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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이론서를 포함해서) 다른 저서들을 연상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실망할 것이다. 에코 특유의 유머와 다양한 사례 적용, 이야기꾼적 재질 같은 것은 이 책에서 전혀 얻기 힘들다. 또한 저자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그의 후기 저작이 다루고 있는 기호학적 문제영역들(기호학의 영역과 한계 - [기호와 현대예술] - 나, 해석의 가능성과 한계성의 문제들 - [열린 예술작품]과 [해석의 한계] - 등을 다룬다)에 천착하기 보다는 이 저작이 쓰여지던 때 까지 이어져온 기호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다루고 있다. 탐구서라기보다는 개론서에 가깝다. 하지만 여지껏 나온 개론서 중에서 에코의 이 저작 만큼 충실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쓰여진 저서도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 책의 진짜 메리트는 맨 마지막 장의 "기호의 철학적 문제들"이다. 특히 퍼스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어지는데, 이 장을 잘 읽어 둔다면 기호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에게 더 근본적인 토대와 포괄적인 지평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인간은 분명 언어다. 인간은 단어나 인간 외부에 있는 다른 상징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징들은 인간에게 오히려 "당신 인간은 우리가 가리킨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고, 인간은 한 단어를 사고의 해석소로 사용할 때만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과 단어는 서로를 가르치는 셈이다. 인간의 지식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단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이 사용하는 기호와 단어는 인간 자체이다. 인생이 사고의 연속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곧 기호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단어homo와man이 동일하듯이 인간과 인간 외부에 있는 기호는 결국 같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곧 사고이기 때문에 나의 언어는 '나'라는 존재의 총체다. ...퍼스 철학의 모든 웅장함은 이 같은 최종적 울림을 뒷받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