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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남북의 분단, 이념의 대립을 순진하게 끌고 들어오는 첩보영화는 아니다. 표종성의 신념과 정진수의 무기력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들의 시계는 철저하게 과거에 맞춰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체제의 음모를 쉽사리 파악하지 못하고 번번이 속임을 당한다. 정진수가 표종성에게 마지막에 남기는 경멸의 말은 실은 자기 연민의 독백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베를린이 표종성과 정진수, 두 남자에게만 초점을 쏟는다고 미리 넘겨짚어선 곤란하다. 극중 인물들은 자신이 버려졌음을 깨닫는 순간들이 제각기 다르고, 그러한 차이가 이야기의 호흡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더이상 뺏을 것도, 내줄 것도 없는 그들이 피 흘리며 싸울 때, 베를린은 낙오된 이들의 생사여탈을 누군가가 낄낄대며 관전하고 있다는 추악한 진실을 들추는 것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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