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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음생활을 할 것인가?" 이 책의 주된 관심사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이미 전제된 상태이다. 그래서 일반인보다 크리스천이 읽으면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많이 놀라게 된다. 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도 보고 책도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솔직하고 겸손하게 활자로 전세계인에게 자신의 믿음에 대한 핸디캡을 털어놓다니. 우리는 목사나 주위의 믿음생활를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믿음이 완전했던 것으로 착각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선택된 사람이 아닐까 할 정도로.(우리나라 목사들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곧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초신자의 입장(시시때때로 드는 의심)을 이해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그러한 과정이 없었던 것처럼 심하게 질책하기에 나선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님께서 보혈의 십자가로 우리의 대속적 죽음을 강단에서 그들에게 들으면서도 원죄에 시달린다. 아이러니하다. 억지주장이 아니다.
나는 솔직히 목사나 신부, 혹은 교회의 일정한 직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부터 작아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을 질책하기에 앞서서는 곤란한다. 물론 사랑은 매도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매는 아프지 않다. 그리고 더 많이 감사한다. [인상깊은구절]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있는 뼈대와 같다. 그런 골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된 장소로 이끌어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히는 것이다. 의심은 감추거나 두려워 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직을 가지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단단한 골격이다. 만약 내가 지금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쓸 필요없이 이 문장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왜 교회는 '의심'을 마치 적군처럼 간주하는가? |
| 가장 큰 기독교의 당면 과제는 '성경의 가르침'과 '성도의 행실' 사이의 괴리이다.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겠으나, 이 부분은 정말 언제나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로 작용한다. '일요일의 종교인, 월요일의 사회인'을 역설했던 사회학자의 말 같이, 우리는 늘 회칠한 무덤, 외식과 위선의 허울을 적절히 뒤집어 쓴 교리주의자, 혹은 사이비, 자칭 교인, 비주류 신자로 각각 살아간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독사의 자식이라 칭하셨던 것을 보아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과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럴때 마다 우리는 너무나 하는 말이 많다. 신앙을 가지면서 인간의 행동원리는 누구나 기복(祈福)에 기인한다. 사실 기독교는 보상과 반대급부가 철저하지만(매우 자본주의-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본래 욕구는 상당히 불순함과 왜곡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본질적 문제 뿐 아니라해도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구원이란 한순간의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현재 진행이기 때문에 인간 본연의 나약함으로 인한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은 문제에 대해 신을 원망하거나 좌절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완전하게 신을 의지하지도 못하며, 신이 인간에게 명한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르침이나 명령 등을 자기 나름대로, 각자의 취향에 따른 취사선택까지도 쉽게 자행하곤 한다. 문제에 본질은 인간에게 있다는 점이고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인간은 괴로움을 겪다가 실패하게 되며 좌절을 경험하고 결국 자기 속에 정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는 다윗의 기도와는 달리 매일 참담해져 가는 비극에 길로 치닫게 된다. 이 상실은 바로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읽는 이들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가르친다. 믿음이란, 진정한 신의 의지라는 것은 바로 은혜이다. 이 작가의 위대한 저작, amazing Grace는 은혜에 대한 내용으로, 신은 우리에게 공로나 댓가에 기인한 교환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아닌 은혜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늘 인도한다. 우리가 험한 길을, -풍부한 풀이 있는 곳으로 가는- 따라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분의 뜻을 우리가 구하고 묵상하기 전까지는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어둡게 되면 우리에겐 상실의 아픔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은혜에의 길로 가는 것은 우리의 고통과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후히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나가는 길임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
| 어느 새부터인가 나는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자..." "그 두 마음 때문에 결코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를 가리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그래서 두 마음을 품게 되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주께로부터 얻을 것을 조금도 생각지 말라고 했다. 오랫동안, 거의 20여년 동안 말씀을 배워왔다. 내가 자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거의 모든 전심전력을 다하는 교회였다. 모교회를 떠난 후, 나는 전문적으로 말씀을 배우는 곳에 내 흔적을 남겼다. 지금도 그 과정은 지루한 듯 모르게 계속되고 있고, 또한 나는 그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벌써 수년을 열성을 바쳐왔다. 나는 지금 그 유산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또한 기뻐한다. 말씀은 모든 흔들림에도 궁극적으로는 굴하지 않는 반석과 기둥이 되는 것을 절감한다. 이건 그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기업이다. 나는 복을 받은 자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확신과는 상관없이 경험하는 내면의 혼돈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상념에 사로잡히는 때의 "나"와, 정해진 주일의 예배 시간에 졸린 눈을 비비면서 나와 앉은 젊은 눈망울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나"라는 전혀 다른 이중성의 내가 있다는 것을 때로 발견한다. 복음을 전할 때의 "나"는 말하자면 "설득을 하는 사람"이다. "믿으라"고 말한다. 한치의 틈도 허용되지 않을 만치 정제된, 최대한의 논리를 이용하여 복음을 변증(辨證)한다. 그리고 설득당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며, 아집과 독선을 포기하고 손을 들고 나아올 것을 요구한다. 성령께서 그 논리 위에 기름부으시기를 기도하면서 "불붙은 논리"가 그들을 압도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무감각한 듯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왜 저들은 믿지 못하는 걸까?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조용한 나만의 공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의 방에서 오직 현악기의 삐걱대는 현만이 그 정적을 타고 자신의 목소리를 발할 때, 나는 턱을 괴고 쉬이 상념에 빨려 들어간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그가 내 삶에 지금도 개입하시고 세밀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가시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리 무기력한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것을, 확신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믿으라고 떠들어대는가? 나는 언제부터 위선자가 되었나? 계속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얀시는 자신이 선천적으로 회의론자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러한 상태로 계속 머물기보다는 노인들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지금껏 그가 써 온 많은 글들의 주제가 그러했거니와 그는 정말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직업이 기자인 것을 증명하듯,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인 것을 드러내듯 그는 교회의 신앙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 또한 외부에서 들여다보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며 바라보는 방식을 택해왔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시선은 정말 위험하다. 신앙이라는 것은 겉으로 객관적으로 증거가 발견됨으로 검증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외부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신앙의 신비의 요소는 단순히 지켜보고 관찰한다고 발견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내부의 일원으로, 한 요소로 자신의 그 안에 함몰되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 훨씬 정답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신앙을 바라보는 얀시의 3인칭 관찰자 시점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는 내가 갖고 있는 그 가식된 위선을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책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그의 회의적 성향을 그는 이 책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의심은 신앙을 파괴하고 객관적 진리를 상대적인 허구로 교체하는 류의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와 신앙인을 사랑하는 순수함을 가지고 참된 신앙을 세우기 위해 의심을 사용한다. 그의 고민의 여정을 그와 함께 걸으며 때로는 답답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나로선 그냥 덮어버린 질문들이 그에게는 열린 호흡이 되어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덮어버리는 것이 덜 피곤하고, 편하고, 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얀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덮어둔 상처가 언젠가 곪아 터져서 예상치도 못했던 심각한 병고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음을 그는 미리 간파한 것 같다. 정직하고 건전한 상채기가 있을 때, 그것을 지금 당장 도려내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그 상처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제거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물론 의심이 모든 해답을 낳는 것이 아님을 얀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얀시의 이런 의심 또한 "하나님의 인격성"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해답의 명료함"보다 더 권장할 만한 "관계의 친밀함"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과 정직하고 솔직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니까... "관계"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수확이다. 우리의 신앙은 사실 무엇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의 행위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행위를 낳는 인격과 관계의 문제이다. 얀시가 아이와 어른과 부모의 삼 단계 성장 단계를 가지고 신앙을 이야기하듯, 신앙은 우리의 삶이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삶의 과정은 하나님과 결혼한 우리가 함께 배우자인 하나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날은 토요일이다. 역설이 존재하는 날... 되기도 했고, 되지 않기도 한 그날. 완전한 승리가 있지만, 더 궁극적인 승리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날이다. 이 길은 노정(路頂)이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우리의 신앙이 무균 상태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호흡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많이 나열될 수 있는 고통의 행렬들 속에서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토요일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고 친밀하고 애정어린 관계에 있는 그분의 손을 잡고 예정된 일요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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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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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변가요 글쟁이인 그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재주
하나님의 방법은 종종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분은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반역하는 자와 방탕한 자들도 좋아하며, 당신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고, 낮은 목소리와 침묵으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러한 성향들 속에서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내쫓기보다는 달래려 하시는 마음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의심이 생길 때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과없이 계시하신 예수님께 집중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과 일치점을 찾을 수 없는 비극이나 악행이 일어날 때에도 먼저 그분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성경은 오직 화창한 봄날에만 살도록 배려해주겠다는 장밋빛 약속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건조한 계절을 대비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여름이 지나면 혹독한 겨울이 뒤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려 생수의 근원에 닿아 있다면, 가뭄이 계속되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고 풍년이 들면 더욱 번성할 것이다.
아직도 나의 자의식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이나 주변 환경들이 나의 가치와 평온함을 좌우한다.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가능성 있는 변화를 위한 가장 든든한 기반이다.
나는 지금 어린애 같은 유치한 신앙의 유혹에 직면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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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이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답답함과 부재를 느끼고, 또한 세상의 불합리해 보이는 일들과 고통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의심을 품어보았으리라. 하지만 의심하는 것이 마치 죄인 듯 포장된 우리네 기독교 문화에서 그런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마치 믿음이 없고 불경한 사람처럼 취급받을 수 있음에 많은 이들이 꺼려하는 것이었다.
필립얀시 목사님은 영적인 리더이지만 솟아나는 의심과 답답함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는 용기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용기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사용되었다. 필립얀시 목사님은 피조물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의심의 영역에 접근한다.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지식과 여러 믿음의 선진들의 하나님에 대한 묵상, 그리고 시련 속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며 의심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일들, 그리고 약속의 신실성을 붙잡으며 우리는 믿음 가운데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
| 책 제목에서부터 나는 압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 달갑지 않은 책 제목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 분명히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내 안에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괴로웠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내가 느낄 수 없어도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도록 해야 한다. 필립 얀시의 책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접한 뒤로 이 책이 두 번째이며, 그 이후로도 여러 권을 사서 읽고 있다. 대체적으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얀시의 책은 거의 주저않고 사도 괜찮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 외국어 제목은 reaching for the invisible God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접근하기 입니다. 내용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갈까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만난다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 그분은 구약시대에서는 직접 모습을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소수의 제한된 사람한테만...그리고 죄때문에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에, 모세에게도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는 분들중에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적극 권장합니다. 뛰어난 필체와 글솜씨의 소유자인 필립얀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소개해 줄겁니다. |
| 이책을 읽은 시점이 나의 상황이 견디기 힘들고...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힘들어 하던 때이고 보니...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믿음의 단계, 그리고 솔직히 하나님 당신을 보기보다는 다급할때 마술상자인 것처럼 여기던 하나님(평소엔 좋은 믿음인듯하나 다급하고 힘든 상황이 되면 당연히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고...기도하며...떼쓰는)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많은 부분 문제해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인내하다 지치면 의심하고...불평하고 따지기까지 했다. 하나님뜻을 운운하며... 이책을 읽으며...힘든시기를어떻게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힘겹고 고통중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나 상황들로 갈등중 인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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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목사님의 제목,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냉철하고 솔직하게 바라본다. 가끔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안에 순수한 믿음이 변질되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외적인 습관(외식적인 행위)에 만족해하며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 그러나 그 형식적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행위는 더욱 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만 할 뿐이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대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가 순수할 때래야만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가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근본적으로부터 재점검 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의 방황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저자의 회복의 추이를 따라 읽는 우리도 치유된다. 우리를 뒤흔들어 놓을 책이라 생각된다. [인상깊은구절] 믿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탐구하고 싶을 때는, 슬그머니 의심이라는 뒷문을 열고 나간다. 왜냐하면 신앙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신앙의 필요성이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