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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그에 대해서 늘 궁금했었다. 소외와 손가락질에 녹아난 원죄의 전라도와 그곳에 사는 전라인들에게는 타고난 논리와 시원한 독설로서 유명해진 그였기에, 살면서 이곳 저곳에서 만나는 그의 글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의 글들을 한꺼번에 읽어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중 이 책 "종교는 영원한 성역인가"를 접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그의 독설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었다. 난 왜 평소에 그를 독설가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 아니 왜 그가 독설가라는 달갑지 않은 칭호를 받으며 사는지 그의 정신세계가 궁금했다. 그 이유는 단지 그의 글중에서 몇가지만이 담겨있는 이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대충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고종석이 표현한 대로 다른 지식인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기를 꺼리는 문제에 거의 단기필마로 싸워왔고 그것을 이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사회에서 각종 실명비판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내가 하루빨리 퇴출당하기를 진심으로 빈다고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내가 이 책에서 본 강준만의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나서서 집중포화를 맞고 싶어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할말을 다 해버리는 논리적 비평가의 모습이다.
나는 이 땅에 강준만과 같은 독설가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이 점차 늘어 갈수록 권세를 잡은자들이 독선과 비리에 빠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이 땅이 안고사는 더럽고 야비한 병원균들이 그 모습을 감출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단지 그의 정치적 견해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치졸한 말쟁이 정도로 치부하는 말그대로의 치졸한 백성들 몇 천명 보다는 그와 같은 독설가 한 두명이 이 사회를 맑게 만들어 나가는 정화조와 같은 보석이 될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기독교의 병폐에 대한 지적은 어찌보면 조찬선 목사나 한용상씨의 비판보다는 그 도가 약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로의 비판과 외부에서의 비판의 차이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강준만과 같은 통렬한 비판들이 쌓여가면서 기독교인들 자체적인 내부 비판이 양성화되고 종교자체의 자성과 회개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그의 생애를 통틀어 통렬한 비판가의 입장을 견지하셨다. 예수가 비판한 그 시대의 더러움과 강준만이 비판하고 있는 이 시대의 종교권세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의 주장대로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적 양심과 도덕과 함께 가는 신앙으로 변모하여야 한다. 그의 주장에 전적인 동감과 지지를 보내주고 싶다. 더불어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한 손봉호, 강원룡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내가 잘 모르던 그들에 대한 사상과 삶을 보게 된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더불어 그 두 분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소개된 라인홀드 리버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책을 한 번 사보아야겠다는 욕심이 들 정도로 매혹스러웠다. 앞으로도 강준만의 독설이 이 세상의 카타르시스적인 요소로 계속 존재되어지고 양산되어지기를 희망하며 그의 책들을 일독해 보기를 권하고자 한다. [인상깊은구절]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운동은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상호 '제로섬'관계를 형성한다. 이건 정치운동이건 종교운동이건 관계없이 마찬가지다. 이는 종교가 사회적 개혁을 외면할 경우 종교열은 개혁열을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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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표현대로 현재 한국 지식인계의 판관 노릇을 하고 있는 강준만, 그가 이번엔 종교라는 성역에 도전했다. 개신교와 불교를 주로 다룬 이번호에서는 개신교계의 성장주의와 불교 내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한국의 언로가 지극히 모순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깨기 위해서는 우선 극우 냉전 논리를 보급하는 신문인 조선일보에 그 사상적 영역에 합당한 제 몫을 찾아 줘야 한다고 누차 부르짖던 강준만은 자신이 제시한 그 실천의 대안을 잣대로 이미 여러 글에서 실명 비판을 해오며 우리 사회에 메스를 가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종교계 비판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이 적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비전공자로써 가하는 비판이라는 것이,영역에 민감한 한국 지식인계에서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강준만이 이번에도 먼저 총대를 메고 종교 비판에 나선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괄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강준만 특유의 인물 분석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 종교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손봉호, 강원룡, 법정 등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현 종교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엑스리브리스4" 라는 기고에서 진보 지식인 진중권이 간증의 형식을 띠고 고백하는 신앙관을 읽는 감동도 크다. 종교는 마약이라고 묘사한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좌파 지식인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 성찰을 바탕으로 신앙관을 운동관과 연계시키는 진중권의 글쓰기는 어떤 글보다 감동적이다.
책 말미에 같은 안티 조선 진영 지식인인 김규항의 진영주의를 비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 아군, 우군 할 것 없이 비판을 가하는 강준만의 방식은 무비판적 이데올로기와 거대 담론의 일방적 수용지로 진영주의에 몰입해 있던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 엑스리브리스4 진중권- 만약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자기도 돈을 찔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떨까?" 그녀는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한마디 해주었다. "바로 그 때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니겠어요? 옳은 길로 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서 다 알아서 해주실 거라는..." 내가 이해하는 신앙은 이런 것이다. ---183, 184p 인간을 양에 비유한다는게 주체성이 강한 근대적 인간들에게는 어쩌면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세계는 필연과 우연이 함께 어울어져 만들어내는 드라마다. 필연은 인간의 힘으로 예측이 가능하나 인간의 힘으로 우연이 개제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때론 위험한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지력을 동원하여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내릴지라도,그 결정이 반드시 현실 속에서 원하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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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라치면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누구나 할 말이 많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종교가와 관련된 추문과 사건들 하며,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만나는 극단적이고 왜곡된 신앙의 형태들까지, 종교는 분명히 우리 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해답이면서 또한 그런 갈등과 문제를 만들어 내는 대상이기도 하다.
신문과 TV에서 나오는 종교에 관한 프로그램은 보통 정서적인 것으로 제한되어 있다. 시사고발성 프로에 나오는 것들은 대게가 최근 SBS에서 방영된 <할렐루야 기도원="">같은 광신적인, 그러나 내 일이 아닌 고로 영화처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들이, 그리고 칭찬프로나 인간시대류의 프로에서는 성직자들의 존경스런 삶과 생활, 보통 사람으로선 실천하기 어려운 미담 같은 것들이 주로 소개된다.
우리나라 언론이 대충 넘겨버리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 인가마는 종교는 특히 심하다. 종교는 우리 생활과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비평작업이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인물과 사상="">이 해야할 일들은 이렇게 많은 것이다. 대중적 매스미디어에서 건전한 사회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물과 사상="">의 중요성과 그 역할은 더 커진다.
자신이 신앙인이든 무신론자이며 비신앙인인 사람이든 이 책은 권할 만하다. 나는 이 책을 YES24에서 받은 그날 오후 바로 다 읽어 버렸다. 내가 종교에 가지는 관심만큼 집중해서 읽기도 했지만 그 내용들이 알차고 흥미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점="">
1. 강원용이라는 사람과 크리스천아카데미:
신문이나 잡지에서 단편적인 기사들만 보다가 이 번에 강원용 목사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그 활동상을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한 혁신적이까지 한 그의 열린 사고는 현대 기독교에 아주 희망적인 요소들이다.(철저한 반공주의 만큼은 어쩌 수 없지만) 그리고 대화운동.
2. 강원용목사와 손봉호목사 편에 동시에 나오는 라인홀드 니버:
니버의 사상과 적극적인 현실참여 정신에 깊이 공감했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반드시 사야겠다고 생각.
3.진중권의 엑스리브리스편:
진중권 특유의 시비적이고 비아냥대는 글투가 아닌 아주 잔잔하고 아름다운 글. 진중권의 전혀 새로운 맛.
4. 손봉호목사와 법정스님편:
강준만의 돋보이는 자료수집과 정리, 평가. 사회적 덕망가의 책임과 우리의 의식문제.
개인적인 감성의 영향으로 존경하던 사람의 안타까운 모습을 속속들이 파헤쳐보는 것은 분명 속상하고 거북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외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들은 자신의 신앙을 떠나서 모두가 분명히 인식해야만 하는 것들이고, 오히려 스스로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면 더더욱 그 비판을 자신의 주위로 확대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한국의 초기 개신교인들 중의 상당수는 분단 고착화와 반공 지상주의를 건설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반공의 선봉장이었다. 그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권력에 깊숙이 개입해 한국 종교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강인철) (11쪽) 이제 더 이상 종교는 성역이 아니다. 과거처럼 종교를 계속 성역으로 간주하는 한 한국 사회엔 희망이 없다. 이제 우리는 언종유착-권언유착-권종유착의 3위1체적 유착의 유산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32쪽)도덕적>내가>인물과>인물과>할렐루야> |
| 나는 기독교인이다. 물론 나 스스로 그리 신실한 믿음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도 못 하고,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도 관심이 있고 관심을 쏟을 때마다 내 신앙의 나약함을 느끼고는 한다. 아주 약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나라 교회의 문제점을 설파하는 글들을 가끔 보았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세속의 객관적 잣대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앙 생활이라는 그 안에 기실 신앙은 없고 진정한 기독교가 흐려져 간다면 그것은 마땅히 경계하고 고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교회 안에서 자발적인 교회 비판은 어렵다고 보여진다. 그런식으로 여태까지 매우 부족했던 교회의 자기 성찰의 기회를 이 책은 제공해 준다. 물론, 불교 비판도 씌어져 있지만 교회도 역시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한 사회안에 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독단과 아집이 교회에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객관화 시키기가 무척 어려운 것처럼 보여서 나도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 또한 반성이 필요할 것임에 틀림이 없고 그 반성으로 더 올바른 신앙을 기른다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길에 조금은 더 가까워 지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
| 이번 호는 그 제목부터가 눈에 확 띈다. 바로 종교문제를 논하고 있기 때문인데,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이 많은 종교들이 창설되어 있는 종교의 천국이며, 동시에 그 종교들이 거의 아무런 분란 없이 황금분할되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종교의 문제는 많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이 한국의 종교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이 모아졌고,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종교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물론 그 내부의 비리(?) 문제도 있겠지만, 이것은 해당 종교 자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특히 그 규모가 거대한 불교나 기독교, 천주교 등에 있어서라면. 문제는 중교가 이 사회에 하는 역할과 관련된 것이다. 즉, 종교가 언론과 유착하거나, 사회를 하나의 특정 이데올로그로 단정지으려는 그런 잣대를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가 입을 열지 않으면 진보의 절반을 잃을 수도 있다. 그만큼 중요한 시국에서 종교인들은 이 나라를 위해 그 한목소리를 힘껏 내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교계에 흘러들어 있는 그 많은 돈과 권력, 언론과의 유착관계를 더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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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패의 행태 한가운데는 늘 어느 교회 장로, 목사들이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고, 내세에의 관심과 개인 내면 세계에로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히 고민해야할 사회적 책임에 대해 수수방관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이제껏 얘기하길 꺼려왔던 부분들에 대해 속시원히, 때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까발리는 강준만의 방식이 나는 맘에 든다. 그처럼 과격한 비판에 선행되어야 반성과 자기조절 능력, 적절한 조언이 뒤따른다고 본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한 이 책의 다양한 접근은 뻔한 얘기들만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절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잘잘못을 구분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 뿐 아니라 교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아울러 스스로 힘 없는 종교라 얘기하는 불교의 안이한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용된 몇몇 지각있는 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음을, 이러한 비판들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이땅의 종교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사랑과 자비, 희생과 봉사를 주장하는 세 종교인이 민족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도덕성이 점점 타락하고 더 심한 부정부패가 민족의 진로를 방해한다면, 그 책임을 어미에 물어야 할 것인가? 그 책임이 세 종교에는 없는가? 성당의 우렁찬 종소리와 미사도, 교회에서 새벽마다 울부짖는 통곡의 기도도, 절간의 목탁 소리도 민족을 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증거인가? 혹은 한국의 종교들은 각 개인의 축복과 구원만을 추구하는 이기집단인가? 그렇다면 그런 종교는 우리 사회에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그런 종교는 도리어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세 종교가 인구이 반이 넘는 심도들에게 천문학적인 숫자의 헌금을 걷어들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국민과 사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난한 신도들의 주머니를 터는 해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의 존재 가치를 저울질해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