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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늠하는 저울추는 항상 동일한 무게로 당신의 삶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때로는 과도하게 무거운 저울추로 당신의 삶을 찍어 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저울추로 당신의 삶을 들뜨게도 한다. 그것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항변해도 어쩔 수가 없다. 당신의 삶을 되돌리거나 새로운 환경에 떡하니 내놓을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일러 '운명'이라거나 기타 명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불경한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힘겨웠던 개개인의 지난 삶에 대한 분풀이나 보상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대체불가의 크고 작은 불행에 대해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뿐이다. "치료의 80퍼센트는, 그 이상은 아닐지 몰라도 바로 너야. 환자라고. 이제 의사들한테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 건 그만둬. 의사들한테는 네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필요한 건 완벽한 의사가 아니야. 그들도 사람이야. 우리 나머지랑 똑같이 결점을 지닌 인간. 너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해. 나는 록산의 솔직함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네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 의사들뿐 아니라 네 가족들도. 록산이 다리를 꼬고, 왼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기 시간을 나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p.365~p.366) 수잰 스캔런의 에세이 <의미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녀가 겪었던 이런저런 삶의 불행에 대해 조용한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1992년,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던 작가는 극심한 식이 제한과 자해 끝에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장기 입원이 정신의학의 표준 치료로 여겨지던 시절이었고, 의사들은 환자의 증세를 과거의 외상과 연결하려 애쓰던 시기였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작가는 가족들의 침묵 속에서 애도의 과정도 없이 성장했고, 뉴욕으로의 이주와 식사를 중단하겠다는 결정, 그리고 첫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의 기원이 당시 의사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 하나에서 발원했을까. 작가의 기록은 정신질환을 겪었던 암울했던 시기의 회고록이자 광기와 의학에 대한 문학적 전통을 탐구한 작가 나름의 고찰이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고요함과 하나에 집중하는 정신의 조합이다. 하나의 문제와 함께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p.115) "그 시절, 예술은 하나의 빛이었다. 나에게 통곡과 그리움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경계선 위에서 혹은 경계선 바로 너머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256) 총 3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작가는 작가 개인의 사적 기록과 자신이 탐구한 여러 문학인으로부터 옮겨 온 적절한 인용,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과 불합리한 사회 인식에 대한 비판 등을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문학비평의 한계를 회고록으로 확장하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던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하여 여성 작가의 계보를 이었던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줄리아 크리스테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재닛 프레임, 시네이드 오코너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내재했던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질환의 길고 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서가 나를 구원했다. 어리석게 들릴 수 있는 말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하기도 하다. 과대망상이라거나 낭만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고, 더 심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일 수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고, 나에게는 진실이었다. 만약 그날 밤 내가 그 서점에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낭독을 듣지 않았고,『분노한 여자들』을 읽지 않았다면, 오드리 로드를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p.431) 작가가 자신이 겪었던 정신질환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구원자는 수년간 복용한 약이나 비싼 상담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작가에게 삶을 뒤흔드는 욕망의 언어를 제공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나 의료의 틀이나 형식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오드리 로드의 '암 일기'를 읽음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기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했던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분을 이쯤에서 포기하고자 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존재했던 자신의 문장,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 순간에 우연히 읽었던 한 권의 책, 어느 광고판에서 우연히 읽었던 하나의 문장, 또는 늦은 밤 어느 포장마차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살리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문장을 다시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이 이따금 눈송이처럼 흩날리곤 한다. 등산로에도 켜켜이 쌓인 낙엽으로 인해 지면의 고저를 가늠하기 어렵다. 비탈길을 오르는 등산객이 가랑잎을 밟고 미끄러지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의 인생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낙엽만 무성한 허방을 밟을 때도 있고, 때로는 길 위에 넘어져 피를 철철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목소리, 인생을 비추는 등불과도 같은 그 하나의 문장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문장을 되찾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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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지급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그냥 한 편의 에세이로 생각을 했었다. 막상 책을 펼치면서 읽기 시작하니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현실에서 혼자서 오로지 책과 글쓰기로 긴 터널을 나온 수잰 스캔런의 이야기다. <의미들>외에 여러 책을 출간했으며 창작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는 저자의 인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책은 스스로 들어간 병원에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단순히 자기만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처럼 정신질환으로 보냈던 여성 작가들과 수잰이 병동에서 만난 이들을 말해주고 있다. 왜 들어가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평범한 삶에서 살지 못하게 했을까? 이런 의문점은 차차 책을 읽을 때 해소가 된다. 누구나 마음의 병은 갖고 있다. 그 무게가 다를 뿐 완벽한 행복을 가진 삶은 없다. 수잰에게 있어서 9살에 암으로 떠난 엄마가 바로 삶의 상실이었다. 의사 아버지와 간호사 엄마 그리고 형제를 두었던 그녀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삶과 그 후의 삶으로 나뉘어졌다. 책 곳곳에서 느껴지는 상실감은 엄마를 잃은 슬픔을 넘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사라진 엄마의 자리를 애절하게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병동에 있을 당시 처방받은 약에 대한 의견과 의사들이 환자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행한 행위가 결코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자신들의 판단이(의학적 병명)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현재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와 실비아 두 사람이 가진 상실감은 의학적으로 치유할 수가 없었다. 신경증 환자가 유달리 여성이 많았다는데 저자는 글쓰기로 치유할 수 있음에도 오로지 강제 휴식을 강행했던 의학자들을 비판한다. 수잰이 병동에 있을 때에도 환자들은 거의 여성이었고 대부분 의사들은 치료하기 보단 약물을 투입함으로써 상태가 달라지기를 연구했을 뿐이었다. 수잰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책과 글쓰기였고 자신을 붙잡아 준 것은 소설가들이었다. 실비아 프리실라의 삶을 보면서 자신을 투영했고, 뒤라스의 소설 [연인]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서 삶을 돌아봤다. 상실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도, 그렇다고 위로 받을 수 없었지만 저자는 여성 작가들의 삶에서 힘을 얻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주지 않을 때 사람은 길을 잃게 된다. 때론 길을 찾아서 새로운 길로 가기도 하지만 영원히 잃어버려 흩어져 버린다. 그녀의 친구 패트릭 처럼 말이다. 책은 수잰 스캔런의 이야기지만 오로지 그녀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병동에서 만난 동료(같은 환자들), 그녀를 유일하게 도와준 의사, 자신처럼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글을 통해 고통을 표현한 여성 작가들 그리고 수잰 스캔런의 가족을 이야기한다. 그동안 에세이를 읽어봤지만 읽은 내내 마음이 먹먹했던 건 이 책이 유일하다. 최근 <글쓰기는 스타일이다>를 읽으면서 고통이 글쓰기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다 했는데 [의미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낄 수밖에 없었던 도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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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약이 아니라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문학과 글쓰기가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되고, 상처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가는 법을 보여준다. 읽고 나면, 회복이 꼭 완전히 나아지는 게 아니라, 상처와 함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걸 알게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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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무 살의 수잔 스캔런이 뉴욕 주립 정신의학연구소의 병동 문을 처음 통과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거기서 3년을 보내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1992년, 프로이트 사진이 간호사 스테이션을 내려다보던 그곳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공간이었다. 프로작이 등장하고 정신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던 시대에, 그녀는 여전히 히스테리아 진단을 받았고, 의사들은 그녀의 자살 시도를 설명할 "마법 같은 트라우마"를 찾아 과거를 파헤쳤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 멈춰 섰다. 병동의 여성 환자들이 항정신성 약물로 인한 지발성 운동장애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 스캔론이 자신의 고통을 의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연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을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정말로 그때보다 나아진 것일까? 스캔런은 자신이 "아픈 것을 더 잘하게 되었다"고 쓴다. 돌봄을 받기 위해 질병을 수행하는 법을 배웠다고.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것은 단지 1990년대 정신병동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고통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고, 포장하고, 때로는 과장하거나 축소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의료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 그것은 케어를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처럼 보인다. 스캔런은 전통적인 회복 서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리학의 시작점을 계속 찾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뉴욕으로의 이사일 수도, 첫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의료 기록이 제공하는 깔끔한 이야기—우울한 젊은 여성이 병원에 들어가고, 3년을 머물고, 의사들의 개입 덕분에 나아진다—는 거짓말이다. 아니, 적어도 불완전한 진실이다. "나는 세부사항들을 원한다"고 그녀는 쓴다. "공식적인 언어, axis 1이나 axis 2, 약물과 증상의 목록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병원에서의 우리의 길고 지루한 날들과 해들의 이야기다. 내가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일상이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삶을 진단명과 증상 목록으로 환원하는지 생각했다. 의료 차트는 효율적이고 필요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텍스처, 그들의 일상,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질감을 담지 못한다. 책은 그 의료 기록에 대한 수정이자 반박이며, 무엇보다 증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진단명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고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스캔런이 퇴원한 1995년, 그 병동은 영구 폐쇄되었다. 그리고 1997년, FDA가 제약회사들의 직접 광고를 허용하면서, 정신질환자들은 "소비자"가 되었다. "당신에게도 졸로프트가 맞을까요?" 라고 묻는 광고들이 쏟아졌다. 화학적 불균형 이론—아직도 논쟁적이고 반복적으로 반박되어 온—은 엘리 릴리와 다른 제약회사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나는 2004년, 열아홉 살에 처음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 당시 내 주변에는 그런 약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안 먹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우울증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생물학적 질병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이전의 "성격적 결함"이라는 관념을 반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을 덜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진보다. 하지만 스캔러이 지적하듯, 약이 작동한다고 해서 화학적 불균형이 우울증의 원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약들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가? 202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29%가 평생 동안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항우울제 사용은 증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다. 이 역설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질환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개인적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정신질환은 세상의 어떤 것이 아픈지를 보여주는 거울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 거울을 약으로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캔런을 구원한 것은 약도, 정신분석도 아니었다. 그것은 독서와 글쓰기였다.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스, 오드리 로드, 이 작가들은 스캔론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넓은 틀을 제공했다. 로드의 <암 일기>는 "지배적인 의료 모델의 질병과 회복 서사에 맞서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정상성 바깥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슬픔이 삶의 장애물이 아니라 당신을 만드는 것의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과민했다. 평생 그렇게 들어왔다. 그것은 약점이었다. 하지만 독서에 있어서는 그것이 힘이었다. 초예민함." 우리는 너무 자주 민감함을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본다. 하지만 그 민감함이야말로 세계를 더 깊이 느끼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아름답게 쓸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아닐까. 스캔론은 자신의 "다공성"을 약점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자산으로 재해석한다. 애니타 힐이 클래런스 토머스를 고발하는 청문회를 병동에서 지켜보며, 스캔런은 깨달았다. "내가 살 수 있는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조 바이든과 클래런스 토머스 같은 남자들이 권위를 가진 세계, 그리고 문학의 세계." 그녀는 문학을 선택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섬뜩하다. 현재의 스캔론이 새로운 의사를 만난다. 그녀의 파일을 본 의사는 놀라며 말한다. "이건 매우 드문 경우네요. 요즘은 환자들을 그렇게 오래 입원시키지 않아요. 상황을 더 악화시키니까요." 스캔론은 안다고 답한다. 그녀가 그것을 살았으니까. 15분 진료가 끝날 때, 의사는 말한다. "당신이 왜 그렇게 오래 입원했었는지 정말 상상이 안 가네요." 여기서 나는 의료 시스템의 망각을 본다. 3년이 스캔런의 삶에 여전히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인 반면, 그것은 의사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스캔런은 생각한다. 만약 의사가 인문학을, 의료 역사를 더 배웠다면, 그녀를 호기심이 아닌 한 사람으로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이건 나일 수도 있다"고 스캔런은 말한다. "나는 아픈 사람과 아팠던 사람의 구분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이고, 모두 연약하다. 우리는 모두 해체로부터 한순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정상과 비정상, 정신과 광기, 건강과 질병 사이의 경계가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만큼 확고하지 않다는 인식.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어머니를 잃은 여덟 살 소녀가 슬픔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듯이, 우리 모두는 때때로 우리 안의 무언가를 말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책은 그 언어를 찾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것은 의료 차트가 아니라 문학이 될 수 있는, 진단이 아니라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언어. 그녀가 찾은 것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다. "나는 다시는 정상인이 되지 못했다. 병의 느낌을 내 시스템에서 완전히 빼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그 병을, 그 민감함을, 그 다공성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쓰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나은 약을 가지고 있지만 더 많이 아프다. 더 빠른 진단을 받지만 덜 이해받는다. 더 많이 치료하지만 덜 치유된다. 스캔런이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이다: 읽고, 쓰고, 생각하라. 고통을 의료 차트가 아닌 이야기로 만들어라. 그리고 무엇보다, 민감함을 약점이 아닌 힘으로 보라. 정신질환의 치료는 1992년 이후 변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진보인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의학이 실패하는 곳의 틈을 메우고, 더 사려 깊고 확장된 방식으로 인간 경험의 핵심에 있는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그 일에 동참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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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카고 예술학교 등 여러 대학교에서 창작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에 에세이와 소설을 발표해 온 주목 받는 작가가 어린 시절과 정신 병동에 3년간 입원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회고록이자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고백한다. "정신 병동은 정신질환을 치료도 하지만 생산하기도 하는 시스템"이라는 성찰과 동시에 독서와 글쓰기는 병원 밖 삶으로 회귀하는 여정일 수 있다고 말이 인상적이다. <뉴욕 타임즈>, <뉴요커> 등 주요 매체의 호평 속에 동시대 중요한 여성 문학으로 자리매김한 책이라고 한다. 그럴만하다. 특히 이 책은 자신의 정신 병동 장기 입원과 그로 인한 낙인의 기억을 문학 작품 읽기 경험에 깊이 겹쳐내며 써 내려간, 회고록과 문학비평을 아우르는 눈부신 에세이로 평가받는다. 공교롭게 정신질환과 관련된 책을 연이어 읽게 됐고, 지금 쓰고 있는 브런치 연재의 에피소드도 정신 질환 이야기라서 왠지 요즘 내 정신 상태가 이와 비슷하게 멜랑꼴리해서 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엄마의 삶을 대신 살아온 듯한 오리나가 '자신에게도 아침이 오겠냐'라고 묻자 효신(이정은 분)은 '어떻게 내내 밤만 있겠냐'라며 맞을 준비가 되었다면 아침은 꼭 온다고 했다. 문득 이 장면을 더듬게 된다. 그때 나는 효신의 말을 들으며 그랬다, 그럼 그곳에선 아침은 누구에게나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구나, 밤만 있는 사람도 있겠구나 했었는데 저자의 글에서 확인하는 기분이다.
주목할 것이 아무와도 여러 날, 여러 주를 얘기하거나 만나거나 하지 않아서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외로워서 그렇게 된다고 한다. 근데 그게 정말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외롭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미 기억도 희미해진 이십 년 전에 작가가 겪고 느꼈던 일들의 회고록이라지만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빠져들었다. 느낌 상 1인칭 소설 같았달까? 단지 내 귀에는 뛰어내리든 뛰어들든 뭐든 결정을 내리라고 '지금'이라는 재촉해대는 말이 들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위안 삼으면서 읽게 된다. 또, 정신병원이라는 제도적 공간에 스며들어 자신이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치료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의미들'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읽기와 쓰기가 어떻게 돌봄이 되는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런 작가의 경험이 철학이 되는 순간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그게 병원에 들어 '갔던지' 혹은 '있던지' 아니면 나와서 다시 들어가야 하는지 같은, 정신병원이 중심이라는 게 문학적이 될까? 버지니아 울프처럼? 아무튼 정신 병동에서의 삶이 그에게는 생존의 연장 선상이라기 보다 머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42쪽
과연 우리는 미쳤다는 걸 알기나 하나? '미친 여자'로 낙인찍는 사회 관습이 아닌 그의 말대로 나는 병원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머물렀던' 것이라면 그게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문득 궁금했다.
109쪽 한참을 더 읽다가 맞닥뜨린 히스테리라는 단어에 큭 했다. 앞에서 읽었던 '돌아다니는 자궁'이라는 의미가 달려왔다. 히스테리가 여성만 걸리는 정신병이었다는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버렸다.
180쪽
작가가 '미쳤다'는 프레임에 갇혀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검열하고 밝히면서 이 말도 안 되는 사회 제도적 관점에서 '고통스러운 내면'의 탐색을 통해 문학으로 펼쳐낸 점이 존경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터운 작가의 경험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깊은 위로와 공감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다소 무거운 주제와 전문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체는 술술 읽히지는 않았다. 관심에 따라서는 좀 딱딱하게 느껴져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깊은 울림을 주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정신적 고통과 치유에 관심과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푹 빠질만한, 의미 있는 책이다. #의미들 #수잰스캔런 #정지인 #엘리 #서평 #책리뷰 #도서인플루언서 #정신질환 #회고록 #여성학 #정신분석 #통찰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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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불완전함과 취약성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인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용기와 위로를 나누는 것은 서로의 결핍과 불완전함을 일정 부분 해소해줄 수 있는 심연과 어둠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의미들>은 ‘미친 여자들’이 창조해낸 문학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작가 수잰 스캔런의 여정이 담겨 있다. 실비아 플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 버지니아 울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재닛 프레임 등 여성 작가들의 문장과 자신의 경험을 교차하면서 자신만의 수잔 스캔런은 자신만의 의미를 발굴해내고 있다. <의미들>을 읽으며 문학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의미들, #수잰스캔런,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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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책과 콩나무를 통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회고록 형식의 저작이다. 다만 일반적인 기억 서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소설적인 성격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합한 소설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논픽션 같기도 하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익히 보아온 회고록의 형태를 띄고 있고 소설적 요소를 첨가했다고는 하나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독자들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회고록일 뿐인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손이 가서 찾게 되고, 읽는 내내 사색을 촉진하는 묘한 기능을 체험하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뭔가 다른 수준의 회고록으로, 혹은 지적인 자극을 주는 저작으로 만드는 것일까. 먼저 일차적으로 특색을 띄는 것은 저자의 정신적 불안과 문학적 소양이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병원에까지 입원할 정도로 저자를 괴롭힌 내적인 문제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그러나 단순히 하소연하거나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근원과 이유를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면서 자신이 가진 강점을 활용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문학적 소양이다. 과거 기라성 같았던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작품 속에서 자신이 찾는 해답을 발견하려고 애쓰고, 그 깊은 곳에 숨겨진 의미를 추출하려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성을 작동시킨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독보적인 분위기와 작품성을 취득한다. 다음으로, 위와 같은 시도를 통해 극히 개인적인 문제와 사유를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사유로 끌고들어간다는 것이 백미이다 플라스, 울프, 프레임, 파이어스톤 등 엉망진창인 삶을 산 여자들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며, 과연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그 삶들은 혼란스럽기만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구원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여기서 자살이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삶의 자연적 마감', 그러나 능동적인 '해방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격분, 거부, 분열, 혼란 등 온갖 흉한 감정들을 겪고, 게다가 자신의 삶마저 그 파괴적 영향을 받았던 여성들은 그런 광기에도 불구하고, 그 삶 속에서 자신들만의 성취를 이뤄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실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폭발적 실천이자 파괴라고 재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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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정신병동에서 보낸 시간을 회고하는 에세이. 책 소개글을 봐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인상을 준다. 볼륨감이 상당히 느껴지는 책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럼 그렇지 하는 의미의 끄덕임이 절로 난다. 친절하거나 쉬운 책이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의식대로 이리저리 흘러가면서 시간도 공간도 마음대로 넘나들고 어지러워할 독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독자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가이드 할 의무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선언을 해버린 셈인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 3년을 정신병동에서 보내게 된 저자. 친구의 자살과, 저자의 자살시도 등으로 스스로 병원을 찾아갔고 치료는 생각만큼 효율적이거나 빠른 회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대체로 언제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기록하는 경우는 많지만 언제 자살하지 않기로 했는지를 언급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저자가 밝힌 자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기록이 기억에 남았다. 1990년대 뉴욕의 주립 정신병원이 어떤 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지 엿보는 재미도 있다. 레지던트들이 트라우마를 끄집어 내기 위해 유혹(표현이 그렇다는 것일 뿐) 하듯 환자에게 기억을 소환하려고 하는 장면들도. 환자 성향에 따라 가끔은 그런 경우 없던 트라우마도 만들어서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 매우 위험한데 말이다. 유년 시절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이후로 그 상실의 아픔이 해소되지 않은 채 불안정한 청소년기를 거쳐 20대에 다다른 저자는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된 정신병원에 스스로 들어가 3년의 시간을 보낸다. 중간에 이제 괜찮아졌으니 나가겠다고 하지만 그때는 또 본인의 의사와는 반대로 병원에서 나갈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각종 약 처방과 온갖 치료법, 화학적 불균형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고, 정신분석 방식도 자신에게는 전혀 맞지 않고(감정적인 공감 없이 오로지 냉정하게 분석만 하는 타입이 저자에게는 적절하지 않음), 저자는 결국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치료해나간다. 여성의 서사에 마음을 맡기고 그 안에서 조금씩 치유하는 과정을 거친다. 저자는 거식증과 몸무게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으로 살이 찌는 것을 공포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부분도 치료를 받고 원인을 분석하지만 의사들이나 상담사들이 말하는 불안정 애착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의견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을 나와서도 다시 병원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병원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의 일원으로 지내기 위한 기간을 거치고, 결혼과 이혼을 거치고 유산과 출산을 경험하며 저자는 어느덧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있다. 긴 치료를 겪으면서 저자가 느낀 점은 치료가 효과를 내도록 만들어야 할 사람은 누구도 아닌 환자 자신이라는 것. 의사들은 환자에게 줄 것이 없으며 환자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우울증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하는 삶 속에서 때로는 어떠한 약도 없이 출산과 육아, 수유를 견디면서 그 자체가 우울증 치료였다고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저자는 자살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 바로 그것이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삶의 평범함에 익숙해지는 일,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고, 아기를 가진 일, 그리고 나이가 드는 일 모든 것이 삶에 전념하는 일이고, 버티며 살아내는 일이며 클라이맥스에 올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것에 비하면 훨씬 따분한 일이다. 병원생활에서 저자가 느낀 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에 사람들을 넣어서 구분하지 않고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으며, 여전히 일정 부분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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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콩나무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의미들 #수잰스캔런 #엘리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을 담아낸 책, <의미들>을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그녀에게 서서히 마음의 병이 찾아오게 된 과정을 알게 됐어요. 정신 병동에 입원하고 그곳을 나와서도 오랜 시간 동안 힘들어하다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수잰 스캔런에게 글이 있고, 여러 작가들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그녀가 그 힘든 시간을 버텨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너무 힘들었던 그 시절을 벗어나 살고 있음에도, 그때로부터 아주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잊고 싶고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인데 그때의 감정으로 얼마나 쉽게 다시 돌아가는지.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어서 이 부분을 읽으며 슬퍼졌어요. 언제든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때의 슬픔이나 우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또 다른 슬픔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문장을 만났어요. 결코 그때의 감정만큼 강렬하지 않으며, 그 감정은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위로가 됐어요. "그런 것 같아." "아니, 정말로 그래." 록산이 말했다. (p.365) 아무리 좋은 의사를 만나도,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도, 내가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해요. 나아지기 위해 병원을 꾸준히 찾아가고, 상담을 하고 약을 잘 챙겨 먹고, 나의 일상을 바꿔야 해요. 밖으로 나가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걷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 의사에게만 의지하고 있거나, 약을 먹으면서도 나는 앞으로 평생 약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무기력하게 있었다면 수잰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렇게 책을 써 내려갈 수 없었겠죠? 이런 말을 건네는 록산의 진심이 느껴졌어요. 수잰 스캔런에게는 뒤라스와 같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가 힘이 됐는데, 나에게는 어떤 작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힘이 되어주고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여러 작가의 책과 그 책 속의 문장들이 떠오르는데, 앞으로도 많은 책을 읽으며 나만의 뒤라스를 찾아가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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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동병상련은 독서와 글쓰기에도 적용된다. 병에 걸렸을 때 무협지를 펼쳐들곤 한다. 거기엔 주인공이 중상을 입고 내상을 치료하는 회복 과정이 꽤 자세히 나오곤 하는데, 그게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된다. 같은 이치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독자라면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진 유명 작가나 그런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을 찾아보면 좋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내 인생의 사연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듯이, 혼자 길 잃은 채 절망하고 있는 우울증 여환자라면 실비아 플라스나 버지니아 울프 같은 '미친 여자'의 작품이 바로 본인 이야기라는 데 공감할 것이다. 미국의 작가 수잰 스캔런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우울증을 극복한 자전적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마음의 고통을 토로하는 자기성찰적인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지적이고 예민하다. 저자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던 시기가 마침 내가 군복무하던 때와 겹치는 바람에, 군대와 정신병동이라는 대표적인 규율 공간이 갖는 제약과 복속의 의미군에 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저자는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 5층 병동에서 삼년간 머물렀다. 저자는 프로이트류의 대화나 프로작 같은 향정신성 약품이 아니라 독서와 쓰기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읽기와 다시 읽기가 자기치유의 효과가 있음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과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통해 깨닫게 된다. 저자의 우울증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감이 크게 작용했는데, 두 소설 모두 모성을 탐색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딸에게 어머니, 어머니에게 딸. 역사의 무게, 역사의 폭력." 그런 식이다. 독서와 글쓰기는 자기돌봄의 시작이자 의미치료의 유능한 도구다. 저자는 뒤라스, 토니 모리슨, 에이드리언 리치, 에리카 종, 엘리스 워커 같은 마음의 고통에 천착했던 여자 작가들의 작품에 접속하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지적인 삶"은 물론 "살아감의 다른 방식들"을 깨닫게 된다. "책들은 나에게 다른 삶을, 더 크고 더 잘 떠받쳐주는 틀을, 삶을 긍정하는 틀을 알려주었다." 저자는 읽기와 쓰기가 나를 성장시키는 자기돌봄의 활동이라고 확신한다. 작가 조앤 디디온은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했는데, 쓰기의 효과는 생각의 정리뿐만이 아니다. 불안, 우울, 상실, 소외, 절망 등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글쓰기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을 돕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서사의 글쓰기는 자기돌봄의 행위이자 자기치료의 회복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