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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박노자著, 2014)> 2014年 12月 31日 1. 독서기간 : 2014年 12月 27日 ~ 2014年 12月 29日 2. 선택의 이유 :「광장(최인훈著,1960)」을 읽고 느낀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박노자著,2001)」과 「우승열패의 신화(박노자著,2005)」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해부했던 저자에게 시원한 처방전을 얻어보고자, 이 책을 손에 들었다. 3. 저자의 주장 1) 저자는 2014年 현재의 대한민국을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한다. ①억압 ②공포 ③비굴 : 재벌, 정치꾼 등 지배층의 억압으로 인한 생존의 공포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소시민들이 합리적 사고와 공감능력을 상실한 채, 비굴한 태도로 아귀다툼을 하는 무간지옥.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2) 저자는 한국사회가 이런 부정적 사회상을 지니게 된 원인으로 세 가지를 지목한다. ①내셔널리즘 ②군사문화 ③신자유주의 :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뿌리내린 민족주의와 군사문화로도 모자라 IMF구제금융시대부터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열풍까지. 이 세 가지가 조합된 광기야말로 한국인이 각자도생이라는 저열한 생존전략을 선택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제시하는 한편,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다음 사항들을 실천하라고 요구한다. ①비판적 현실인식 ②강력한 연대의식의 형성 ③적극적(실천적) 투쟁 :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인식은 주체적인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라, 지배층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노예의식일 수도 있다는 비판적 사고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가정, 학교, 직장 내에서 겪는 부조리(파시즘)에 침묵하지 말고 각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자. 또한,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 공감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한 강력한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전사회적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생존의 위기에 처한 소시민들의 삶 속으로 적극 침투하는 행동을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이다. 4. 나의 생각 : 먼저, 이 책에 대한 불만부터 토로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블로그 게시물을 출판사에서 주제별로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일러두기'에서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런 에세이 형식의 글은 그 깊이라는 것이 뻔할 뻔자이기 때문에 몰입의 맛을 느끼고자 하는 나의 독서취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박노자라는 현인의 탁월한 글솜씨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완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단점도 이런 형식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짧은 글들에서 반복적으로 주장을 펼치다보니 뒤로 갈수록 주장의 신선함이 떨어지고 대안제시의 내용 또한 빈약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책의 종반부에 다다를 때까지 '민주적 사회주의가 도대체 뭐지?'라는 의문이 지속된다. 책의 형식에 대한 불만은 여기에서 그치고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타당한지 검토해보자. 일단, 한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진단에는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파시즘과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터널 속으로 전력질주하는 증오와 비굴함의 소굴로 한반도를 묘사하는 부분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처방이다. 저자는 상당히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로서, 그의 대안들이 내게는 너무 파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투철한 계급의식의 고취로 체제전복을 위한 폭력투쟁마저 용인하는 태도에는 거부감마저 들었다. 나는 아직 체제의 세뇌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애송이인가 보다. 5. 독서의 가치 : 불만을 잔뜩 토로하는 바람에 이 책에 대한 악의적인 서평이라고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읽어볼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부르짖고 있는 '비판하라! 연대하라! 투쟁하라!'라는 주장이 작금의 현실에 꼭 필요한, 그러나 서서히 잊혀져가는 외침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주의 모델에는 공감하지 못했지만,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가치들, 특히 연대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준 박노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부족한 서평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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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B급은 안 되더라도 C급 정도의 좌파의 삶은 견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이미 다른 이들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희망' 혹은 '이상'이라고 불리던 목표들이 사라지고, 함께 어깨걸고 싸우던 이들이 제각각 사방으로 흩어져 안개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혹은 정해진 길을 따라간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저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 정처없이 흘러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온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매순간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나와 우리의 삶이 온전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100% 인정을 하면(아마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땅의 현재를 살아가는 제 삶이, 제 아이들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바라보면, 미래에 거는 '희망'이 과연 온당한 것이고,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길을 가다 쓰러진 행인을 보고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 있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의 손길을 뿌리치고 있지 않은지, 좀 더 손쉽게 무거운 짐을 진 이의 짐을 같이 들어주고 있는지... 더 거창하게 이 사회에서 억압받고 부당한 이들과의 공감과 연대를 말하기 전에, 손만 내밀면 바로 옆에서 나와 같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러니, 제 뒤에서 저를 그대로 보고 배우고 있을 제 자식들에게 나와 다른 행동과 삶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억지로 억지로 변명거리를 찾아봅니다. 아마도 제 행동을 규정하는 요소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가정을 하면, 그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불안'과 '불편', '공포'일 듯합니다. 괜히 선의를 제공한다고 손을 내밀었다가 불편한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 남을 위해 같이 손을 잡았다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 이미 편안함에 적응이 된 삶이 곤두박질 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등등 어쩌면 실제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한발짝 뒤로 물러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좀 무섭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자그마한 '용기'만이, 그리고 닥치지 않은 미래 혹은 공포가 실제보다 무섭지 않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어쩌면 이 비겁하고 비굴한 시대를 뚫고, 다른 이들과 연대하고 세상과 공감하는 작은 씨앗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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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가 또 한건의 책을 냈다. 누구보다 한국에 대해서 실날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 저자가 이번에는 어떻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요즘 갑질논란의 주역으로 뽑히고 있는 일들이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은 아니였을까.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이 자살을 시도하고, 1등만을 강요하고 있는 시대에 강자와 약자의 아부와 비굴한 사람들만이 살아남는 이 현대의 한국사회의 감출 수 없는 청사진이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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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의한 권력이 저지른, 그리고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꼭꼭 숨겨둔 추악한 거짓이나 부정일 수도 있고, 다수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매장되어 버리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우리들의 뒤틀린 욕망이다. 차마 이목이 두려워, 아닌 척, 상관없는 척하지만, 끝내 악취를 풍기며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 안의 괴물. 그것은 이 시대를 자연스레 타락의 길로 이끈다. 때문에 박노자는 우리에게 불편한 존재다. 그를 ‘이 시대의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이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지금 우리 지식인 사회가, 우리의 정신세계가 어느 정도로 천박하고 또한 획일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을 꿰뚫어본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대학 시절 만난 그의 글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과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뒤틀리기 시작했는지, 아니 애초부터 정상적인 때가 있었는지, 자괴감과 수치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위선과 폭력이 일상화되어버린 살풍경이 새삼 다가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나는 ‘당신’이 아니었고, 때문에 몸 둘 바를 끝내 찾지 못했다. 박노자는 소위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자처하는, 인정받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반대라 불리고, 자처하고, 인정받는 일부에게도 그리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특히 그들이 박노자를 불편해 하였던 것은 ‘북’에 대한 그의 인식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결코 제대로 된 사회주의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와는 더더욱 멀었다. 때문에 북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우습게도 이 땅의 일부 진보들의 분노를 사는 결과를 낳았다. 슬픈 모습이었다. 자신과, 혹은 자신의 진영과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주장을 펼친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또한 불온시하는 모습은, 진보라 불리는 이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보수진영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그런 모습이 나에겐 생경했고, 그런 진보 세력들에 대한 실망감이 조금씩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은 썩게 마련이다. 죽게 마련이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책에서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라 표현한다. 지나침이 없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비굴’은 자연스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어 버린다. 냉소의 시대를 지나 비굴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른 바 기득권 세력들은 오랜 시간동안 민중을 철저히 개인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겨졌다. 사적 욕망의 추구를 찬양하였고 적극 장려하였다. 아울러 그를 위해 남을 짓밟는 것 역시 장려되었다. 이젠 더 이상 이기주의와 몰염치가 죄악이 아닌 시대다. 박노자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 역시 지나침이 없다. 어느 한 분야라도 썩지 않은 곳이 없다. 최근 신경숙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듯, 사뭇 고매함을 뽐내는 문화예술계 스포츠계도 이미 충분히 타락했다.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권력’없이 몸 담아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자리라도 펼쳐지면, 각자 자신들의 영역이 더 썩었고 희망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만 잘 살게 되면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까지도 관심 밖이 되어버린 모습. 비굴함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책은 그의 눈을 통해 나타난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모순과 불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지독하게 작동하고 있는 전근대적 습성까지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울러 그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에도 눈길을 돌린다. 급격히 자본에게 ‘인간’과 ‘자유’를 빼앗긴 세계. 이젠 인간 없는 세계, 인간 없는 번영이 더 이상 상상의 그것이 아님을 그는 말한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흐름의 확산은 결국 인간의 주변화, 그것의 장기화와 상시화를 초래하고야 만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여전하다. 그는 남과 북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유지하며, 지금껏 ‘자기들만의’ 세상을 유지해왔다고 말한다. 그 사이 양 국가의 인민들, 시민들은 고통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고, 결국 남쪽은 지독한 이기주의와 보신주의,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북한은? 그의 눈엔 여전히 왕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과 남을 ‘왕족 사회와 귀족 사회’로 표현하는 그의 눈빛엔 남북은 일란성 쌍둥이 체제일 뿐이다. “남북한은 한반도가 성취한 근대성의 빛(문맹 퇴치)과 어둠(전 사회병영화)을 동시에 공유한다. 그만큼 서로 돕고 상처를 보듬어주는데 지원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을까?”라는 말은 남북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벗어나 진정한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 아울러 그는 “통일로 가는 문은 우리가 북한을 또 하나의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정상의 비정상화’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굳이 우울한 내용의 책을 읽으려 하냐고. 우울하고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책이라도 즐겁게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슬픈 영화는 어쩐지 보기 두렵듯, 나 역시 즐겁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낀 몇 안 되는 교훈 중 하나는, 혼자 즐겁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고, 그마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함께 즐거워야 참으로 즐거운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의 더러움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눈물겨운 이웃들과 어깨걸이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지 않고, 대들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있어야, 그나마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고, 야매가 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그래야 정말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비굴의 시대에 모두 다 혁명투사가 되라고 선동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비굴하고 잔혹한 시대를 철저히 응시하고 결연한 목격자가 되어 연대하는 길. 그곳에서 희망은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그 무슨 ‘병행 전략’이라느니, ‘전략적 모호성’이라느니 떠들지 말자는 것이다. 말과 행동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상대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대응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주먹을 날린 후, 상대에게 화해의 장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 코미디다. 지금 우리 정부가 북에게 그런 우스운 꼴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가뭄과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늘과 땅과 이웃들에게 덜 부끄럽고, 덜 해를 끼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워 아이를 쳐다볼 수 없는 지금이다. 가뭄과 역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 살기 어려워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들.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다. 그럼에도, 우리, 희망을 놓지는 말자. “그러나 우리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음껏 외치고 힘껏 연대하면 된다. 사회는 보수화되더라도 진리는 그대로 진리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왜곡하고, 장기적 차원에서는 다수를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빈곤으로 빠뜨리며 결국 위기, 공황, 전쟁을 낳는다는 것은 진리다. 나는 그냥 저들이 내 입을 힘으로 막을 때까지 그 진리를 크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파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화된 사회의 경제적 상황이 불가피하게 악화되어 다수의 삶이 망가져가는 대로 연대와 투쟁의 폭을 계속 넓히면 된다. 그래도, 그래도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 - 67~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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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을 여러편 읽었다. 러시아에서 귀화한 한국인이지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의 역사 정치 사회에 대해 식견이 깊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글이 점점 좌로 좌로 흘러서--지난번에 읽었던 책 제목조차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였다.-- 설득력과 논리력을 가진 그의 주장의 진정성이 알려지기에는 독자의 폭이 줄어들 듯하다. 나처럼 건전한 보수(?)를 자처하는 독자마저도 매번 그의 책을 사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에서는 객관성을 찾을 수 있다. 그의 국적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외모적인 차이로 인해 그가 구수한 한국말을 하고, 한국에 대해 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그가 국수적이거나 수구적인 발언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어볼만한 것이다. 며칠전 갑자기 조카 카톡에 '노르웨이에 가고 싶다'란 상태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교수가 휘두르는 무기'란 소제목의 글에서 여제자를 성추행해서 문제가 된 어느 임상치과의학연구소의 추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다름 아닌 노르웨이 대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헉 그 잘 산다는, 그리고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어 선진국의 대명사처럼 보인 그런 나라에서도 우리 나라 대학과 같은 권위주의의 폐해가 여전하다는....(저으기 놀랐다. 자유가 보장되고 성숙한 사회의식을 가진 사회라고 해도 개인적인 성문제나 권력관계는 있게 마련이건만) 저자는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1970년대 구소련 재야인사들의 건배사로 소개한 문구는 인상적이다. "가망 없는 우리 일의 성공을 위하여"라니. 그게 구소련 시절 재야 세력이 현실 정치에 실패했더라도 그들의 저항은 역사의 거름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했다고 그는 평가한다. (p.308) 그러면서 그가 꿈꾸는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그는 인생을 거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100% 동의는 못한다. 나와 생각과 다른 면도 많고 하지만 그의 글을 기피하라고 하는 데는 반대다. 충분히 알아야 할 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