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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여행을 앞두고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 시절은 물론 그 이후의 도시국가들이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면서 쌓은 부를 바탕으로 건축, 조각, 미술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키워냈기 때문에 볼거리가 많은 여행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체여행이기 때문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구경할 기회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바티칸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브레라 미술관처럼 소장품의 규모가 크고 유명한 곳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간 미술의 원형준기자님이 특히 이탈리아의 작은 미술관에 주목한 이유는 첫째 대형미술관에서는 인파에 떠밀려 다니다 보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기 마련이고, 걸려있는 작품이 너무 많아 무엇을 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미술을 잘 모르는 저 같은 경우에는 그저 누구의 어떤 작품을 보았다라고 자랑하려는 속셈(?)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었어도 도록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작은 미술관들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고즈넉한 정원을 거닐며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있던 곳에서 옮겨져 맥락을 잃어버리는 많은 미술품들과는 달리, 작품이 걸려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어 맥락이 살아 있는 생생한 감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건축과 연계하여 제작을 의뢰한 작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로마를 시작으로 피렌체, 베네치아, 파도바, 나폴리, 라벤나, 밀라노, 포사뇨, 볼로냐, 베르가모 등 이탈리아 10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30개의 작은 미술관을 소개합니다. 이들 미술관은 교회이거나 옛 이탈리아의 귀족가문의 소유였다가 공공기관에 이관하였거나 일반에 공개한 것들입니다. 다만 박물관의 규모에 비하여 소장 작품이 많은 탓인지 그림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면 따로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당연히 예술품들의 사진을 풍부하게 곁들이고 있는데, 사진은 역시 월간미술의 류동현기자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전체로, 필요하면 부분을 강조해서 찍은 사진까지 볼 수 있어 실감을 더할 수 있습니다. 보르게세미술관에 있는 <플루토와 페르세포네>라는 조각 작품을 찍은 사진을 보면 대리석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느낌을 사진으로도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프루토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원초적이고 광폭한 힘에 대한 저항을 이처럼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은 이전까지 없었다. 플루토의 긴장된 등 근육, 뭉친 무릎과 종아리 근육은 자연스럽고 강한 힘이 느껴진다. (…) 야수 같은 그의 손아귀에 잡힌 페르세포네의 허벅지와 허리는 마치 대리석이 아닌 것처럼 살이 움푹 들어갔다.(51쪽)” 그런데 그런 느낌을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사진에 담아냈다는 것입니다. 류동현기자님은 얼마 전에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 http://blog.yes24.com/document/10039590>을 통해서 익숙해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중세 교회가 행한 짓(?)의 일면에 대하여 생각해봄직한 언급도 있습니다. “본래 성당에서는 사람들의 신심이 약해지고 타락하는 것 같으면 수도사를 파견해 심판론 등 ‘무서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수도사가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고 증명하거나 기적을 실현하면 대중은 공포에 떨며 회개하고 신앙심을 다잡았다.(158-9쪽)” 이는 물론 또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다른 도시들은 르네상스를 일찌감치 받아들였지만, 베네치아는 14세기에야 르네상스를 수용했다.(212쪽)”라는 부분입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서로 르네상스를 선도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라벤나에 있는 산 비탈레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사원이 서로 규모만 다를 뿐 구조와 모자이크 장식이 비슷하다는 점도 기억할만 합니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 소피아성당을 장식했던 모자이크를 회칠하여 뒤덮어버린 것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작은 미술관이라고 전했지만, 내용으로 보면 알차고 큰 미술관이라 해도 좋을 그런 미술관들을 소개받은 느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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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돌아본 미술관들을 다시 한 번 찾아보고자 이 책을 읽어보았다. 이탈리아에는 대규모 미술관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작은 미술관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분주한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아름다운 정원과 저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은 미술관들은 당대 권력가 귀족이나 교황 또는 교황의 친척들이 지은 경우가 많다. 이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저택에 모아두고 감상하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미술관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성당도 훌륭한 미술관이 된다. 가톨릭 성당은 종교개혁 이후 내적 개혁으로 거듭났고, 그것이 예술로 표현된 것이 바로크였다. 바로크 미술의 화려함은 승리한 가톨릭 성당의 자신감을 내비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우선 메디치, 보르게세, 파르네세 등 유력가문의 팔라초와 빌라를 방문한다. 가장 먼저 천국의 정원을 재현해낸 것 같은 풍광을 가지는 빌라 파르네시나 미술관을 소개한다. 자연을 주제로 한 외벽 프레스코가 인상적인 이 곳은 은행가이자 교황의 회계 담당자이며 예술 후원가로 부를 자랑하던 아고스티노 치기가 점성술을 잘 아는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에게 짓게 한 것이라 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 빌라는 한동안 황폐화되었다가 1577년 추기경 알렉산드르 파르네세의 손에 들어갔고, 파르네세는 미켈란젤로의 조언에 따라 이 빌라와 바로 건너편의 파르네세 팔라초 사이에 다리를 놓아 두 저택을 연결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어서 두 번째로 보르게세 미술관을 방문한다. 보르게세 가문이 만든 미술관, 박물관, 승마학교와 동물원, 호수와 여름별장 등이 보르게세 공원에 다 모여 있다. 여기에 유명한 작품들이 꽤 많은데, 예를 들어 기대고 누운 비너스 조각상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녀가 누운 침상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고대의 것은 아니고, 그런 분위기를 낸 19세기에 유행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비너스 조각상에 회전 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이 회전조각은 신고전주의 시대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의 장기라 한다. 또한 기대고 누운 비너스의 실제 모델은 나폴레옹의 여동생 파올리나 보나파르트라 한다. 그녀는 1803년 카밀로 보르게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 유력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 조각상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편이 주문했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에도 카노바는 무사했지만 파올리나는 1815년 남편과 강제 이혼을 당했다. 이후 카밀로 보르게세는 거의 모든 고대 조각품을 프랑스에 넘겼지만 자신의 아내였던 파올리나를 모델로 한 이 조각상만은 남겨두었다고 한다. 보르게세 가문은 시에나 출신으로 그 중 한 파가 로마에 정착하면서 고위 성직자를 여러 명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 중 교황 파울루스 5세도 있는데, 이 파울루스 5세가 아끼던 조카이자 추기경인 시피오네 보르게세가 지금의 보르게세 미술관을 일구어 냈다고 한다. 시피오네는 삼촌이 교황에 즉위한 1605년 건축가 플라미노 폰초와 조반니 바산지오를 불러 로마의 부유한 가문이면 으레 소유하고 있던 언덕에 넓은 정원이 딸린 빌라를 짓게 했다. 오늘날 건물의 인테리어는 안토니오 아스푸르치의 작품인데 사실상 17세기와 18세기풍의 인테리어를 뒤섞어 놓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소장품 대부분은 시피오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집한 것이라 한다. 이를테면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림"은 페루자에 있는 발리오니 가문의 예배당에서 밤에 은밀히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이어서 바로크라는 사조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16세기 후반에 등장해 17세기에 뿌리를 내린 바로크 미술은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 성당의 뼈를 깎는 반종교개혁 이후 로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승리한 가톨릭 성당의 자신감이 바로 바로크 미술로 화려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이 정적이고 완성도가 높고 세련된 것이라면 이후 매너리즘 조각의 형상은 왜곡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르니니는 이탈리아 최초로 완전히 다른 조각, 즉, 형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역동적인 조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가만히 있는 형상이 아닌 전후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을 묘사했는데, 동시대에 활동했던 카라바조를 비롯한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격정적인 주제를 즐겨 묘사했다고 한다. 특히 "아폴로와 다프네"가 그렇다고 한다. 아폴로의 자세와 특징은 고전기의 "아폴로 벨베데레"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르네상스기의 조각처럼 고전기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옷 주름이 베르니니의 조각에서는 한층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나풀거린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반종교개혁이 이 시기의 바로크 미술에 미친 영향도 많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들이 누드를 고대인들처럼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나 바로크 시대 예술가들은 조심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베르니니는 고대 시대의 옷으로 남녀 성기를 가렸다고 한다. 또한 베르니니가 만든 "다비드"상은 싸움 직전에 모아둔 힘을 쏟아내려는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을 넘어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연 거장인 카라바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르네상스적인 종교화에 바로크적인 풍속화를 도입하는 한편 바로크 미술의 핵심 기법인 키아로스쿠로(명암 대조법)를 극적으로 구사했다고 설명한다. 미술관이 위치한 보르게세 공원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계속 변화했고, 시피오네 추기경 사후 100년이 지난 뒤 마르칸토니오 보르게세 4세가 빌라를 물려받아 안토니오 아스프루치를 시켜 1770년에서 1790년대까지 추가적인 장식과 복원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1902년에는 파올로 보르게세가 빌라와 모든 것을 국가에 팔았으며, 빌라에 있던 대부분의 부조 장식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어서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특히 걸작으로 알려진 티치아노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티치아노의 후원자인 에스테 가문에서 올림피아에게 준 것이 바로 이 작품인데, 유디트 이야기는 종교적 믿음의 승리,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 폭력에 대한 정의의 승리라는 의미라 한다. 유디트는 유다 여자란 뜻인데, 유다의 도시 베툴리아가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원로들은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이 과부 유디트였다고 한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서 잠자리에서 목을 벤다. 이러한 미술관을 일군 카밀로 팜필리는 위대한 예술 컬렉션을 남겼고, 여러 예술가들을 고용해 빌라와 성당을 장식했지만 항상 돈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카밀로의 컬렉션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인노첸시오 10세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가보를 잘 지켜낸 덕분이라 한다. 팜필리 가문은 1760년에 이르러 거의 쇠락하고 그 유산은 카릴로와 올림피아의 딸이 결혼한 제노바의 명문이며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제네바의 해군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의 가문인 도리아 가문으로 넘어가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어서 로마 국립박물관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작품을 전시할 목적으로 1889년 국립박물관으로 설립되어 1870년 이후 로마에서 발견된 예술품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이곳은 고전 예술에 있어서 세계적인 박물관이라 한다. 박물관 건물은 카라칼라 공중목욕탕보다도 규모가 훨씬 컸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공중목욕탕을 개조한 것인데, 공중목욕탕의 일부는 공화국 광장이고 다른 일부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있다. 이어서 다른 성당으로 눈길을 돌린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는 카라바조의 마태 그림이 걸려있다. 어둠을 깨고 환하게 비추는 초자연적인 빛을 구사한 카라바조는 "성 마태오의 소명"에서 인간적인 이야기를 극적으로 포착했고, "성 마태오의 순교"의 경우 성당의 계단이 배경이라 한다. 성가대 소년이 오른쪽으로 달아나고, 중앙의 근육질 남자(악마의 현신)는 성인의 손목을 잡고 칼을 다시 내리치려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밖으로 쭉 뻗은 남자의 팔은 반대편 벽에 있는 그리스도의 팔과 대응된다. 천사는 구름 위에서 몸을 구부려 성인을 천국으로 이끌려고 하는 모습이다. "성 마태오의 천사"는 처음에 그렸다가 마태오의 맨발이 깨끗하지 않고, 천사를 이끄는 마태오의 손이 독단적이라는 이유로 주문자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현재 성당에 걸려 있는 작품은 1602년에 그린 두 번째 버전인데, 성경을 집필하고 있는 마태오의 어깨 위 조금 떨어진 공간에 천사가 날고 있다. 그런데 작품을 주문했던 콘타렐리 추기경이 숨을 거두자 주문자가 산필리포네리 성당의 양식을 선호하던 크레센치 가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결국 카라바조가 어떤 예술적 영감을 받아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완성했느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작품 탄생의 종교적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다. 당시 반종교개혁과 함께 예술가에게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불경스러워 보이는 도상은 그리지 않도록 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에서 주인공 랭던과 비토리아가 판테온에서 헤매다 찾아간 성당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소설에서는 악마의 구멍이 있는 곳이며 우주를 이루는 4대 원소 중 흙에 해당되는 신비로운 장소로 소개된다. 전설에 따르면 성당 터에는 원래 네로 황제의 묘와 호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밤마다 황제의 유령과 까마귀 형상의 악마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1472년 교황 식스토 4세가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성당 건축에는 안드레아 브레뇨, 브라만테,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참여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소박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로마에서 가장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어서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안내된다. 이 성당의 이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슬에 묶인 베드로"인데, 실제 베드로가 투옥됐을 때 묶였던 쇠사슬이 보관된 성당이라 한다. 그런데 성당 내부에 미켈란젤로가 만든 모세 조각상이 있어서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모세 조각상은 교황 율리우스 2세 묘비의 일부인데, 47점의 조각상으로 장식하는 장엄한 묘비 계획의 일부였지만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건축과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제작된 기념비인데, 원래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고대의 마우솔레움처럼 만들 계획이었지만 원안이 축소되어 1547년에 한쪽 벽면만 완성되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손수 제작한 작품은 모세 외에도 그 좌우에 야곱의 두 아내 라헬(명상을 상징)과 레아(능동적인 삶을 상징)가 있다고 한다. 모세상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나 있는데, 이렇게 머리 위에 난 뿔은 히브리어 성서가 잘못 해석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하느님과 두 번째 만난 이후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는데, 중세 시대 빛이 뿔로 잘못 번역되는 바람에 결국 모세 머리에 뿔이 나는 것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어서 산티냐치오 성당으로 넘어간다. 1626년에서 1650년에 사이에 건립된 적갈색과 황갈색이 은은하게 대조를 이루는 매혹적인 바로크 양식의 건물인데, 이 성당의 수호성인은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라고 한다. 성 이냐시오는 1540년에 청빈, 정결, 순명의 서약과 함께 교황에 대한 순명을 기본 원리로 하는 예수회를 창설한 이후 로마에서 활동하며 종교개혁으로 흔들리던 가톨릭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성당 내부에는 안드레아 포초가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콰드라투라라는 환상적 기법을 사용한 천장 프레스코가 있다. 이 그림 아래에 서면 지붕이 열리고 천국으로 이어진 공간에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종교적 환상과 감각적 도취를 이뤄낸 포초의 웅장한 천장화는 로마의 제수 성당에도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성당으로 넘어간다. 환상 속에서 자신의 심장에 금색 화살을 찌르는 천사를 본 아빌라의 성 테레사를 묘사하는 조각상으로 유명한 성당이다. 특히 여인의 얼굴에 드러나는 황홀경으로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게 특징이라 한다. 성당의 벽을 뚫어 테레사 뒤로 쏟아지는 빛을 묘사해 그녀의 얼굴과 몸이 성령의 불 속에서 타오르는듯한 환영을 만들고 있다. 이 조각상을 매우 에로틱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조각상을 만든 베르니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테레사 성녀도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자서전에서 밝힌 것을 보면 육체적 황홀경의 순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교황의 건축사이자 로마 최고의 조각가였으며 매일 예수회의 교리를 실천에 옮겼던 베르니니가 테레사 성녀의 기적적인 법열을 성적 쾌락의 떨림으로 묘사했을 리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17세기 당시 영혼이 신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의 극한적인 경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테레사 역시 자서전에서 천사와의 경험이 분명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 경험이 생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넘어간다. 본래 1434년부터 도미니크회 수도원으로 사용되던 곳인데, 메디치 가문의 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을 위해 후원하고 재건축 한 곳이라 한다. 메디치 궁을 지었던 건축가 미켈로초가 1437년에 옛 수도원을 부수고 재건축하기 시작해 16년 만인 1452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화면에서 천사와 마리아가 있는 곳은 바로 이 수도원의 로지아라고 한다.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과 무염시태를 상징하는데, 수태고지는 주로 백합을 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그리고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닫힌 정원을 일컫는 것인데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미술 작품에서 마리아가 우물가나 샘터에서 물을 긷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샘은 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솟는 생명의 샘 또는 말씀의 샘을 빗댄 것이라 한다. 수태고지에는 천국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도 등장하는데, 선악과를 탐하면서 인간에게 원죄의 올가미를 씌운 이브와 구세주를 잉태하여 인류의 죄악을 씻고 대속할 마리아를 대비시킨 것이라 한다. 인간의 첫 번째 어머니가 이브였다면 인류의 두 번째 어머니이자 새로운 이브는 마리아라는 말이다. 한편 산 마르코 미술관은 수도원 기행이라는 즐거움도 선사해준다면서 중세 수도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성구, 성서, 성가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어서 1865년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바르젤로 미술관도 소개하고 있다. 이곳은 1255년 건립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이며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할 때는 행정장관의 관서, 즉 바르젤로였다고 한다. 16세기부터 경찰청사 겸 교도소로 쓰이면서 구조가 바뀌고 추가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피렌체의 예술가들과 문화유산에 대해 언급이 이어진다. 미켈란젤로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과두정치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에 참여했고, 거사가 실패하자 로마로 도피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도나텔로가 만든 "다비드"는 여성스러운 소년의 모습인데, 고전적인 조각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솜씨는 도나텔로의 위대한 재능이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후원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총애를 받았으며, 미켈란젤로가 활동하기 이전에 피렌체에서 가장 주도적인 조각가였다고 한다. 도나텔로가 만든 다비드는 고대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제작된 전신 누드이자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입체상이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피렌체의 두오모 이야기를 하면서 브루넬레스키를 원근법이라는 수학적 투시도법을 발명한 건축가로 소개하고 있고, 청동문을 제작한 기베르티는 청동 표면에 사실적인 공간을 창조했으며 화가로 훈련받았기에 원근법을 이용해 천사를 단축된 모습으로 묘사했다고 설명한다. 기베르티가 청동 문을 완성한 것은 작품 제작에 착수한 지 23년이 지난 1424년이었다고 한다. 문 한 쌍을 만들기 위해 20년 이상 소요되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세례당의 또 다른 청동 문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천국의 문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이라 한다. 이 문을 만드느라 그는 또 다시 22년을 바쳤다고 한다. 이어서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소개한다. 1784년 토스카나 주를 다스리던 피에트로 레오폴도 대공이 자신의 컬렉션을 학교에 기증하면서 미술관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다비드 조각상 진품이 여기에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참주 정치를 축출하고 시민이 주인인 공화정을 다시 채택한 피렌체의 시위원회가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다비드를 정한 결과물이라 한다. 다비드는 시뇨리아 광장과 접한 베키오 궁전 앞에서 우피치 쪽을 향해 적을 노려보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873년 미술관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미술관의 길고 좁은 통로 양쪽으로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던 미완성 조각상들이 있고, 앞쪽에 다비드 상이 놓여 있다. 다비드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왼팔로 왼쪽 어깨에 투석기를 짊어졌으나 인물의 엉덩이와 어깨가 반대 각도를 향하여 몸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S자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각상은 1527년 강풍에 왼손이 부셔졌다 복원되었고, 1991년에는 정신장애자가 왼쪽 엄지발가락을 망치로 파손했다고 복원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상들인 젊은 노예, 수염 난 노예, 성 마태오 등을 보면 돌 속에 갇혀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이제 막 대리석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신체의 일부분이 대리석 속에서 나왔고 일부는 돌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 성당은 1278년에서 1350년에 사이에 도미니크회 최대 성당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서쪽 파사드는 1456년경 알베르티가 중앙의 둥근 창과 밑 부분의 장식 등 기존 체제를 살리면서 새로 구성한 것인데, 색깔 있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무늬로 파사드를 장식한 것이 특징이라 한다. 이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특유의 장식법인데, 파사드에는 로마네스크(색깔 대리석의 수평 띠), 고딕(아래쪽의 뾰족한 아치), 르네상스(위쪽의 기하학적 사각형과 원형 무늬) 양식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미켈란젤로가 나의 신부라고 불렀다는 성당인데, 바실리카 양식의 내부에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조토의 십자가형,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와 성 요한의 생애,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등이 걸려있다고 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수학적 선 원근법으로 혁신적인 작품을 만든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의 경우 성부(하나님), 성자(예수), 성령은 삼위로 존재하지만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는 한 하나님이란 교리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화면은 단순히 분홍색과 파란색(지금은 색이 바래 회색처럼 보임)으로 구성된 3차원 공간인데, 장례 예배당 속에는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석판 위에 서서 십자가형을 당한 그리스도를 잡고 있고, 둘 사이로 성령을 상징하는 흰 비둘기가 날고 있다고 한다. 바로 아래는 성모와 사도 요한이 서서 최후 심판의 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예수를 바라보는데, 성모는 관람객을 곧장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화면 속에 벌어지는 사건을 안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면 속 사각형 예배당 밖에는 성모, 요한과 같은 색 옷을 입은 남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고 한다. 또한 남성 기부자(도메니코 렌지)는 성모 옆에, 여성 기부자(렌지의 아내)는 요한 옆에 엇갈려 앉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성당 내 가족 묘소의 벽을 장식하기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다. 한 벽면에 그려진 인물들이지만 각 층위 공간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머리 위쪽에 모든 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소실점이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마사초는 현존하는 프레스코 중 최초로 체계적인 투시원근법을 구현했다고 한다. 또한 벽화의 가장 밑에는 석관과 아담(인간)의 해골이 그려져 있고 이탈리아어로 "나는 과거에 현재의 당신이었으며, 당신도 또한 나와 같이 되리니"라는 비문이 적혀있다고 한다. 벽화의 이 부분은 제단의 아랫부분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히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미사에서 영성체 의식을 행할 때 반복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된 문구라는 것이다. 위쪽 그리스도의 석관과 함께 나란히 아래쪽에 있는 인간의 석관은 인간을 구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내세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 마사초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겨우 5년간 활발히 활동하다 요절한 천재 화가로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라 할 수 있겠다. 이어서 도시 자체가 예술 작품인 베네치아로 넘어간다. 우선 베네치아 화파에 대해 소개한다. 치밀한 구도나 윤곽을 그리던 피렌체나 로마의 화가들과 달리 베네치아 화파는 많지 않은 색을 사용하면서도 느슨하고 가벼운 붓 터치와 색채의 구사, 명암의 대조미를 추구했다고 한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기하학과 이성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다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감각이 넘치고 색채가 가득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특히 베네치아 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와 국방이었는데, 예술품은 주문자가 주로 상인들이다 보니 다른 도시에 비해 주제나 묘사가 자유로운 편이라 한다. 심지어 종교화에서도 세속적인 분위기가 나타나는데, 귀족 부인이 옷을 다 벗고 신화 속 여주인공의 감각적인 작품 모델로 등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안토니오 카날레토만큼 베네치아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가도 드물다면서 거대한 건축물과 함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다양한 빛의 효과와 물에 반사되는 이미지, 대기의 묘사를 활용해 매력적인 풍경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관찰한 뒤 여러 시점을 혼합해서 작품을 완성하는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와 로마의 거장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였다면 베네치아의 거장으로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를 들 수 있다고 한다. 피렌체나 로마의 화가들은 치밀한 구도나 윤곽선을 중시해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 회화의 중요한 원리였고, 그 다음 요소로 색채를 보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습작 소묘를 보면 색채보다는 선을 중심으로 한 다이내믹한 형태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렌체 화가들은 정교한 기하학과 이성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사실적인 재현을 추구하는 그림을 그린 반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와 명암의 대조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한다. 항상 축제와 바다에 반사된 빛을 접하는 베네치아 화가들은 관능과 감각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고, 빛과 색채가 자아내는 느낌과 감성적 분위기가 이들에게는 회화의 원리였다는 것이다. 티치아노는 당대 최고 궁정화가였는데, 유럽 최고의 권력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도 그가 떨어뜨린 붓을 집어주며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수많은 군주와 교황, 그리고 귀족의 그림 주문이 항상 밀려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베네치아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도시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에 조토가 그린 그림을 소개해주고 있다. 조토는 13세기말에서 14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로 치마부에와 함께 중세의 정적이고 정형화된 표현 방식을 깨뜨린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연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넘어간다. 먼저 1층 파르네세 컬렉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534년 파르네세 가문의 알렉산드로 파르네세가 교황 파울로스 3세가 되었는데, 그는 반종교개혁 지도자였고 성 이냐시오가 예수회를 설립하는 것도 허락했다고 한다. 반면 성직자임에도 그에겐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은 테베레 강변에 화려한 팔라초를 짓고 이교도적인 예술을 열광적으로 수집했다고 한다. 1731년 파르네세 가문은 몰락하고 4년 뒤 나폴리 왕 카를로스 3세는 파르네세 가문의 고대 예술품들을 손에 넣게 되었으며, 그는 부르봉 왕실 박물관(당시에는 부르봉 왕실 사람이 나폴리 왕이었음)이라 불리던 건물에 그 예술품들을 수용했는데, 그곳이 지금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라 한다. 이 박물관의 비밀의 방에는 폼페이에서 출토된 선정적인 그림과 조각들을 따로 모아둔 곳이 있다고 한다. 또한 "성 세실리아의 희열" 제단화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1517년 이 제단화가 몬테 산 조반니 성당에 놓이기 전에 성 세실리아는 음악의 수호성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1400년대부터 예술가들이 황금전설에 따라 파이프 오르간을 들고 있는 그녀를 묘사하기 시작했지만, 그때의 악기는 다른 처녀 순교자와 그녀를 구분하기 위해 그렸을 뿐이라 한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이 그림 이후 성 세실리아는 음악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많은 작품들과 작가들을 알 수 있었다. 작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당시 보았던 것도 있고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을 또 다시 볼 수 있다면 이 책을 들고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