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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지식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이 객관적인 사실이자 진리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은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을 언급한다. 과학이 '서양 중심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었음을 드러내며 비서구세계의 과학과 지식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은 과학사나 기술사를 넘어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 권력 등과 같은 거시적 구조와 과학을 연관짓기도 한다. 즉, 과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세계사적 흐름과 지배관계와 연관지으며 지식의 유통과 불평등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점 역시 이 책의 매력이다. 비록 나는 과학 관련 전공도 아니고, 과학을 좋아하던 학창시절을 보내지도 않았지만, 과학이라는 학문을 새롭게 볼 수 있어 좋았던 책이었다. 어쩌면 과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사유의 폭을 넓혀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진리들을 한번쯤 다른 시선에서 보고 싶다면,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의 입문서로 이 책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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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오래된 관성이 존재한다. 현대 과학의 뿌리를 서구 근대에 두는 좁은 시각은 다른 문명권과의 소통으로 탄생한 지식의 흐름을 손쉽게 주변부로 밀어내며 해당 역사를 단일한 이야기로 포장해버린다. <서양과학은 없다>는 과학을 하나의 절대적 체계가 아닌, 각 문명권이 구축해온 사유 방식과 지식의 축적 과정으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과학을 한 문명권의 성취로 묶어 과학을 이해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실제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서 어떤 지식이 배제됐는지를 차분히 추적한다. P.17 탈식민주의는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비판을 요구하는 오늘날의 어떠한 현상을 가리키는 일종의 표지판일 수도 있다. 과학의 기원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책은 다양한 문명권의 사례를 통해 ‘과학’이 단일한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의 경험론적 기술 전통, 이슬람의 정교한 수학과 천문학, 인도의 독창적 계산 체계는 모두 자연을 읽어내는 고유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서구 근대문명의 시선으로 과학을 바라볼 때, 이러한 지식은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주체라기보다 그 혜택을 ‘전달받는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 해당 도서는 이러한 일차원적 서술을 비판하며, 현대 과학의 형성은 특정 문명권의 단독 성취가 아니라 여러 국가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체계를 만든 자와 그 혜택을 누리기만 하는 자를 단순히 나누는 방식은 과학의 실제 역사와 맞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 간의 상호작용에서 탄생한 과학을 부정하는 사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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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외교 현장에서는 과학지식이 한 국가의 소유물로 취급되거나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처럼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국가의 과학수준을 논하는 기사 제목에는 흔히 ’강대국‘ 내지는 ‘선진국’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붙고, 어떤 기술들은 지배당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갖추어야하는 요소로서 소개된다. 이러한 현시점에서 “불평등과 차별, 식민주의적 구조가 더 이상 비가시화되지 않는다(p.7)”는 분석은 상당한 위로를 가져다준다. <서양과학은 없다>는 기술과 사람의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과 차별을 은폐하기가 어려워진 현시대의 특성을 기회삼아 ‘탈식민주의 과학’을 논하는 장을 마련한다. 탈식민주의 과학학은 과학지식이 탄생하고 보편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언어가 차별적인 분류를 전제하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시도이다. 서양열강이 식민지에게 지식을 보급했다는 몽상을 비판하고, 식민주의가 절멸시키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고 번영한 원주민적 지식과 실천을 발견한다. 학문이나 기술의 ‘중심부’를 추적하기를 거부하며, 국가를 지식 전달의 주체로 보기를 거부한다. “집단적인 정체성은 더 이상 과거의 범주들로 분류할 수 없는 파편화된 장소들 위에서 정의되고 있다.(p.47)” 더 이상 땅에 구속되지 않고 이동하는 개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은 지식뿐만이 아니다. 문화와 정체성 또한 전지구인의 공동 산물이며 혼종적이고 불완전한 형태를 띠어간다. 저자는 기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감각과 불평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풍경에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실천적인 해결안들을 모색하는 원동력이라며 안심시킨다. 탈식민주의를 구체화해나가는 여정은 시대에 혼돈이나 위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대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정립해나가는 시간을 살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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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적인 과학으로의 접근은 식민주의의 토양 위에 새겨져 당연시된 과학의 영향을 탐색하고 비판적으로 흔들어댄다. 이것은 단지 식민주의적 패권을 공격·비판함으로써 권력구조를 전복시키고 핍박받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은 지구, 지구 속 공동체, 공동체 속 인간으로서 부여받은 생을 자유롭게, 제한없이, 생긴대로, 잘 살아보려는 전략과 맞닿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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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릭 앤더슨의 『서양과학은 없다』는 과학을 보편적·중립적 진리로 여겨온 통념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과학이 서구에서 완성돼 퍼져나간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식민주의적 역사와 현지 지식의 마찰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된 산물이라고 말한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에서 활발했던 탈식민주의적 시각이 과학계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아왔다는 점을 짚고, 과학 역시 권력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새로운 관점을 쉽게 풀어내 입문자에게도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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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이음출판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읽어보면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잠깐! 그렇다고 바로 뒤로 가기를 누르기 마시길. 이 어렵고 난해한 감각이야 말로,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이라는 이 생경한 표현에 대응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이 뭔지 설명하기 이전, 이 용어가 가진 느낌에 대해 생각해 보자.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은 왜 탈식민주의적인가? 앤더슨은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모두 탈식민주의라는 느낌적인 느낌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 193p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은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왔던 과학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던진다. [과학=서구의 것=보편적 진리]라는 공식은 당연시 여겨왔지만, 이것이 정말 옳은가? 과학이 서구에서 완성되어 나머지 세계로 매끄럽게 ‘전파’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현장에서의 충돌과 번역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만들어진 '과정'임을 밝혀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 모호함과 혼란스러움 자체가 바로 과학이 서구에서 완성되어 매끄럽게 전파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충돌하고 섞이며 만들어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앤더슨은 옅은 미소를 띠며 "애매모호한 것들을 잘 견디는 것(bear with the ambiguities)"이 학자, 특히 역사학자와 인류학자에 게는 미덕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 189p 그러니 이 "탈식민주의적 횡설수설(rambling, 65p)"에 대해 정독하며 그의 아이디어를 한 아름 곱씹으며 정독하는 것은 어떤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번외로 읽다가 너무 어렵다면, 맨 뒤에 수록된 역자 해제부터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저자 워릭 앤더슨(Warwick Anderson)은 의사이자 역사학자로, 과학기술학(STS)에 '탈식민주의' 시각을 접목한 선구자다. 이 책은 편역자 이종식이 앤더슨의 핵심 논문 6편을 엮은 것으로, 한국어판 서문과 해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수록된 논문은 다음과 같다. Anderson, W. (2002). Postcolonial technoscience. Social Studies of Science, 32, 643–658. Anderson, W. (2009). From subjugated knowledge to conjugated subjects: Science and globalisation, or postcolonial studies of science? Postcolonial Studies, 12, 389–400. Anderson, W. (2012). Asia as method in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6, 445–451. Anderson, W. (2018). Remembering the spread of Western science. Historical Records of Australian Science, 29, 73–81. Anderson, W. (2018). Thickening transregionalism: Historical formations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in Southeast Asia.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12, 503–518. Anderson, W. (2020). STS with East Asian characteristics?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14, 163–168. 여기서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뽑자면, 논문을 엮은 만큼 미주에서 논문에서 앤더슨이 직접 달은 주석과 역자가 달은 주석을 구분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역주는 따로 빼서 각주라 다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역주만 보고 싶다면, 3-8(228p)와 3-39(230p)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믿어왔던 '과학의 전파' 모델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학은 서구라는 중심에서 완성되어 비서구라는 주변부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앤더슨에 따르면 과학은 이동하면서 번역되고, 현지의 문화와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테크노사이언스'이다. 그는 과학이 단순히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접촉지대(Contact Zone)'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고 역설한다. 이 지점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저자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그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목이었다. 최근 라투르의 저서가 많이 번역되서인지 아니면 들뢰즈의 유행에 편승해서인지, ANT는 '힙'하고 유용한 분석 도구로 통한다. 하지만 그러한 ANT가 비판 대상으로서 기술되는 점이 놀라웠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포스트-ANT에 대해서는 풍문으로만 들었을 뿐, 라투르의 이론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앤더슨은 라투르의 '네트워크'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적 시선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러나 라투르의 네트워크는 때때로 오래된 식민주의의 범주들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했다. (…) 탈식민주의적 분석보다는 식민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라투르의 이야기는 현지의 행위자들과 맥락을 생략하고 과학의 네트워크를 원주민들이 뚫을 수 없는 일종의 철장으로 만들어 놓는 데에 성공했다. - 58p 앤더슨은 라투르가 『프랑스의 파스퇴르화』나 아마존 연구에서 식민지 현장을 그저 과학이 실험되는 '텅 빈 실험실'처럼 취급했다고 비판한다. 라투르의 세련된 이론이 사실은 타자들을 식민화하고, 현지의 역사와 정치를 지워버리는 군사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앤더슨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네트워크의 확장이 아니라, 그 네트워크를 '비식민화'하는 것이었다. 이 난해하지만 매혹적인 비판을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과학소설(SF소설)을 떠올렸다.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와 같은 작가들은 이미 글을 통해 외계인(타자에 대한 알레고리)과의 조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다뤄왔다. 즉, '탈식민주의적 SF'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런데 정작 현실의 과학을 다루는 우리는 왜 탈식민주의적 STS를 상상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입버릇처럼 한국식 SF, 우리만의 문화를 외쳐왔다. 그러나 정작 그 기저에 깔린 과학과 STS에 대해서는 서구의 것이 곧 보편적 진리라는 거대 서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서구를 유일한 중심으로 여기는 "오래된 지도"(48p)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과거의 거대 서사들을 거부하고, 타자들의 목소리와 경험을 듣고 보고자 하며,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범주들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모두 탈식민주의라는 느낌적인 느낌 안에 있다. - 55p 이 책이 주는 부끄러움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서양과학은 없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믿어왔던 그 단단한 믿음이 사실 특정한 역사와 권력(식민주의)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폭로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과학기술학의 단순 자료나 데이터가 아닌 방법이자 이론으로서 의 동남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 168p 앤더슨이 제안하는 '동아시아적 STS'는 아시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구 중심주의를 깨뜨리고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자 이론으로서 삼자는 초대장이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레시피북이 아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방법"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테크노사이언스를 작동시키는 하나의 지역적인 방식이고, 아직 초기 단계인 하나의 삶의 형식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채워져 나갈 하나의 비판적인 연구 분야이다. - 95p 물론 이것이 "우리 것이 무조건 최고"라는 식의 국수주의로 향하자는 것은 절대 안 된다. 결국 너무나 어렵게 읽히는 이 책의 문장들은,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서구 중심의 과학'이라는 안경을 벗어던질 때 접하는 현기증과도 같다. 새로운 시각의 맞닥뜨림, 그리고 우리만의 언어로 과학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무를 자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번외로, 이번 도서 『서양과학은 없다』는 원어 병기에 있어 '할주'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출판종합전문지 <출판문화>의 한 칼럼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음에서 출간된 『서양 과학은 없다』에서는 원어 병기에 할주 방법을 접목했다. 보통 한 줄로 작게 표기하는 병기 대신 할주처럼 두 줄로 변형해 여백을 최소화하고 균질한 글줄의 느낌을 연출했다. 병기 표기가 책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일반 본문 크기로 설정한 경우와 비교하면 공간을 씬 절약하는 효과가 있고, 글의 흐름에도 덜 방해가 된다. 원래 전문적인 글을 읽을 때는 원어 병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원어가 쭉 나열되어 있으면, 글이 피로해지는 느낌이 드는 단점이 있다. 한 줄에 한글이 반, 영어가 반 있는 글을 독해하기란 영 피곤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할주 방법을 처음 본 입장에서, 지면을 아끼고 영어가 적은 출판 디자인이라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 낯선 할주 디자인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구의 개념(원어)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도,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 글의 흐름을 압도하게 두지도 않으면서 한 줄 안에서 공존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앤더슨이 그토록 강조한, 서로 다른 지식과 문화가 만나 섞이고 번역되는 '접촉지대'의 모습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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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보여주듯 이 책은 우리가 막연히 믿어온 서양 과학의 권위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저자는 과학이 순수하고 완벽한 원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만나 뒤섞인 혼종적인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서구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고유한 지식들의 가치를 재조명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탈식민주의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세상을 보는 태도의 문제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과학과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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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연구가 과학 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 연구가 탈식민주의를 통해서 과학기술학을 더럽힐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식민주의와 현 세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책. 동아시아의 고유한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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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릭 앤더슨의 『서양과학은 없다』는 제목만 보면 도발적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깊고 섬세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과학은 보편적이다”라는 서구 근대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특정한 역사·권력·제국주의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밝힌다. 앤더슨은 탈식민주의 과학기술학(STS)을 기반으로, 서구 과학이 단순히 전 세계에 ‘전파’된 것이 아니라 식민 권력 관계 속에서 재조합되고 변화하며 만들어진 혼종적(hybrid) 지식임을 강조한다. 즉, 서양과학이 세계로 퍼져나가면서도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 아니라, 현지의 지식·문화·권력구조와 상호작용하며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비서구=전통, 서구=과학’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해체한다는 데 있다. 앤더슨은 과학이 특정한 문명이나 민족의 고유한 산물이 아니라, 만나고 충돌하고 협상하며 생성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진정한 과학’이 무엇인지 묻기보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만나게 된다. 번역 또한 어려운 개념을 최대한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느껴져, 탈식민주의나 STS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크게 장벽이 되지 않는다. 다만 사유의 깊이가 있는 만큼, 한 문장 한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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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과학이 없다》는 과학을 서구 중심의 보편적 지식으로 여겨온 통념을 흔들고, 과학이 다양한 문화와 권력 구조 속에서 이동·변형되며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과학의 ‘중심’과 ‘주변’을 다시 사고해보고 싶은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