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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미학자와 철학자이지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미술에 관한 책은 미학이나 철학이지 그림에 대한 감상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냄새, 어려운 글들, 개인의 감성이나 느낌보다는 배경지식에 치중하는 내용은 자칫 그림이나 예술을 일반인들에게는 먼 현학적 예술로 격리시켜놓을수 도 잇다.
하지만 그의 지식이나 그림에 관한 철학은 매우 뛰어나다. 예술은 예술로 다루어야지 그의 책은 예술을 철학으로 다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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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문외한이다. 일전에 지인을 따라 미술관에 간 적이 몇 번 있다. 당시 작품 한 점마다 10분 이상 서 있는 지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술관 전체를 둘러보는데 나로서는 30분이면 충분했다. 언젠가 고흐 특별전이 열릴 때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그림이 무엇이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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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 있어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독창적인 미학자인 진중권은『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주목하고 있다. 이유인즉 이 작품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작품을 놓고 2~3가지 충돌이 있어도 무려 28가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에 무게감이 실렸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해석의 바벨탑’이었다. 조르조네의 <폭풍우>가 논란에 휩싸인 까닭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풍경이 아직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보다 풍경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양 미술사에 있어 이 작품을 ‘풍경화’ 장르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역사화’란 장르로 해석된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역사화란 이주헌이『서양화 자신있게 보기』에서 말했듯 ‘엄밀히 말해서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특별히 영웅적인 모범이나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덕을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 용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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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씨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교양독자를 위한 제대로 된 교양서적이라고 할 만 해요. 이 책은 그가 관심을 가진 12개의 미술 작품에 대한 설명입니다.
머리말에 보면 그림을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을 몇 가지로 나눠놓고 있는데 대략 이런 식입니다. 아름다움을 즐기는 방식, 작품을 통해 지적 자극을 받는 방식, 영혼의 울림을 경험하는 방식..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감각적인 기쁨을 얻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때로는 깊은 감동을 받는 일이죠.
저자는 주로 지적 호기심을 느끼고 풀어나가는 방식의 감상을 좋아한다고 하네요.. 이 책도 거의 그런 식으로 그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학과 철학이 전공인 저자에게 딱 맞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어려운 감상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단박에 명화라고 할만한 대표적인 미술 작품만 해도 수백 점이 넘고 그 각각의 작품은 역사와 사회 흐름, 문화적 배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지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기초 정보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이 책만해도 단 12점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위해 한권 분량의 주변 지식이 필요했죠.. - 읽어보면 그 조차 추리고 추린 양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어떤 작품에 대해 모범 답안과도 같은 해석이나 감상법이 있다고 가정하는 건 옳지 못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기준도 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게 맞는 일인가 하면 그도 또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의 방법을 맛보기로 보여주면서 다양한 그림 감상의 한 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가치는 여기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진중권씨의 글 서술 방식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습니다.(하지만, 그 분의 행동과 용기는 멋져요) 언제나 지식인의 '티'를 꼭 내는 글을 쓰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들어 용어나 문장 표현에서 철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이해하기 힘든 논리나 뉘앙스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이건 당연하기도 하지만 좋은 학자들 중에는 일반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경우 쉽고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에 비해서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미학 오디세이]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이 책에도 그대로 이어지네요. 저자의 전공이 아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 같은 책이 더 읽기 좋았습니다.
어쨌건 이 책은 재미있게 잘 쓰여졌습니다. 책 편집도 아주 좋아요.. 그림도 선명하고 인쇄 질도 훌륭합니다. 특히 초록 바탕에 붉은 글자로 쓰여진 중간 표지는 너무나 예쁘네요. 인쇄나 종이 질에 비해 책도 무겁지 않아서 - 요즘 책은 비싼 가격에 핑계를 대기위해 종이를 쓸대 없이 무겁게 만들고 있어서 - 들고 읽기에도 좋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감상하는 일도 좋아하고 즐겨 하는 제 생각에... 좋은 그림 감상에 기본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진지한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그림의 역사나 의미를 모두 잘 알지 못하더라도 그림을 보는 자신의 느낌에 집중하고 솔직하게 마음으로 뭔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로써 훌륭한 감상이라 생각해요. 이게 말은 쉽지만 참 어려워요.. 보통은 지식이나 분위기나 주위 사람들 생각에 휩쓸리기 쉽거든요.. 그림이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처럼요...
미술관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세요. 단 저자의 박식함(?)은 그냥 그림 즐기기의 한 방법일 뿐이라고 꼭 기억하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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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 [명사] 교수형을 받은 사람의 목을 매어 죽이는 대(臺). 또는 그 장치
교수대 라는 말을 많이 듣고 많이 써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또 다 읽고 나서도 교수대와 사형대의 의미가 혼동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궁금했던 바, 정확한 뜻을 다시 찾아본 것이다. 100분토론 최다출연(?) 에 빛나는 진중권 작가를 예스24-롯데시네마 강연회에서 만나기 전만해도 - 누구나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적지 않겠지만 - 강렬한 인상과 거침없는 입담의 소유자 일 것이라는 나 나름의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누군가 그랬듯이 사람이 희망이라고 했듯이 진중권 작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또 다른 희망적인 단초를 내게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엄청난 무게의 배낭 (정말 배낭이었다)을 짊어지고 등장했던 진중권 작가에게서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끼기는 했었지만 교수대 위의 까치를 보고 나서 외형적으로 알려진 비평가 모습 못지않게 세심한 면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수대 라고 하면 중세 고위관료들의 죄를 대신해 교수형에 처해져야 했던 민초들의 억울함이나 몹쓸 운명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곤 한다. 얼핏 그림의 곳곳에 숨어있는 민화 스러운 부분들을 본다면 춤을 추는 사람, 큰 일을 보고 있는 사람 등에서 평온한 민생을 느낄수도 있겠지만, 실은 이런 것들이 모두 사연이 있고 의미가 있는 장치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까치가 우리나라에서와는 반대로 흉조에 속한다는 설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역시 집권층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의식이 숨겨져 있는 이 '교수대 위의 까치'와 같이 전체적으로 12 점의 그림이 소개되고 있다. 그 시대의 사회상, 독특한 문화적 특질 등을 그림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중요한 것은 의외의 것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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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림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미학자인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도 이미 읽어봤다. 이 책은 정말 독창적인 그림읽기였다. 다른 책들과는 좀 달랐다.
기존의 미술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그림에 대한 정보전달과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 책도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다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해석이 매우 철학적이다. 게다가 해석에 사용한 언어 자체도 철학용어인 것 같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진다.
다행인 것은 그가 소개하는 그림들이 상당부분 유명한 화가의 잘 알려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한다면 다른 해석가의 다양한 해석도 찾아 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 히에로니무스 보슈, 피터 브뤼헐, 티치아노 베첼리, 조르조네, 프란시스코 고야... 언급된 작가들은 그림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수십 번은 접했던 이름일 것이다.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그림에 대해 그런 독창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같은 작품을 놓고 해석이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그림을 놓고 수십 가지의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그림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그림을 느끼는 마음이 깊어질 때, 나도 그림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근거없는 해석을 할 생각은 없다. 그림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감상을 거친 후 내 생각을 적어 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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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는 관련없는 말이지만 올해 들어 부쩍 전자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만큼 타블렛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에는 누구 말마따나 종이를 한장 넘기는 손맛, 새책을 손에 잡았을때의 나무냄새를 맡으며 책을 보는 재미가 없는 전자책이 과연 종이책을 대체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샌가 요즘은 읽는 책의 1/5~1/4정도를 전자책으로 볼 정도로 그 시장이 성숙해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아직도 여러 문제들이 많지만.
내머리속에 어리석음의 돌이 굴러다니고 있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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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진중권 교수를 네 번 만났다.
이 책, 교수대 위의 까치. 미술에 문외한인 나이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회화를 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범례적으로 말해주는데, 그게 여러 분야와 맞물려 꽤나 흥미진진하다. 푼크툼.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사용한 개념까지 알게 되는 덤까지. =================
이건 참 아이러니하다. 진중권은 (강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를 더욱 사로잡고 휘어잡았다.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진중권에 대한 ‘푼크툼’. 푼크툼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자세히 나오지만, 쉽게 말해, 필(feel)이 꽂혔다는 거다. ‘진중권’, 그 이름을 잘 모르던 사람까지 꽂히게 만든 마술적인 힘. 타의에 의해 ‘사라진 주체’가 됐지만, 개별적이고 고독하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진귀한 경험. 알다시피, 지금 TV는, 지상파나 케이블이나 상관없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완전 대세다. ‘진짜 리얼’에 대한 불신도 커지곤 있지만, 리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브라운관 속 리얼리티는 몸집을 키우고 있다. 특히나 케이블은 연예인들만의 리얼을 넘어, 일반인들이 종횡무진한다. 시청률은 덤이다. 뉴스를 만들고, 이슈가 된다.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감도 좁혀진다. 누군가의 말마따나(씨네21 이다혜), ‘리얼은 가짜 같아지고 가짜는 리얼 같아진다. 리얼리티쇼의 재미는, 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진 교수의 임용탈락은 리얼리티쇼 같다. 진 교수는 진짜 잘린 것일까. 그건 리얼일까. 헷갈린다. 이라크전에 대한 보들리아르의 말(“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처럼 대중에게 더욱 익숙해진 그를 보자면, 현실(리얼리티)의 자리에 가상(가짜)이 들어와 있는 것? 지난 18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관에서 열린 45번째 ‘아름다운 人터뷰’에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초대됐다. 최근 출간된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의 7장에 실린 ‘사라진 주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롤랑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이 기록은 중앙대 강단에선 사라졌지만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출몰하는 진 교수가 ‘왜 대중을 사로잡을까’에 대한 작은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꽂히면 푼크툼, 아니 진크툼(진중권 푼크툼!)이고, 안 꽂히면 말고.
책의 콘셉트는 ‘낯설게 보기’다. “그림을 보다보면, 표준적인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이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사람을 확 사로잡기도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왜 저러지? 왜 저렇게 했을까? 그런 그림을 모아보자고 해서 열두 꼭지를 모았다. 사실 더 있었다. 쓰다 보니 숫자에 대한 미신도 있고, (웃음) 열두 꼭지로 만들었다.” 또 이날 주제는 타의로 중앙대를 떠나게 된 그를 위해 학생들이 마련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었다. 강단에서 사라지게 된 교수가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강의가 화가의 자화상을 다룬 ‘사라진 주체’라니, 재밌지 않나. 이건, 리얼인가, 아닌가. 강연을 엿보고 판단하시라. 진중권, 푼크툼을 회화에 꽂다 이번 책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빌린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스튜디움(studiun)과 푼크툼(punctum)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로 사진을 보는 것이 스튜디움이다. 우리는 신문, 내셔널지오그래피, 광고에 등장한 사진 등을 보면,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별다른 예외가 없다. 그것이 스튜디움이다. 반면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것이 푼크툼.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 없다. 사진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우발적이고, ‘절대적인 우연효과에 의해 발생한’(롤랑바르트) 개념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 잘 나와 있다. 수잔 손탁과 함께 묶은 『사진론 : 바르트와 손탁』에서도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스튜디움.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스튜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튜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은, 푼크툼. “두 번째 요소는 스튜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튜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그러니까, 푼크툼은 찌른다. 개별적인 나를 찌른다는 것.
진 교수는 롤랑 바르트를 ‘찌른’ 두 개의 예를 제시한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어릴 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이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왜 나를 사로잡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마술적인 힘, 사로잡는 힘을 푼크툼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임스 반 데어 지(James van der Zee)가 흑인 중산층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바르트는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의 벨트에 꽂힌 거다. 즉, 사진 주제와 상관없는 디테일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러나 이는, 사진의 개념이다. 피사체가 있어서, 지표성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푼크툼이다. 회화에는 기본적으로 피사체가 없기 때문에, 회화에 쓰기는 문제적 개념이라고 진 교수는 지적한다. “푼크툼은 향수적이다. 노스탤지어. 그게 얼마나 보편성을 가지겠나. 한편으로 유아론적이다. 나한테만 와 닿는 거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미학이 있다. 절대적 우연은 예술과 미학이 될 수 없고, 수용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푼크툼을 버리자는 말도 나온다.” 그럼에도, 진 교수는 푼크툼이 버리기엔 참 아까운 개념이란다. 어떻게든 푼크툼을 살리고 싶다. “경직되고 좁은 것을 완화해서 나만이 겪는 체험이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20여 년 전, 친구의 집에서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에 꽂힌 적이 있다. 또 아우구스트 잔더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사회과학적 사진을 찍고, 특정주제만 찍는 유형학적 사진의 창시자다. 그 사람의 사진은 독일사회를 읽어내는 사진이다. 그 사람의 <석탄배달부>라는 사진이 확 들어왔는데, 3년 뒤 다른 작가의 같은 주제로 찍은 사진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한테 꽂힌 게 다른 사람에게도 꽂힐 수 있구나! 푼크툼도 전달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밀히는 안 된다. 회화에는 피사체가 없으니까.” 진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푼크툼의 개념을 완화시켜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해보자는 것이다.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적으로 보는 순간, 보편적으로 읽게 해주는 그런 코드가 아닌.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걸린 그림 가운데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냥 훌쩍 지나치기도 한다. 그러니까, 『교수대 위의 까치』는 범례적인 책이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어. 한번 해 보라는 식의. 어떻게 접근하면 되냐고? 진 교수의 팁은 검색을 통한, 경계를 넘나드는 길 찾아보기. “99.9% 구글에서 정보를 찾았다.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등 다양한 언어로 나온 자료를 통해 이 책을 썼다.” 자화상의 어떤 역사 이날의 주제로 들어가자.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 듣보잡이라고? 맞다. 알려진 작품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자화상> 밖에 없을 정도란다. 미술사를 찾아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도 아니다. 그런데, 진 교수는 꽂.혔.다. 그러니까, 푼크툼.
여기서 잠깐 자화상의 역사를 짚어보고 가자. “자화상은 르네상스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중세 때 화가는 개성이 없었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듯, 중세까지 화가는 장인의 의미였다. 최초의 자화상은 역사화에 자신을 배치했다.” 그림의 일부이자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화가 자신. “초기 르네상스의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이 묘사하는 신성한 사건에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령 아뇰로 가디(Agonolo Gadi, 1350~1396년)가 그린 산타 크로체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보자. 화면 왼쪽에 테두리에 몸이 반쯤 잘려 나간 채로 한 사내가 서 있는데, 그 사내의 프로필은 화가가 그린 가족의 초상 속에 등장하는 본인의 옆얼굴과 일치한다.”(pp. 139~141)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필리피노 리피의 자화상이 바로 그것. <시몬 마구스와의 논쟁과 베드로의 책형>의 경우다. “누가 화가인지 찾는 방법이 있다. 누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그게 화가다.”
독립적인 화가의 자화상이 나오는 것은 타치아노와 바사리다. 다만 화가라는 사실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림의 왼쪽 끝에 아주 소심하게 붓이 들려 있음을 보여줄 뿐. “타치아노의 <자화상>을 보자. 옷이 화려하다. 나도 살만큼 산다는 거다. 사회적 지위를 강조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인양.” 물감을 묻혀가며 그림을 제작하는 공인(工人)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닥 찾아볼 수가 없다.
한 걸음 더 가보자.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담았다. “카라치에 와서야 ‘나는 예술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라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굼프의 자화상 그렇다면, 굼프의 작품은 독창적이었을까. 카라치의 다른 그림, <이젤 위의 자화상>을 보자. “카라치의 이 그림에는 화가(얼굴)가 없다. 주체가 없다. 저 멀리 창가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인물이 서 있다. 이건 재현에 대한 그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메타적인 그림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준다. 매우 현대적인 그림이다. 굼프는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굼프는 카라치의 영향을 받았다.”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회화의 자의식을 탐구한 셈이 됐다.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카라치의 <이젤 위의 자화상>이나 굼프의 <자화상>은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의 문제. 복제가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보들리아르가 얘기한 개념을 17세기 화가들이 다룬 셈이다. 현실적 주체가 사라지면서 복제의 복제가 되고, 모방의 모방이 된다. 현실보다 재현이 더 현실적이다. 보들리아르는 말했다.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의 끔찍함이 사라지고 게임 같은, 현실의 자리에 가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1600년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그 정서가, 바로 바니타스, 즉 헛되다(Vain). 데이비드 데일리의 작품이 이를 잘 드러낸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17세기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잖나. 삶이라는 게 가상이고, 연극이다, 허무하다, 같은 정서가 지배한 거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을 보면, 그림을 그린 베일리는 그림 속 사진에서의 모습일 때, 67세인가 그랬다. 나이가 많을 때 그렸는데, 그림은 젊을 때의 자신이 현실의 사진을 들고 있다. 뒤에 있는 모래시계, 해골, 쓰러져 있는 물잔, 꺼진 촛불은 바니타스, 즉 인생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가상과 현실이 뒤바뀌었다.” 자화상은 진짜 나일까 진 교수는 지적한다.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은 진정한 자화상이 아니다.” 눈을 빼서 보지 않는 이상,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은 타인이 자신을 본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자화상은 실은 자기가 자기를 본 모습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화상은 결국 타인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p.151) 이에 에른스트 마흐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분석』에서 <거울 없는 자화상>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거울을 활용하지 않은 자화상이다. 단 하나 문제는, 얼굴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 이 그림에서는 소파에 길게 누운 몸과 자신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얼굴의 일부가 드러나긴 하는데, 바깥을 향한 왼쪽 눈의 째진 틈과 그 사이로 보이는 코의 왼쪽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그릴 때는 모종의 자기기만이 들어간다. 블로그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데,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이상이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거울을 볼 때의 생얼(민낯)이 진짜다. 일종의 허위의식인 거다. 정체성을 이상화할 때, 더 나은 나를 추동할 수도 있으나, 자기소외를 불러오기도 한다.” 모종의 분열증이 끼어들게 되는 셈이다. 책에서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거울 단계’를 통해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은 이상적 자아를 투사해놓고 현실의 자아의 불완전함을 보상 받으려 한다.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상으로 구성한 이상적 자아를 현실의 무대 위에 연출하려 한다. 그 충동이야말로 어쩌면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성립시키는 모티프일지 모른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통해 자의식과 정체성을 주장할 때, 그들 역시 거울에 자신을 비춰놓고 그 이상적 자아를 화폭 위에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p.151)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초상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17세기 고전주의 인식론의 표상이며,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가 자립성을 띠는 것은 17세기 바로크 세계 감정의 표상이다. 초상(재현)이 화가(주체)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립하는 데에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즉, 화가들은 다른 사물을 그릴 때와 달리 자화상을 그릴 때에는 거울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화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지도 모른다.”(pp. 148~150)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의 자화상
진 교수는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설명한다. 굼프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는데,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거울을 두 개 이상 쓰지 않는 한. 르네 마그리트의 <재현 금지>가 이를 잘 표현했다. “일종의 유체이탈인데, 착란증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17세기에 일반적이었다. 제재가 아닌 재현에 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대표적이다.” 즉, 이는 OBE(out-of-body experience).
세 번째 유형은, 내가 나를 보는데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다. HAS(heautoscopic)로 일컬어지며,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 그렇다. 거울 속는 두 인물이 있다. 그런데, 누가 화가인지 헷갈린다. “이 그림은 이유가 있다. 화가는 건축가와 한 몸 같은 친구였다. 건축과 회화는 디자인(이탈리아어로 ‘disegno’)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한 몸이다시피 묘사한 것이다.” 느닷없이 왜 신경생리학이냐고? 굼프의 자화상은 그러니까, 세 번째 유형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현실, 거울, 화폭 위에서 3중으로 분열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현실의 모델은 얼굴이 없다. 거울 속의 얼굴은 시선을 회피한다. 오로지 캔버스 위의 얼굴만이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관객의 주목을 자기한테로 잡아끈다. 복제의 복제, 모방의 모방에 불과한 캔버스 위의 얼굴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현실성을 띠는 셈이다.”(p.157)
굼프의 두 자화상의 결정적 차이이자 결정적 장면은, 눈이다. 거울에서 드러나는 눈의 위치가 다르다. 사각 포맷의 자화상은 거울 속 얼굴은 화가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원형 포맷은 다르다. “분명 거울을 보는데, 눈을 안 맞추고 무시한다. 얼마나 섬뜩하나. 시선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관객과 눈을 맞추는 것은 캔버스의 것이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다. 주체가 사라진 것은 17세기에도 있었고 굼프 혼자 한 것은 아니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굼프의 작품에 꽂힌 것은 이런 아주 작은 디테일 때문이다. 이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 그림은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범례적으로 보여준 것.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이날, 나는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왠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독자적으로 표정을 낼 것 같아서. 복제가, 시뮬라크르가 나를 압도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살짝 궁금하다. 이 글을 쓴 나는 리얼일까.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리얼일까.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거꾸로 시대는 과연 리얼일까. 우리는 언제쯤 다시 거울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울을 통해 인민의 아픔과 소외를 다독이고 눈 맞춰야 할 통치자가 등을 돌린 이 현실, 리얼일까. 인민에게서 등 돌린 통치자가 거울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등을 돌리는 모습이면 어쩌지. 사라진 통치자. 사라진 인민. 아, 이런 푼크툼의 순간이라면, 정말 싫다.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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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씨를 좋아한다. 작자로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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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점에 대한 기존의 해설과 작가 자신의 의문을 해설한 책. (작품은 항상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진실로 존재하고 살아있게 된다는 말에 백프로 공감-) 진중권의 박학다식이 빛난다. 미학 오디세이를 좀 찾아 읽어봐야 겠단 생각이 마구 들게 한 책.
펼친지 하루 만에 다 읽어낼 정도로, 소재 자체는 가볍지 않을지 몰라도 술술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 보는 그림들이 흥미로웠다. 주저없이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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