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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처한 위치에 따라 객체와 주체, 수동과 피동의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하는 것과 '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시각의 차이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지요.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과 그 피사체로 찍히는 사람, 사랑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책은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나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화가 자코메티, 그리고 그가 그렸던 초상화의 모델인 제임스 로드. 자코메티는 제임스 로드의 영혼을 화폭에 옮겨놓았고, 제임스 로드는 18일 동안 자신을 그린 자코메티의 작업과정, 그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을 매일 저녁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언젠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의 화가들과 그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옷 입은 모델을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그때의 신선한 충격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습니다. 모델의 입장에서 바라본 화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 양복 차림의 점잖은 신사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초상화의 기초 스케치들이 점차 살을 붙여가며 사진 속의 인물을 닮아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격 급한 사람이라면 차분히 읽어나가지 못하고 단숨에 그림의 진행과정부터 먼저 찾아 볼 게 눈에 훤합니다. 그 정도로 스케치는 묘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기하고 말까요? 아마 그래야 될 것 같아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오. 안되지요" 그에게 말했다.
"작업을 조금만 더 합시다. 이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어요. 내가 밉죠?" 그가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요. 내가 왜 그렇겠어요?"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그렇지요."
"그런 소리 마세요." 』
이 짧은 대화만 보아도 자코메티가 모델과의 교감을 통해 살아 숨쉬는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고뇌했는지, 그의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가가 자신의 또 하나의 분신을 완성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끊임없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고 힘을 북돋워주면서 진심으로 그의 고통과 회의까지 나눠 가지려한 제임스 로드의 모습은 진한 감동을 가져다줍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감은 결국 초상화와 실재 제임스 로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만족을 가져다주는 작품을 만들어내게 되죠. 그 만족은 어쩌면 그림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작업하는 동안 쌓인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하로 곤두박질친 차가운 날씨와 얼어붙은 경제로 시절이 어수선한 이즈녁, 예술가로서의 장인정신과 그 장인정신을 펼칠 수 있도록 이해와 노력 그리고 믿음을 아끼지 않은 모델 사이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웨딩드레스를 입을 예비신부로서 제 삶의 모델이 되어주고, 제 삶을 그려 줄 화가인 신랑에게 저는 얼마만큼의 신뢰와 사랑을 심어줄 수 있을지... [인상깊은구절] "일이 잘 안되고 있어요." 그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나아질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작업을 조금만 더 합시다. 이 상태로 놓아둘 수는 없어요." "좋습니다. 하지만 곧 어두워질 것 같은데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시 작업해서 싫으세요?" "아니오" " 내가 밉죠?" 그가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요. 내가 왜 그렇겠어요?"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그렇지요." "그런 소리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