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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소설의 경우, 육체에 도달하려는 의도는 성공, 혹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성취, 혹은 환멸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중심 플롯이 된다. 이것은 바로 인생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는 욕망의 구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 피터 브룩스著, 『육체와 예술』 (2013, 문학과지성사刊) 中에서
소설 작품을 읽을 때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가 어떤 이면의 이야기, 즉 표면이 품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독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홀로 내밀히 맛보는 즐거움, 뭔가 은밀한 것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달성하려 했던 앎의 욕망의 성취. 그럼에도 이 욕구는 만족할지 모르고 다른 소설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는 앎의 세계,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 소유에의 충동, 그 본질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파우스트적 시도를 지속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에로틱(Erotic)'이란 말과 유별나게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육체를 욕망의 주체 및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 욕망과 관련하여 의미를 띠게 되는 육체에 대한 고찰, 그 본질인 성적이며 호기심 가득한 지식욕이 얼마나 육체적인 것인지 말이다. ‘롤랑 바르트’는 “상징적인 장(場)은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 ....다름아닌 인간의 육체다.”라고 썼다. 또한 ‘테리 이글턴’은 “육체는 정신의 전제 조건이며, 형이상학적 탐색이 궁극적으로 회귀하는 실체”라고 했으며, ‘피터 브룩스’는 “육체는 의미생성의 장소이며, 이야기가 각인되는 장소가 되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 서술적 플롯과 의미산출의 일차적 요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즉 육체는 모든 상징의 근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종착점이란 뜻으로 읽힌다. 결국 인간의 지식애적 욕구란 육체를 알기 위해,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 서술되는 이야기들의 알레고리, 바로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1. 지식애(愛) = 내밀한 삶으로서의 육체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에는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듯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대한 문학사적 성격의 설명이 있는데 꽤나 흥미롭다. 『고백록』 제 1권 첫 머리에 소개되는 자기 육체에 대한 고백인데, 열한 살 시절 자신의 교육을 담당하던 랑베르시 양이 벌로써 그의 엉덩이를 때린 사건이다. 그때 루소는 “고통 중에, 심지어는 수치감 속에서도 일종의 관능적 쾌락을 느꼈으며 .... 두려움 보다는 차라리 욕망을 느꼈다.”는 고백이다. 이때부터 그의 ‘육체에 에로틱한 기표’가 새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진술한다. 그 벌이 “나의 전 생애에 걸쳐 내 취향과 욕망과 열정,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결국 그의 생의 이야기는 초기에 그의 육체에 ‘새겨진 자국’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에 새겨진 자국이라는 알레고리는 『신 엘로이즈』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알레고리로 꾸준히 등장한다고 한다. 이 자국은 욕망의 자국이 새겨진 육체다. 재현되지 못하던 육체가 자국을 통해서 언어의 영역, 글쓰기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브룩스는 주장한다. “글쓰기는 욕망과 그 대상의 재현 관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고백록』은 인간 삶의 모든 문제는 육체가 자리 잡은 곳과 그 의미로 귀결된다는 점을 간파한,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에 주목하고, 육체는 육체 이외의 장소에서 생성되지 못하는 의미 생성의 장소로서 파악한 인간 의식의 역사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저작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고려가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되는 서사물들이 육체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야릇한 즐거움을 준다. 책을 읽는 것,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르는 길을 열어주는 여정이 마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다른 표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2. 글쓰기 작업: 치명적 죄의 극복 육체에 글을 쓰는 문제의 이야기로서 1916년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유형지에서」는 문자 그대로 육체가 글을 새기는 공간이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한다. 루소의 작품이 가부장적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것이었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육체에 메시지를 쓰려는 것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반(反)육체적이고, 남성적 시선의 전복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상관에 복종하지 않은 한 군인의 처형에 초대된 탐험가의 이야기다. 아마 이야기의 핵심은 일벌백계의 관습을 항구적으로 존속시키려는 ‘사형 집행기계’에 관한 설명일 것이다. 기계가 작동되면 사형수의 몸에 내려진 선고의 문장(“상관들에게 경의를 표하라!”)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늘로 사형수의 몸에 12시간에 걸쳐 새겨지는 것이다. 탐험가는 사형 집행자인 장교에게 묻는다. “죄수가 자기 몸에 새겨지는 문장을 압니까?” , 장교의 대답은 그야말로 잔인한 무지로 가득 차 있다. “모릅니다. 죄수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죄수는 몸으로 그 문장을 배울 겁니다.” 즉 죄수의 몸에 법률을 새기는 벌이 죄수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기대하는 것으로, 장교는 부언한다.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얼마나 조용해졌습니까? 죄수의 눈 주위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죠.” 죄수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의미를 해독하는 데 여섯 시간이 필요하며, 그때 쯤 죄수는 피와 물이 흥건한 구덩이에 던져진다. 과연 죄수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에 대해 탐험가가 회의를 보이자, 장교는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기계에 ‘정당해라!’라고 선고를 써 넣고 기계위에 서자 그 기계는 저절로 파괴되며 12시간이 아니라 바로 장교의 몸에 바늘이 꿰어지고 장교의 몸은 꼬챙이에 매달려 죽고 만다. 장교가 설명했듯이 새겨진 문자를 깨닫기는커녕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그저 죽었을 뿐이다. 결코 ‘정당하라!’는 문장은 써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육체가 법과 의미를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는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작가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우화이리라. 즉 고통당하는 육체는 고문하는 권력을 만족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며, 도덕적 타락의 상징일 것이다. 단지 육체를 문화의 산물로 만들려는,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육체의 의미화에 대한 이런 냉혹하고 부정적인 시선처럼 아무런 깨달음도 주는 것이 없는 것일까? 육체에 대한 자국내기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일련의 욕망들이다. 그것이 긍정성을 지니든, 부정적이든. 권력이 개인의 육체를 좌우하려 하는 것이든, 연인의 육체에 다가가려는 것이든, 육체를 소유하거나 합일하려는 갈망의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타자를 알려는 충동이다. 비록 오늘의 세계가 육체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고 신비를 거의 벗겨내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체를 알지 못한다. 어찌 앎이 달성 될 수 있겠는가. 어찌 타자의 육체를 소유 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반복적으로 글쓰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탈육체화가 이루어지는 어느 날 의미를 상실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육체에 대한 욕망의 이야기는 인간의 앎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지속되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내 무의식의 유혹은 이렇듯 앎을 향한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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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의 표지그림에 주목하라. 일단 누구의 어떤 작품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지 말고 그저 그림을 감상해보길 바란다. 그림을 보면서 천천히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시선은 먼저 고혹적인 침대 위의 누드로 향한다. 매혹적인 갈색 머리 여인이 하얀 커버로 둘러싸인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다. 피곤한 나머지 잠에 취해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성은 뭇남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에 충분하다. 화려한 꽃무늬 휘장과 보라색 이불, 그리고 커다란 침대는 사치스런 정부나 고급매춘부의 방을 떠올리게 한다. 침대 머리맡에는 분홍색 스탠드가 은은한 조명을 발하고 소파 아래엔 여인이 벗어놓은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들이 있다. 격렬한 사랑의 물증인양 장미빛 허리띠와 하이힐이 침대 밑에 널부러져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자연스레 창문가에 구리빛으로 그을린 한 남자에 주목하게 된다. 고개를 돌려 침대위의 그미를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의 정서를 읽을 수 있을까? 우울? 허무감? 글쎄다. 확실한 것은 그의 하얀 상의는 가슴까지 두 세개 단추가 풀어져 있고 소매 단추 역시 채우지 않아 이미 한바탕 욕정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뒤임을 암시하고 있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창문 난간을 불들고 있고 왼손으로는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붙잡고 있다. 짙은 명암으로 인해 남자의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강렬한 감정을 남기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런 여성을 바라보는 남자의 응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곰곰히 생각하기 바란다.
이 고혹적인 그림은 앙리 제르벡스(Henri Gervex, 1852~1929)의 <롤라>란 작품이다. 착각은 금물이다. 롤라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이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주인공은 바로 그림 속의 남자이고 이 남자는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의 장편시 《롤라(Rolla)》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 자크 롤라다. 롤라는 향락의 도시 파리에서 가장 타락한 남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롤라는 사랑하는 매춘부 마리온에게 자신이 몸에 지닌 최후의 한푼까지 다 써버린 뒤 음독자살하고 마는데 제르벡스의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롤라가 자살하기 직전의 광경이다. 이제 우리는 초점을 마리온을 바라보는 롤라에게 맞추고 이야기를 다시 풀어내야 한다. 한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이 그림이 1878년 공식적인 전람회인 살롱에서 냉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이 그림을 보면 그렇게 불온하지 않지만 19세기에 이 그림은 대중들에게 전시될 수 없었던 금기작이었다. 미국 예일대 비교문학과 석좌교수 피터 브룩스는 《신체 작업: 근대 서사 속의 욕망 대상》 에서 서사 문학과 미술에 나타난 욕망대상으로서의 몸의 재현문제를 다루고 있다. 좀더 유식하게 표현한다면 저자는 몸의 문학사 혹은 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몸의 기호화와 이야기의 신체화를 탐구한다. 보통 몸은 생물체, 성심리구조나 문화적 구성물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적어도 저자에게 있어서 몸은 의미화의 방식으로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대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구조로 길들일 수 없는 '타자'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몸에 관한 글쓰기는 언제나 욕망대상과 타자라는 의미화의 갈등을 수반한다. 저자는 시각, 욕망, 지식애(epistemophilia)등의 개념을 빌어 텍스트에 재현된 몸의 이슈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몸은 인식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몸에 대한 온전한 철학적 고찰은 몸과 정신,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주창한 데카르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겔을 포함해서 많은 서구 철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몸 철학에 주목하곤 했다. 몸의 물질성과 정신성의 합일이 문화적으로 가장 원숙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도 두터운 저서 《헤겔》에서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가장 숭고한 상태의 생명양식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 사상과 정감, 도덕적 각성과 인지능력의 합일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저자에 따르면 세 가지 지적인 사조가 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첫째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실천에 관심을 갖는 문화사다. 둘째는 정신분석학 이론, 그 중에서도 특히 성(sexuality)에 관한 이론의 부활이다. 정신분석학에 있어서 몸은 히스테리처럼 정신적 갈등이 현현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상징주의의 원천이다. 프로이트, 멜라니 클라인, 자크 라캉에 뒤이어, 피터 브룩스는 몸은 상징의 구성과 언어의 구성에 재료를 공급한다고 강조한다. 1818년에 출판된 메리 셜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괴물이라는 괴이한 육체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모성과 부성, 성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주제로, 즉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대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설명한다. 셋째는 성별과 성차, 정체성에 관한 페미니스트 이론이다. 페미니스트 연구는 성의 정치학이나 몸의 정치학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쾌락과 지식과 권력으로 통하는 열쇠임을 환기시킨다.
저자의 몸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작품과 미술작품에 대한 저자의 분석도 정신분석학에 대거 의존하고 있다. 피터 브룩스에게 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은 둘이 아닌데 나도 이런 견해에 공감한다. 저자는 이 책의 전작인 《플롯 따라 읽기(Reading for the Plot)》에서도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문예비평을 결합하여 이야기를 추동하는 '욕망의 동력학'을 제시한 바 있다. 이야기를 의미 있는 형식으로 배열하는 플롯을 따라 읽으며 서사가 이야기하고 제시하고 불러일으키는 욕망을 의미화의 동력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문학과 미술작품을 넘어서 우리는 욕망의 동력학 혹은 '플롯 따라 읽기'의 방식으로 정치적 수사학을 읽을 수도 있다. 일찍이 신역사주의가 우리에게 강력히 시사한 바처럼, 거리, 광장, 법정, 병원 등에서 벌어진 사회적 사건들이나 연극 무대 혹은 스크린 위에서 벌어진 허구적 사건들이나 플롯과 욕망의 측면에서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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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사용하는 "육체"라는 용어는 "생물학적 개체", "정신적, 성적 구성물", "문화적 산물" 등 매우 중첩적인 의미를 지닌다. 몸을 다루는 창작자는 전술한 각각의 의미 중 하나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 셋이 서로 얽혀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저자는 이런 얽힘의 상태에서 주로 '육체가 무엇인지'를 정의내리기 보다는(과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육체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상상되고 상징되었나를 살핀다. 특히 근대, 즉 18세기 이후의 서사물에 있어서 육체가 중심주제로 등장하게 되는지 살핀다. 근대의 서사물이나 서사적 예술 속에서 육체는 이야기가 형태를 갖추게 하기 위해 아주 중심적인 뼈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육체론은 "문화적 구성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영화와 광고, 예술에 있어서 여성의 생식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적으로 전시를 해도 무방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성의 성기는 충격을 주고 그것이 춘화처럼 전시되지만 분명 검열에 걸리지 않는다. 린다 윌리암즈의 방식대로라면 음경으 이런 식으로 시각적 열광의 대상이라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음경은 성적 흥분과 오르가즘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때문이다.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드러낸 음경은 상상 속에서 힘의 기준이 되는 음경에 결코 적합치 않기 때문이다. 또는 음경은 "로고스가 욕망과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특별한 기호의 표현"이라는 라캉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음경을 전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게도 육체와 언어,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복잡한 얽힘을 폭로한다고 짐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