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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어느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일상에 쫓겨 과거의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도, 어느 특정의 ‘사건’에 대한 순간만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혹은 전후의 맥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득한 느낌만 지니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건’이 행복함을 안겨주는 기억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 반대로 불쾌감을 동반하거나 부끄러움으로 기억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잊고 있다가도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간직해야만 했던 경험을 주요 소재로 취하고 있다.
작품에서 중년에 접어든 서술자는 ‘열 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려고 했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그 사건이 일어났던 ‘1952년 6월 15일’을 ‘내 유년기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간혹 그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기도 했지만, ‘이 말을 듣고는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던 경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 이후 누군가에게 그 '사건'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기억 속에 부끄러움의 원천으로 남아있다고 이해된다.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까마득한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 사건으로 인한 부끄러움의 실체를 찾기 위해, ‘나’는 12살의 어린 나이로 돌아가 그 시절의 삶을 회상하는 내용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전체 4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작품에서, 첫 번째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등장으로 한 당시의 가족 관계를 세밀하게 소개하는 내용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자리를 잡고 있고, ‘나’에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그 ‘사건’에 대해 그 이후에는 부모들 모두 입에 떠올리지 않았음을 토로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 사건이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지만, 정작 ‘사건’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부모들은 그 사건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거나 기억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그 원인이나 전후의 맥락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나’에게는 당시를 회상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 항목은 저자가 살았던 고장의 특징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하는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 ‘루아브르와 루앙 사이에 있는 인구 6천명의 이 도시’를 중심으로, ‘나’와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잇다. 그 도시에서 ‘식품점과 식당을 겸한 우리 가게’가 위치해 있고, 그 도시에서는 예의가 ‘주도적 가치이자 사회적 판단의 첫 번째 원칙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예의란 일종의 보호 장벽인 셈이고 따라서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 사이의 예의는 위선이나 악의처럼 느껴져서 불필요한 것이었다. 거칠고 노골적이고 악을 쓰는 것이 가족 간의 대화에 있어서 정상적인 형식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기억에 남은 그 사건은 예의를 벗어난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기에, 여전히 지끔까지 부끄러움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세 번째 항목은 ‘나’가 다녔던 ‘가톨릭 사립학교’에 대한 기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곳은 ‘종교와 지식이라는 두 가지의 절대적 명령, 두 개의 이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하나로 묶여서 내 생활을 압도했던 곳이며 또한 가장 많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소개되고 있다. 사립학교에는 두 개의 운동장이 있었는데, ‘포석이 깔려 있고 햇빛이 들지 않고 커다란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로 그늘져서 어두컴컴한 곳’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배당된 운동장이었다. 반면 ‘넓고 햇살이 들어오는 다른 운동장은 기숙학교에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이 이용하는 장소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부터 빈부의 격차로 학생들을 구별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항목에서는 ‘나’의 학교생활과 이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 등이 주로 소개되고 있다.
마지막 항목에서는 어머니가 주선하여 ‘아버지와 나’가 그해 겨울에 떠났던 여행에 대한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여행에 함께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나’는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변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결국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다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부끄러움이 시작되었고, 그 원인과 맥락을 찾으려고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당시에 찍은 사진 속의 ‘작은 여자 아이와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그 사건뿐’임을 토로하면서 작품은 마무리되고 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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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아니 에르노가 쉰 일곱 살이 되던 1996년에 쓴 것이다. 쉰을 넘으면 그렇게 한 번 쯤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한 때를 반추하고 싶은 것일까? 그녀의 반추는 멋있지만 아직은 그녀를 흉내내고 싶지 않다.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기 전에 치유할 방법을 찾고 싶다. 아니 에르노의 어법을 빌리자면 부끄러움 앞에서 정직할 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열세 살의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평생 잊지 못할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버지의 자리="">나 <단순한 열정="">에서처럼, 아니 에르노는 살갗을 벗겨내는 냉혹한 자기응시를 이 소설에서도 보여준다. 과거 특히 유년 시절을 그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시절을 미화하고 추상화시킨다. 지금의 이미지로 과거의 한 때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천진난만함 속에 도사린 거짓을 예리하게 찌른다. 그리하여 아니 에르노는 열세 살을 기준으로 삶을 가른다.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와 모르는 나이, 삶의 처참함을 아는 나이와 모르는 나이. 그리고 지금의(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의) 아니 에르노는 그 가름이 과연 정당했는가를 묻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부끄러움에 관한 잠언들을 쏟아내는 것도 자기응시의 결과이다.그렇다면 아니 에르노는 왜 그 부끄러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회상이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일까? 그녀는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명징한 의식'으로 돌아보려는 것 같다. 변화란 오로지 삶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스스로 고칠 때만이 가능한 법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의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 소설을 쓰기 전에 그녀는 부끄러움을 몰랐을까?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죽음 <어떤 여인="">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 <단순한 열정="">에서 뒤늦게 찾아온 불같은 사랑은 그 상황을 만나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인상깊은구절]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 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한 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이다."단순한>어떤>아버지의>단순한>아버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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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24회]에서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다뤘다. 만권 박사는 아드님과 해외 탐방 중이라고 한다. 두 분 말씀대로 어떤 모습으로 컴백할지.. 지난번엔 박사님 대신 다른 박사님 모시고 정세랑의 중장편소설을 가지고 이런 저런 말이 오갔다.
정 소설가의 책이 나오자마자 경쾌한 에스에프라며 에피소딕하게 읽어 나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그 당시 소설가가 역사 전공자라는 점과 학교라는 공간을 괴담 이상으로 다르게 문제화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정 소설가는 초록식물 애호가이자 환경 보호가로 정표가 나있다. 나는 편집자 출신인 작가를 거친 회사 사람들과 동료 문인들이 반색하며 아끼는 걸 더 신기하게 봤던 것 같다. 성격이 모나지 않고 꽤나 둥글다 했던가.
그날 방송에서 만권 박사의 빈자리를 느끼며 보다 말았던 것 같다. 그주 일이 많았던 터라 집중하지 못했던 것도 같다.
얇은 책 중심으로 고르는 서유미 작가의 픽 기준에 일단 박수 보낸다. ‘단순한 열정’을 읽었던 나는 친구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자 할 때 손사레를 쳤다. 어떤 이미지와 느낌이 더 읽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방송을 보며 그때 좀 읽을 걸 후회됐다. 한 권 읽고 다 아는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긍데 필립 로스에 대해선 “너무 많이 읽었다”며 거절하는 나라는 사실이다. 다시 읽어도 분명 다른 이야기를 건네고 오고 가는 말이 또다른 경유점을 만들 텐데 내가 이렇다. 떠나 보낸 작가들이라 그런가 싶고.
소설을 읽고 모임에 다녀와 오랜만에 소설 읽기와 토론의 여운에 사로잡혔다. 이 모임 외에도 십년 가량 온 앤 오프로 토론에 임했던 나는 모임에 다녀오면 불이 붙은 듯 열병 비슷한 것을 앓았다. 대부분 다시 읽으며 사람들의 말의 의미를 되짚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달뜬 시간을 치렀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말하거나 말을 들을수록 깨알 같은 의미가 주르륵 흐르는 작품이라 기억들이 뭉치로 날아드나보다.
그 여파에 마음 실어 짤븐 Small Things를 후딱 보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 김경일 외 공저의 ‘적절한 좌절’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현실 분석인지 문학적 응축인지 살짝 경계가 애매해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감기가 걸려도 끝을 보는 스타일이라 십이일 지속 중인 기침과 기운 없음에 몽롱하게 지낸다. 잠을 못 자는 것이 사람을 참 힘들 게 하는구나, 깊은 잠의 의미를 더듬는 나날이다. 눅눅하고 끈적이며 처지는 날씨지만 그래도 매일 걷는다. 얇은 달이 예쁘게 떠서 한참 보는데 창문에 들러붙은 러브버그가 보였다. 하나에 이어 둘.. 넷인가. 눈살을 찌푸리고 조금 열어둔 창문을 닫았다. 방충망이 허술해서 애들 활동 시간과 서식 환경도 알아봐야겠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읽지 않았다는 말을 참 길게 하고 있다. ‘사이섬’에 이어 치욕이란 어떤 감정인지 매만지게 한다. 프랑스어로 오뜨honte를 찾아 봤다는 정준희 교수. 난 오리온 오뜨 과자가 생각나 검색하니 haute로 고급지다high는 뜻이란다. 말씀 중 가장 인상적이고 좋았던 부분이 ‘사춘기’ 시절에 대한 회고였다. 나는 내가 사춘기를 앓지 않고 지나 오춘기로 애먼 고생이라고 둘러댔었다. 긍데 나도 오 육학년 당시 주변을 유독 둘러보고 ‘계급’ 인식까지는 아니어도 사는 차이와 사람들의 천차만별 응대를 유심히 살폈던 것 같다. 중학교 진학 전까지 그처럼 심적 요동과 부딪침이 있었는데도 모른 척 딴청 피우며 바깥의, 나 외의 다른 큰 문제로 시선을 돌렸던 것 같다. 자유분방하고 개성 강한 아이에서 튀기 싫어하는 성향으로 바뀐 시점이랄까. [조승연의 탐구생활에서 한국인은 신분이나 계급, 지역성보다는 국가 정체성에 무게를 두고 휩쓸린다고 분석했다. 정체성 identity가 it is~에서 오고 identical(: the same)가 어원이 같다는 데서 묘한 동질감이 싹튼다. 나는 좀 다르게 본다. 아이던티티에 대해 논의하고 키워드로 삼는 외국에 비해 우리는 페미니즘처럼 급물살을 타고 말았다. 구분점 없이 섞어 찌개 끓이듯이 확 만들어 올리고 먹었다고 생각한다.] 서유미 소설가의 말에서 ‘부끄러움’이 이십오년도 더 된 체험 기반의 글쓰기 선언과 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성 문단을 향한 도전장과 사소설, (후기 구조주의 해체 바람 타고) ‘여성적 글쓰기’의 꼭짓점을 당당히 찍은 용감함과 함께 오는 대로 수용하는 힘에 새삼 반하게 된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해도 그것을 긴 시간과 연결해 조망하거나 연결고리를 찾아 별자리를 그려보는 완성에 도달은 흔치 않다. 작위적이지 않은 경우는 더하다. 현실과 상상, 각색이 뒤섞임에도 충분히 타인의 공감과 이해를 부르게 노크할 수 있다면 펜의 생생한 매직 파워일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끝에 “그니까 자식이 셋은 되어야 강물처럼 알아서 흐르게 둔달까. 다채롭고 입체적인 이야기의 각이 잡힌다”고 후담을 달았었다. 골목길 안, 낮은 지붕들 안에 모여 (마당을 공유하며) 살지 않았다면 형성되지 못했을 정서와 이해 기반이 있는 듯하다. 여기까지 살아낸 애틋함과 각별함을 비롯해 공유점과 차이점을 나눠보며 쪼개진 거울방에서 나라는 사람과 내가 선 자리를 여러 각도에서 둘러보는 기회가 생긴다.
무엇인지 살필 수 있는 룸, 공간과 여유와 여지 확보에 감사한 마음이다. 너무 많이 가지거나 너무 없어도 놓치고 누릴 수 없는 인생 조각들과 덤이 있지 않나 싶어서다. 저마다 어떤 시절을 어떻게 지나pass age 여기에 있는지 풀어놓는 들판이자 더 가보는 항해 여정 같다. [요즘 박구용 철학자가 초월적 통각이라는 개념을 밀던데 어떤 현상을 용어로 그때그때 정립하는 과정이 성실하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의 차이를 저렇게 풀 수도 있구나 흥미롭다. 나랑은 다르지만 자기 기준에서 이어봄과 지식의 지평선 너머를 그림을 높이 산다.] 그렇게 보면 목초지 개척 서사나 항해 출항 소설 아닌 픽션이 없다. 새롭게 미러 봄. 미러볼 아니구요. 조승연 작가의 말처럼 픽션 읽기는 어디론가 떠나는 짐 꾸리고 맞닥뜨리고 다시 싸서 돌아오기까지 함께하는 에너지 품이 많이 든다.
옛날 한약재를 지어와 약탕기에 정성들여 달이던 보약이 떠오른다. 부채질도 하고 마당 가득 향이 번지던. 부엌에서 잘은 딸기를 잼으로 만들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닭의 형체 그대로, 다리 부위 들고 팍팍 뜯어먹는 사람이면 원기 보강하고 좋을 텐데..(그러면서 돈까스는 먹엉) 단백질 보충하자며 마트용 콩물이 아닌 전문점에서 좀 비싼 걸 사봤다. 원래 콩 갈면 미숫가루 맛나나. 뭐든 잘 먹고 잘 자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몸이나 안 아프면 좋겠다.
계속 맞춰보지만 동네 토박이 의사가 나랑 안 맞는다. 첫 진료 끝에는 코로나 검사를 말하더니 세 번째 진료 끝에는 폐 검사를 말한다. [네 번째 약은 받아왔다.] 약국에서 만난 이름이 같은 인생 선배님이 개복숭아와 (자기 전) 상추 섭취, 밤엔 얇은 마스크 착용을 권했다. 몰라서 생고생했다며 여성호르몬제에 대해서도 귀띔했다. 제때 적량의 말만 하자면서 이렇게 의식의 흐름 따라 지껄인다. 끝으로 만권 박사님에겐 안 들리게>> 굳이 셋tri 트릴레마 짜맞춤 아니어도 둘di 딜레마 구도도 색달라 충분히 좋았다는 말 전하고 싶다.
염원의 이룸 순간은 초현실적이라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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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존재할까. 상처의 크기가 작든 크든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단지 잘 잊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꾸만 솟아오르는 기억의 그늘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그 부끄러운 기억을 표면 위로 끄집어 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두운 기억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서야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과감하게 그 어두운 기억을 들추어 낸다.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 <부끄러움>에서 용감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작가가 열두 살 때 경험한 이 사건은 그녀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부끄러움에 편입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다.
식료품점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집안환경 탓에 잠옷이나 가운을 사치품으로 여기며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그리고 드나드는 손님들을 신경 쓰며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하는 그런 생활들은 어린 여자 아이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립학교 친구들 앞에서 가운을 걸치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폭력과 가족들의 억세고 투박한 여러 가지 행동들 속에서 다시 확인하는 부끄러움. "나에겐 어떤 일이건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것이란 느낌" 이제 그녀의 부끄러움은 자신의 삶을 규정짓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런 부끄러움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흔히 느끼는 그런 부끄러움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다.
쉬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솟아 나와 괴롭히는 감정들, 그리고 기억들. 이젠 지겨울 만도 하건만 그래도 끈질기게 반복되는 삶의 원시성. 그 이해할 수 없는 원시적인 삶의 모습 앞에서 나 자신또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녀의 문장이 더욱 더 가까이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체험이 녹아있기에 더욱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글들. 건조하고 메마르지만 진실된 힘을 가진 문장들. 부끄러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부끄러움 앞에서 오히려 더 당당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건 고백이라는 것이 가지는 투명한 자아 성찰의 힘 때문은 아닐까. |
|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일만 소설로 쓴다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이라는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12살 때 작가 자신이 우연하게 경험하게 되었던 부모의 비밀에서 부터 출발하는 솔직히 보는 내내 활자는 눈에 들어와도 내용이 가슴에 와 닿을만한 메시지랄까, 감동의 포인트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철저한 사회 비판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그저 시간의 흐름과 똑같이 찍어댄다는 영화 기법처럼 무료하고 난해할 뿐이다. 부끄러움이라는 제목대로라면, 말 그대로 철저히 부끄러움의 소지가 있어야 하는데 설명이 미흡하고 묘사가 아닌 나열로 그치고 만 느낌이다. 또 처음 이 책을 yes24에서 구입했을 때, 부피에 놀랐다. 물론 짦은 소설 중에도 명작은 이 정도 분량을 한 권으로 꾸미기도 하지만 여느 시집 수준의 소설책을 이 돈을 주고 구입하기에는 여러면으로 보아 부족하다는 개인적인 소견이다.단순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