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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 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by 1973년 서문, 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by. 1961년 서문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 그에 이르는 수많은 골목을 몸의 길을 따라,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간 그의 발자취 속에서, '힘에 부치는 운명'에 그저 자신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사는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광장을 찾아 헤매이다, 결국은 자신의 밀실로부터 자신을 가둬버린 그의 운명의 부르짖음은, 결국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심연의 바닷속에 머물러버린다. 풍문의 역사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며, 허울뿐인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민'의 모습을 찾아헤매는 그의 발자취는 역사의 상흔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푸른 광장을 향한 그의 발돋움은 그를 진정한 자유의 광장으로 데려다주었을까.
'삶이 시들해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탈인즉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저도 모른다는 것이고, 자기 둘레의 삶이 제가 찾는 것이 아니라는 낌새만은 분명히 맡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 (p.38) '자기 삶이 어떤 나무에서 익을 대로 익은 끝에, 곱다랗게 자리 잡고 있던 가지에서 뚝 떨어지기 앞선 얼마 동안, 새로운 움직임을 마련하는 숨결이, 아무래도 본인에게 새어나게 마련이다. '(P.85)
'사는 것조차'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 나날들,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 명준에게 남한의 삶은 그랬다. 사기와 약탈, 탐욕과 배신으로 물들어버린 텅빈 광장,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는', 밀실만이 살찌어지고 있는, 죽어있는 광장 속에서 그저 '몸의 움직임'만이 존재했다. '자유'의 이름을 앞세워 포장된 자본주의의 이기심에 염증느끼며, 어떠한 광장에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철학 뒤에 양심을 숨겨놓은 채, 외로움이 만들어낸 사랑이란 그림자를 더듬으며 허무한 외로움을 달랬다.
단조로웠던 명준의 삶이 핏빛 빛깔로 물들게 된 것은, 기관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광장을 지키기위해 내달렸던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혁명도, 이념도, 사상도 허용되지 않는 껍데기 뿐인 자유와 반공이데올로기의 억압 속에서 처참히 자신을 무너뜨리는 운명을 보고 나서야, 혁명의 핏빛이 그의 마음에 불길로 번져들었다. 그는 새로운 빛이 필요했다. 빛 뒤에 숨은 컴컴한 어둠은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새로운 광장으로, 그의 아버지처럼 마음의 길을 따라 내달렸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해야 하나? 하숙집 천장을 노려보고 있다.' (P.124)
그를 기다리고 있던 만주의 붉은 울렁임은 그의 심장을 타들게 하지 못했다. 그가 상상했던 붉은 혁명의 깃발은 광장 어디에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곳은 그저 '인민'의 가면을 쓴 '제가 낸 신명이 아니라, 무쇠 같은 멍에가 다스리는'(p.178) 그런 곳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깍아내려져야 했으며, 자기 자신을 내어버리고 나서야, 그들이 만들어낸 굴레에 간신히 몸을 붙일 수 있었다. 그 어느 한쪽으로도 물들지 않는, 물들 수 없는 칙칙한 회색 낯빛을 한 채, 그렇게 회색 '광장'에서 벗어나 두 팔 안의 작은 '밀실'로 숨어들었다. 그 어떤 '이념과 사상의 탯줄로부터 자유로운' 그녀와 함께, 그가 만든 '한 뼘의 작은 광장'에 머무는 것, 그가 회색 광장에서 숨쉴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이 사람들, 이 친구들이 내 동진가. 하긴 같은 배를 탔다는 것뿐, 처음부터 우리에겐 뚜렷한, 함께 설 광장이 없었던 게 아니냐.(p.107)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된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P.185)
'모습 없는 죽음의 그림자와 맞서서 지내야 하는 나날'(p.163) 속에서 그녀와 그는 다시금 그들만의 밀실에서 서로를 보듬었다. 자유와 혁명의 총부리 끝이 서로를 겨누는 핏빛 광장에서 뿌리 뽑힌 채, 그들만의 동굴로 숨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끊어짐 속에서, 돛대를 잃고 난파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때 묻지 않은 광장'으로의 발걸음 뿐이었다. 그 어느 광장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사랑도 이념도 없는 낯선, 새로운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환상 없는 삶'에 묻히기 위해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중립국행'이었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P.200)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 제 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 (P.200)
끊임없이 뒤따랐던 두 갈매기의 어스름을 눈치채고 나서야, 제 마음의 길을 터놓아주고 나서야, 그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광장을 발견한다. 발 디딜 틈도 내어주지 않은 채, 뱃간 한 켠으로 그를 몰아세운 공허한 광장으로부터 벗어나, 그는 푸른 광장으로 자신의 몸을 맡겼다. 환상없는 삶보다는, 제 두팔 안의 작은 광장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무엇하나라도 있을 희망을 찾아 또다른 광장 속으로 깊이 파묻혀버렸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심연의 푸른 광장 속으로.
보이지 않는 사상이 만들어 낸 두 집단의 갈라짐, 허울뿐인 사상의 일렁임은 그 어느 광장에서도 올곧이 자리를 잡지 못한 듯하다. 겉만 번지르르한 이념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한 몸이 나뉘어져, 제 살을 뜯으며 삶을 옥죄어 온다. 옥죄어 오는 삶 앞에 한낱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시기와 배신, 약탈과 증오가 제 자신을 지키는 몸부림이 되어버린, 그저 삶 앞에 무기력하게 자신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명준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는 위대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불의와 싸우기보단, 때론 제 나름대로의 '요령'을 통해 삶에 순응하기도 했다. 어떠한 위대한 가르침과 존경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찾아(그것이 풍문이었을지라도) 현장을 헤매이다 결국은, 죽은 광장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이라는 밀실로 숨어버렸다. 우리는 광장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이다 길을 잃고 방황하듯, 서둘러 자신을 밀실로 내친 그를 나약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다그쳐오는 운명에 힘없이 자신의 몸을 내던져야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의 삶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느끼며, 과거 혹은 현재의 우리네 모습을 본다. 그때의 광장으로부터 자리잡은 지금의 광장, 우리는 지금 수많은 광장에서 제 몸을 지탱하기 위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각자의 밀실안에 제 몸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명준이 찾고자 했던 푸른 광장을 우리는 여전히 찾아헤매이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 ' 인용어구 <담고 싶은 문장>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가면서 살 수 있는 삶. 명준이 찾는 삶이다. ' (p.40)
'사람이란 어느 때까지는, 세상일의, 말하자면 가장 껍데기만을 허술히 보고 지내는 것이며, 자기와 둘레 사이에 아무 티격태격도 없는, 달걀 속 노른자위같이 사는 무렵이 그나마 좋을 때라 할까.' (p.41)
"사는 것처럼 사는 법이 좀 없을까요?" "자넨 아직 패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패라니요?" "왜, 미스를 할 적마다 패 하나씩 뺴앗기는 놀이 있잖아. 자넨 아직 한 판도 안 했단 말일세. 아니, 내가 잘 못 알았나?" (p.59)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p.60)
"이런 광장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 뿐입니다.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 "그 텅 빈 광장으로 시민을 모으는 나팔수는 될 수 없을까?" "자신이 없어요, 폭군들이 너무 강하니깐." "자네도 밀실 가꾸기에만 힘쓰겠다는." "그 속에서 충분히 준비가 끝나면." (p.63)
'고요한 무너짐. 그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쓸 손도 없었거니와 귀찮기도 해서, 그저 심란하면서 꼼짝하기 싫은 몸을 일으킬 염을 내지 않았다. 실은 무서워서, 그토록 질려버린 것이다.' (P.85)
'나한테도 영웅의 삶을 살고, 영웅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씨앗이 파묻혀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이 검은 해가 비치는 어두운 광장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씨앗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내는 나팔수가 바로. ' (P.86)
'그는 때 묻지 않은 새로운 광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들떴다. ' (P.121)
'손끝을 맞잡아봤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 했다.' (P.135)
'물살의 움직임이 이쪽의 마음을 끌어당겨 그의 마음도 바다가 되어, 거기 물거품을 일으키면서, 물이랑을 파헤친다.물결과 마음의 사이는, 차츰 가까워진다. 끝내 그의 몸과 물결은 하나가 된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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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고, 어려운 책이다. 한국
문학 특유의 냄새가 난다. 문학을 특히나 어려워하는 나에게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책이었다. 덜컥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충동이 인 것은 여러 일들 때문이리라. 혹은
이 책이 지금쯤이면 내가 만나야 하는 우연에 우연을 얹은 인연의 순간이기 때문인가. 벌벌 떨며 읽었다. 잘 읽어야 해, 정확하게 읽어내야 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책장이 넘어 갈수록 얉게 읽을까봐 걱정했던
내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주인공 이명준이 떠다니던 그 바다만큼이나 짙은 남색으로 내 머리속도
가득 찼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참견하기 시작한 한 남자의 삶이 참으로
기구하다. 그는 인생 전체에 안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독해서’ 그러는 거라는 태식과의 대화
속 우스갯소리가 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진실로, 진실로
고독한 삶을 살아야만 했으니까. 광장을 찾아 다니는 그는 배의 뒤쪽 난간이나 굴과 같은 밀실 속에 스스로
가두고 있었다. 어떤 광장을 찾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그는 밀실에서 잠시 나와 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서둘러 밀실로 도망치고 만다. 어쩌면 내쫓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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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탈인즉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저도 모른다는 것이고, 자기 둘레의 삶이 제가 찾는 것이 아니라는
낌새만은 분명히 맡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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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가면서 살 수 있는 삶. (p.40)
초반에는 그저 철학 공부하는 이상주의자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살고자 했던 곳은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그가 추구하는 광장이
어떤 곳일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 곳에서 그도 함께 서 있을 수 있길 바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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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p.60)
밀실과 밀실들이 길로 연결되어 하나의 광장으로 만나는 것인가? 광장에서 그들은 함께 서 있는 것일까, 나란히 서 있는 것일까, 그저 서 있는 것일까? 만남일까?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만남을 도모하는 것이니, 어쩌면 이명준이 원했던 광장은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고독해지지 않는 곳을 그는 광장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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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 했다.
(p.135)
심지어 마침내 찾아낸 자신의 밀실이자 광장을 결국은 지켜내지
못한다. 그는 남한에서 겪었던 치욕 때문에 우연히 월북한 삶에서 이상향을 찾고자 한다. 윤애와 은혜라는 두 여성의 차이점은 그의 고독함을 온전히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니었나로 구분해보았다. ‘윤애’라는 인물은 ‘혼자
서고자 하는, 자신을 잃지 않고자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함께 광장에 서기엔 몹시나 동떨어진 인물이다. 하지만 ‘은혜’라는 인물은 ‘한
사람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방식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은혜를 통해 결국 자신만의 광장을 찾아낸다. 이를 지키고 싶었지만, 은혜의
배신이 있었고, 다시 돌아온 은혜를 전쟁으로 빼앗긴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큰 정신력을 갖고 있어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까?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중립국으로 떠다니던 배 위에서도 그를 위한 광장은 없었다. 환시라고 여겼던 ‘갈매기’는
그가 지니고 있던 마지막 꽁꽁 묶어둔 응어리 마저 일깨운다. 사실 그의 삶의 마지막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정확히 이해가 되진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어떤 묘사를, 어떤 비유를 저자는 전하고 싶었을까? 자신이 총구를 겨누었던 그
갈매기가 은혜와 자신의 아이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환시로 착각했던 자신을 살펴보는
그 눈은 자신을 지켜주는 은혜인 갈매기. 그는 결국 그들과 함께 하기를 선택한다. 어쩌면 결정되어 있었을 그의 말로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이 나온 지 거의 60년이
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준이 묘사하는 남한과 북한의 모습들이 지금 내가 아는 모습과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보인다는 것은 조금은 부끄럽다. 우리의 발전이라 함은 그저 수치적인 부분이었나 보다. 그러니 이런 ‘고전’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생각을 파헤쳐보고 깊이를 더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들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다. 희미하게 굴러가던 내 머리 속에 작은 실마리 같은 생각들을 던져준다. 물론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혹은 뭐가 문제인지, 던져보아야
할 질문인지가 명확하지 않아 더 복잡해진 기분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저자가 해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나의 이야기로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일고십 생각나눔 : http://blog.yes24.com/document/10572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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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고십 리뷰는 되도록 많이 생각하고 신경 써서 쓰는 편인데, 이 리뷰는 어떻게 써야할지 난감하다.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없는 생각을 끄집어내려니 난감하다. 분단이니 이데올로기니 책은 읽었을지언정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고, <광장>을 통해 ‘아. 그 시대에 이런 부조리가 있었구나’를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의미는 그 시대의 아픔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 때에 해소되지 못한 부조리(일제 잔재 청산 등)가 지금까지 우리의 삶, 우리의 의식 깊숙한 곳에 불신과 패배주의를 남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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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물질적이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 그래서 개인의 이익이 모든 도덕과 이념을 뒤엎는 시대. 그러기에 아무리 자신이 지지했던 정당과 이념이라도 그 정당과 이념이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를 끼쳐도 사람들은 욕하며 돌아선다. 자신의 아파트값이나, 주식가치, 또는 노후보장 등이 모든 이념과 가치보다 우선시 된다. 그리고 싫든 좋든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은 그런 시대의 가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가치를 가졌다면 그런 시대의 흐름에 몸부림을 쳐 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간다면 인간이란 가치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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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부터 들어온 유명한 작품임에도 이제야 읽게 되었다. 고인의 추모를 계기로 리뷰대회를 열어주신 관계자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시위 현장의 모습과 광장에서의 민중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인가 했었는데, 읽어가면서 깨닫게 된 광장은 인간의 삶의 터전,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시 처한 상황에서 이명준이 겪어야 했던 운명적인 개인사와 국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사랑, 자유를 둘러싼 환경에서 그 고통과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당시 사회의 어떤 이의 아들이었고 오빠였으며, 이웃의 고통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중략)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의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P18, 1961년판 서문)
광장과 밀실의 대조를 들어가며 끌어가는 이 이야기는 우리 삶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친 삶의 현장인 광장과 아늑함을 느끼는 밀실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이루는 과정일 터이다. 오래전 쓰인 작품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분단국가인 상황에서 남북이산가족으로 남아 있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의 월북으로 인해 이명준은 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고백하도록 강요당한다. 권력의 힘으로 짜 맞춘 그들의 밀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내보내진다. 밝은 대낮에 민중에게 보여도 아무 상관없다는 처사다. 법률의 혜택도 이명준 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뭇 시선 또한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일이 지금은 없을까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대로 재현되고 있을 것이다. 팽배한 무관심은 비리를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두어 번의 부름 후에 이명준의 마음 저 밑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의 파문이 인다. ‘자 보람 있는 삶이 끝내 자네 것이 된 거야.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벅찬 불안에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루의 시간이 어두운 무서움으로 짙게 칠해진, 알차게 익은 시간이란 말일세. 자네가 그렇게 조르던 바람이 아닌가. 이제 심심하단 말은 말게.’ 스스로 두려운 불안을 어떻게 이겨낼까 몸부림친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의지할 혈육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 섬뜩해진다. 이미 추악한 탐욕과 배신, 살인이 난무하는 한국 정치의 광장에 신물을 느끼던 이명준은 월북을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는 어땠을까. 월북 후에 바라 본 만주벌판의 붉은 저녁노을은 활활 타오르건만 정작 자신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잊은 지 오래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겠지. 하지만, 만주의 저녁노을과 달리 잿빛 공화국을 마주대한다.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맥 빠진 얼굴들이다. 자신은 최대한 죽이고 당 선전부의 뜻을 살려야 한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늦은 시간가지 공부를 하면 노력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P124)
누구를 위한 당이고 국가인가. 인민들은 당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존재다. 굿만 보고 무관심 일색인 그들은 당의 노리개가 될 뿐이라고 아버지에게 외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실체 없는 두 사상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배를 불려주었다. 인민들은 힘없는 나약한 존재다. 그것도 살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민중의 삶은 얼마나 가여운가.
남녁도 북녘도 명준이 의지하고 살만한 광장은 없었다. 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만, 날선 시선을 느끼며 ‘값진 요령’을 깨닫는다. 옛날 S서에서 취조를 받고 느꼈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다. 두 번이나 거부당하는 삶의 광장. 전쟁은 끝났지만 두 체제의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 그것은 이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 배 타고르호를 타도록 만든다.
윤애의 반쪽 사랑에 비하면 은혜는 온전한 사랑이었다. 대중의 광장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은혜와의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밀실이었던 동굴에서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였을 수도 있는 은혜의 죽음을 알고 얼마나 황망했을까. 그것이 그를 푸른 심연의 광장으로 뛰어들게 했을까. 어디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삶, 그곳에서는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을까. 여기서도 저기서도 원하는 삶은 이룰 수 없었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한 개인의 힘은 약했다. 이미 짜여진 사회조직을 바꿀 만큼 힘을 실어주지도 못했다. 어쩌면 시대의 아픔일 수도 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뿌리치고 제3국만을 고집했던 이명준의 저 안의 고여 있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안타까웠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이 작품을 읽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 광장과 밀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민중이 이어가는 삶이 곧 역사가 된다. 대중의 광장보다는 심해의 밀실을 택했지만 그를 나약하다고 탓할 수는 없다. 개인을 발붙이게 할 수 없는 국가의 이념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올바른 민주주의 광장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전보다 조금씩 나아가는 건강한 광장을 꿈꾸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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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인훈을 알았던가. 아니다. 그저 부고를 보았을 뿐이다. <광장>에 대한 리뷰들이 올라왔다. 나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2019년 첫 소설 읽기는 <광장>이 된다. 첫 장을 읽으며 무거운 분위기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낀다. 읽어내지 못하리라... 그런 생각이 든다. 포기하게 되더라도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동생네 오면서 단 한 권만을 들고 온다. 나를 단 한 권이라는 선택지 없는 <광장>에 가두고 읽어내리라는 결심이다. 그리하였는데도 읽어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카 책상 앞에 앉아 읽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술술 잘 읽힌다. 미안하게시리... 지난 시대의 아픔을 들여다 보는 것을 꺼렸던 마음도, 그 아픔을 거리낌 없이 읽어내린 것도, 모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2016년 겨울 촛불혁명으로 '광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광장을 갖고자 열망했으나 광장을 갖지 못했던 수없는 명준의 피 위에 선 사람들이다. 이제는 광장을 가졌다는 여유가 <광장>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프지 않으므로 읽을 수 있었다. '나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튼튼하리라고 믿어왔던 나의 문이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젖혀지고, 흙발로 들이닥친 불한당이 그를 함부로 때렸다. 내 방인데. 그자는 어찌 그리 방자할 수 있었을까.'(77쪽) 명준은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 명준은 아버지를 잘 모른다. 월북 전에도 집에 계신 적이 별로 없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친구 집에 기거해왔다. 대남방송에 등장한 아버지 덕분에 S서에 불려가 흠씬 두들겨 맞는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슬기였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는 S서 뒷동산에서 퉁퉁 부어오른 입언저리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이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번 것은 더 큰 울림이었다. 그러나 먼 소리였다. 무디게 울리는 소리. 광장에서 동상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140~141쪽) '북조선 인민에게는 주체적인 혁명 체험이 없었다는 데 비극이 있었다.'(151쪽) 명준은 개인의 밀실을 지킬 수 없는 남한을 떠나 월북을 하지만 그 곳 또한 개인의 자유는 없고 공허하고 빈 광장뿐 진정한 의미의 광장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명준은 포로수용소에서 중립국을 택해 인도로 향하는 배 위에 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은 연인 은혜에 대한 사랑뿐이다. 명준은 인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마카오 부근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택한다. 마음의 방을 무너뜨리고 은신처인 사랑도 잃은 채 그저 헛깨비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을 명준의 선택지는 그것 뿐이 될 수 없었다. 2018년 시대는 달라져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이 38선의 남쪽 땅에 발을 디뎠지만 여전한 분단국가이고, 지난 세월동안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아픔이 많았던 우리의 이야기 끝에 나는 생뚱맞고 엉뚱하게도 프랑스 영화 <그랑블루>를 떠올렸다. 두 잠수사의 이야기로 영화의 마지막 한 명의 잠수사는 영원히 떠오르지 않기로 한다. 명준이 택한 길에 이 잠수사가 심연에서 찾은 안식이 겹쳐졌다. '(어떠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지만, 예술 속 죽음은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 명준은 자신의 마음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 각각의 두 조국을 너무도 사랑하였나보다. 어느쪽도 선택할 수 없어 떠난 중립국에서 사랑마저 잃고 버젓이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각하'였는데, 그냥 두어도 아픔 없이 살 수 없는 삶에 들이닥쳐 죄인으로 만들고 마음을 무너뜨리던 '각하'들을 지나보내고 맞은 현재는 참으로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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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작가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던 날, 지인 남편분이 병으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그리고 바로 노회찬 의원의 자살 소식이 방송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에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꼭 그들의 죽음에 대해 무엇인가를 느껴야할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때 마침 일.고.십 독서 모임에서 최인훈 작가의 작품을 읽자고 의견이 나왔다. '인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남북정상회담, 고전 독서 모임, 최인훈 작가의 타계.. 이 하나하나의 점이 <광장>이라는 책으로 연결되었다면 너무 과장일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고리가 없었다면 이번 생에서 내게 <광장>은 학창시절 외웠던 문학사의 한 줄 정도로만 기억되고 끝이었을 것이다. 거창하게 이 책을 읽기까지의 인연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책은 재미로 읽거나 읽고 싶어 읽는 책이라고 생각 안 해서 많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는 말을 하고팠다. 우리 문학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 작품이고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해서 읽도 전에 작품에 기가 눌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읽기 시작하니 문학사, 역사 등등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소설자체가 주는 매력에 빠져든다.
내가 요즘 소설을 읽을 때 감탄하는 순간은, 내 머릿속에 막연하게 떠돌던 감정들을 글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장면을 만났을 때이다. <광장>을 읽는 동안 이런 경험들이 계속되었다. 특히, 한국문학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번역문이 아닌 순수 한국어로 되어 그 느낌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전해지는 경험들이 즐거웠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예감'에 대한 묘사이다.
예감이라는 단어를 글로 써 볼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예감이 들었어라고 감정을 표현해 왔었는데 이 글을 보는 읽는 순간 예감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보게 된다. 그때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 내 마음에서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던 그게 예감이었구나 하며, 소설을 통해 내 감정을 되돌아 보게 된다. 이 외에도 필사해 놓은 글귀가 제법된다. 감정 하나 사물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작가의 눈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느낀 또 다른 매력은 대립을 이루는 축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광장'과 '밀실', '삶'과 '죽음', 이명준의 연인 '윤애'와 '은혜' 사랑 방식. 대립이라는 표현이 맍는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대립이 명확하다 보니 내 생각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처럼 명확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게 한다. 이중 '삶'과 '죽음'의 대립이 제일 마음에 남는다.
일.고.십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죽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소설을 읽으면 느꼈던 '죽음'과 이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죽음'은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죽음은 유한성을 상징이었다면 <광장>의 '죽음'은 사람이 삶을 살다가 맞이하는 과정, 삶의 또다른 모습일뿐이라는 느낌이다. 단, 실패를 두려워말고 열심히 살아보라는 메시지는 같다.
<광장>을 읽으며 <그리스인 조르바>가 계속 떠올랐는데, '바다'라는 공간이 주는 메시지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바다가 주는 상징성들이 이 <광장>을 읽고 나서야 '아! 그말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고나 할까. 여러 학자들이 얘기하는 소설의 배경이 주는 상징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그런갑다 하고 넘겼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어 내겐 의미가 있다.
그 시절 먼 곳으로 가기 위한 교통 수단이 배였으니 당연할 수 있지만, 북한으로 갈 때 중립국으로 갈 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게 된다. 갈매기들 밖에 안 보이는 땅이 나오기나 하려나 하는 기분이 드는 바다 위의 시간들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공간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떠났다는 홀가분함, 막막함 여러 감정들이 뒤섞이는 공간이 바다 위인 것이다.
무려 <광장>이라는 소설의 독후감이다 보니, 시험지에 답을 써나가는 기분이 계속들었다. 심지어, 정답을 피해간 답안을 작성하고 제출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맞춰야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정답에 맞추기 보단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이제 어른(?)의 독서법이라 생각하고 맘편히 독후감을 던져본다.
<사족>
1. 거제도가 가깝다보니 거가대교가 처음 뚫렸던 즈음에 거제도를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가서 쉬다 왔었다. 거제도 간 김에 포로수용소도 두 세번 갔는데 그저 여느 공원이나 박물관으로 여겨졌지 포로들의 삶에 대해 솔직히 깊이 느낀바가 없었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어디가를 선택하라고 설득자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무심히 보았던 장소들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다음 번에 거제도에 가면 좀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2. 한국문학을 읽는 즐거움, 소설의 매력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정작, 광장 뒤에 있는 구운몽도 읽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학창시절에 읽었던 느낌과 확실히 다르다. 나이가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겠지. 즐겨보고 싶다.
3. 이명준과 윤애가 나이든 사람에 대해 얘기 나누는 장면을 못찾아 일.고.십 멤버들에게 급 도움을 요청했는데 바로 해결해준 능력자분들. 감사합니다!! |
![]() 이웃집에 들렀나가 써 있는 한 구절이 호기심을 끌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내가 품고 있던 꿈이 무었이었는지, 어떤 꿈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지 막연하다. 앞으로 해야할 일, 가족을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과 꿈은 다르다. 꿈은 바램 그 자체다. 그런데 그런 바램이 적다는 것이 가끔 무력감을 준다. 그런 같은 생각의 문구는 나에게 호기심을 준다. 나는 최인훈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 구절을 따라서 선택한 책이 그의 작품이다. 여러번의 재판발행과 덧붙인 서문보다 초판의 서문을 읽었다. 밀실과 광장에 대한 글이 좋다. 뒷문장에 눈이 가지만 앞문장에 마음이 간다.
책의 배경없이 읽기 시작하면서 이 책이 해방전후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명준이라는 인물이 나의 밀실에서 반짝이는 것을 향해서 이어진 길의 끝에서 만나는 다양한 광장을 헤메인다. 마치 인간의 삶처럼, 우리 나라에 남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어낸 셈이다. 그 시기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전통적 유교와 식민지 잔재의 의식까지 다양한 사상적 배경과 이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행위, 정치가 혼돈된 시간이다. 그 복잡하고 혼탁한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그리는 이유가 그 시대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슬픈 역사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선택과 나아간 길을 또 다르다. 그것이 합쳐서 역사가 되지만 작가 그려낸 이명준은 자유로움을 지향하지만 선택한 광장의 질식, 밀실의 자유로운 생각, 도피처로서의 사랑과 좀더 자신에 솔직한 사랑과 제약을 체험하며 결국 선택을 한다. 중립국도 다른 광장의 변증법적 합이 아닌 자신의 순수한 의지가 아닐까 한다. 자살을 예견하는 그의 삶도 순수하게 자신이 결정하고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적인 선택이다. 이를 통해서 그의 자유의지를 확인하는 셈이다. 변화의 시간에 밀실에서 자유롭고, 광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환경에 의해서 개인들이 타락하고 숨막히는 광장을 체험하며 개인의 자유를 박탁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도 타인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 마음의 타인을 내 정성을 다해서 품는 것이다. 시대를 품은 아픈 이야기지만 지금의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것과 또 다른지 않다.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60년 쯤 된 책인데, 읽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글을 통해서 다시 변화의 시간이 적지않음을 안다. 시대가 바뀌고 우리가 바라는 광장과 밀실도 바뀌었다. 하지만 이명준이 바란다고 생각하는 자유는 지금도 소중하다. 그런데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끝없는 실수를 거듭하고 끝없이 뉘위치고 사는 내가 못마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런 구절이 내 마음과 머리에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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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유명하다. 그러나 최인훈이 왜 구운몽을 썼고 이를 광장과 엮어 냈는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광장과 구운몽을 함께 읽어야만 광장이 완성된다. 광장 이야기는 많이들 떠들뿐더러 학교 국어시간에 졸지 않았더라면 한 번 이상 들었을 이야기니, 구운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구운몽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이 시대는 감옥사에 있어서 일대 타락의 시대였습니다. 감옥사조상으로는 암흑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사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그 자체 죄악적이었느냐 하는 것은, 그사이 이름난 수감자들의 이름을 훑어보는 것으로써 넉넉합니다. 장발장, 간디, 안중근, 오스카 와일드, 이순신, 소크라테스, 플라톤, 성춘향. 그래 이 사람들을 악당이라고 해서 곧이들을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느냐 말입니다. (중략) 어떤 사람은 우리 감옥을 부르기를 정신병원이라고 합니다. 또 복역수들을 환자라고 부릅니다."(280p.) 구운몽은 최인훈의 근대 그리고 근대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찰하는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다. 죄형법정주의와 감옥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근대인의 정신병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그의 날카롭게 벼린 눈이 어디까지 꿰뚫고 있었는지 더듬어 나가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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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읽고 수행평가를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샀습니다. 교과서에도 광장의 일부가 실려있기는 한데 전체내용을 알 고 싶었어요. 처음에 먼저 읽었을 때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자주 읽어본 적도 없었고 접해본적도 없었기 때문이죠..그래서 책의 4분의1 정도 읽고 난 후 다시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 책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다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