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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징비록" 내용보기
징懲이라는 글자는 "아픈 적이 있어서 경계할 줄 안다"는 뜻(9쪽)으로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에서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려운 시기에 중대한 임무를 맡아, 나라가 위태롭고 쓰러지는 형편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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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懲이라는 글자는 "아픈 적이 있어서 경계할 줄 안다"는 뜻(9쪽)으로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에서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려운 시기에 중대한 임무를 맡아, 나라가 위태롭고 쓰러지는 형편인데도 제대로 일으켜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자책한다. 그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고 <징비록>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910년 국권강탈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만다. 역사 앞에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만하고 교만한 마음을 멀리하면서 자신감과 당당함을 갖추어야 하니 어려운 일이지만 되풀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1586년 병술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온 것에서 시작한다. 조선과 일본이 우호를 다진 것은 200년이 되었다. 1443년 신숙주는 세종 25년 2월 27세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다. 신숙주는 28년 후 1471년 성종 2년에 성종의 명으로 <해동제국기>를 완성한다. 일본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으로 조선통신사의 필독서였다. 신숙주는 죽으면서 성종에게 일본과 우호를 잃지 마시라는 당부를 남겼었다. 이에 성종이 통신사를 보내지만, 쓰시마 섬에 이르러 통신사들이 병이 나자 국서와 폐물을 쓰시마섬 도주에게 주고 돌아오라고 한 후 다시는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류성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전한다.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일본 66주를 병합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사신이 오지 않는 것을 일본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라 여기고 조선에서 사신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는 국서르 야스히로에게 보내 온 것이다. 국서의 태도는 거만하였고 야스히로의 행동기지는 오만하였다. 야스히로는 조선의 모습을 보고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이미 기강이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이 바닷길을 잘 알지 못해서 사신파견을 못한다는 말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하니 히데요시는 야스히로를 죽이고 일가족을 멸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소 요시토시를 보내왔다. 조선을 섬겨왔던 쓰시마 섬 태수를 죽이고 소 요시토시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사정을 살필 목적으로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도 함께 보내왔다. 소 요시토시는 나이는 어려도 민첩하고 용감하여 그를 다른 왜인들이 두려워하였다. 한참을 조선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1590년 선조 23년 3월 요시토시와 함께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이 때 요시토시가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바쳐 조선이 처음으로 조총을 가지게 되었다. 7월에 교토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을 히데요시는 11월 7일에야 만나고 조선의 국서를 받았다. 그 후 다시는 히데요시를 볼 수 없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사키이 항구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답서를 받았는데 내용이 오만하여 여러 차례 고쳐오게 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여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 급히 보고 하고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도 같은 대답을 하였으나, 김성일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미혹시킨다는 이유로 그런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고 고한다.

왜가 보내온 국서에는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지나 명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고 류성룡은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영의정 이산해는 왜국과 내통하였다고 나무랄 수 있다며 숨겨야 한다고 한다. 조성에서 류성룡의 의견이 옳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 김응남 등을 명나라에 보내 보고하였다.

조정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관찰사를 보내 병기를 갖추고 성과 해자를 손보게 하였는데 평화로운 시절에 익숙한 백성은 노역을 꺼리고 원망을 하였다. 성을 쌓을 때는 작고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백성을 많이 수용하는 데만 힘을 들였다. 류성룡은 "근본적인 군사 행정과 장수를 선발하는 기준, 군사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적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고 말한다.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을 지니고 있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는 등 능력이 출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알아주지 않았다. 무과 급제 10년 동안 걸맞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다가 정읍 현감이 된다. 왜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임금이 류성룡을 비변사에 명하고 장수를 추천하도록 하자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좌수사)에 임명을 하였다.

당시 조성의 무관은 신립과 이일이 가장 뛰어나고,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은 늙고 용맹하지 못하니 이일에게 조대곤의 임무를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나 병조판서 홍여순이 도성 수비를 염려하여 반대하였다. 또 제승방략의 방어전략보다 진관제도가 방어전략으로 용이하다 고하나 경상도 관창사 김수가 갑자기 바꿀 수 없다하여 논의가 중단되었다. 이는 조선 군이 쉽게 궤멸하는 이유가 된다.

1592년 임진년 봄,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로 보내 변방 대비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신립은 잔인하고 포악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자 수령들이 백성을 동원해 도로를 보수하고 사치스러운 연회를 베풀어 접대하였다. 4월 1일 신립이 류성룡을 만나러 와 적들의 형세를 물이니 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만하고 자신을 과신했다.

임금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을 해임하고 특지로 유학자인 승지 김성일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함께 온 일본 사신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가 동평관에서 머물고 있을 때 겐소가 김성일에게 중국이 일본과 관계를 끊고 조공을 바지 않으니 히데요시가 분하고 수치스럽게 여겨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니 조선이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전쟁이 없을 것이라 말했었다.

1591년 신묘년 여름, 소 요시토시가 부산포에 와서 다시 일본이 명나라와 외교적으로 왕래하고자 하는 것을 조선이 중국에 알려주기를 청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장수가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조정은 통신사를 보냈던 것을 후회하고 일본의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나있어 소 요시토시에게 회답을 하지 않으니 소 요시토시는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 그 뒤로 왜인은 다시 오지 않았고 부산포 왜관에 머무르던 왜인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의 배가 바다를 가득 덮으며 몰려왔다. 경상 좌수사 박홍이 적의 형세에 놀라 출병도 못하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왜군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람시켰다. 다대포 첨사 윤홍신이 전사하였고 4월 15일 동래 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였다. 밀양 부사 박진은 밀양의 무기고와 창고를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은 병영(울산)에서 첩을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도 달아나니 군사들이 무너졌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성을 지켰으나 왜군이 들어오자 초계 군수 이유검이 먼저 달아나고 서예원도 달아나 김해성이 함락되었다.

용궁 현감 우복용은 병영으로 가던 중 영천 길가에서 만난 하양(경북 경산) 군사 수백 명을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을 트집잡아 모두 죽였다. 순찰사가 우복룡이 공을 세웠다고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우복룡을 통정대부로 승진시키고 안동 부사에 임명하였다. 훗날 아비와 남편을 잃은 하양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소용없었다.

4월 17일 경상 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처음 도착하였다. 조선 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을 거듭하였고 왜군은 시시각각 한양과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나섰다. 5월 7일에는 어가가 평양에 도착하면서 징비록 권 1이 마무리 된다.


류성룡은 5월 1일 파직되었다가 6월 1일 복직되었다. 이는 서인 정철과 윤두수가 복귀하고, 동인 책임론에 따라 이산해는 귀양을 보냈고 류성룡은 파면된 것이다. 6월 1일 복직되면서 왕명으로 명나라 장수 임세록을 접대하였다. 류성룡은 백성의 민심이 굳건하고 곧 명나라 군대가 올 것이니 평양을 사수하고자 하나 정철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6월 11일 어가는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하였다. 대신 최흥원, 유홍, 정철 등이 호종하였고 좌의정 윤두수, 팔도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은 남아 평양을 지켰고 류성룡은 명나라 장군을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남았다. 이 날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이 활 잘 쏘는 사람을 골라 배에 태워 왜군을 향해 활을 쏘게 하였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나날이 줄어들었다. 류성룡은 속히 명나라 장군을 도중에서 맞이하여 그들로 하여금 평양성을 구하도록 하고자 성을 빠져나왔다. 류성룡은 어가를 쫓아 박천으로 가 임금을 뵈었다. 류성룡은 평양성을 지키고자 애를 썼지만 평양성은 함락되었고 민심은 어지러워 관의 곡식을 약탈하였다. 어가는 의주에 도착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명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만이 조선을 도왔다. 7월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왔다.

류성룡은 군사 5,000명을 먹일 걱정을 하였다. 7월 19일 요양 부총병 조승훈이 평양을 공격하였다. 유격대장 사유는 조총을 맞고 즉사하였고 많은 군사가 죽자 조승훈은 후퇴하여 공강정에 주둔하였다. 겁을 먹은 것이다. 이틀 동안 큰 비가 내리고 군사들이 원망하자 요동으로 돌아갔다.

처음 왜군이 상륙했을 때 원균은 왜군의 규모에 겁을 먹고 함선 100여 척, 화포, 무기를 모두 바다에 가라앉히고 도망을 갔다. 수군 1만 여 명이 달아났다. 원균 수하의 이영남의 간언으로 전라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대여섯 차례 구원병을 요청하여 이순신이 판옥선 40척을 이끌고 와 거제에서 원균과 군사를 합하여 견내량에서 왜군 함대와 대치하였다. 이순신의 책략으로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두자 임금은 이순신에게 일품 벼슬을 주고자 하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승진하고 이억기와 원균은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한산도 대첩이 있기 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도착하여 일본의 전투 함대 10여 만 병력이 서해로 오고 있다하였는데 한산도 대첩으로 왜군의 한 팔이 잘린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탈환하였지만 고립된 세력으로 진군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로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연해 일대를 지켜내어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엇고 명령 및 연락 체계를 통일시킬 수 있었다.

9월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와서 일본 진영으로 가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겐소 등을 만났다. 그리고 50일을 기한으로 왜군과 조선은 싸우지 말 것을 명하고 황제에게 고하기 위해 명나라로 떠났다.

훈련원 부봉사 권응수, 정대임 등이 향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왜군과 싸워 영천을 되찾았다. 병마절도사가 된 박진은 좌도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경주로 진격하였다. 비격진천뢰를 쏘아 왜군을 쫓아내었다. 비격진천뢰는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하였다. 대완구로 발사하면 500~600보까지 날아가 땅에 떨어지고 한참 뒤 폭발하였다. 왜군은 이 무기를 가장 두려워하였다. 박진은 가선대부, 권응수는 통정대부, 정대임은 예천 구수로 승진하였다. 여기서 권 2가 마무리 된다.


각 도에서 일어난 의병의 이야기로 권 3이 시작한다.

그 가운데 금강산 표훈사 승려 유정(사명대사)의 일화가 소개된다. 적이 산 속으로 들어오자 다른 승려는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움직이지 않았고 왜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합장을하며 경의를 표하고 갔다. 유정은 승군을 일으켜 1,000여 명을 이끌고 평양성 동쪽에 순안의 군대와 함께 주둔하여 기각지세(협공)을 하였다. 왜군의 첩자 노릇을 한 자도 있어 그 가운데 김순량을 안주성 밖에서 처형하엿다. 40여 명 되는 첩자는 놀라서 흩어졌고 명나라 군대가 도착한 것을 왜군은 알지 못하였다. 12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쳤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겐소, 야나가와 시게노부 등은 한양으로 달아났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파주까지 왜군을 추격하여 벽제관 남쪽에서 싸웠으나 패하고 개성에 주둔하였다. 이여송은 북쪽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던 중 왜군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자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여송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었고 왜군은 강화를 요청하느 편지를 보내왔다. 심유경이 다시 적진으로 들어갔다. 류성룡은 화의를 반대하고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여송은 류성룡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왜군은 퇴각하였고 4월 20일 한양을 수복하였다. 이여송은 왜군을 뒤쫓지 않았고 류성룡은 병이 나서 몸져누었다. 명나라 병부 우시랑 송응창이 제독 이여송에게 패문을 보내 왜군을 추격하게 하자 문경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왜군은 울산 서생포에서 거제까지 열여섯 곳에 주둔하여 성을 쌓고 바다를 건너지는 아니하였다. 6월에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고 조선군이 패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래 이 전투에서처럼 많은 사람이 죽은 경우는 없었다. 왜군은 진주를 함락시킨 뒤 부산으로 돌아가 명나라가 화의를 허락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퍼뜨렸다.

심유경이 왜장 나이토 조안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항복 문서를 가지고 왔지만 믿지 않았다. 이여송과 명나라 장수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고 명나라 총병 유정, 오유충, 왕필적 등이 1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팔거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국의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군량미를 운반하느라 노약자들이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져 있었고, 건강한 사람은 도적이 되었다. 게다가 역병이 돌아 백성이 모두 다 죽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부모 자식과 부부가 서로 잡아먹어 그 뼈가 잡초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224~225쪽)

명나라 병부에서 황제께 아뢰 나이토 조아을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1. 책봉만 요구하고 조공은 요구하지 말 것. 2. 한 명의 왜인도 부산에 남기지 말 것. 3. 영원히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이 약속을 지키면 책봉할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책봉하지 않을 것이다."(227쪽)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심유경이 일본으로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으나 그의 요구가 너무 많았고 심유경은 구차하게 일을 성사시키려 하였으나 일은 틀어져버렸다. 명나라는 조선에 다시 원군을 보내왔다.

원균은 성격이 음험하고 바르지 못하였다. 이순신을 모함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중간첩 요시라의 계략으로 이순신이 체포되었고 원균은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면하였다. 관직은 삭탈당하고 사졸로 군을 따르게 되었다. 그 사이 노모는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가 다시 원군을 보내와 남원에 주둔하면서 권 3이 마무리 된다.


1597년 정유년 선조 30년 8월 7일 한산도의 수군이 참패하고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전사하고 경상 우수사 배설은 달아났다. 이순신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뒤를 수습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었다. 이순신은 진도에 도착해 10여 척의 병선을 수습하여 얻었다. 해전에 능하다고 평판이 난 왜장 마다시는 200여 척을 끌고 와 벽파정 아래서 이순신의 12척과 만나 패하여 달아났다.

성품이 사납고 사람들과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 명나라 수병 도독 진린이 이순신과 병력을 함치게 되니 류성룡은 다시 조선 수군이 지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였으나 이순신은 진린을 잘 구슬렸다. 진린은 임금께 "통제사는 천하를 경영할 만한 재주와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할 만한 공을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10월 명나라 제독 유정이 순천의 적진을 공격하였다. 수군도 바다에서 왜군의 구원병을 격파하였다. 이순신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를 격파하고 적의 배 200여 척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진린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고 온 군대가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바다를 흔들었다. 조정은 이순신을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바닷가 사람이 민충사를 지어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어린시절과 성품을 전하며 권 4를 마무리 한다. 그리고 녹후잡리로 <징비록>을 마무리 한다.


<징비록>은 실제했던 역사라는 것을 모르고 읽는다면 정말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다. 이처럼 스펙타클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이는 실제했던 우리의 역사고 그 것을 인식하면 어처구니 없고 가슴 아픈 이야기로 넘쳐난다. 우복룡이 우리 군 수백 명을 트집을 잡아 죽인 것이나, 그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지 바쁜 장수들이나, 힘이 없어 남의 힘을 빌리니 말을 들어먹지 않는 명나라 장수의 일이나, 원균의 이순신에 대한 모함이나, 인육을 먹어야 하는 백성들의 배고픔과 고생스러움 등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류성룡은 책임있는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살아남은 자로서 다시 그 역할을 다하여 <징비록>을 지은 것이다. 책임있는 자로서의 자기반성이고 잊지말자는 다짐인데 안이한 조선의 사대부는 이 치욕의 역사를 잊고 다시 되풀이 하고 말았다. <징비록>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쓰여진 책인지 알 수 없지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 장군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징비록>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게 한다. 류성룡의 임진왜란 통한의 기록 <징비록>은 현재의 우리도 옆에 두고 읽으며 되새겨야 할 책이다.

o********o 2020.04.05. 신고 공감 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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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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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역사의 통절한 실패를 경험한 옛사람이 그 실패를 후손들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책이다. 400여 년 전 징비록에 새겨놓은 뼈저린 반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가가 직면하게 되는 위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전 필독서로만 여겨왔던 책. 이게 잘 읽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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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역사의 통절한 실패를 경험한 옛사람이 그 실패를 후손들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책이다.

400여 년 전 징비록에 새겨놓은 뼈저린 반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가가 직면하게 되는 위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전 필독서로만 여겨왔던 책.

이게 잘 읽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술술 읽혔다.

왜그럴까 생각해보니, 지금 우리사회 모습과 별 다를게 없어서.

500년 가까이 흘렀는데, 조직 내의 인간들의 모습이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씁쓸하지만,

실패를 반복하지는 말자.

YES마니아 : 로얄 w*******2 2021.08.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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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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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며 보게 된 "책을 읽어드립니다"에 소개된 도서 징비록서애 류성룡 선생이 집필한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역사를 배우는 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꼭 읽어볼 만한 도서이다.참고로 영상도 같이 보면 더욱 유익할거 같다.나는 영상을 먼저 보고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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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며 보게 된 "책을 읽어드립니다"에 소개된 도서 징비록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집필한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를 배우는 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꼭 읽어볼 만한 도서이다.

참고로 영상도 같이 보면 더욱 유익할거 같다.


나는 영상을 먼저 보고 책을 읽었다.

k*****1 2020.11.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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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통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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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좋아하는 책이라서 여러 번 읽었지만 기회가 되어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징비록이 출판사 별로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특히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는 각종 삽화와 지도가 곁들여져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왜란을 몸소 겪은 서애 유성룡의 통한의 기록에 담긴 깊은 뜻이 헛되지 않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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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좋아하는 책이라서 여러 번 읽었지만 기회가 되어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징비록이 출판사 별로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특히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는 각종 삽화와 지도가 곁들여져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왜란을 몸소 겪은 서애 유성룡의 통한의 기록에 담긴 깊은 뜻이 헛되지 않도록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에 새겨 오래도록 간직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d********s 2020.04.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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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였어요
"요즘 시대에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였어요" 내용보기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대에 꼭 읽어보고 싶었어요. 무력으로 싸우지만 않았지 임진왜란 같은 지금의 현실...한줄 한줄 읽을때마다 무능력한 집단들 때문에 답답함이 고구마 백만개는 먹는 느낌이 밀려오지만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거겠죠. 그래서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본문들어가기도 전에 어떻게 해야 국민들이 잘 살수 있는지를 요목조목 잘 정리해 놓으셨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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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어수선한 시대에 꼭 읽어보고 싶었어요.
무력으로 싸우지만 않았지 임진왜란 같은 지금의 현실...
한줄 한줄 읽을때마다 무능력한 집단들 때문에 답답함이 고구마 백만개는 먹는 느낌이 밀려오지만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거겠죠. 그래서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본문들어가기도 전에 어떻게 해야 국민들이 잘 살수 있는지를 요목조목 잘 정리해 놓으셨던데 그게 실행하기 참 힘이 드나봅니다..ㅠㅠ
c****2 2020.03.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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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졸렬함의 끝판왕 확인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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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 후 집필한 책이다. 황송하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썼다는데, 일단 책을 읽다보면 독자가 부끄러워 진다는 점에서 저자와 독자가 일맥상통한다. 독자와 저자가 하나 되는 일심동체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가히 명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는 건 정신이 건강하다는 방증이다. 잘못된 행동을 두고 반드시 그렇게 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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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 후 집필한 책이다. 황송하고 부끄러운 심정으로 썼다는데, 일단 책을 읽다보면 독자가 부끄러워 진다는 점에서 저자와 독자가 일맥상통한다. 독자와 저자가 하나 되는 일심동체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가히 명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는 건 정신이 건강하다는 방증이다. 잘못된 행동을 두고 반드시 그렇게 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잘못된 행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끄러운 감정은 잘못된 행동을 예방하는 백신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때 생긴다. 더군다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가 아니라 많을 때는 어떻게 될까? 징비록은 그 답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이 조선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은 소문 확인을 위해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일을 마치고 온 황윤길은 부산에 배가 도착하자마자 전쟁이 반드시 날 것이라는 보고를 했다. 그런데 같이 갔다온 김성일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그리고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기에 옳은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황윤길을 나무란다. 이에 조정은 두 패로 의견이 갈렸다. 류성룡은 혀를 차며 김성일에게 만일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꺼냐 물었다. 김일성 아니 김성일의 답이 가관이다.


“왜인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고 제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은 너무 지나쳐서 안팎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미혹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갑론을박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벌어질수 있다치자. 문제는 강도가 당장 집에 처들어오려고 칼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집안 싸움을 하고 있는 행태다. 경계가 허술하여 강도가 집에 들었으면 집안싸움은 멈추고 강도를 때려 잡는게 우선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강도가 든 후 정신을 차렸을까?


 강도가 가재를 다 털고 백성들이 도검에 찔려죽고, 못먹어 아사하는 상황에서도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또 집안싸움을 했다. 지방수호라는 역할을 맡은 장군들은 지형상 유리한 성곽을 버리고 평지에서 전투를 감행하는 병신짓을 서슴치 않았고, 일부 머리가 돌아가는 무관들은 자신의 공을 세우려 다른 무관을 모함하고 죽이는 짓을 신속히 감행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게 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와중에 류성룡을 빼고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집안을 살릴 인재가 나타난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징비록이 조선의 병크짓을 밝히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해 이순신 장군에 관한 분량을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분량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이룩한 업적은 ‘나 혼자만 레벨업’ 수준이다. 류성룡이 이순신 장군을 천거했기에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약간의 msg를 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도, 장군의 임진왜란 전적은 이미 역사적 고증으로 드러난 것이라 의구심은 한낱 혼자만의 의혹임을 깨달을 뿐이다.


 임진록엔 졸렬한 인간만 한가득이다. 그 중에서 으뜸을 뽑자면 역시나 선조다. 그는 무슨 연유에선지 이순신을 싫어하고 상대적으로 원균을 좋아했다. 태생 때문인건지, 아니면 이순신이 평소 뿜어내는 원칙주의자의 냄새가 싫었던 건지 아무튼 싫어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으로 다 꺾여가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한다. 연유는 일본 해군을 쫓아가 잡으라는 명에 소극적이라는 보고가 올라온 것. ‘기회는 이때다’ 선조는 냉큼 시행한 것이다. 그나마 사형에서 백의종군 처벌로 감형돼 불행중 다행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한뒤 결말은 잘 알려져있다.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해 싸움에 나섰고, 칠천량에서 대패해 죽는다. 모든 배가 다 쓸려나가 남은건 12척.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라는 말로 더 유명한 그 12척은 실은 ‘배설’이 도망쳐 나오면서 남은 것이다. ‘배설’이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이순신은 싸움조차도 시도 못했을 뻔 했다. 문득 주식매매의 격언이 떠올랐다. ‘손절도 전략이다.’ (배설은 명량해전 직전에 도망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의 복귀하자 백성들과 군사들이 사기가 올라갔다는 점이다. 이쯤되면 선조가 그를 싫어한게 이해된다. 빤스런한 자기와는 달리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최초로 승리한 옥포해전부터, 전세를 역전시킨 한산도대첩까지 조선군의 피해 없이 왜적을 물리친게 첫번째 이유요, 그로인해 백성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게 두번째 이유다. 첫번째 보다 두번째 이유가 더 선조의 내장을 살살 꼬이게 했음은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복귀한 이순신은 그 유명한 명량해전을 치른다. 12척으로 120여척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 최후의 전투지인 노량에서 총탄에 맞아 장군은 숨을 거둔다. 징비록에서는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진 않다. 다만 노량해전에서 그가 죽은 뒤 조선은 물론 명나라 군대가 모두 통곡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공께서는 실로 우리를 살려주신 분인데, 지금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징비록에서는 장수를 칭찬하는 대목이 없는데, 이순신에 대해서만은 예외다. 저 대목을 역으로 해석하면 ‘우리를 살려주지 않는 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류성룡이 저 발언을 굳이 쓴 이유는 선조와 조정을 은근히 겨눈 것은 아니었을까?


 징비록을 읽게된 동기는 조선이 치명적인 실수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초반 중반부에서는 조선이 저지른 짓들을 문자로 확인하면서 혀를 찼다. 열받으면서도 즐겁기도 한건 함정. ‘에라이 병x들아’ 속으로 되내이는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결국 이순신 장군의 거대한 존재감에 압도된다. 이게 사람인가…


 이 책은 징비록의 내용과 함께 해설이 들어가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책의 마지막 또한 해설로 끝나는데, 선조의 졸렬함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공을 기리는 문서를 만든다. 선무공신첩. 일등 공신은 세명이다. 이순신, 원균, 권율. 선조가 나라말아먹을 뻔한 원균을 일등 공신에 올린 것이다. 자기가 택한 원균을 차마 2등급 내지는 3등급을 줄순 없었나 보다. 책은 졸렬함의 끝을 확인하고 막을 내린다.

s*****s 2019.11.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