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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백치』는 가장 순수하고 선량한 인간이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에 던져졌을 때 맞이하는 필연적인 비극을 그린 대서사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국내 최초로 모두 완역한 김정아 박사의 번역은, 지극히 현대적이고 유연한 문장으로 원작의 무거운 위엄에 짓눌리지 않고 작가의 사상과 깊은 연민의 숨결을 21세기의 언어로 생생하게 부활시켰다. 이야기는 스위스에서 간질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20대 청년 미시킨 공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행 기차 안에서 거칠고 열정적인 부호 로고진을 만나며 시작된다. 미시킨은 맑은 영혼과 끝없는 선의를 지닌 '완전하게 아름다운 인간'으로,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인 '연민'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교계에서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어린 시절의 학대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자신을 파괴하려는 매혹적인 여성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이고, 다른 한 명은 순수하고 자존심 강한 명문가의 막내딸 아글라야다. 미시킨은 아글라야를 향해 인간적인 '연정'을 느끼면서도, 고통받는 나스타시야를 향한 압도적인 '연민'을 외면하지 못한다. 세속의 사람들은 미시킨의 계산 없는 순수함과 이타심을 이해하지 못해 그를 '백치'라 조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맑은 거울 앞에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비추며 기묘한 매혹과 혼란을 느낀다. 미시킨은 모든 사람을 품고 구원하려 하지만, 그의 선의는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욕망 속에서 오히려 파국을 앞당기고 만다. 결국 로고진의 질투와 광기가 나스타시야를 살해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미시킨 역시 사랑과 연민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긴 채 완전히 정신이 붕괴되어 진정한 '백치'의 상태로 스위스로 돌아가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백치』는 읽는 내내 짙은 슬픔과 경외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작품이다. 미시킨 공작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선'이라는 가치가 이 타락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얼마나 불가능한지, 그럼에도 왜 우리가 그 가치를 포기해선 안 되는지 날카롭게 질문한다. 특히 김정아 번역가의 문장은 도스토옙스키가 포착한 인간 심연의 갈등과 붕괴하는 영혼의 파동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달해 주어, 오역 없이 작가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 듯한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구원자로 보였던 미시킨조차 현실의 욕망 앞에 부서져 버린 참혹한 결말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위선에 대한 서늘한 경고이자, 잃어버린 '연민'의 감각을 일깨우는 강력한 각성제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