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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하며 살고 싶은 바람에 끌려 국경을 넘어 곳곳을 누비고 살아가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뛸 때가 있다.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며 오감을 동원해 인생의 일면을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일은 속박되지 않는 이로 자리할 때 가능해진다. 일정한 궤도를 걸으며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였던 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공공의 선을 지키기 위한 법규는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델리 공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기존의 관행은 붕괴되어 무질서와 혼란의 세계로 몰아갔다. 기본적인 법규는 지켜지지 않았지만 종교적 의례는 놓치지 않는 현지인들의 모습에서 신앙의 나라라는 말이 걸맞은 나라에 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자마마스 지드를 방문했을 때 웅장한 규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유한한 인간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하는 종교적 믿음은 맹목적인 숭배로 치달아 비판을 불허하는 경우가 흔하다. 지금도 신을 앞세워 벌이는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고 정치적 · 경제적인 이익까지 결부되어 패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다. 평탄한 삶에 위협이 올 수도 있는 상황에 신념대로 자신의 뜻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이의 비장한 표현에 숙연해진다. 인생의 전환점은 도처에 자리하여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 삶을 이뤄 존재감 있게 살아갈 힘을 불어넣는다. 개인적으로 고락 속에 이어졌던 인도 여행 후 인생은 다채로운 무늬를 아로새기며 현재적 삶에 충실할 에너지를 얻어 열정적으로 살 수 있었다. 반면 인도출신의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 소설을 발표하고 난 뒤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코란》에서 전하는 구절들이 알라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악마의 말이 전승된 것이라 말하며 왜곡된 이슬람 관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사형을 언도받고 시작된 감금 생활은 추방을 당하거나 은둔 생활자로 전락하게 했다. 살해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데다 무장경찰에 에워싸여 살던 시절을 반추하며 지금까지의 일대기를 순차적인 구성에 담아 타협을 거부하며 살아온 작가의 지난한 역사를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내가 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 아는 대로 말하고 양심에 따라 마음껏 주장하는 자유’ 부조리한 구조에 맞서 타협을 거부한 작가의 자서전은 3인칭 서술자로 객관성을 확보하며 이슬람 세력의 무자비한 파행을 드러냄으로써 와하브파의 성장이 야기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전횡은 적나라해졌다. <<악마의 시>>를 ‘이슬람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해 작가를 처단하라는 종교 칙령 발표로 루슈디는 기약 없는 도피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도피생활을 하면서 경찰의 권고로 지은 가명 ‘조지프 앤턴’의 파란한 생활은 이어졌다.
인도 무슬림 문화는 인도 출신인 그의 입국비자 발급을 거부하였고 이란인들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다 영국에서 추방당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압박의 강도는 커졌다. 무슬림 사회의 친절과 자비심, 아름다운 건축물, 철학과 과학 분야의 업적 등을 남긴 무슬림의 지혜가 변질되어 편협한 종교적 이념으로 평화를 위협하고 반 이슬람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가로서 파트와 반대운동을 벌이는 창작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에 직면할 때면 알코올에 의존하며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갔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운명의 굴레 속에 허우적거리던 전처와의 이혼은 일상의 균형을 앗아가는 일이었지만 또 다른 여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숨 막히는 압박의 시간에도 루슈디는 엘리자베스와 만나 교감하며 소통하는 사랑을 쌓아가지만 그의 아기를 갖고 싶어 했던 그녀와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그가 오랫동안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살해 위협으로 점철되는 상황에서도 아들 자파르는 파타와 이전의 작가 루슈디로서의 삶을 일깨워주었다. 짧은 시간이기에 작가가 아들 자파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련의 활동에 집중하며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엮어내는 성과를 낳기도 하였다. 13년간의 투쟁 아래서도 쪼갤 수 없는 자유를 의식하며 살아가려던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주정뱅이 아버지와 결혼하여 수십 년을 견뎌 온 어머니의 비결인 망각력을 떠올리며 아들 루슈디는 내면의 균열을 다스리고 감내하며 시련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하는 생활로 무장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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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했던 말 때문에 오해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있습니다. 최근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종종 있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그닥 유쾌한 일도 아닐 텐데 어쩜 그리 해맑게 말할 수 있냐구요? 세상사라는 게 다 오해와 용서의 결합체이니까요. 누군가를 끝없이 오해하고 또 끝없이 용서하다 보면 우리 인생도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따금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할 때가 있습니다. 많이 오해하고 또 많이 화해하라고 말입니다. 칼부림이 날 정도의 깊은 오해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오해를 푸는 것도 좋은 경험일 테지요. 우리는 어차피 내가 아닌 너가 될 수 없는 까닭에 완전한 이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같은 화가 당신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신문에서 자주 목격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극단적인 대립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불필요한 논쟁처럼 읽히지만 지구상의 두 세력은 이미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웃자고 쓴 글인데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지요. 얼마 전에 있었던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빚어지는 크고 작은 오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올바른 대처 방법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고 (만약 있다면)약간의 실수에 대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용서는커녕 내 목숨까지 요구한다면? 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요. 자신의 운명을 탓하는 것 외에는.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 <조지프 앤턴>은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극단적인 오해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1947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열세 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고, 1975년에 '그리스머'로 문단에 데뷔합니다. 1981년에 쓴 '한밤의 아이들'은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잘 나가는 소설가에서 도피자의 신세로 전락한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 그가 발표한 '악마의 시'로 인하여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는 전 세계의 무슬림을 향해 그를 처형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수백명의 무슬림이 모여 ‘악마의 시’를 불태우고 폭력시위를 벌이며 살해 위협을 가했습니다. 작가가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었죠. 그로부터 작가는 13년간의 기난긴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이 책 <조지프 앤턴>에서 자신의 도피생활 중에 겪었던 여러 일들을 독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지프 앤턴>은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입니다. 뜻밖의 결과에 당혹해 하면서도 작가는 담담하게 받아들인 듯 보입니다.
"방송이 시작되고 호메이니의 위협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루슈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더 비판적으로 쓸 걸 그랬어요."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겻다. 그 말은 진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이 이슬람교에 특별히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p.17)
연도별로 기술된 그의 자서전 <조지프 앤턴>은 그가 태어난 1947년에서 '악마의 시'가 출간된 1988년까지의 기록인 1부 '파우스트의 계약'을 제외하면 모두 1년 단위로 부를 나누어 2002년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2년은 작가가 무장 경찰의 보호 속에서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으로 은신처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끔찍했던 시절에 종지부를 찍었던 해였습니다. 2001년 9ㆍ11 테러로 자신에 대한 처형 명령이 실질적으로 해제돼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해가 2002년이었지요. 작가는 그 해에 비로소 '조지프 앤턴'에서 다시 '살만 루슈디'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루슈디는 자기가 사랑하는 작가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름을 이것저것 조합해보았다. 블라디미르 조이스, 마르셀 베케트, 프란츠 스턴. 그런 식으로 짝을 지어 목록을 만들어보았는데 모두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스꽝스럽지 않은 조합을 발견해 나란히 적어보았다. 콘래드와 체호프의 이름. 그것이 앞으로 11년 동안 쓰게 될 이름이었다. 조지프 앤턴." (p.219)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이 나에게 각별했던 까닭은 따로 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미화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솔직해지려 했다는 점입니다. 계속되는 살해 위협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도 연쇄적 불륜과 그로 인한 네 번의 이혼, 돈과 명성을 향한 끝없는 욕망,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탐닉하는 철없음 등을 그는 자기조롱과 희화화까지 동원해가면서 대담하게 펼쳐 보입니다. 또한 작가는 자신을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인 양 다루기 위해 1인칭인 '나'를 사용하지 않고, 시종일관 ‘루슈디 씨’ 또는 '앤턴 씨'라는 3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 이유를 “자기 미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냉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작가의 도피 생활은 힘겨웠던 듯합니다. 10여 년간 앞마당에 신문이나 우편물을 집으러 나갈 수도 없었고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거나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거처를 끊임없이 옮겨다녀야 했던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떠올렸습니다. 애인에게 던졌던 농담 한마디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루드빅이 살만 루슈디의 삶과 비슷하다 느꼈기 때문이지요.
"그는 벌써 죽었어야 했다. 누가 봐도 당사자인 그는 납득하지 못한 게 분명했지만, 그거야말로 모두가 기사로 내기 위해 목을 빼고 기다리는 헤드라인이었다. 부고는 이미 쓰여 있었다. 비극이든 심지어 희비극喜悲劇이든 등장인물은 초안을 고쳐 쓸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살아 있길 고집했고, 더 나아가 의견을 내고 변론을 하고,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믿고, 자신의 일에 매진하길 고집했으며 또한 (사람들이 그런 만용을 믿어줄지 모르겠지만)자신의 인생을 조금씩, 고통스럽더라도 한 걸음씩 되찾길 고집했다." (p.539~p.540)
악의적인 의도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은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오해에 종종 부딪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매번 화를 내고 들어주지 않는 상대방의 귀를 하릴없이 두들겨야만 할까요? 우리는 어쩌면 탄생과 더불어 오해를 경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리가 불편하다고 우는 아기를 서툰 엄마는 배가 고파 운다고 오해하거나 같이 놀자는 뜻으로 빼앗았던 친구의 장난감 때문에 빚어진 싸움 등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켰음을 기억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오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오해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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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사람의 이름이다. 누구일까? Salman Rushdie, 살만 루슈디, 제법 사랑하는 독자를 가졌지만, 그렇게 대중적으로 사랑 받지는 못하는 유능한 작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아마 파트와일 것 같다. 지금은 지난 일이지만, 이란의 호메니의 파트와(종교적 명예살인) 선언으로 사라졌던 투명인간 그가 조지프 앤턴, 힘겨운 도피생활 속의 그의 가명이었다. 조지프 콘래드와 앤턴 체홉에서 따온 기발한 이름, 13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한 루슈디의 분신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그 13년의 기록이며, 그 기간의 회상이다. 나의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짧아서인지? 이 사건의 단초가 된 ‘악마의 시’를 읽고 이슬람에 대한 모독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 누군가가 누구를 죽이라는 것, 어쩌면 종교의 탈을 쓰고 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그런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의 글들을 보면 무슬림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 같은데…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지 않은 인간이 있겠는가? 하지만, 공개적인 살인선언으로 항상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것만 같은 그가 그 와중에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나름 작가의 임무에 충실했고, 사랑도 했고, 삶을 이어갔다. 보통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의 보통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자주 보인다. 우리에게 지금의 삶에 충실 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면 흔쾌히 열고 읽어보지 않겠지만, 이 책은 두께만큼(818페이지)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종교 그리고 개인 또 문학, 국가권력과 이들간의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은 없는 걸까? 국가와 종교 권력은 한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문학의 자유는 소수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은 현실과 다수에 의한 폭력, 다수의 목소리 큰 이기적인 사람들이 더 공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타인을 비난한다 왜란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나 글에서는 얼마만큼 자유가 존재하고, 어떤 소재까지 허락한다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지. 하여간 세상은 요지경이다.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것보다 읽고 판단하는 것이 나을듯한데. 엄청난 책이 쏟아지는 현재에 읽히지 못하고 사라지는 책이 얼마나 많은지? 가끔 우스개 소리로 그의 이름 Salman Rushdie, 살만 러쉬다이(rush와 die)처럼 살만은 죽음으로 명렬히 달려갔지만, 죽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가 오래 살아서 좋은 글들을 많이 써나갔으면 한다. 그의 말처럼 작가는 글을 쓸 자유를 갖고, 독자는 책을 읽을 자유를 갖기에 이 두 자유가 함께여야 할 것 같다. 또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되는 삶이지만 부지런히 살아야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잘 그려진 책,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 사생활 하지만, 그의 사랑이었다니 존중해줄 도리밖에는.. 작품의 탄생과 그의 생각과 사상을 잘 엿볼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무엇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고뇌와 사람들의 배신과 우정. 한 작가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그의 책을 접하면 참 배움을 빨리 체득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화적 흡수력이 어디에서 나오나 하는 부러움, 그의 뿌리는 분명히 인도(무슬림)의 이야기인 것 같다. 인도와 무슬림, 파키스탄 그리고 영국과 미국 등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자기화하여 점점 영역을 확대해 나가 문화를 혼합하고, 그 문화로 이끄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역사적 배경을 조금 알게 되면 그의 책은 배움과 재미를 함께 얻을 수 있게 한다. 그의 독자로서 새로운 책과 아직 번역되지 않는 그의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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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이후로 ‘전기문’을 읽지 않았다. 전기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어릴 때 읽는 위인전기를 제외하고는 ‘전기문’이라 지칭할 수 있는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이유를 묻는다면 명확한 대답을 하기 어렵다. 왜인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서전에 대한 거부감은 있는데, 이는 정치인이 낸 자서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서전을 읽은 경험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중록」이나 「사기열전」 그리고 「체 게바라 평전」 은 언젠가는 꼭 읽으려고 한다. 《조지프 앤턴(2015.02.13. 문학동네)》은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이다. 살만 루슈디는 소설가인데 처음 접한다. 그의 작품 목록을 살펴봐도 낯설긴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서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자서전’은 도대체 왜 읽었는지 궁금할 법하다. 살만 루슈디가 유일무이하게 ‘세계3대 문학상’인 부커상을 3차례 휩쓴 이력을 가진 유명한 소설가라는 정보만 접했다면,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으리라. 책 소개에서 아버지가 물려주신 ‘살만 루슈디’란 이름을 감추고 ‘조지프 앤턴’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확인한 후 강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느꼈다. 처음 접하는 소설가의 작품보다 삶이 먼저 알고 싶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살만 루슈디는 1988년도에 발표한 소설 『악마의 시』가 이슬람교와 예언자 마함마드와 쿠란을 모독(p.16)했다는 이유로 이란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파트와)를 받는다. 루슈디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대학 졸업(1968년) 후 빈털터리가 되어 1년여 가량 실업수당으로 살았고 광고회사에서 일하면서 짬짬이 쓴 『한밤의 아이들(1981)』로 세계 문학계에서 주목 받는 작가가 된다. 그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무신론자였는데, 그에게 종교는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소재였다. 게다가 역사학을 전공하여 이슬람교가 종교에서 사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정확히 인지한 그에게 신앙은 좋은 작품 소재로만 보였다. 그래서 루슈디는 『악마의 시』를 훨씬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이라고 생각했다. 몸소 겪은 이민과 변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첫 작품. 그래서 그에게는 제일 덜 정치적인 작품(p.108)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불쾌한 소설로 비난 받았을 때 그는 어리둥절했다. 호메이니가 사형선고를 내린 뒤 루슈디는 영국 경찰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고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작가의 이름을 따 ‘조지프 앤턴’이란 이름을 만든다. ‘조지프 앤턴’은 그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얼굴이었다. 파트와는 살만 루슈디뿐 아니라 출판인들과 번역가들까지 위협(p.201)했으며, 살만 루슈디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의 대립은 갈수록 거세졌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위험한 사람들을 피해 안전한 장소에 숨어있었지만 도망만 다니지 않는다. 집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서평 쓰기를 시작으로 글쓰기에 몰두하여 새로운 작품을 출간하고 새로운 사랑도 시작한다. 루슈디는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조지프 앤턴》에서 살만 루슈디는 작중인물을 ‘그’라는 3인칭 대명사로 지칭한다. 자서전이기에 1인칭 시점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하지만 3인칭 시점이어서 자서전이 아닌 소설처럼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인터넷에서 「파트와」를 검색해 보았다. 대체 종교적 의무란 게 무엇이기에 살인도 불사하는 걸까. 인간의 믿음이 이토록 무서운 건지 새삼 깨닫는다.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품이 해석될 때 그가 느꼈을 당혹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악마의 시』는 단지 소설일 뿐인데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시간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러나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낸 루슈디가 대단해 보인다. 신변보호생활 10년을 끝내고 조지프 앤턴에서 살만 루슈디로 돌아온 그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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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쪽, 1240g. 이 어마무시한 쪽수와 무게가 이 책 『조지프 앤턴』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조지프 앤턴’은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유일하게 부커 상을 세 번 수상한 작가이자 이슬람의 암살 위협 속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소설 같은 삶을 살아온 소설가 살만 루슈디. ‘조지프 앤턴’은 그런 살만 루슈디의 도피생활을 위한 가명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래서 집을 떠나는 그 순간을 특별히 의미심장하게 여기지도 않았지만, 그가 5년 동안 살았던 그 집에 돌아오기까지 그로부터 3년이 걸렸고 그때는 이미 그의 집이 아니게 되고 만다. 1988년 9월 26일 출간한 한 편의 소설 『악마의 시』 때문이었다. 이 책이 이슬람교의 탄생 과정을 도발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출간 즉시 격렬한 논란을 부른데 이어 급기야 1989년 2월 14일에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가 신성모독죄로 살만 루슈디에게 ‘파트와(사형선고)’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영국 정보부와 경찰의 경고에 따라 루슈디는 기약 없는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 사이 이란의 ‘15 호르다드 재단’은 파트와 실행에 현상금 100단 달러를 내걸고, 『악마의 시』 출판사에 협박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주일 뒤, 『악마의 시』를 판매하던 미국의 서점에서 폭탄이 터졌고, 같은 해 4월 9일에는 영국의 서점 2곳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서점에서 폭탄이 터졌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년 뒤 7월에는 『악마의 시』 이탈리아어 번역가가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으며 일본어 번역가가 살해되는 등의 테러가 잇따랐다. 그러한 살해 위협 속에서 자신과 작품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 루슈디.
이 일을 두고 루슈디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일에서 최악의 측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되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p.21)
일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슬람 사회의 지도자, 이맘이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지도자 이맘. 사람들은 이맘을 소리 높여 규탄하기 시작했고 그의 혁명도 인기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방법이 절실했는데, 때마침 등장한 책 『악마의 시』의 저자 루슈디가 그 해답을 주게 된 셈이었다. 책은 악마의 소행이고 저자는 악마. 그렇게 이맘은 원하던 적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프롤로그의 대략적인 요약이다. 본인이 소설가여서 그런지 몰라도, 거기다 유일하게 부커 상을 세 번 수상한 작가여서 그런지 몰라도 막상 책을 읽으면 824쪽이라는 어마무시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삶. 처음에는 루슈디의 도피 생활이 어떠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문학가로서의 루슈디에 관심이 갔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직도 변함없었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루슈디도 매번 정신적, 언어적, 형식적, 정서적 여행을 했다. 책은 그 여행에서 얻은 메시지였다. 그는 독자들도 자신과 함께 여행하며 즐거워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그는 깨달았다. 어느 시점에선가 독자들이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오지 않는다면 물론 아쉬운 일이지만 그로서는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론가들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나와 함께 걷지 않겠다니 안타깝구려.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가겠소. (p.799)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라던가, 프로듀서 브라이언 그레이저가 사무실로 초대하더니 루슈디 자신의 삶에 대한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혹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면 책으로 먼저 내겠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일로 엮이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좋기도 했다. 뭐랄까, 그게 더 근사하니까. 시나리오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한낱 고용인 신세로 전락할 테니까.)’(p.794) 라고 말했다는 것도 그의 말마따나 참 근사해보였다.
예술은 그렇게 강하지만 예술가는 약하다. 어쩌면 예술은 스스로를 지켜내는지도 모른다 (p.812)고 루슈디는 말했지만, 그의 자서전을 읽고 있으면 예술, 그 중에서도 문학만큼은 루슈디 자신이 역량껏 지켜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프 앤턴’으로 살아낸 13년이 말해주듯이.
워싱턴 포스트는 이 책에 대해 ‘놀라운 책이다. 오랫동안 내 책상을 스쳐간 자서전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말했다. 난생 처음 읽어본 자서전이었지만, 난생 처음 읽은 자서전이 이렇게 멋진 자서전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스릴러이자 한 편의 서사이며 정치적 에세이이자 사랑 이야기이고 자유에 대한 송가, 아니 그 무엇보다 ‘다만 루슈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못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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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는 다른 두툼한 택배 박스에 물음표를 둥둥 띄우면서 개봉하니, 무려 800쪽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두께의 거대한 책 한 권과 또 다른 책 한 권이 나왔다. 그 거대한 책이 바로 <조지프 앤턴>. 그리고 다른 책 한 권은 <그래도 괜찮은 하루>, 신간평가단 지정도서였던 것이다. 일단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 작가? 잘 모르는 작가다. 근데 책의 두께가 역대급이다. 3년째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해 오면서 이렇게 두꺼운 책은 처음이었다. (물론 '크기'가 컸던 책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고 화보를 보는 듯한 에세이가 있었다.)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두꺼운 책이 주는 중압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래도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 자리에서 책을 펴 봤다. 그리고 나서야 알았다. 이 작가가 누구인지 왜 살만 루슈디의 자전 에세이인데 제목이 <조지프 앤턴>인지. 프롤로그는 마치 잘 짜여진 소설 같았다. 왜 안 그렇겠나. 자신이 쓴 소설 <악마의 시>가 종교모독으로 읽혀지고, 자신은 살해 위협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며, 그 와중에 자신은 은둔생활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긴박감있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내용이기 때문에 당시에 무엇을 했고 어떤 상황이었으며 누가 이런 말을 했다,라는 것을 적었다. 그래서인지 더 현실감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20페이지 남짓한 이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 작가 살만 루슈디. 그를 잘 모르지만 그의 대단함은 책 속 곳곳에서 느껴졌다. 특히 자신의 상황을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의 까마귀가 등장하는 장면과 비교하는 부분은 이 프롤로그의 제목 '최초의 까마귀'와 잘 맞아 떨어졌으며, 내게는 꽤 임팩트가 있게 다가왔다.
첫번째 까마귀가 정글짐에 내려앉을 떄는 유일하고 색다르고 특별해 보인다. 그 모습을 일반화하여 거창한 이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사후에, 즉 재앙이 시작된 후, 사람들은 흔히 첫번째 까마귀를 어떤 전조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까마귀가 정글짐에 처음 내려앉을 때는 한낱 새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p.15)
현실감이 없어 보였던 건 아무래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전조였던 이 부분이 실상은 그저 여느날과 다름없는 하루였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 느낌을 영화와 비교해 정확하게 전달해냈다. 프롤로그에서 부풀어오른 기대감이 다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유년시절, 그리고 왜 <악마의 시>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에게 작품이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됐었던 1장. 여기서부터는 화자가 3인칭으로 등장, 루슈디를 '그'라고 지칭하기 시작하며 소설같은 구성을 띠기 시작한다. 새로움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등장하는가? (p.105) 살만 루슈디는 소설을 쓰기 전 이런 문장을 비행기 안에서 적었었고, 그가 쓴 소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소설이었다. 이 물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왜인지 와 닿는 문장이라서 적어봤다. 루슈디는 이민자였던 자신과 옆집의 할머니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여러 의문이 던져지길 원했다. 이민이라는 행위는 이민자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 자아상, 문화, 신념 등 모든 것을 위기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이민자들에 대한 소설이라면 마땅히 의문을 던져야 옳다. 이민자들의 위기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p.105) 그렇게 등장한 <악마의 시>는 센세이셔널했지만, 머지않아 파트와로 목숨을 잃을 위협에 놓인다. 그가 책상 앞에 적어두었던 "책을 쓰는 일은 파우스트의 계약과는 정반대다. 불멸을 얻으려면, 하다못해 유산이라도 남기려면, 일상생활은 아예 포기하거나 지리멸렬을 각오해야 한다."라는 좌우명대로, 그는 이 책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포기해야만 했다.
에세이에서 보건대 다른 나라에서 책을 출간하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하지만 "자유인은 책을 씁니다. 자유인은 책을 펴냅니다. 자유인은 책을 팝니다. 자유인은 책을 삽니다. 자유인은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국민정신에 입각하여 독자 여러분이 전국 방방곡곡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전면광고를 낼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했던 출판계는 확고했고, 비겁자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용자들도 어디서든 등장했다. 그리고 10년의 지리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표현의 자유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하고 어디까지가 모욕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인데, 루슈디의 책도 그런 것이다.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긴 했으나 그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 분명한 종교가 존재함에 '단순'한 것이 '복잡'해 진 것이다. 그럼에도 루슈디는, 쫓기는 신세임에도 예전에 사랑했었던 첫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아들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새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으며, 그와 반대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기기도 했다. 자신이 자신일 수 없음을 괴로워하다가도 자신을 지켜주며 보호해주는 특수부 사람들과 친구들의 위로로 자존감을 되찾기도 했으며, 이름을 조지프 앤턴으로 바꾸고 '조'라고 불렸다. 루슈디가 10년만에 드디어 자유를 얻었을때 나도 얼마나 기뻤던가. (드디어 책이 끝이라는 생각에-)
긴 분량은 그만큼 그때 겪었던 일들이 잊을 수 없을만큼의 기억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작가의 기질로 그때의 일을 더 잘 알리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20년 전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경험은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를 이렇게 쓰는 사람은 루슈디가 처음일 듯. 그리고 <악마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파트와가 선포되었더 건지 말이다. 뭐 그때와 지금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의 글솜씨를 보건대 보통은 넘을 듯 하니 말이다. 내게 많이 낯선 루슈디지만 왜인지 그의 인생을 알고나니 궁금증이 생긴달까.
책은 작가의 책상을 떠나면서 변모한다. 아무도 단 한 구절도 읽지 못했을 때부터, 글쓴이 말고는 그 누구의 시선도 스치기 전부터, 책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으니 더는 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책은 제멋대로 세상을 여행할 테고, 작가가 간섭할 방법은 없다. (중략) 책은 이미 세상으로 나아갔고 세상은 책을 바꿔놓는다. (p.129) 세상에 내놓은 책은 작가의 의지가 아닌 세상의 의지대로 바뀐다고 했다.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그러니 말이든 책이든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게 했던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