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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는 책으로 읽기전에 이미 영화나 다른 형태로 너무나도 많이 접한 상태였다. 어렸을 적에 TV 만화에서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걸고 모든 지식을 얻는다는 설정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을 수가 없었다. 지적 욕구를 느끼던 시절에 나에게 그런 제안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를 여러번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만큼 파우스트라는 책의 의미는 나에게 상당했던 듯 하다. 그러나 줄거리가 너무 익숙하다 보니 실제 책을 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금번에 읽은 책도 구매한지는 10년도 넘은 책이다. 그동안 정독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으나 매번 중단을 했던 기억이 크다. 그만큼 문체가 익숙치 않고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단순 줄거리를 파악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기에 이번에는 인내를 갖고 끝까지 읽어 보기로 했다. 제자리를 맴도는 독서라는 것이 참 고통이기도 했고 중간에 몰입이 되기도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결말을 낼 것인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지? 그리고 난 또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건지?의 혼란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부터 읽는 고전 소설들을 다시금 볼 수 있을지 모르기에 마지막 접한다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읽었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는 내 힘이 부친다는 느낌이 든다. 다 읽고 나서 작품론을 다시 꼼꼼히 보고 웹을 뒤져서 작품 해설을 다시 본 이후에야 조금씩 전체적인 그림이 재해석되었을 정도이다. 줄거리는 너무 익숙하지만 내재되어 있는 이념(?)은 상당히 어려운 듯 하다. 책 표지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얼굴이 서로 뒤집혀져 있는 것이 묘한 뉘앙스를 준다. 인간에게는 사실 두가지 모습이 다 있는 것이고 중세 시대의 괴테로서는 종교적인 승화라는 결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중간 중간 나오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들이 비슷하거나 다르게 나오기도 하고 웅대한 스케일과 신비한 문체라고 알려져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사실 쉽게 익숙해지기 어렵다. 나같은 저질 감상력으로는 몇번을 정독에 정독이 필요한 소설인 듯 하다. 4/11/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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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W. v. 괴테 / 박환덕 옮김 / 범우사 지난번에 읽은 ‘카라마조프의 형제’에 나오는 이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언뜻 ‘파우스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두 인물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악마와의 대화를 한다는 점에서 의혹이 생겼다. 어떻게 파우스트는 악마를 이길 수 있었는가? 더욱이나 메피스토펠레스는 끊임없이 파우스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는데 말이다. 또한 그 계약 내용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 순간에서 멈추고 싶다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 과연 주와 악마사이의 계약인데 이것이 파우스트의 순수한 신앙심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의 신앙심이 돈독했다면 악마의 유혹을 애초에 거절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의문점은 이 글이 파우스트 초고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에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었다. 우선 ‘파우스트’가 ‘파우스트 초고’의 내용과 다른 부분은 ‘파우스트 초고’에는 지령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지만, ‘파우스트’에서는 지령대신 주(主)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와 주의 충복인 파우스트에게 욥처럼 시험을 들게 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경쟁을 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더군다나 초고와 달리 파우스트는 산문이 아닌 운문의형식이어서 자칫 주와 메피스토펠레스를 같은 위치에서 바라볼 뻔 했다. 하지만, 둘은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주의 신하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여기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이 사랑하는 인간에게 시험을 내려 자극을 하고, 더 굳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이 생겼다.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인간의 욕심이란 것은 한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게 부귀, 영화,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주어도 인간은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은 도 가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난 ‘순수한’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신앙심과 별개로 인간의 본성이 아닐런지. 파우스가 말하고 있는 것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구출될 수 있다고 했는데 파우스트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끊이없이 고민하고, 공허함과 조악함을 느끼며 그를 쫓는 게 아니라 멀어지려 했기 때문에 최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직 신과 악마, 천상과 지상의 문제는 나에게 너무 많은 문제를 던져 주고 있는 듯하다. 나도 파우스트처럼 끊임없이 이 문제에 대해 노력하고 구하면 구원에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구원이란 자체는 있는 것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파우스트적인 살아가며 고민의 귀로에서 결단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오직 끊임없이 노력하자. 구출이 보이는..영광이 비치는 그 날까지~! |
| 파우스트는 쉽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청소년문고판으로 쉽게 씌여진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원전을 번역한 것이다. 독문학과 독일역사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파우스트>안에 녹아있는 방대한 량의 지식을 한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괴테이전부터 전해오던 파우스트설화, 메피스토펠레스와 신의대화, 팔푸기스의 밤이라 불리우는 축제, 수많은 마법, 파우스트의 제자 바그너가 만든 인조인간, 그리스의 이상적인 남여상인 파리스와 헬레나. 백발의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춤어라, 너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까지 이 책에는 독일정신의 배경이 넘나들고 있다. 파우스트의 마직막 외침으로 메피스토펠레스와 신과의 내기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승리로 끝난듯 보인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를, 우리는 구출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파우스트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천사들의 합창은 구원의 정당성을 문제로 제시한다. 목적이 신성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혹은 수단과 방법도 신성해야 하는가? 닭과 달걀의 선후문제처럼 답을 찾기 힘든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파우스트인가? 파우스트는 노력하는 동시에 방황하는 학자다. 그의 제자 바그너의 경우, "귀중한 고서를 펼치게 되면/ 천국이 당신한테로 내려 오는 것처럼 느겨질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보듯 지식에 대한 탐구열외에는 어떠한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른다. 반면 파우스틑 지식에 대한 탐구열과 불타는 애욕이 자신의 영혼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파우스트는 괴테 그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모습일 것이다. 정신적 깊이와 독창성, 지적 추구의 다양성으로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문학의 중심인물로 추앙받았지만 그러한 존경 뒤에는 인간적면으로의 괴테가 존재하는 것이다. "영원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문구에서 괴테의 구원상을 엿볼 수 있다. |
| 이책은 사람의 이기주의적 내면을 잘 나타낸글이다. 장점이라면 작품성으로 따지면 꼭 한번 읽어봐야하는 점이지만 단점은 역시나 전개방식이라던가 내용의 흐름이 대체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이유로 이책을 읽기전에는 반드시 어떤 내용인가를 알아두고 읽기시작해야할것이다. 더군다나 이 범우사의 파우스트는 상-하 두권으로 나눠져있기 때문에 지루함감이 없지않아 있다는 점이 또하나의 단점이다. 파우스트같이 전개가 긴작품은 필히 지루함을 덜느끼게 하는 그림이 들어가 있는 책을 골라야 할것같다. 이 책은 학생때보단 사회생활을 하면서 휴식시간에 짬짬히 읽어야 안질리고 오래볼수있는 그런 작품이다.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나같이 학생때 빨리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데 읽고나니 중고등학생들에겐 별로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