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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불만(성해영 옮김) 서평> -합리적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
문명과 인간은 본성적으로 대립할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이런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계몽주의에서 시작되어 현대까지 이어지는 사회 계약론 전통에서 문명과 인간은 완벽한 한 쌍이다. 그들에게 정의, 제도 등으로 불리는 문명의 제한은 원칙적으로 합리적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를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문명의 제한은 개인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기 제한으로서 억압적이지 않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사회 계약론이 상정하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논의의 정면으로 내세운다. 문명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본성을 억압하며, 이러한 본성이 인간 삶의 진정한 추동력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현존 사회 뿐 아니라 사회 이론에 대한 이중의 비판을 제기한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성과에 대한 무한한 요구가 문명적 초자아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현대에도 큰 가치를 지닌다.
프로이트가 학문적 원숙기에 쓰여 가장 널리 읽힌 작품 중 하나인 《문명 속의 불만》은 번역가가 인정하듯 국내에서도 이미 여러 종이 출판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번역본이 가치 있는 이유는 번역가만의 상세한 해제와 해설, 그리고 무엇보다 역주에 있다. 《문명 속의 불만》에 대한 가능한 여러 해석 중 종교심리학적 해석에 초점을 둔 해제와 해설은 실제로 다른 번역본 얻지 못하는 더 깊은 이해를 획득하게 한다.
이런 가치를 염두할 때 이 책의 내용은 단순히 본문을 넘어 번역가의 해제와 해설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촘촘한 논리로 진행되는 《문명 속의 불만》의 특성 상 내용을 요약하는 중간중간 필자의 견해를 삽입하는 것은 둘을 혼동하게 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번역가의 견해와 본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요약한 후 이 책의 가치와 한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문명 속의 불만》의 핵심 내용
《문명 속의 불만》의 1장은 로맹 롤랑이 편지로 전한 종교적 감정의 원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는 이 감정에 대한 분석 끝에 영원에 대한 감각은 ‘외부 세계 전체와 내가 결코 풀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느낌’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논문 초반 느닷없이 등장한 ‘대양적 느낌’에 대해 우리는 해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환상의 미래>에서 프로이트는 서양의 종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분석심리학으로 대체되어야 할 문명의 요소로 간주한다. 이와 달리 여전히 종교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던 로맹 롤랑은 동양 종교로부터 종교성의 또 다른 근원을 모색하였으며 그 결과로써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대양적 느낌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대양적 느낌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 후 과연 이것이 ‘서구적 종교’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성찰한다.
유아기의 원형을 통해 대양적 느낌을 분석하는 프로이트의 시도는 매우 흥미롭다. 자아와 외부 대상의 경계는 대부분의 경우 명확하지만 그런 명확성은 선천적이지 않다. 유아는 처음에는 외부 세계와 자아를 구별하지 못하지만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외부 세계와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요컨대 자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부 세계와 자신을 분리한다. 그리고 이런 감각, 원초적 자아 감각에 어울리는 관념적 내용이 바로 무한함과 우주와의 연대감일 것이다. 즉, 프로이트가 분석하기에 대양적 느낌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대양적 느낌의 발생적 맥락을 고찰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여기서 어떤 느낌이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그 느낌 자체가 강한 욕구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견해를 통해 대양적 느낌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동경’에서 종교적 욕구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압도적인 운명의 힘에 대한 두려움은 유아기부터 죽을 때까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속된다. 즉, 종교적 감정의 원천은 유아기의 무력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서양 종교의 발생적 맥락을 분석한 후 2장에서 종교의 기능적 본질을 서술한다. 종교는 삶의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고통을 피하는 수단으로도 기능한다. 인간은 쾌락 원칙의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지만 순수-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말 그대로 완수될 수 없다. 쾌락은 원리적으로 고통과의 대조 속에서만 가능하기에 지속될 수 없고 또한 필멸적인 육체, 외부 세계 등에 의해 우리는 행복해질 가능성보다는 불행할 확률이 더 높다.
결국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쾌락을 추구하기 보다는 고통을 피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소극적 쾌락이 득세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헬레니즘 철학이 유행하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적극적 행동과 행복 추구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이어질 수 있던 혼란기였다. 그렇다면 이런 불쾌감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예술가가 창작을 하고 연구자가 학문적 발견을 성취하고 기뻐하는 것은 인간의 욕동을 승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승화는 소수에게만 허락되며 그조차 강도가 약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택지는 환상이다. 환상은 현실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하지만 이런 괴리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느슨함이 그에게 더 큰 쾌락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환상의 더 열정적인 방식은 현실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며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는 이러한 부류의 적극적인 집단 환상이라고 분류한다. 더하여 그가 보기에 종교는 환상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환상을 공유하기에 그것은 환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리비도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자신에게 가장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리비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적절한 변형과 재배치를 겪지 못한 자들은 신경병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많은 사람들을 신경증으로부터 구원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종교는 그 이상의 긍정적 가치는 가지지 못하며 오히려 종교 자체를 집단적 신경증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 종교적 감정에 대한 그의 통찰이 마무리되며 3장에서 논의의 초점이 문명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명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의아함을 표한다. 왜냐하면, 사회 계약설의 입장에 따라, 우리는 자연 상태의 문제점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며 자연 상태로의 복귀는 말 그대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해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인이 단독으로 생존하기에 자연은 너무나 험난하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공동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의지는 공동체의 목적에 의해 제한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는 폭력으로 매도되는 반면, 집단, 공동체의 목적은 그것에 맞서는 정의로 간주된다. 문명의 본질은 온전히 자유롭던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데 있다.
4장에서 프로이트는 원시 가족 역시 최초의 공동체이지만 아직 문명의 본질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구성원 중 하나인 아버지의 자의는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명은 어디서 탄생하는가? 프로이트는 여기서 논란이 많은 ‘형제 무리’ 개념을 제안한다. 부친 살해를 통해 아들들은 개인의 결합체가 개인보다 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형제들은 이 결합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제약을 부과한다. 즉, 터부를 지키는 것이 최초의 법이다.
터부를 바탕으로 한 공동생활은 두 가지 원동력을 기초로 한다. 노동에 대한 강요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을 조금 상술하면, 남성은 성적 대상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도이고 여성은 자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문명은 이런 식으로 발생하고 구성원을 늘여 가며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 문명은 어떻게 구성원들의 불행을 가져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5장에 나타난다.
관능적인 사랑은 공동체의 원형인 가족을 만든다. 하지만 문명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이런 문명과 사랑의 우호적 관계를 위기를 맞는다. 오히려 사랑과 문명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정신적 에너지는 리비도이다. 즉, 인간은 리비도의 분배를 통해 자신의 과업을 수행한다. 즉, 우리가 외부의 임무를 수행할수록, 즉 더욱 사회화 될수록, 사랑을 위한 리비도는 줄어든다. 그리하여 가족의 고유 목적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사회화되는 것과 대립한다.
이런 이유로 문명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여 대부분의 문명에서는 정상적인,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성생활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런 타부는 개인의 선천적, 후천적 요인에 따른 성향 차이를 무시하기에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분류가 발생한다.
6장에서 프로이트는 에로스 외의 다른 본능을 제시한다. 인간은 성적 본능뿐 아니라 공격 본능 역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이웃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가지고 있다. 공격본능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위에 등장한 문명의 이상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문명은 인간의 공격 본능 역시 적절히 억제할 필요가 있다.
이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공산주의를 비판한다. 공산주의는 인간은 본래 선하며, 사유 재산이 그들을 타락시킨다고 간주한다. 그리하여 사유재산이 폐지된 공동체 사회는 곧 이상사회이다. 프로이트 역시 사유 재산이 공격 본능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사유 재산이 철폐돼도 인간의 본능인 공격 본능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격 본능은 생명 본능만큼이나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그럼에도 문명은 이 두 본능을 억제한다. 그리하여 문명 속에서 본능적 욕동이 억압당한 인간은 행복해지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우리보다 행복할 수 있으나 이 행복은 지속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행복의 가능성을 희생하고 안정성을 획득한다. 이렇게 문명 속의 불만이 탄생한다.
7장에서 프로이트는 공격 본능을 자세히 다룬다. 프로이트는 모든 유기체는 에로스(생명 본능)외에 죽음 본능이 있음을 주장한다. 유기체의 해체에 작용하는 죽음 본능의 일부는 외부 세계에 돌려진다. 이 전향된 본능이 공격 본능이다. 그런데 이 외부에 대한 공격성이 문명에 의해 제한되면서 이 본능은 다시 내부로 돌려진다. 즉, 자기 파괴는 더욱 촉진된다.
그리하여 문명 속 개인의 공격 본능은 내면화된다. 공격 본능은 그것이 처음 나왔던 곳, 즉 자아로 돌려진다. 내면화된 본능을 인수한 초자아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아를 공격한다. 그리고 이 공격에 의해 죄책감이 발생한다.
그런데 초자아에게는 특이한 특징이 있다. 초자아는 자아가 그것에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엄격해진다. 즉, 도덕적인 인간일수록 자신을 책망하고 죄인이라 여긴다. 즉, 초자아에 대한 복종은 어쩌면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다. 또한 불운은 초자아의 힘을 강화한다. 불운이 닥치면 인간은 자기 징벌을 강화한다.
불운이 닥쳤을 때 초자아가 강화된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지만 양심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양심은 외부의 권위자를 내면화하여 발생한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 어려움의 순간 신과 같은 권위자를 찾게 되며, 그렇지 않을 때는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려움의 시기에는 언제나 종교가 득세하지만 현대에 오면 올수록 종교나 도덕의 요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외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본능을 자제한다. 그리고 내면의 권위자가 확립되면 인간은 양심의 가책에 의해 자신의 본능을 자제한다. 이 단계에서 행위와 의도는 동일시된다. 그리고 본능 단념은 처음과 다르게 이제 양심의 역동적 원천이 되어 우리는 본능을 단념하면 할수록 양심은 더욱 가혹해진다.
더하여 프로이트는 개인적 초자아와 문명의 초자아를 구분한다. 아버지(유아기의 권위자)의 권위를 내면화한 개인적 초자아와 달리 문명의 초자아는 예수와 같이 문명의 지도적 인물이 남긴 인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문명의 요구를 내면화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적 초자아 역시 개인적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지켜지지 않을 시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문명적 초자아는 개인적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요구를 할 뿐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초자아의 엄격함 때문에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문명의 발전이 이렇게 개인의 발전과 유사하다면, 문명 속의 인류 전체가 일종의 신경증에 걸려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결국, 문명의 진보를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행복의 상실이며, 또한 죄책감의 고조이다.
마지막 장에서 프로이트는 공격 본능과 에로스 사이의 조율을 문명의 과제로 제시한다. 문명은 공격본능을 억제할 수 있으며,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 핵무기 등 같이 만인이 만인의 멸종을 불러올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멸종을 막기 위해 생명 본능인 에로스가 죽음 본능과의 투쟁에서 충분히 버텨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본능에 대한 지나친 억압은 억압된 것의 회귀를 발생시킨다. 즉, 적절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억압된 것은 어느 순간 폭발한다.
번역본으로서의 《문명 속의 불만》의 가치와 한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이 번역본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해설과 역주일 것이다. 예컨대 해제 부분에 각주를 통해 욕동과 욕망을 구분하며 인간의 본능을 욕동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은 리비도의 승화에서 나타나는 리비도의 유연성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종종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모든 동기를 ‘성적 욕망’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리비도가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과 유사함을 강조한다.
또한 해설과 역주는 꾸준히 종교심리학의 관점에서 《환상의 미래》와 《문명 속의 불만》의 연관성을 지적해 주어 독자의 이해력을 높인다. 분명 《환상의 미래》와 《문명 속의 불만》은 초점과 세부적 맥락은 다르지만 문명과 종교의 관계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종교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일관된 해석은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었을 때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전반부의 논의와 후반부의 논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일관적 태도에 의해 역설적인 단점이 발생한다. 개인에 대한 문명의 억압을 종교의 관점에서만 해석함으로써 독자는 《문명 속의 불만》이 비판하는 대상의 범위를 과도하게 축소하여 이해할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해설은 문명이 개인의 욕동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여러 제도와 방식 중 종교적 가치관만을 부각한다.
물론 《문명 속의 불만》이 《환상의 미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전반부 주제 역시 종교의 발생 맥락이다. 따라서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의 억압을 논할 때 프로이트가 종교를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문명이 인간을 억제하는 요소 중 종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문명 속의 불만의 주제가 바뀌는 중반부부터, 프로이트는 의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종교와 관련된 어휘의 사용을 피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문명의 제도 일반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해석과 적용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더하여 우리는 《환상의 미래》에서 그가 종교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정한 맥락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종교가 인간의 본능에 관하여 수행하는 기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상을 통해 문명 속에서의 억압과 부조리를 소극적으로 감수하게 하는 것이다. 《환상의 미래》는 그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번째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프로이트가 종교가 인간의 문화적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정신분석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종교의 두 번째 기능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기인한다. 즉, 종교는 억압된 욕동을 적극적 방식으로 승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기원하며 소극적으로 감내하도록 만든다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억압의 기능에서는 종교 외의 더 많은 사회적 요소들이 고려될 수 있다. 심지어 전반부에서 종교의 원천에 대해 탐구할 때조차 프로이트는 환상의 미래와 달리 종교의 억압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문명 속의 불만》이 제기하는 비판의 적용 범주는 종교심리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종교심리학의 관점에서의 일원적 해석은 환상의 미래의 결론, 즉 종교가 분석 심리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결론과 《문명 속의 불만》의 결론과 동일시하여 문명의 제도가 가지는 문제점의 원인을 오직 종교에서 찾는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사회와 사회 이론에 대한 이중의 비판서로서 《문명 속의 불만》
그렇다면 《문명 속의 불만》이 지니는 더 넓은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정당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를 확장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몽주의자들에게 문명은 인간과 완벽한 한 쌍이다. 그들에게 문명은 합리적 개인들이 자발적 동의를 통해 생성된 것이며 따라서 문명의 제한 역시 구성원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 이론에서 억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인간을 합리적 주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파악하는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계약론이 고려하는 사회적 합의는 합리적 자아의 영역에 제한되며, 그 기저에 놓인 무의식과 본능의 영역은 간과된다. 이런 경향은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계몽주의의 한계가 증명된 후인 현대 사상에서도 이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에서도 이런 한계를 찾아볼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공론장의 참여 주체들은 합리적 자아를 지닌 존재들로 상정된다. 이에 대해 박영도(2003)는 하버마스가 언어화를 통한 합리적 토론이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무의식의 영역을 간과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사회 사상사의 경향에 맞서 문명 속의 불만은 문명의 구조 및 제도 구상에 있어 개인의 합리적 자아의 영역만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이 논문이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 계약설에 특히 충격적인 이유는, 그들은 합리적 자아의 영역에서의 억압만을 억압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합리성 저변에 놓인 본능이 인간 행동의 에너지이며 따라서 본능의 억압이 진정한 억압임을 밝힌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제도 속에서 무의식의 영역이 합리성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고려될 수 있는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무의식이 가장 왜곡 고려될 수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
더하여 우리는 《문명 속의 불만》이 현대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를 검토해 볼 수 있다. 《문명 속의 불만》이 출판된 해는 1930년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9년 전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에 쓰인 책이다. 따라서 당대의 사회와 현대 사회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음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당대 사회에 대한 그의 진단이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양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1930년대에 비해 현대 사회는 더 많은 자유와 즐거움을 제공하는 듯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인류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체감하였으며, 많은 지식인들은 내적 자연을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런 사회적, 사상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여전히 억압적이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경쟁 사회이다. 하지만 한병철(2012)이 지적하듯 이런 경쟁 사회의 원동력은 경쟁심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성장에 대한 무한한 압박이다. 현대 사회의 경쟁 양상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다. 프로이트가 종교적 가치관이라고 규정했던 문명적 초자아의 요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주의 계율로 대체되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죄책감을 부여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 즉 초자아이기에 개인은 억압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한 체 억압당한다. 자기 성장에 대한 무한한 요구 속에 개인은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또한 성과주의의 영역은 자본주의 내에서 경제적 영역으로 축소된다. 가치 있는 성과는 곧 경제적 성공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현대 문명의 초자아는 영원히 이어지는 것을 넘어 비좁기까지 한 길을 완주할 것을 요구한다. 더하여 사회는 이런 엄격한 계율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잉여 혹은 낙오자로 간주하며 이들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전가한다. 종합하면, 개인의 성장은 오직 경제적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개인은 초자아에 의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낙오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하지만 절대 완수될 수 없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구성원이 자신의 가치를 키우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강박을 느끼며 그런 가치마저 취업, 경제적 성공 등을 위한 스펙의 양과 동일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로이트의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가치에도 불구하고 《문명 속의 불만》이 지니는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그가 제시하는 최초의 친부 살해 내러티브는 입증 가능하지 않다. 우선 형제들이 힘을 합쳐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내러티브는 사실상 입증 가능하지 않다. 또한 이런 부친 살해로부터 토테미즘 사상과 초자아의 양심이 등장했다는 주장 역시 입증 불가능하다. 특정 대상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토테미즘 사상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런 추론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런 입증 불가능성은 분석심리학에서는 큰 문제로 작용하는데, 프로이트는 분명 이성적 학문의 특성을 입증 가능성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 속의 불만》은 논리적인 구조와 설득력 있는 문장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타부가 발생하는 근원적 사건을 정작 입증할 수 없는 전래동화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이런 문명의 억압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결책은 다소 엘리트주의적이다. 그가 상정하는 대중은 본능을 자제할 수 없는 존재로서 문명은 소수의 지배 없이 존속될 수 없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해결책은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소수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해결책은 반쪽짜리 해결책에 불가하다. 프로이트의 가치는 정당한 사회가 고려해야 할 영역을 구성원의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 무의식의 영역으로 확장하였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의 해결책은 정작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이동에 불과하다. 구성원들의 합의를 고려하지 않은 제도는 오히려 합리성의 영역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다. 즉, 무의식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의식의 영역을 간과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문명의 억압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문명에 대한 쿠데타로 한정하였다는 것 역시 지적할만하다. 현대 사회에서 문명이 초자아를 통해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은 문명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탈진과 우울증을 유발한다. 개인의 실패와 정체는 죄악이며 그 형벌은 죄책감이다. 문명의 억압으로부터 개인은 문명에 대한 적대감을 품기 보다는 현존 질서에 부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회의를 경험한다. 이처럼 개인의 삶이 황폐화되는 것 역시 현대 문명의 억압의 중요한 문제점이다.
마무리
《문명 속의 불만》은 문명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정당한 사회 이론이 고려해야 할 영역을 무의식까지 확장하였다. 비록 문명의 터부의 발생에 대한 그의 설명이 다소 신화적이라고 할지라도 문명이 인간의 본능적 욕동을 제한하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설득력이 강하다. 또한 그의 진단은 약 90년이 지난 현대에도 유효하기에 《문명 속의 불만》은 오늘 날에도 큰 가치를 지닌다. 다만, 엘리트주의적 처방은 또 다른 억압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적 지식을 통해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에서 성찰할 수 있는 구성원들 및 그런 구성원들의 제도적 합의를 기대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김정현 (1997). ‘서평: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인간의 본능은 억압되어야만 하는가?”’. 역사와 사회. 19. 191-200 박영도 (2016).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역설과 민주적인 사회적 공공성’. 사회와 철학(31), 131-158 박영도 (2003). ‘의사소통 이성과 그 불만 - '경계의 사유'를 위하여’. 경제와 사회, 59, 103-129 한병철, 2012. 《피로 사회》. 문학과 지성사. 앤서니 엘리어트. 1993. 《정신분석학 입문》. 한신문화사 지그문트 프로이트. 1997. 《환상의 미래》. 열린책들 지그문트 프로이트. 2014. 《문명 속의 불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각주를 포함한 원문: https://blog.naver.com/shpark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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