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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치는 것'을 좋아하는가? 첨단 시대에도 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신이라 무시하지만 사람들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점치는 일에 관심이 높아진다. 나는 딱 한 번 길거리 점을 쳐보았다. 그 후로는 아예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과학과 주술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럴지라도 과학시대에 주술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과학과 주술의 만남이 변함없을진대 예술과 주술은 어떨까? '천지창조' '만종'이 점집에 걸려 있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예술을 모욕한 것이라 비난할까? 새로운 점집이 등장했다고 호응을 할까?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비판과 옹호가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다. 김융희다. 그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에서 점치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어느 날 타로(Tarot) 카드를 만나면서 점치는 일이 재미를 넘어 무엇인가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타로 52장의 그림을 계속 보면서 이상한 힘을 방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술은 과연 영성을 가지고 있을까? 있는 그대로, 이미지만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만 인가?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을 규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예술을 세계와 자연을 재현하는 잘 훈련된 기술로 자리매김 하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신비한 현현으로 보는 태도다." (본문 10쪽)
예술에 대한 두 갈래 의견 중 앞의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예술세계이며, 뒤의 것은 무당과 같다. 전자는 르포 작가처럼 일상에서 치열한 고민과 삶, 취재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며, 후자는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과연 오늘은 어떤가. 후자와 같은 예술에 대한 갈래를 인정할 수 있을까? 비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융희 생각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면서 경험하는 일들은 분명 합리성과 논리성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떤 신비와 영적 실체가 존재함을 경험한다. 김융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밤의 어두움과 모호함 그리고 침묵 세계가 밝은 낮 세계의 자양분이라 말하고 싶다. 세계에는 합리적으로 질서를 이루는 경험 과학적 담론들이 채 다 퍼올리지 못한 신비가 숨쉬고 있으며 그 수맥을 탐사하고 드러내는 통로는 이미지에 있을 것만 같다. 말과 논리는 조금만 더 가면 금방이라도 세계의 진상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뻗지만 실제는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긴다. 그 잡히지 않는 여분의 것, 그러나 잡히는 세계 모태이기도 한 세계의 또 하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 몫이다." (11쪽)
예술을 통하여 그 잡히지 않는 여분 캐내기를 시도하는 것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이 남긴 각종 예술 작품은 분명 신비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절에 가면 '산신도'가 있다. 절에서 보는 산신도는 영성과 신비함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걸려 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산신도와 절에 있는 산신도를 달리 보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 산신도는 예술이고, 절에 있는 산신도는 종교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김용희는 이런 이중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림이 주체가 아니라 장소가 주체가 되는 현실을.
김융희는 말한다. "예술은 주술에서 시작되었다." 라스코의 동굴벽화와 빌렌도르츠의 비너스는 분명 예술이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주술적 상징이라고. 이런 주장은 물론 비판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예술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냥 그들의 들소 사냥이 잘될 수 있도록 신에게 제사지낸 것이지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고대에 등장하는 것 중 '뱀과 새'가 있다. 아마 거의 모든 나라와 민족의 신화에 등장할 것이다. 성상 - 예수, 성모 마리아, 성인. 불상 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의 얼굴을 항상 기억하기 위하여 만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상징과 영성, 숭배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남긴 많은 작품들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조건 미신이라 비판하지 말고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을 더 깊은 상상 세계 속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김융희는 말한다.
예술 속에서 영성을 찾는 작업.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술 모두를 상징, 이미지, 영성으로 이해하고자 함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일 뿐, 어떤 상징과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제다. 예술은 박물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밖으로 나와 인간과 함께 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예술품을 보고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야 하리라.
"예술이 태고적에 지니고 있던 하나의 역할, 다시 말해 인간과 우주와의 간극을 매개하여 행복한 화해에 이르게 한다는 주술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127쪽)
예술이 돈벌이로 전락한 시대다. 미술관 안에만 고이 모셔 놓은 미술작품(예술품)은 예술을 도외시 하는 일이다. 감상과 미술만을 위한 장소, 평안한 안치소에만 존재하게 하는 일은 예술을 비하하는 일이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혼을 담아 구현했던 그 시대, 그 작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주술과 신비함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며 그 노력을 미신으로만 취급해 비하하는 것은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방해된다는 것이 김융희의 생각이다. 과연 독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
| 나는 우연히 수업에 관련 책자를 찾다가 이 책을 읽어 보게 되었는데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내용이 난해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읽고는 있는데 그 내용이 머리로 번역되어 들어오는 것 같지 않은 당황감. 내가 미술 관련 전공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예술의 파생이라던가 하는 과정을 대강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기에 좀 힘든 내용이 있기도 했다. 무언가 전문적인 지식을 써 놓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위화감. 이것에 관련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읽기 좀 힘든 감이 있는 것 같다. 주제가 넘부 어려워서 이기도 한 듯한 어려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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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본래 고향은 무엇일까? 대충 지도를 그리자면 예술을 유사과학으로 보는 듯한 재현론, 예술을 사회적 총체의 하위요소로 파악하는 제도론, 그리고 삶의 생기 혹은 신비와 연결짓는 표현 혹은 상징론이다. 예술사가들이나 미학자들은 예술의 본향을 그 기원에서 소급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예술의 표현론으로 치우치는 주장들은 예술의 제의성, 그리고 그 제의성이 갖는 신비주의에 주목한다.
신비는 인간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어떤 것이며 그 생기야말로 예술의 근본적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은 책은 바로 그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이 그 속성을 잃고 하나의 제도로 타락함을 아쉬워 한다. 간결하면서도 열정이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열정만큼 엄밀성은 떨어진다. (생각)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 않을까? [인상깊은구절] 신비는 존재하지만 쉽사리 개념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개녀므이 틀을 끊임없이 벗어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개념의 틀로 보아서는 하나의 모순, 또는 아이러니로 드러날 뿐이며 그 의미를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한낱 말장난 이나 유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처가 들어올린 연꽃을 보고 웃었던 가설을 생각해보자. 말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웃었던 가섭을 생각해보자. 부처는 존재하는 것의 본체를 느꼈을 뿐 설명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부처는 한 송이 연꽃을 들어올린 것이다. 이것이 상징의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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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술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예술이 하나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면 그 이미지는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선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다. 내가 문학도이다 보니 많은 부분을 습작과정과 연관시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말은 미술에서처럼 눈에 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언어를 만들어 냄으로서 그 언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하는 작업에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특히 시라는 장르는 많은 이미지들과 상징을 가진다. 시에서 사용되는 모든 언어는 이미 상징이기도 하다. 헌데 그 상징의 힘인 언어로서 현실세계의 전복을 꿈꾸고 환상적인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문학이, 예술이 지금에 와서는 많은 부분 그 현실과 결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모더니즘이 부여하고="" 있는="" 예술의="" 존재방식이란="" 그것이="" '오로="" 지'="" 예술이어야="" 하며="" 인간="" 문화의="" 다른="" 영역과는="" 관계없는="" 것이="" 어야="" 한다는="" 결벽증적인=""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자기="" 규정은="" 소위=""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영역을="" 넘보는="" 예술은="" 저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모더니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술을 소외시켰다. 아니, 예술로부터 사람들을 소외시켰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결벽증이 예술 스스로를 미술관이라는 잘 짜놓은 관 속에 안치시켰으며, 그로 인해 예술의 상징성, 영성은 죽음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모더니즘에 관한 논의들은 이상한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그 기형적인 예를 들자면 그것은 문학 안에서도 순수, 참여라는 이상한 논리를 생산한다. 문학작품을 두고 순수니, 참여니 하는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억지스런 논리라고 코웃음을 치지만 몇 십 년 전, 아니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억지 논리가 문단에서도 팽배했었다. 혹은 작품을 내용, 형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억지로 구분 지어 설명하려 들었던 것이다. 현실, 일상을 완벽히 외면할 수 있는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던 것이었고, 순수니 참여니 하는 구분 또한 당치 않은 말이었다. 그 당시 '참여'를 민중시라 하여 삶과 밀착해 있고, 정치적 사회적인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군이라 하며 그 이외의 것을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매도하였다. 또, '순수'를 삶과 분리된 철저한 작품위주의 계열로서 그것이야말로 고상한 예술작품에 편승하는 것처럼 떠벌려대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억지 논리들은 문학가나 예술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떠들고 구분 짓기 좋아하는 비평가, 이론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결과 '참여'나 '순수' 모두로부터 진정한 시의 힘, 예술의 힘인 상징성이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예술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려내고 담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잊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오랜 옛날 주술적인 목적에 의해 예술작품이 만들어졌던 시대는 지났다. 그 시대에는 예술이라는 개념자체가 모호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벽화에 그려 넣었던 동물 그림을 가지고 예술이라고 말하는(혹은 오늘날 예술의 모태라고 말하는)것은 전적으로 현대인들의 말이다. 즉, 내 말은 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예술이라는 개념을 의식하는 현대에는 과거와 같은 주술적 의미만을 가지는, 혹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작품(생산물)을 만든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개념 안에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에 의한 것, 신성을 담은 어떠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에서 이미 예술이 갈 길은 정해져 있다고 본다. 다만 그 안에 얼마나 정신적인 것들을 담아내려고 노력을 하느냐, 얼마나 많은 상징들을 간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겠다.
'만들어진다'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산업과 문명의 발달로 치장되고 미화되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이 그것이다. 모더니즘의 결벽증은 예술 내에서의 문제였겠지만 이제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장, 현실과의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순수'나 '참여'를 구분 짓게 되었던 우리나라의 정치적인 현실보다도 자본주의 안에서 예술은 오히려 그 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그것을 왜곡시키는 힘 또한 더 커졌다.
일찍이 앤디 워홀이 자신의 '모나리자'나 '마릴린 먼로'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예술품의 복제나 소멸되는 정신성을 비판하고 나섰듯이 자본주의의 상업성은 예술의 상징성은 물론이고 정신성을 소멸시키기에 이른다. 헌데 문제는 마을입구에 세워져 있던 장승이나 솟대를 박물관이나 기념관 안으로 들여와 그 영성을 소멸시켰던 것과는 달리 그 차이점이나 문제점이 눈으로 보아서는 잘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판을 치고 값비싼 문학상의 이름이 작품의 예술성을 대변하는 것인양 말해지기도 하지만 또 베스트셀러라고 해서(상업적으로 성공을 하였다고 해서)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는 말이다.
세계와 소통하기 위한 예술의 언어, 예술의 상징성들이 자본가들 눈에 돈이 되겠다 싶기만 하면 당장 복제되고 획일화되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는-예술이 그것을 원하건, 원치 않건 상관없이- 선두그룹이 되고 마니, 아, 예술이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인상깊은구절] 모더니즘이 부여하고 있는 예술의 존재방식이란 그것이 '오로 지' 예술이어야 하며 인간 문화의 다른 영역과는 관계없는 것이 어야 한다는 결벽증적인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자기 규정은 소위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영역을 넘보는 예술은 저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모더니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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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것이 꼭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달력속의 멋진 풍경화(유명작가의 그림이라면)도 놓여있는 곳의 차이이지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찮은 그림일지라도 보는 사람의 눈에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작가의 그림이라도 사람들이 외면한다면 그것이 과연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등등의 생각을 다시한번 해보게 해 주었다. 특히 책 속의 글 중에 '절이나 당집에 있는 산신도가 미술관으로 옮겨오면 신이 떠나버린다' 대충 이런식의 글이 있었는데 예술이라는 것이 장소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그것이 과연 예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과 주술이라는 것이 한쪽면은 연결이 되어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하고 예술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상깊은구절] 현실에 대한 마음속 이미지를 모방해 현실의 이미지로 바꾸고 그 이미지와의 교감을 통해 현실을 바꾸는 것, 주술은 이러한 관념을 모태로 출발한다. 주술에서 태어난 예술은 이미지를 현실로 바꿔주는 매개 장치인 셈이다. 아니, 어쩌면 현실을 바꾸는 부적 같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