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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상력은 뛰어난 편이고, 문제의 근본을 파고들어가려는 자세를 갖는 한편, 사고에 치밀함은 부족한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융통성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세심함을 추구하는 일본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까. 따라서 우리에게는 복잡한 논리를 전개해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것 보다는 "名可名 非常名", "야반 삼경에 문빗장을 만져보아라"하는 식으로, 도가나 禪에 의탁하여 대충 넘어가 버리고, 초탈해 버리는 접근법이 더 인기있는 듯하다. 이런 경향은 김용옥이라는 사람을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배경이 아닐까?
이제까지 김용옥씨가 저술해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저서는 그야말로 "대중적"인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여자란 무엇인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혜능과 세익스피어] 등... 반면 일반인은 읽기 어렵지만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저작은 시도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성공을 거둔 [노자]와 이번의 [논어]는 여기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에 주석을 붙이고 해설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정통적인 학문 연구 방식이 아닌가. 그러나, 책과 강연을 보면 그가 여전히 '대중철학자'의 오색 구름 속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노자]나 [논어]는 모두 논리적으로 엄격한 장절편성 작업을 거쳐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노자]는 은유와 암시로 가득 차 있고, [논어]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잡담을 기록한 책"이라 평했을 정도로 이 말 저 말을 집성한 것이라 체계성이 부족하다. 오랜 세월 동안에 후대의 첨삭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한문 자체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인지라 이 두 경전에 대해 "이 해석이야말로 진짜다. 여기서 일획도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용옥씨도 이를 인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모호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이들 경전을 '연구한 결과'를 제시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닐까? 논리적이고 주장이 분명한 [맹자]만큼만 되어도 그가 그토록 자유롭게 '자기 주장'을 피력할 여지가 적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김용옥씨 자신이 강조하듯 "[논어]란 소설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그 내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라 할 것인데 어째서 그의 어조는 그토록 오만과 독선에 차 있을까? 옛날보다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어떤 해석을 내세우면서 그는 "이를 누구는 ....라고도 하는데, 완전히 개소리다. 쓰레기 같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식의 폭언을 즐긴다. 그러면서 자신의 해석이 그토록 올바른 이유를 뚜렷이 제시해주지 않는다. 학문적 연구서의 형식에서 중요한 주석이나 참고문헌을 그는 일체 무시한다. "동서고금의 논어 주석을 모두 섭렵해서 나의 것으로 소화하였다"는 자랑을 위해 몇 가지 늘어놓을 뿐이다.
이처럼 그는 문체와 어투 면에서 대중적 인기(어떤 통쾌함을 심어줌으로써)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지식계에 반향을 얻기는 힘든 면이 있다. 그것뿐인가? 그뿐이면 그냥 희대의 기인이거니 하고 넘어가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입장에는 그리 깊이 동양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고개를 갸우뚱할 문제점들이 곳곳에 있다.
우선, 그는 자신이 공부한 일본 학계의 경향을 좇아서(그 자신은 독창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하지만), '공자'와 '유교'를 애써 분리하려고 한다.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道統'을 '후대의 픽션일 따름'이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그 근거로 "공자가 증자를 우둔하다고 평했다"라는 기록이나 "증자는 공자의 후기 제자로 중요성이 덜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나는 삼(증자)이 우둔하다고 여겼지만 그건 내 불찰이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은 "후대의 조작"으로 무시해 버리고, "증자의 아버지 증석은 공자의 오랜 제자로 증자는 어려서부터 공자를 따랐다"는 기록 역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어떤 기록이 조작인지 아닌지의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또 그는 역시 일본 학계의 영향으로 공자를 나약한 문인이 아니라 건장한 武夫, 쾌남아였다고 하고, 또 일본에서도 지지가 별로 없는 시라카와의 주장을 좇아서 공자의 어머니가 무당이었으며 어린 공자도 무당패를 따라다녔던, 근본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면 공자는 어려서는 무당이다가 젊어서 무인이 되고 늙어서는 학자요 선생이 된 셈인데, 한 인간이 그렇게 변화무쌍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또 아무리 당시가 난세였기로 비천한 무당의 후레자식이 어떻게 널리 왕후장상의 자제들을 끌어들이고, 공자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가가 중국의 최대 학파로 성장하게끔 만들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질문과 의혹에 대해 김용옥씨가 만일 듣게 된다면 대답은 하나뿐일 것이다. "그래서? 네가 나보다 한문 잘 하냐? 네가 토쿄대랑 하버드대 나왔냐?" 공자든 예수든 꼭 엄숙하게만 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소설을 쓰고는 논문이라고 하거나, 논문이라고 하면서 소설처럼 써서는 안 된다. 파격에도 법칙이 있고 지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스트레스를 대리 해소하는 사람들에게 한때 존경과 흠모를 받는다고 해서, 김용옥씨 자신이 그토록 혐오한다고 밝히고 있는 '小人儒' 이상이 될 수 있겠는가? [인상깊은구절] {논어} 그 자체로의 회귀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는 또 다시 {논어}라는 텍스트에서만 발현된다고 하는 파라독스에 우리는 봉착한다. 결국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논어}라는 텍스트와 공자라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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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씨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책이다. 김용옥 씨 초기 책들은 상당히 내용이 어렵고, 어려운 문체로 쓰여졌는데 반해, 이 책은 나이 들어 더 원숙해진 김용옥 씨의 사상을 반영하듯, 읽기에 한층 편안하다.
논어는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는 논어가 성립하게 된 배경과 논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김용옥 씨의 견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실제 논어의 내용은 제 1편인 '학이(學而)'편만 실려 있다.
논어가 성립하게 된 배경이라든지 논어라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의 방식에 대한 설명은 김용옥 씨 외에 다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만큼, 논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아주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학이'편에 관한 내용도, 다른 논어 책에서는 기껏해야 본문을 직역하는 수준의 해석밖에 없지만, 김용옥 씨는 번역의 동시성의 성립이라는 자신의 해석학 이론에 입각하여, 논어가 구성될 당시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어떻게 그런 구절이 성립되었는가를 저절로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등장 인물들의 성격에 대해 여러 전거를 이용한 전반적인 상술도 뛰어나지만, 또 이 책의 큰 특징은 공자를 성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해할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공자를 계속 신격화하고 추앙하기만 하면, 우리는 절대로 공자 이상이 될 수 없다." 는 김용옥 씨 자신의 생각처럼, 철저히 인간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우리를 너무도 욱죄어왔던 유교사상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서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경전의 부당한 권위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논어는 지혜의 잠언이다. 현대에 맞는 논어의 새로운 의미를 재발견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인상깊은구절] 학이편은 매우 기분나쁜 편이다. 이 편은 사실 논어의 첫머리에 와서는 아니되었을 편이다. 다행스럽게도 맨 처음에 온 제 1장의 공자말을 빼놓으면, 대부분이 진부하고 도식화된 공자의 후기제자들의 말이다. .. 중략... 불행하게도 학이편이 천하제일지서(天下第一之書)인 논어의 관(冠)을 차지하는 바람에 논어에 대한 인상이 도식화된 가족주의적 규범윤리, 그리고 복종만을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노모스로서 왜곡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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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여섯이니까 김용옥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 아마 1985년도쯤인 걸로 기억한다. 자그마치 15년전의 스물한살의 꽃다운(?) 청춘시절이었다. 누나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요상한 제목의 <여자란 무엇인가="">가 나와 도올을 만나게 해준 첫 책이었다. 그 책은 나에게 있어선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씹이니 하는 상스런 말들을 마구 내뱉던 책, 하지만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나하나씩 제시해 주던 그 책은 도올을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하지만 열혈 대학생이었던 당시의 내게 더 급했던 것은 군사정권에 대한 반항이었기에 도올에 대한 생각은 잠시 뒤로 접어놓아야 했다.
그런데, 아마 86년도 쯤이었나? 최류탄과 화염병으로 얼룩지던 나의 일상속으로 도올은 다시 다가왔다. 당시 고대교수로 있던 도올이 감행한 시국선언문과 함께 모든 이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교수직을 뿌리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올은 그 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내가 어디에 있건 내 앞에 나타나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 쫄병 시절에도 내 자리 바로 위 천장 속에 몰래 숨겨놓았던 책들 역시 도올의 책들이었으며, 한 때나마 군 제대 후 국문과였던 나의 전공을 무위로 하고, 한의학과로 도전을 해볼까 심각하게 고민하게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친구들은 도올을 나만큼 좋아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고, 몇몇 친구들은 오히려 도올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조금만 이야기 해 보면 그들은 정작 도올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고 대충 넘겨 보고만 하고선 괜히 싫어하는 것이었다. 잘난 체 하는 것이 싫대나? 욕을 마구 해대서 별루래나? 하긴 이 세상에서 잘난 체 하는 사람, 욕을 해대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도올의 그런 점이 좋았으니 말이다. 누군가 내게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힘든 게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백명 중 아흔아홉명이 A가 맞다고 하는데, 혼자만 유독 B가 맞다고 하는 것'이라고. 아마 도올의 그런 점이 나는 좋았나 보다. 그는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외로운 소수자의 위치였고,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에 위축받지 않고 당당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대중들에게 유익함을 주는 지식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들을 과감히 깨뜨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도올은 자신의 기철학이 그러했고, EBS 채널에 많은 사람들을 고정시키게 한 노자 강의가 그랬다.
그리고 이번엔, 공자! 공자가 바로 그런 것이다. 공자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하나의 고정관념이요, 기반이요, 편견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깨뜨리려 노력하고 있는 도올의 가치가 돋보이는 무대인 것이다. 지금까지 누가 공자를 가지고 들었다 놓았다 해왔던가. 어느 누가 감히 예수를 씹을 수 있었던가. 요즘 항의를 하고 있다는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재점검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념이란 늘 고민하고, 질문하고, 회의하는데서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도올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도올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도올을 다시 한번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도올이 여기서 입을 막으면 예수도 슬퍼하실 거라 확신한다. 우리는 도올의 지식과 엔터테인먼트를 충분히 즐여야 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올을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고 감히 얘기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논어>는 유교의 최대의 이단서일 수도 있다. <논어>야말로 성인공자의 최대의 걸림돌일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논어>가 유교의 이단이라 함은, 유교를 국가종교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유교를 절대적인 권위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논어>의 정직하고 비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이단으로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논어>논어>논어>논어>여자란> |
| 읽은지가 한참이나 지났다. 하지만 공자님도 어질적 친구 그리고 친척들에게 존중이나 존대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부분을 이해했을때 그분또한 한 인간으로서의 안타까움을 느낄수 있었다. 어릴적 친구들이나 친척들은 너무나 철없는 시절부터 봐 왔기 때문에, 성장해서도 남에게 존중이나 존경을 받더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인듯 하다. 다른책에서도 느꼈듯이 예수님도 그러하셨던 같고... 도올 역시도 이 부분에 있어서 고뇌가 있는듯도 하다... 이런부분은 다 아는 사실같지만서도 인지못하는 것인데, 이를 새롭게 느끼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
| 참 어려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 꼭 그 짝에 쓰는 말 같다. 겨우겨우 1권을 읽으며 깨달은 점은 이러하다. 첫째, 한문이 어려웠다. 그래도 최소한에 불편은 없다한 한문 실력이 바닥을 보였다. 특히 고문에 대한 이해 부족이 확실한 듯. 둘째, 논어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함. 논어 관련해서는 만화로 독파한 1권과 공자자 죽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김경일 교수의 책을 본 것이 전부이니 말이다. 세째, 논어의 부족함을 쉽게 쓰여진 강론을 통해 습득하려면 저자를 잘 선택해야겠다. 너무 많이 알기에 지면이 부족한 듯 절제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듯하면 벌써 관련 된 다른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니 가방끈(?)이 짧은 나로서는 도올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런중에 조금이나마 얻었다면 공자만의 어록으로서의 논어는 정치성을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중국보다도 더 지독히 물들어 있는 우리나라의 유교사상의 주체는 공자이지만, 治民 統國을 위해 많이 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曾子 孝經은 이러한 사상을 위한 좋은 본보기라 생각된다. 새삼 어려운 時國의 辯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내 자신에 새겨할 좋은 말들이 많다는 것이고, 사물을 볼때 관련된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나 자신의 결론을 갖는다는 것이 기본중의 기본이라는 점이다. 한 경구가 좋아 적어놓고 싶다 자왈 :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슴하시었다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적정할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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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증자가 공자의 제자인지, 논어를 누가 쓴건지, 뭐 그런 것도 전혀 몰랐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김용옥이 쓴 책은 대부분 재미있기에 책을 펴게 되었고, 역시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원고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도올서원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강의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어나갔다.전반부는 공자에 대한 이야기이고, 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논어의 원문과 해석이 나오게 된다. 논어가 제자 중 한 사람이 쓴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쳐 내려오며 계속 보태어졌다는 것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내용중엔 다분히 정략적인 것들, 가치없는 것들도 많다는 것도 말이다.
특히 해설에서는 너무나 깊고 자세하게 설명해서 논어에 대해선 일자무식인 내가 읽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수없이 많은 자료들과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절로 감탄이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의 고리타분하고 비생산적인 유교타령 때문에 공자를 미워했던 사람들도 한번 읽어보면 공자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먹은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 하다"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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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방송국에서 전국민 교양함양차원에서 -아니 그보다 더 큰 목적이 물론 있었겠지만- 한번도 빠지지 않고 시청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내 자신 스스로 그 시간을 기다리며 자리를 보전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교재로 채택되어 저자가 직접 저술한 그 책을 구입해 본 것은 한 달포 정도 지나서였지 싶다.
브라운관에 나와서 강의하시는 그 폼 그 자세가 그대로 연상될만큼 책에서 하시는 용어구사(?)도 어찌나 똑같아 보이던지...
그만큼 작자의 이력이 말해 주듯 철학자, 예술가,(한)의사... 흔히들 지갑 속의 명함뒷면까지 자신의 이력을 넘칠 정도로 적어 남들에게 과시하는 풍토의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집중적으로 몰두해서 이룩해 낸 작가의 근성이 놀랍다.
동양고전 하면 흔히 떠오르는 대학, 중용, 논어 하며 떠오르는 딱딱함, 보통 그렇게 인식하고 관계가 직접 없으면 상당히 대하기 어려워하는 책으로 우리의 교육은 서구화 일변도로 치달아있는 현실에서 감히(?) 대중매체를 통해 전국민의 교양을 고양시키겠다고 나선 그 배포가 또한 놀랍다.
그리고 국민을 전폭적으로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어준 그 작자의 신뢰또한 이 지면을 빌어 감사히 생각해야겠다.
공자가 태어난 곳을 직접 발로 돌아다니며, 그 시대의 환경을 상상해 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그 노력 또한 대단한 집념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선 현대인들에게 고전을 대하는데 있어 딱딱하기만 하다는 선입견을 버리게 해 준 것에 대해 가장 공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인상깊은구절]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 하라! 그렇게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출처럼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권고인가 ! 여기에 뭔 다른 구구한 해석이 필요할까? |
| 한 때 유행처럼 씹혔던 책이다. 그냥, 논어를 읽고 싶었서 집어 들었다. 이 저자의 저작을 워낙 좋아하기도 한다. 내 한문 실력이 일천해서 딱히 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지나, 스무살 초반에는 노자와 장자가 좋다가 지금은 논어가 더 좋다. 왜 그럴까? 인생의 쓴 맛을 약간 더 봐서 그런가? 그렇다고 논어가 처세에 더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賢賢易色(현현역색)' 어진이를 어진이로서 대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해라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 하다 좋아하는 구절 몇 개 적어 봤다. 이미 고전이 된 책이지만, '도올 논어'라면 지루한 고전에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평생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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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논어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논어"이기에 웬만한 사람은 논어가 누구의 이야기이고 누구의 작품이며 대략 어떤 내용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논어의 내용의 진위여부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공자의 생애 등이다.
사마천이 지은 "공자세가"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나오는 "논어"가 소설이라는 그의 주장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준다. 공자 사후 400년이나 지난 후에 지어진 "공자세가"가 소설이라면 그에 못지 않게 더 오래 지난 "논어"의 진위여부를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도올은 사마천의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에게 "논어"가 그들이 만들어낸 작은 이야기인 소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고 있다. 공자의 탄생과 예수의 탄생.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정말 기분 나쁠 것 같은 이야기를 주저 없이 한다. 공자의 예를 들면 바로 예수의 예가 나온다.
공자를 공짱구, 공자의 아들을 공잉어, 심지어는 삼대에 걸친 이혼경력까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그는 묻는다. "예수는 방귀를 뀌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굳게 믿고있던 세기의 성인인 공자는 그의 앞에 낱낱이 벗겨진다. 심지어는 聖人의 의미까지 새롭게 해석할 뿐 만 아니라, 士의 의미까지도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예전에 쓰이던 우리말이 세월이 흘러 다른 뜻으로 바뀐 것처럼 이 경우도 그런 경우로 보이기까지 한다.
공자는 천한 신분이며, 말 그대로 짱구이며, 무당출신의 어미 밑에 자라 결국 그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면 그도 역시 무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학문에 뜻을 두며 공자교단이 출발한다. 자로와의 만남, 안회와의 인연 등등....
저자는 자로의 죽음을 '숫탉 꽁지털에서 갓끈'이라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더불어 공자의 삶을 미완성교향곡이라고 명명하며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함축시킨다. [인상깊은구절] 논어를 읽으메, 어떤 자는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도 같다.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