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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빛을 찾아나)선 사람들 <흑산>을 읽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동명의 소설과 영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제한, 단절, 고립과 같은 이미지가 먼저 고개를 든다. 아마 조선 시대에 죄인을 섬으로 보내어 살게 하는 형벌인 ‘유배’가 한 몫하는 성싶다. 김훈 작가의 소설 <흑산>을 읽고 나니 섬의 장소성과 더불어 그 섬을 삶터로 여기며 살다간 사람들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섬의 선주민은 무슨 죄로 귀양 온 양반이나 부임 온 수령을 위해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었는지 그저 얄궂기만 하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난 19세기 초로, 천주교가 많은 신자들의 피땀을 양분 삼아 조선 땅에 뿌리내리려 하던 때이다. ‘천주교’라는 굴러온 돌이 오래전부터 단단히 박혀있던 ‘유교’라는 돌을 빼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는 돌 밑에 깔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돌들이 쌓여 만들어진 현실의 벽 앞에서 뒤돌아서거나 주저앉았으니 말이다. 소설 속 황사영은 ‘순교자’이고, 정약전은 ‘배교자’라 부를 수 있겠다. 둘의 사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여럿 눈에 띈다. 먼저 황사영은 열여섯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뛰어난 인재로 장차 입신양명할 것으로 뭇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이윽고 정씨 집안과 혼인의 연을 맺음과 동시에 천주교에 입문함으로써 말 그대로 입신(入信)하게 된다. 이는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이라는 구질서에 대한 배반과 같아서 끝내 그는 멀리서 온 구원자들과 그들이 탄 배를 보지 못한 채 두 눈을 감고만다. 살아서 황사영이 대왕대비(정순왕후)와 벌이는 대립 구도가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처럼 겹쳐 보이기도 한다. 다음으로 정약전을 비롯한 정씨 집안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높고 낮음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천주교를 받아들인다. 기존 제도를 고수하기 위해 조선 왕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탄압하고자 국가폭력을 자행한다. 정약전은 감옥에서 고문을 받으며 황사영과는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스스로 배교(背敎)가 아니라 기교(棄敎)를 통해 죽음을 불사하기보단 현재 ‘여기’에서 작지만 큰 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나는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337쪽)”는 정약전의 말에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흑’은 검기만 하여 두렵지만, ‘자’에는 희미하나마 빛을 간직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아울러 ‘자’에는 ‘지금, 이제, 여기’라는 의미도 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약전의 흑산 앞바다와 난바다를 넘나드는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기록한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섬이든 아니든 같은 조선에서 세상살이하는 사람들과 실용적인 지식을 나누어 다 같이 조금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책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자신이 처한 현실, 여기 흑산에서 세상을 바꾸는 자기만의 실험을 한 것이리라.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인가 싶지만, 작가는 아무개로 명명되거나 쉬이 잊히고 말았을 민초들에게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한다. 마노리, 창대, 문풍세, 육손이, 강길녀, 아리 등 저마다의 서사를 품은 채 정약전, 황사영의 삶의 궤적과 겹쳐진다. 두 사람과 어둠 속 빛을 찾아나가는 길을 동행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구체화하는 데 크고 작은 영감을 전한다. 그 가운데 육지와 섬을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뱃사공 문풍세의 수탉이 독자에게 여러 메타포를 던져준다. 모름지기 한 나라가 망해도 해는 뜨고, 개도 짖고, 닭 역시 우는 법이다. 묵은 밤이 가고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이 어쩌면 낡은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 바뀌는 천지개벽을 알리는 천주교의 전령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계명(鷄鳴)에서 한 발 더 나아가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誡命)과도 연결되는 듯하다. 책을 덮고 흑산을 빠져나오며 정약전과 『자산어보』의 숨은 공저자이자 황사영의 기운을 닮은 창대, 그리고 가족이 탄 배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흑산의 사람들이 바라본 바다를 상상한다. 흑산은 늘 물과 하늘 사이에 있(어왔)고, 물가에서 먼 바다를 향하면 수평선이 나타난다. 차별 없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의 마음을 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점점이 모여 공동선을 이루어 모두가 예사롭고 평범한 삶을 향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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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흑산입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조선 사회의 전통과 충돌한 정약전, 황사영 등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부패한 관료들의 학정과 성리학적 신분 질서의 부당함에 눈떠가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천주교가 이러한 조선 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새로운 대안이었습니다. 천주교에 연루된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인 황사영의 삶과 죽음 다루고 있습니다. 문학은 그 사회를 표현한다는 말처럼 살아있는 그 시대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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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걸까. 사실 조선시대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고 대부분 궁궐 로맨스 이런 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흑산에서 조선땅에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그리고 얼마나 힘이들었으면 죽는 줄 알면서도 천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았을까. 그리고 배교한 자들의 죄책감과 밀고를 당한자들의 아픔이 얼마나 절절한지 느낄수있었다. 흑산을 읽고 아,,,이런것이 바로 소설의 힘이구나. 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알려주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것. 진짜 생각해보니까 한번도 노비의 삶을 알지 못했다. 드라마에서는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 같았는데 실상 인간대접은 커녕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고 앞만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손을 잡고 옆도 둘러보고 같이 살아가자.라는 마음가짐.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소재,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가끔 나살길만 바라보고 주위의 아픔을 잊는 경우가 종종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흑산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것 같다. 과거이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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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기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배경과 사건들을 왔다 갔다 하는 이 책의 구조를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앞에 나왔던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책을 읽을수록 인물과 인물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책속의 인물관과 세계관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졌다. 흑산의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중 가장 몰입해서 읽은 부분은 정약전이 자신의 형제들과 황사영과 함께 고문을 받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는 매를 맞는것을 '똥물','살점' 등 역겨운 것들과 함께 묘사를 했는데 이것이 지저분하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적나라한 표현에 오히려 너무 사실적으로 느껴졌고 정약전이 고문을 당하는 부분을 읽을때는 내가 곤장을 맞는다면 그 고통이 어떨지 상상하며 읽을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다. 흑산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책의 내용을 읽는 것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예를 들어, "정약전과 형제들은 이미 사회의 상위계층에 속하는데 왜 만민이 평등한 천주교를 믿었을까?" 나 "목숨을 버려가면서 까지 종교를 믿는것이 바람직할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이러한 질문들을 많은 학생들과 나누면서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게 생각했던 문제는 "내 형제들은 천주학을 한바탕의 신기한 이야깃거리로 알았을 뿐, 그 계명을 준행하지 않았고 타인을 교화시키지도 못했다."(16p) 라는 정약종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정답은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와 책을 다 읽고난 후 생각해볼 때 정답이 서로 달랐다. 하지만 내가 정약종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했을때 내가 내린 결론은 이 말은 진심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형제들은 배교를 해서 살아남았고 만약 다른 형제들이 정약종만큼 믿음이 깊었다면 정약종과 함께 사형당했을 것이며 정약전은 "죽은 약종이 말했듯이, 나에게는 애초에 믿음이 없었으니~~~"(18p)라고 말했기 때문에 정약종의 말은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떤 재밌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고난 후 내용을 알고 있으면 내용을 모른 상태로 읽고 보는 경험을 다시하고 싶을때 흔히 "~~~보기(읽기)전으로 돌아가고싶다."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흑산이란 책을 읽고난 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 이유는 이 책은 여러번 읽으면 읽을수록 전에 읽을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여러번 읽을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흑산'은 시험이 끝나고 난 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여유롭게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픈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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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서두의 일러두기를 보고는 빵 터졌다. “이 책은 소설이다”라고 쓰여있었다. 김훈 답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집에 있는 <남한산성>, 그리고 <칼의 노래>를 펼쳐보니 거기도 비슷한 글이 쓰여있다. 흑산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책을 시작했고, 흑산이 흑산도임을 알게된 후에도 이 책이 대체 무슨 내용을 쓴 책인지 몰랐다. 무척 무거운 책이었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와 황사영이라는 실존 인물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겪어야 했던 무섭고도 끔찍한 일들이 적혀있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 <흑산>은 천주교 박해, 이렇듯 배경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던 시기이다보니, 이 책들에서 그려지는 백성들의 사는 모습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흑산>이 그려내는 당시의 사는 모습을 읽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인상이 쓰여진다. 그것은 내가 기독교인이라 박해받는 천주교인의 모습에 감정이입이 되어서이거나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보통 백성들, 특히 노비 신분인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다. 그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김훈의 글은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고 간결하다. 그래서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아래와 같은 구절이 대표적인 예라 인용해 두었다. "박차돌은 육손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육손이 주변에 선을 대서 황사영에 닿으려 했지만, 육손이는 박차돌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육손이는 넓고 멀리 움직였다. 박차돌은 육손이에게 가까이 왔으나 닿지는 못했다. 닿지 못했으므로 박차돌은 육손이와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박차돌은 겉돌았다. 황사영의 집은 교인들이 모이고 흩어져도 달그림자 흐르듯이 고요했다." 흑산이 자산이고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그 책이라도 쓰지 않았으면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흑산도까지 가는 길이 너무 실감나게 묘사되어 흑산도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배를 싫어하는 나는 아마도 평생 절대 가보지 않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먼 길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라고 해놓고 책 말미에는 당시의 연대기, 즉 소설이 아닌 실제 발생한 일들이 시간 순으로 실려있다. “이 책은 소설이다”고 하지 않았으면 보통 그런 연대기를 읽거나 하지는 않을텐데, “이 책은 소설이다”라는 글 때문에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과연 소설이기에 순서를 조금 뒤바꾸거나 해서 극적으로 만든 부분이 있다. 올해에만 김훈 작가의 책을 세권째 읽고 있다. 늘 그랬다. 한번 꽂히면 그 작가 책을 자꾸 찾게 된다. 김훈 작가는 소설이든 수필이든 정말 많은 자료 조사와 공부를 하고 쓴다는게 느껴지는데, 정작 글은 무척 겸손하고 간결하다. 그런 김훈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책속으로] 밀고 써는 파도가 억겁의 시간을 철썩거렸으나,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스치고 지나간 시간의 자취는 거기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가득 차고 또 비어 있었다. ……저것이 바다로구나, 저 막막한 것이, 저 디딜 수 없는 것이……. 그림자가 어둠에 녹을 때까지 정약전은 갯가를 어기죽거리며 걸었다. ……죽지 않기를 잘했구나…… 저렇게 새로운 시간이 산더미로 밀려오고 있으니……. 매를 맞을 때, 고통은 번개와 같았고 매를 맞고 나면 고통은 늪과 같았다. 물소리에 실려서 정약전의 의식은 먼바다로 흩어졌다. 정약전은 불려가듯이 잠들었다.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혔지만, 돌아올 때는 지나온 길이 앞으로 뻗었고, 갈 때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 다시 잊혔다. 길은 늘 그 위를 걸음으로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 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의 위엄은 조용했고 평화로워서 이슬비처럼 사람과 마을에 스몄다. 날마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포개져서 노을 속으로 함께 저물었는데, 바다는 그 너머였다. 바다에 내린 빛이 물을 덮어서, 서망의 아이들은 노을의 빛과 바다의 물을 구분하지 못했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서울로 가는 강선에서 황사영은 그 말의 단순성에 놀랐다. 육손이는 노꾼도 아니면서 노를 저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호격에는 신통력이 있어서 부르고 또 부르면 대상에게로 건너갈 수 있을 듯싶었다. 들판에 퍼지는 소 울음소리도 호격으로 울고 호격으로 부르고 있었다. 주여, 주여 부를 때 주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 호격 안에는 부르는 자가 예비한 응답이 들어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마노리에게는 그 뜻이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이 확실했다. 마노리는 그 분명함에 놀랐다. 황사영의 말을 듣기 전부터 마노리는 그 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드러나지 않고 몸속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목마른 자가 저절로 물을 찾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서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처럼 분명했다. 마노리는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중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저녁에 빛들은 수평선에 내려앉았다. 수평선은 눈동자 속의 선이고 물 위의 선이 아니라는 것이 물가에서는 믿기지 않았다. 시야의 끝에서 물과 하늘이 닿는 허상이 펼쳐졌으나, 닿아 있는 자리에서 물과 하늘 사이는 비어 있어서 수평선은 아무런 선도 아니었고 그 너머에 또 다른 수평선이 지나갔다. 하늘의 선한 뜻은 권력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서 일상의 땅 위에 실현할 수 있으며, 그 실천의 방법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사랑하고 죄를 뉘우치고 뉘우침의 진정 위에 새날을 맞이하라. 크고 두려운 날들이 다가온다. 지나고 나면 지나온 길은 눈비 속에 지워졌다. 이 세상에는 가보지 않은 길이 더 많을 터인데 가보지 않은 길이 가보지 않은 자리에 그렇게 뻗어 있을 것인지가 마노리는 늘 궁금했다. 그래서 길은 그 위를 지나갈 때만 확실히 길이었다.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무서움이었다. 썩은 것들이 오히려 강력하고 완강했다. 황사영은 그 완강함이 무서웠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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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은 신유박해를 소재로 삼은 역사소설이다. 픽션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에 소설은 소설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흑산>을 읽으면서 걱정이 생겼는데, 소설과 실제를 착각하면 어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역사를 찾아보기도 했다. *실제 역사 1.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한다. 1801년 부터 1814년까지 흑산도에서 살며 저술한 것으로 물고기의 생태에 관한 것이다. ‘자산’은 정약전의 호다. 흑산이 자산을 뜻한다는 것은 소설의 설정이다. 정약전의 또다른 저서가 <자산역간(玆山易諫)>인데, 흑산이 자산이라면 자산역간이 흑산역간을 뜻하므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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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은 자로부터 전해들을 수나 있고, 책과 책 사이를 사념으로 메워나갈 수가 있지만, 매는 말로 전할 수 없었고, 전해 받을 수가 없으며 매와 매 사이를 글이나 생각으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는 책이 아니라 밥에 가까웠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눈물 겨웠다. 호격에는 신통력이 있어서 부르고 또 부르면 대상에게로 건너 갈 수 있을 듯 싶었다. 들판에 퍼지는 소 울음소리도 호격으로 울고 호격으로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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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은 재미있다.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다. 역사는 이미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다. 검색 한 번이면, 역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결과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역사 소설의 묘미가 생긴다. 이미 알려진 결과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정해진 틀 안에서 얼마나 상상력을 발휘해 낼 것인가. 글과 사료로 이어진 틈 사이를 어떻게 메워 내는가가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의 역량이고, 그 역량을 감상하는 일이 역사소설을 보는 한 방법이라 믿는다. 그런 면에서 김훈의 소설은 가히 독보적이다. <칼의 노래>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현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본다. 그리고 <흑산> 역시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람vs사람>에서 정혜신 박사는 "'보이는 것만' 믿는 '물질적 인간'", '기능적 사고패턴'을 가진 사람이라 평한다. 그래서 거대 담론이니 뭐니 보다 몸이 검증 한 언어만 쓴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김훈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심하게 본다면 무미건조함. 어떤 인물의 내면이나 의식을 자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현상, 아니 장면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보다는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만 표현한다. 또한 인물간의 대화나 대사도 그다지 많지 않다. 묘사도, 대화도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건조함이 오히려 인물의 감정을 독자 스스로 유추하게 한다. 보이는 것만 보여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서 찾게 만드는, 공백을 독자 스스로 채워가게 만드는 문체가 아닐까. 그의 문체는 앞서 말한 역사소설의 재미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역사의 기록과 사실을 채워나가고자 노력하고, 독자는 작가가 비워놓은 감정과 느낌을 채워나가는 것. 이것이 김훈의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다. <칼의 노래>를 쓰면서 이가 6개나 빠졌다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치열했을까. 저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되새겨 본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으르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p.446 ------------------------------------------------------------------------------- 기록과 사실에는 많은 편차가 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기록을 재구성한 결과는 온전한 사실이 아닐 것이다. p.3 형틀에 묶이는 순간까지도 매를 알 수는 없었다. 매는 곤장이 몸을 때려야만 무엇인지를 겨우 알 수 있는데, 그 앎은 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은 읽은자로부터 전해들(p.10)을 수나 있고, 책과 책 사이를 사념으로 메워나갈 수가 있지만, 매는 말로 전할 수 없었고, 전해 받을 수가 없으며 매와 매 사이를 글이나 생각으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는 책이 아니라 밥에 가까웠다. p.11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 p.190 개국 이래로 국본이 이토록 망가진 적은 없었는데, 첫째는 굶주려서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참상이고 둘째는 무민하는 요언의 창궐이었다. 요언의 뿌리는 굶주림이었고, 그 두 가지는 실상 한가지였다. 요언이 썩은 고기의 구더기처럼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썩은 고기는 바로 굶주림이고, 그러므로 여언은 일없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당상들은 누구나 알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p.236 죽음은 바다 위에 널려 있어서 삶이 무상한 만큼 죽음은 유상했고, 그 반대로 말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들끼리 살아 있는 동안 붙어서 살고 번식하는 일은, 그것이 다시 무상하고 또 가혹한 죽음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지라도, 늘 그러한 일이어서 피할 수 없었다. 흑산의 사람들은 붙어서 사는 삶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두 말없이 긍정하고 있었다. p.354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식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p.390 주린 사람이 꾸며서 배고파하지 않고 추운 사람이 억지로 떨지 않는 것과 같아서, 그 까닭을 물어봐도, 물어보나마나 한 말이 될 것이었다. 선비들이란 그렇게 뻔한 것도 공력을 들여서 생각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p.4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