 시절은 분명 자본주의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처럼 자본의 이익이 인간의 그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되는 현재,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한 시도였기에 어떠한 대안도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대안의 제시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이 오래 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모든 것을 크게 보는 사고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어찌 보면 너무 뭉뚱그려 설명한 것만 같단 생각도 살짝은 든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막 고개를 들던 시절부터 이는 문제시되어 왔다. 찰리 채플린이 열연한 무색 영화 속 한 장면을 아마 대다수는 기억할 것이다. 볼트와 너트를 조이던 노동자의 손놀림이 기계화되다 못해 나중엔 조이지 않아도 될 것까지도 조여버리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러한 형태의 노동이 강제되어야만 했던 까닭은 바로 양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양을 만들어야만 하는,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질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덜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알고 보면 죄다 양쪽으로 치중하고 있다. 수치화된 데이터를 분석해 이른 결론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권력이 되어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머나먼 미래까지 내다 보는 시선을 상실한 채 오히려 현재에 급급하게 된 것도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지금 당장 가시적인 무언가의 도출인데 굳이 먼 훗날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혹 부작용이 일어 이룬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존재하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문제로 치부될 따름이다. 비대한 몸은 혈액순환을 비롯하여 온갖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장애가 될 따름이다. 그런데 왜 생산의 단위는, 심지어 국가마저도 거대한 형태가 선호되는 것일까? 규모로 인한 이득이 모든 문제점을 상쇄해버릴 정도로 크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 탓에 많은 이들이 스스로 소외되는 상황이 발생해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마치 거대한 기기를 이루고 있는 아주 소소한 부품마냥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면화된 시선이 그러하다. 물론 당신 자신을 좀더 소중히 여기라는 충고를 하면 모두가 발끈하겠지만 말이다. 저자도 은근슬쩍 내비치고 있지만,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일지라도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본질적인 대책이라 볼 수 있다. 모두에게 있는 그대로의 과학을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과학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사용하는가 하는 바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길을 고려할 수 있도록 인류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삶의 본질적 의미를 잃은 채 표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세상, 이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저자의 외침이 최종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목적지일 것이다. |
|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게 된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히 생각했던 경쟁 사회 그리고 사물에 대한 시각들. 너무나 익숙히 생각했던 그것들이 얼마나 모순되고 잘못된 것이었는지 대하여... 솔직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너무나 익숙한 것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깨닫지 못했을 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중간중간은 지겹기도 하다. 이 책이 쓰여진지 이미 20-30년이 흘렀으며 그 당시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저자의 생각들은 현재로서는 그리 신선하지는 않다. 다만 그 신선하지 않은 당연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것이 씁쓸함을 남긴다. 이 책이 쓰여진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리고 이 책의 내용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을 테지만 그것에 대한 실천은 부족하다. 누구나 작은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아름다울 수는 없는 세상이라는 점. 그것이 씁쓸함을 남긴다. |
| 이 책은 1973년에 영국에서 출판되자마자 큰 주목을 받았고, 이에 힘입어 곧장 미국에서도 출간되었는데, 종래의 계량 경제학과 물질 문명에 경도된 당대 현실을 초경제학적인 각도에서 새롭게 비판한 수작이라 평해진다. 우선 저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그는 독일 태생의 경제 사상가로 1964년 이후 ‘중간기술 이론’을 제창하여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중간 기술 개발 모임(ITDG)’을 창설, 제3세계 경제 개발에 관심을 기울인 실천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저술에 주력하여 물질 문명을 비판, 반성한 ‘불교 국가에서의 경제학’을 비롯하여 ‘A Guide for the Perplexed’(1977), ‘Good Work’(1978)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사상에는 그가 청년기부터 줄곧 관심을 보여온 동양 사상에 관한 탐색의 궤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 그의 책들은 여타의 경제학 저서와는 다른 이색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은 그의 저서들 가운데서도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의 실천적인 관심이 상당 부분 적극적으로 표방되면서도, 비교적 쉬운 논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독자에게 또렷하게 부각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저자 자신의 이론과 실천의 지향점이 가장 분명하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저작이다. 책의 구성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저자 나름의 진단과 처방이 개괄적으로 선보이고 있고, 2부에서부터는 ‘자원’, ‘제 3세계’, ‘조직과 소유권’라는 주제하에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책의 내용이 워낙 방대한 분야들을 취급하다 보니, 사례 위주의 분석이 주류인 2부 이후는 지엽적인 것에 치우친 경향이 있고 전제적인 저자의 의도가 쉽사리 포착되지 않아, 필자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포괄적으로, 그리고 쉽게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1부를 중점으로 책 소개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20세기를 앞둔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슈마허의 ‘Small Economy’가 도출된 경로를 검토하기 위해 지루하게 써 내려가 보겠다. 슈마허는 오늘날의 세계가 근대이후의 사상, 과학, 기술에 의해 초래된 세 가지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말한다. 1. 우선 인간의 본성이 비인간적 기술과 조직 속에서 질식하고 쇠약해져 가고 있고, 2. 둘째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해 왔던 자연 또한 파괴되어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셋째, 3. 인간 경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재생 불가능한 자원, 특히 화석 연료의 고갈이 눈앞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그는 물질 지상주의, 거대 기술 신앙, 탐욕과 질투심에 의한 무분별한 ‘풍요로움의 추구’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 자연계와의 조화 정신, 근검절약의 윤리관에 의해 지탱되어 왔던 이전 시대의 문명이 자연 자체의 자정 능력에 의해 영속성을 유지하여 왔다면, 현대는 근대 이후에 등장한 자연지배를 정당화하는 진보사관과 운송, 통신 기술의 비약적 발전, 끊임없는 팽창주의를 통해 자연의 파괴와 오염을 가속화하였으며, 급기야 자기 자신의 자유와 존엄, 창조력도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저자의 비판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무엇보다, ‘소비를 위한 풍요’라 할 수 있겠다. 먼저 자연에 대한 근대인의 태도에 따른 ‘자연’의 몰락을 살펴 보자. 우선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하여 수 많은 착각에 빠져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산의 문제’이다. 그들은 생산에 관련된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학 기술의 경이로운 진보가 생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생각은 자연에 대한 서구인들의 태도가 근대에 들어오면서 변화한 것에 기인한다. Descartes로 대표되는 근대이후의 유럽인들에게 있어 자연은 단지 인류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에 불과한 지위로 추락하였다. 한때 신성 불가침적인 절대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자연이 인간의 기술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서구인들에게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자, 그들은 자연과 연료에 대해 폭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 태도의 지속은 우리 모두가 지구라는 거대한 배의 동일한 승무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다. 심지어 이것은 우리의 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자본의 대부분이 자연으로부터 부여 받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조차도 부인하게 만든다. 계량 경제학은 ‘연료와 자연’을 ‘자본’이 아닌 ‘소비’의 항목에 집어 넣는 치명적인 오류에 근거한 이론이다. 가스,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들이 한번 사용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장나버리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연’을 소득으로서의 연료로 처리한다. 자연을 인간이 만들 수도 있으며, 인간들이 스스로 자랑해 마지 않는 과학과 기술의 향상으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인류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따라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이기도 하면서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자연을 남용하고 폐기되는 현 상황에 비추어볼 때 생산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거나 행동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라 할 것이다. 또한 슈마허는 오늘날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인간성을 침식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성은 원래 GNP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상실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징후만을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생할 수 없는 자본’을 태평스레 ‘소득’이라고 착각하는 기만적인 문명 상태에게 필연적으로 도래할 파국적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과연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 슈마허의 답변은 조금 안이하게 보인다. 슈마허는 연령, 재산, 영향력의 유무를 불문하고 인류 각각의 개개인들이 그것을 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슈마허가 지적하듯이 모든 탐욕의 원인이 원자적 개인들의 본성에 깃든 ‘악’에서 기인하며, 이것의 치유도 개인의 몫이라면, 악의 발현을 제어하기 위해 제도의 개선을 꾀하는 방도를 택하기 보다 슈마허式의 종교와 심성론에 치중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결과적으로 개개인의 심성이 모든 악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부, 교육, 연구, 개발, 자원의 효과적인 사용도, 공해를 줄이고 환경을 보호하는 데에 |
| ‘제도’의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우리는 ‘풍요로움’이란 말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신화 속에는 풍요로움이 빨리 실현되면 평화도 확실히 실현되리라는 주장이 들어있다. 이에 따른다면, 자기 희생과 억제라는 것은 강자에게 있어서는 성가신 것이 된다. 풍요로움을 얻기에 충분한 과학과 기술이라는 듬직한 원군을 가진 ‘힘 있는 자’에게 있어 귀찮고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 여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을 죽이면 그나마 지금까지 얻어 먹을 수 있었던 조그만 이익마저 얻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회유한다. 강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러한 이론들은 마치 자신들의 명제가 인류 보편의 선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 양 다수의 약자들을 기만한다. 이를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많은 사람들이 모든 번영을 누리도록 할 수 있다. 2.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를 추구하라’는 명제가 필연적이다. 3. 이리하면 평화가 달성될 것이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일정한 정도의, 흔히 말해 충분한 번영을 위한 기간에 도달하기 전까지 얼마간의 탐욕과 고리대금과 악의는 정당화되며,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이 될 수 밖에 없다. 세속 도시의 새로운 신인 자본주의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 타인을 위한 배려와 윤리적인 덕목들은 소용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충분하다’는 말이 지닌 애매다의성의 문제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도대체 우리 인류는 누구를 위해 얼마나 충분히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제 3세계의 피와 눈물, 약탈로 자신들을 살찌워야 우리는 ‘이만하면 만족한다’라고 대답할 것인가? 과연 케인즈가 말한 ‘이기심과 탐욕이 유용하다’는 말은 인류 보편을 위한 가치가 될만한 것인가? 풍요로움과 탐욕에 눈 먼 이성은 극단적인 도구적 이성일 뿐이며 사물을 완전한 형태의 전체로서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이성에 바탕한 경제학은 인류를 문명이 아닌 야만의 상태에 빠뜨리게 할 것이다. 슈마허 역시 평화가 번영을 확대시키는 일로 이룩될 수 없으며, 번영의 확대는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결국 모든 인간들 상호간의 갈등과 충돌만을 조장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시 여기서 그는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간 내면적인 곳으로부터 대안을 찾으라 한다. 다시 딴지를 걸고 싶다. 그가 말하는 예지나 바른 심성, 선의지와 같은 말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가 계급적인 분석을 시도하면서 논의를 전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그가 구체적인 제안들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도 전적으로 부당한 일이다. 그도 저서 후반부에서 소극적이나마 ‘교육의 중요성’도 언급하고, ‘저렴한 가격대의 도구, 방법의 보급’, 영속적인 경제를 확보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산업’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결론은 언제나 정신적인 변화로 수렴하는 것 같다. 물질문명이 정신문명보다 우위에 있어야 함이 필연이며 이것이 진정한 문제해결의 완결을 가져온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전환이 얼마나 큰 위력이 될런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그가 내세우는 ‘작은 규모의 경제학’이 원래 산업의 영속성이란 문제의식과 결부되어 제창된 것이긴 하나, 결국 이것도 작은 것 속에 예지와 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정신적인 것에 맞닿아 있다. 지식을 작게, 작은 규모로 사용한다면 커다란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개별적인 인간들로 하여금 작은 규모의 경제를 몸소 실천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공동의 작업을 모색하기에 우리는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理想으로 현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긴 하나, 단절적이고 공허한 외침은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지 못한다. Hegel의 논리를 빌어 논의를 전개해보자면, 현재 인류는 객관 영역(제도, 법, 등)의 독자화와 투명화가 미진함에 따라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하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유의 양에 따라 자유가 부여되는 신자유주의적인 기준이 철폐되고, 법적인 장치에 평등의 가치가 투영되지 않는 한, 개별적인 심성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 없는 것이 되기 쉽다. 객관 세계의 진정한 개혁만이 개별영역의 발전도 보장한다. 저자에게 부족했던 점도 이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도 물론 기존의 틀과 체제를 뒤바꾸라고 말하며, 중간 기술 이론과 같은 비교적 세부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대안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다시피 관념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정신과 심정의 문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심성을 깨끗하게 하고 사회적인 책무 의식을 가져야 할 이들은 아무런 저항력조차 가지지 못하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힘있는 자들’이다. 계급적인 분석이 많은 폐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경제적인 형평성과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는 여러모로 유용한 것 같다. 가난한 자에게 끝없는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정의’에게 불의를 행하는 일이다. 저자가 ‘심성의 경제학’을 소개하는데 소모된 지면을 구체적인 객관 세계의 개선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데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 99/8/31 이성일(hodie) |
| 후기산업사회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재, 우리는 경제학에서 어떠한 사고를 중심으로 인간본연의 가치를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는 더욱더 자신의 자기회전속도를 빠르게 움직여가고 있고 점점 더 세상은 복잡해지는 듯 하다. 정말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중심으로 모든 사물이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이 출판된지 20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슈마허의 논의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여전히 우리는 '인간'에게 희망을 가져야하고 자연의 자정능력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슈마허는 현실이 처한 문제점에 대해 지적함으로써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처음에 그는 현대세계에서 냉철하게 현재적 상황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현재 세계에 있어서 생태학적으로 '생산'은 생산이 아닌 '소비'에 불과하며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현 상황은 암울하게 우리의 미래를 덮쳐올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대한 근거를 말하기 위해 그는 경제학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현재의 경제학은 단지 수치만을 문제삼는 추상의 논의이며 이로 인해 구체적으로 파괴되어가는 우리의 삶과 자연에 문제에 대한 고찰을 놓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 즉, 우리는 거대체계에 갇혀져 정작 중요한 삶의 터전을 망치고 있고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의 책임은 바로 현재의 우리가 있는 공간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적인 모습으로 경제학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질'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예로서 불교경제학과 경제학의 규모의 문제를 거론하고 대량 생산이 아닌 대중에 의한 생산이 요구되고 이에 걸맞는 사고체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대안은 바로 현재적 분석으로 넘어가는데,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에 대한 '교육'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축적하고 현재적 조건을 만들어 온 것 중에 - 비록 이 현재적 조건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단기적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맛보게 하였지만, 사실 장기적으로 볼 때 풍요가 아닌 파괴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 교육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처럼 우리의 '미래'도 상당부분 교육에 의해 현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이라는 최대의 자원이 적절하게 활용되어 우리으 가치관과 관념을 확립하여야 새로운 세계를 예지할 수 있을 것이고 슈마허 그가 말하는 '인간'을 찾아오게 되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 삶의 회복속에서 미래를 밝게 해주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분석을 듣고 있자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지에 대한 그의 분석과 공업자원의 재활용가능성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원자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통해 '인간중심의 기술'을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강조되어 왔던 우리의 교육적 결과를 반어적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항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문제들을 다시금 언급하고 우리가 그에 동의하기는 하나 실제로 그러한 주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되어지면서 실천되지는 않고 있는 것이 참으로 반어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여전히 원자력은 동력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인 균형을 위해서 - 인도와 파키스탄의 근래의 핵실험이 좋은 예다 - 사용되어지고 있고 이러한 긴장관계속에서 앞에서 슈마허가 이야기한 영속적인 평화의 가능성은 무참히 깨지는 듯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중심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기술력앞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너무나도 우리에게 절망감과 허무감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닐까?라고 회의적인 시각이 들게 하지만, 슈마허처럼 자신의 발언을 통해 세계에 경각심을 일깨워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수밖에 없지는 않을까? 그래서 계속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작용시켜 우리의 두려움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슈마허는 이제 제3 세계 국가에 대한 통찰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획득하고 그속에서 더욱 더 확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듯하다. 개발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개발인가라는 약간은 자조섞인 의문의 서술로부터 그는 중간기술이라고하는 인간중심의 기술의 또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회전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제 3세계국가에 있어서 그들이 가지는 문제는 곧 전 세계적인 문제로 치닫게 된다고 조용히 경고하면서 선진국가들의 도덕성을 자극하고 새로운 대안적 행동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에 이르면 그의 생각이 관념론이고, 의미없는 행동이 아닐까? 라고 되물어 보게 되는데, 항상 서구 지식인의 시각에서 본 제 3세계에 대한 통찰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게 느껴진다. 제 3세계가 가지는 대부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판단하면서 저개발국가이기에 가능한 점들은 장점이라고 포장하는 것 말이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지점이 몇가지 존재하는데, 사실 제 3세계 국가에 대한 원조나 그러한 것들을 떠나서 제 3세계국가의 모습을 만들어 온 것은 바로 제 1,2 세계 국가라는 사실이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그림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문제가 전세계의 문제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고, 이들에게서 대안적 모습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것은 이미 늦어버린 서구사회에 대한 자기반성이라는 사실이다. 제 3세계 국가들이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새로운 삶의 질서를 그 속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으로 보이는 지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물론, 1970년대와 현재적 모습에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슈마허가 강조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 것인가? 물론, 슈마허 자신도 자신의 논의가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안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그는 직접적으로 이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기계에 대한 그의 불신과 포드주의 생산방법이 가져온 규모의 경제학의 폐해와 사회주의가 그런 점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들을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소유형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유권에 대한 재정립 그리고 슈마허가 걱정하는 세계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경제적인 여러 가지 행동을 제안한다. 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