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50%
  • 리뷰 총점6 5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7.0
  • 50대 6.0
리뷰 총점 종이책
커피를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그 순간
"커피를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그 순간" 내용보기
누구에게나 있을까, 서점에 가면 발동되는 직감. 마치 라디오 주파수처럼 결국엔 찾게 되는 지점. 얼마 전 강남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러 마음에 두었던 책을 2권 구입하고 발길을 교보문고로 돌렸더랬다. 알라딘에서도 교보문고에서도 책 탐색에 앞서 염두에 두었던 키워드는 '커피'였다.  좋아하고 즐기는 커피를 '더 잘' 좋아하고 즐기고픈 마음에 지난 해 초겨울 바리스타 클래스
"커피를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그 순간" 내용보기

누구에게나 있을까, 서점에 가면 발동되는 직감. 마치 라디오 주파수처럼 결국엔 찾게 되는 지점. 얼마 전 강남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러 마음에 두었던 책을 2권 구입하고 발길을 교보문고로 돌렸더랬다. 알라딘에서도 교보문고에서도 책 탐색에 앞서 염두에 두었던 키워드는 '커피'였다. 

 

좋아하고 즐기는 커피를 '더 잘' 좋아하고 즐기고픈 마음에 지난 해 초겨울 바리스타 클래스에 등록했던 순간부터 시작됐던 일종의 집착이다. 나처럼, 커피를 애정하는 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들의 생각 내지는 철학을 글로 읽고 싶었다. 관심사로도 학문으로도 철학엔 문외한인 나이지만 '커피 철학'을 정립하고 또 간직하고 싶단 생각에 몰두해있었다. 도서검색대에서 '커피' 또는 'coffee'를 키워드로 넣어가며 여러 책들을 검색해보았고, 직관과 직감에 의지하여 탐색에 돌입했다. 성공적인 탐색이었다 말하기엔 방법이 서투른건 아닌가 싶지만 선택은 기실 탁월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나는 활동하는 현직 바리스타는 아니지만) 바리스타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든 생각 중 첫 번째가 '커피를 더 잘 좋아하기 위해 시작했던 여정이니 더 깊이 들어가보자'였다. 그랬기에 전 세계 100만 바리스타의 필독서라고 칭해지는 '올 어바웃 커피'를 장엄하게 집어 들고 결의를 다지며 60일 읽기(하루에 8.5페이지씩)에 돌입한 지 20여일이 지났다. 그 장엄했던 순간 온갖 기민함과 집중력을 총 동원해 발견한 운명 같은 책이 바로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이었다. 전율이 돋거나 눈물이 핑도는 정도의 감동어린 만남까진 아니었지만 내 '커피 철학'을 향한 갈증과 열망을 해소해주겠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책의 제목과 여러 커피홀릭들이 공저했다는 구성 방식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그러할 듯한데 책 탐색에 있어 차례를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게 많은 도움이 된다. 

 

공저자들의 대부분은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로 연구와 강의를 하며 자신들만의 '커피 철학'을 가진 이들이다. 가장 부럽고 흥미로운 점들은 이들 중 상당수가 주중 며칠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머지 며칠은 지역의 힙(hip)한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했거나, 또는 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두 개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럽다거나 로망으로 보인다기 보다는 커피와 철학을 삶에서 부대끼며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싶다는 거다. 정말이지 탐나는, 매력적인 삶이다. 

 

책은 커피를 형이상학적, 문화적, 미학적 그리고 윤리학적 영역으로 구분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재미있을리 만무하다 싶겠지만 차례를 훑어보다 생긴 눈살 찌푸려지는 약간의 긴장감과 현기증은 각 장을 넘길 때마다 금세 사라졌다. 정말이지 철학이 무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의 철학을 커피라는 매개체를 빌려 그윽하게 풀어나가고 있으며, 반박이나 논증보다는 참여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듯했다. 커피를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커피에 탐닉하는 우리네 각자의 생각과 삶 그리고 강박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인도해주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p.67 (1장, 커피: 까만 흙탕물인가, 만병통치약인가?)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들뜨고 쾌활해지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개는 "진지하고 엄숙하고 철학적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쪽일지 생각할 필요 없이 내게도 커피는 '기분이 들뜨고 쾌할해지도록 해줄뿐만 아니라, 진지함과 엄숙함이 필요할 때에도 극약처방이 된다. 식후 졸음이 밀려와 정신이 흐릿해질 즈음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커피 마셔야겠어"라고. 


실은 책을 읽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 커피에 대하여 철학을 하는 이들의 생각과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뭔가 더 심오할까 내지는 내가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깊이와 수준으로 커피를 논할까, 라는 생각들. 결론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들도 그들의 일상 생활과 업무 환경에서 그리고 매우 사적인 순간에 커피가 안겨주는 어떤 위로와 통찰,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진지함, 그리고 때로는 습관적으로 곁에 커피를 두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등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왜 커피가 내게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에게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과 의견에 이 책을 통한 도움을 받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러던 중 소크라테스를 빌린 저자의 센스 덕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p.107 (3장: 음미되지 않는 커피는 마실만 한 가치가 없다.) 

우리는 자기 능력과 생각을 연마할 수 있다. 무엇이 정말로 좋은지 판별할 수 있고, 객관적인 취향의 기준도 개발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음식, 음악, 문학이 우리에게 끼치는 미묘한 효과들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연마함으로써 정말 좋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을 어지럽히거나 쓸모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 사회적 압박 때문에 편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것을 왜 하는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남에게 들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말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원칙에 대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가치는 우리가 믿고 높이 평가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음미하는 데에 있다. 


커피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음미하고자 여러 감각을 깨우고 생각과 에너지를 동원하는 행위만으로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 아니겠는가. 적어도 커피를 좋아하는 나와 당신들에겐 말이다(p.179, 철학은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 소크라테스). 


18세기에도 커피가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아랍권 나라들과 유럽(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coffee history'를 듣고 보곤 할 때면 마음 한 켠 늘 부러움이 꿈틀댔다. 커피하우스가 중요한 장소이자 문화로 자리잡으며, 철학과 문학과 나라의 정세를 거침없이 논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통찰력을 키워 올 수 있었던 서구의 (철학) 카페 문화에 대한 갈망이다. 사견일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이루어 지는 북클럽의 모습은 일단은 떠올리기만 해도 어색하고 어렵고 간지럽기에 더더욱 커피로 촉발된 문화를 향한 나의 부러움은 멈추지 않고 늘 커져오기만 했다. 기여한 바 없이 그저 마음 속으로만 갈망했을 뿐인 나이기에 할 말은 없지만, 이런 내게 커피와 철학을 마치 한 잔의 카푸치노처럼 쌉싸름하지만 부드럽게 전해주는 이 책을 통해 간접경험의 짜릿함만으로도 한껏 즐거울 수 있었다(2부, '토론을 위한 밑거름: 커피의 문화', 6장~9장). 


예전 직장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팀의 상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커피와 함께 담소를 나누기 위해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비가 내릴 듯한 우중충한 날씨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따뜻한 커피가 간절했던 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아 상사에게도 건넸고 나는 마침 첫 한모금을 들이키기 전 그날 유난히도 황금빛에 실키해보이는 크레마에 마음을 빼앗겨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마도, '아, 크레마 정말 너무 좋다'라고 했던 듯하다. 그 찰나에 상사는 '너의 그 한마디에 커피맛이 달리 느껴진다, 베니스에 와있는 것 같아'라고 했다(참고로 그 카페의 컨셉이 '이탈리아'였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물론 우리는 기분과 몸상태 또는 기타 다른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에 의해 커피맛을 음미함에 있어 때마다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게 바로 커피의 심미적 요인, 커피의 미학이 아닐까 싶었다. 크레마에 대한 1-2초의 감동과 그 표현만으로도 커피맛을 느끼도록 하는 뇌의 기제가 활발히 그러나 기존과는 다른 작은 기쁨을 안겨주도록 기능한 건 아닐런지. 


p.319 - 320 (12장, 선택의 향미: 신자유주의와 에스프레소의 미학) '미학과 자유주의' 

이 연구의 철학적 배경은 미학과 자유주의적 이상의 불안한 결합이다. 좀 더 정치적으로(유감스럽게도, 좀 더 애매모호하게) 규정하자면, 취미와 자유주의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것들의 '처리management'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쟁을 철저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도움이 절실하다. (중략) 다시 말해, 칸트는 어떤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즐겁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이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차이들을 다듬어서 인식의 순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숭고the sublime라는 매우 흥미진진한 미학 개념을 창조해냈다. 


마지막 4부는 '원두와 생두: 커피의 윤리학'이다. 이 챕터에서는 원두와 생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정보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혼란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공정무역'과 '직접무역'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내용과 제안으로 풍성히 채워져 있다. 녹색 커피와 녹색 소비자의 정의와 개념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할 법한 '커피와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지를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p.455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그리스어는 대개 행복을 뜻한다. 그러나 행복은 이 단어가 뜻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즐거운 정신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갓 간 원두의 향기를 처음 들이마셨을 때 느끼는 정신 상태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그런 느낌을 경험한 당사자를 빼고는 아무도 접근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사적이다. 누군가가 행복을 느끼는지 여부를 알려면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에우다이모니아는 공적인 존재 상태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거나 성공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공적인 존재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에우다이모니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존재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다. (중략) 따라서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해서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행복감을 느끼는 삶뿐 아니라 실제로 잘 살거나 번창하는 삶에 관심이 있다. 물론 좋은(또는 에우다이몬) 삶을 잘 사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잘 사는 삶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카페이고, 맥북 곁에 당연한 듯 친근하게 놓여져 있는 것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다. 커피를 이야기하려니, 커피와 철학을 논한 책을 읽고 후기를 끄적이려니 단연 필요한 것은 한 잔의 진한 커피 아니겠는가. 


나는 철학자도 작가도 아니지만, 이렇게 삶과 커피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결하며 스토리를 발견하고 엮는 이가 되고 싶다. 그 출발점에서 21인의 커피홀릭들이 전해 준 생각과 이야기들은 분명 흥미로운 생각거리들을 안겨주었다. 더불어 공감과 (생각과 의식과 상상을 통한) 참여를 통해 커피가 있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라기는 그 흥미로움 그리고 커피가 있는 좋은 삶 속에서의 나의 발견을 많은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나누며 소통하는 그 어느 날이 빠르게 오길. 여러분에게도 한 잔의 커피처럼 이 책이 a good company가 되기를 바란다. 

s**********l 2016.12.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커피로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커피로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내용보기
커피, 적당한 거리의 철학필터지를 이용해서 커피를 내려 마신 게 5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서버 한 가득 내려서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마십니다. 그저 평온한 날이면 출근해서 한 번, 점심을 먹고 한 번 내리지만, 몇몇이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거나 혹은 잘 들르지 않던 사람이 찾아오면 내리는 횟수는 늘어납니다.그렇지만 바삐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커
"커피로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내용보기

 

커피, 적당한 거리의 철학

필터지를 이용해서 커피를 내려 마신 게 5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서버 한 가득 내려서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마십니다. 그저 평온한 날이면 출근해서 한 번, 점심을 먹고 한 번 내리지만, 몇몇이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거나 혹은 잘 들르지 않던 사람이 찾아오면 내리는 횟수는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바삐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커피 한 잔이 CF나 드라마에서처럼 삶의 여유를 주거나 토론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책은 아예 2부를 통틀어 토론을 위한 밑거름: 커피의 문화라는 제목으로 근대 커피하우스에서 기원하는 커피와 토론문화의 관계를 인과관계로 분석하고 있지만, 저는 좀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상대방과 토론할 때 커피의 각성 효과는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론 문화가 활성화되면 커피 문화 역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커피 문화가 활성화된다고 토론 문화가 활성화되는 건 아니겠지요.

오히려 존 하트먼이 스타벅스와 제3의 물결에서 분석한 커피숍의 풍경이 보다 현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스타벅스는 전통 방식에 반기를 든 비트족과 혁명을 동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어둡고 우울한 공간이었던 커피하우스를, 노트북으로 무장한 전사와 도시 중산층 아줌마, 출세를 꿈꾸는 10대들에게 동시에 매력적인 3의 장소로 바꾸었다. p.341

요즘같이 무더운 주말이면 아내는 딸을 데리고 커피숍에 가서 숙제를 시키고 본인의 밀린 일을 처리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수업 준비를 비롯해서 생산적인 일은 항상 커피숍에서만 하게 된다고도 합니다. 대학가 커피숍에서 대학생들이 노트북으로 뭔가 열심히 작성하고 있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죠.

가끔 몇몇이 소란스러운 것은 진지한 토론이라기보다 수다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수다가 전혀 비생산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가십을 이야기하고 각자의 신상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면서 그들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고 연대를 이룹니다.

그런데 적당히 소란스럽고 적당히 개방되어 있으며 적당히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서 왜 집중력이 좋아지는 것일까요? 어디선가 사방이 막힌 공간에 갇힌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하기 싫은 단 한 가지가 앞에 놓여 있다면 그 한 가지를 피해 더 잡다한 상상이 펼쳐지곤 합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는 만고불변의 현실 기피 상상의 법칙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빈 여백, 그 빈자리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기인하는 것만 같습니다. 시시각각 생사를 위협하는 야생에서 인류의 조상들은 여럿이 있을 때 좀 더 안정감을 느끼는 반면 혼자 있을 때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도록 진화했을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평화와 안정을 느끼는 지나치게 강인한 형질은 쉽게 사자밥이 되어 진화론적으로 선택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커피숍에서 일군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는 우리는 여전히 홍적세의 호미니드들입니다.

커피를 서버에 한 가득 내려 가운데 탁자에 가져다 놓으면 선생님들은 각자 리듬에 맞춰 커피를 텀블러나 컵에 담고 약간의 인사를 건네며 본인의 자리로 가져갑니다. 잠깐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여전히 분주히 하던 일을 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한 교무실 한 공간에 있으니 혼자의 외로움은 근본적으로 덜한 셈입니다. 그렇더라도 커피를 마신다는 한 가지 사실이 유대감을 좀 더 가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어제보다 커피가 맛이 없네, 좀 연하네, 누가 많이 마셨네, 이런 농담조의 타박이 이 작은 연대의 소박한 서사들을 이루는 것이지요.

커피숍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는 이런 적당한 거리의 연대에 만족합니다. 커피는 충분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죠. 무엇보다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깜짝 놀랄 맛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 찰나의 만족과 느슨한 연대가 저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응전할 수 있는 연료가 되어주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커피산업은 왜 망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커피숍에 가고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이 외로움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외로우니까 커피를 마신다니요. 커피를 마시니까 외로움이 덜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커피숍에 가고, 또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것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커피 산업은 자본주의 체계의 일부입니다. 커피가 교환 관계를 거치면서 잉여자본을 산출하므로 커피 산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죠. 사람들이 더 커피를 많이 마셔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비싼 커피를 마셔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최소 50인치 크기의 LED TV를 구매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비싼 FHD QLED TV도 구매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소비가 창출되어야 자본주의는 굴러갈 수 있습니다.

TV와 다른 점은 커피는 기호 식품으로 계속해서 소비된다는 것이겠죠. 지나 브라우치와 새넌 멀홀런드는 일당 27센트 이상: 직접무역 혁명에서 기호식품으로서 커피의 위태로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못 마시는 것이 석유 부족만큼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커피는 주로 카페인의 중독성이나 단순한 습관, 취향으로 인해 일종의 국민적 문화로서 소비된다. p.397

석유나 식량과 같이 생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으므로 커피는 언제든지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커피는 대부분 가난한 남반부의 국가에서 생산되어 북반구의 부자 국가에서 대량으로 소비됩니다. 그 과정에서 커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습니다. 가령 케냐의 소농이 케냐AA 원두를 커피상에 넘길 때 1파운드에 2~10센트에 불과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3/4파운드(340g) 한 봉지에 12달러에 팔린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1000배 가량 부풀려지는 것이죠(2008년 기준이니 지금은 좀 더 나아졌을까요?). 커피를 재배하는 소농들의 삶은 커피 하나에 의존하기 때문에 커피 가격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1에이커에 평균 100주의 커피나무를 심는다고 할 때, 헨리의 농장에서 1년 동안 커피를 생산해 벌어들인 돈은 100달러도 안 되는 셈이었다. 이것은 이들이 결국 국제적으로 설정된 빈곤선인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못 미치는 돈을 벌고 있음을 의미한다. p.399

국제 분업 형태의 명백한 착취 구조는 위태롭습니다. 비가 충분히 내려 풍작이면 가격이 폭락하고, 가뭄이어서 흉작이면 커피 가격이 급등합니다. 가격이 급등하면 소비자들은 커피를 예전보다 덜 마시면 될 테고, 생계를 위협할 정도의 가격이면 아예 안마시면 됩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이지요. 소비자들은 커피를 안마시고도 살 수 있지만 아프리카의 소농들은 커피를 팔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착취 구조는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요 

…… 자유 무역은 비교 생산비의 법칙’, 요컨대 각국의 생산비 구조에서 비교적 생산력이 높고, 따라서 비교적 적은 노동으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 부문이 수출 산업 부문으로 특화하고, 이러한 산업 부문의 국제 분업 관계로서 각국 사이에 국제 분업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하고 다른 나라를 영국에 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포르투갈은 농업국으로 전화하고 영국 산업 자본에 종속되었다. 또한 18세기 말까지 인도의 면제품은 영국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그것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붙여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산업 혁명 후에 가격에서 인도를 능가한 시점에 자유 무역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인도의 전통적 수공업을 궤멸시켰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p.400

가라타니 고진은 자유 무역으로 위장된 국제 분업 체계에서 원료를 제공하는 국가의 농업이나 산업이 궤멸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료만 제공하는 종속의 결과 가격 결정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근대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해 붕괴된 주변부 국가의 농업과 달리 커피 재배는 더 활발하게 더 광범위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커피 중개업자들과 판매업자들 모두 공정무역이나 직접무역과 같은 윤리적 가치를 상업화하면서까지 커피 산업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커피 중개업자들과 판매업자들이 상업적으로 창출한 윤리와 가치를 소비자들도 기꺼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이지요.

이것은 커피가 생필품이 아니라 도리어 기호 식품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생필품의 품질에는 생존이라는 비교적 정확하고 합의 가능한 최저값이 있지만, 기호식품의 품질에는 좋고 나쁨이라는 매우 모호하고 사람마다 제각기인 최고값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스테이크를 좋아한다고 해도 스테이크가 없다면 밥을 먹어야 하지만, 탄자니아나 케냐 커피에 길들여진 혀끝은 드립커피가 없으면 구태여 믹스커피를 찾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커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중독성과 다양한 풍미 속에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 만큼의 잠재력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커피와 좋은 삶

로리 켈러허는 커피와 좋은 삶: 커피콩과 중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부터 좋은 사람은 덕에 따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삶이다.”라는 명제를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그 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의 의미로 해석하죠.

가장 잘 마시는 비결은 적당히 마시는 것. 무기력함을 회복할 정도로 충분히 마시되, 중독이 될 정도까지 마시지는 말라. 요컨대 커피를 마시는 것을 덕이 있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p.448

그러나 중용을 실천하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 중용의 적당히를 가늠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죠. 어느 정도까지 마시면 적당히 마신 것이고 덕이 있는 활동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유감스럽겠지만 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는 우리가 완벽하게 덕이 있는 존재가 되어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들을 지니고 있는 편이 좋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적절한 준비 없이 고결한 행동을 하기는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다.” 그는 좋은 친구, , 정치권력, 훌륭한 가문, 행운 등 적절한 준비를 위한 여러 가지 외적인 것들을 나열한다. p.470

좋은 친구, , 정치권력, 훌륭한 가문, 게다가 행운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열하는 적절한 목록들은 모두 개인의 노력이나 준비와는 무관한 만큼 썩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다면 좋은 삶이란 돈 좀 있고 가문도 좀 괜찮고 행운까지 따라주는 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일 테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아테네가 철저한 신분제였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민 평등 사상을 갖추지 못했다고 타박할 일은 아닙니다. 기껏해야 계급제로 환원되는 논지라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지금까지도 중요하게 읽히는 고전이 될 수 없었겠죠.

첫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좋음과 행복한 삶이란 ... 폴리스의 성원들이 모여서 함께 결정하고 공유하는 집단적 좋음으로 보았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최상의 좋음과 행복한 삶에 관해 플라톤이 말한 것과 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절대부동의 진리 따위는 있을 수 없다.

- 홍기빈.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p.88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합의하는 좋음에 방점을 두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뭐라 하든 나만 혼자적절히 커피를 마시는 것은 좋은 삶이 아닙니다. 누군가 우울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불면을 무릅쓰고 커피 한 잔 더 마실 수도 있는 노릇이고 원두가 달랑 혼자 마실 분량만 남았다면 한 번 정도 참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직까지 우리가 공유하는 집단적 좋음이란 상대를 염려하고 되도록 함께 나누는 삶입니다.

공정무역이나 직접무역 커피를 구매하진 않지만, ‘비공정무역(?)’ 커피를 구입하여 매우 자주 드립으로 내려 여러 사람과 함께 마시는 것, 그래서 이 수고로움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각자 커피를 구입하게 되는 것, 그중 몇몇은 종이컵을 사용하기보다 보온성이 좋은 머그나 텀블러를 이용하여 마실 수 있게 되는 것, 물론 이것이 현재까지 커피로 가능한, 좋은 삶에 대한 저의 윤리적 변명입니다.

m*******d 2018.07.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