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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이란 제목처럼 자서전에 가까운 이 소설에는 특별한 줄거리라고 할 게 없다. 에두아르 르베의 짧은 프로필이 더 소설 같다.
이 소설은 사건 중심으로 진행되는 외부적 소설이 아니라 오로지 르베의 생각과 감정 선을 따라 흐르는 내부적 소설이다. 1965년 생으로 겪은 시대상과 자칫 흩어졌을지도 모를 일상과 풍경과 생각들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 소설’과는 다르다. 르베는 플롯, 인물, 배경, 사건 같은 구체적인 소설 장치를 전혀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상의 '지면(紙面)' 공간만 있다고 봐야 할 텐데 그래서 더 독특하다. 소설 속에 그의 의향이 드러나 있다.
위 태도는 이 소설이 일기나 수필이 아닌지 의심스럽게 한다. 문장 구조 또한 그렇다. 불필요할 정도로 강조된 ‘나’라는 주어와 함께 ‘-했다, -하지 않았다’로 이어지는 문장들은 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나뭇잎 점처럼 하나둘 떨어져내린다. 어떤 격정도 없이. 다음 문장은 또 어떤가.
에두아르 르베는 지면에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지만 그도 우리도 그를 완벽히 볼 수 없다. 비추고 있지만 비친 그것은 의문스럽다. 이게 진짜 그 일까? 이 거울상은, 이 자화상은 유일무이한 무엇이 아니라 그때 혹은 이 순간에 남은 어떤 결과 중 하나이진 않은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존재하는 양상이 된다.
소설의 정의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라면 에두아르 르베의 소설에선 허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유독 소설에서 개연성과 진정성을 요구한다. 본질이 허구인데 그것을 위해 더 많은 사실이 필요한 것은 소설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건 허구를 즐기기 때문인가, 사실을 찾기 위함인가. 둘 다라고 말하긴 쉽지만 글로 쓴다면 둘 다 성취하긴 어렵다. 그리고 작가의 입장이 우리와 일치하기도 어렵다. 르베는 말한다.
문체 특성이 르베가 흠모한 조르주 페렉(작가, 비평가, 영화제작자)과 기 드보르(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작가, 영화 제작자)와 비슷하기도 한데, 본인이 직접 밝히기도 했지만 그는 이 글을 소설이라는 틀로 써 내려가지 않았다. 독학파인 그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 대중 소설을 쓰는 작가보다 예술가로서의 창작 자세가 더 강하게 읽혔다.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는 창작이었다면 이보다 정교하고 친절했을 것이다. 인정을 받든 받지 않든 그에겐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왜' 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어떻게'가 더 앞서 있다.
나는 장르 구분이 차후적이며 부차적이지 선행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공감을 구걸하는 노예가 아니며, 장르 구분도 법이 아니다. 지금껏 수많은 창작물들이 고정관념을 깨면서 더 의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줬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작품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쓰고 노래하고 만든다. 창작자에겐 만족이나 가능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그 만듦 속에 있기에. 사람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려는 이야기 형식으로 소설을 좀 더 넓게 본다면 이 소설도 분명 소설이다. "에두아르 르베"라는 한 인물이 살다간 유적으로. 르베가 삶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스타카토(한 음 한 음씩 또렷하게 끊는 듯한 연주)처럼 담은 문장 흐름 속에는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묘한 정서가 있다. 나는 이것이 에두아르 르베가 만들어낸 소설적 특징이자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날 르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살아 돌아와 "정말 모르겠어? 이건 시도 소설도 아니야. 이름표 따윈 당신들에게나 필요한 거지."라고 말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 에두아르 르베 사진 작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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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일까? 그냥 일기일까? 자서전일까? 에세이일까? 예술 형식에 대한 구분이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시대에, 장르를 적는 건 무의미하다. 책 표지에 적힌 '장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보인다. 이 책의 서술, 그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에두아르 르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에두아르 르베는 이 짤막한 글 속에서 자신이 여든 다섯 살에 죽을 것임을 예감하지만, 마흔 둘의 나이로 자살하니, 이 책 자체로 일종의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내 일상이, 내 인생이,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다 부조리하고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그걸 부정하고 있지. 이미 죽은 자의 자화상. 서로 연관성 없는 문장들은 병렬적으로 나열되며 대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자화상의 하늘이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어떤 의미도 구할 수 없다. 개별 문장들은 일종의 취미판단일 뿐, 가치판단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호를 나타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개별적인 산문이 되고 유명론(Nominalism)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지도. 짧지만, 읽기 어렵다. 어떤 문장은 흥미롭지만, 어떤 문장은 재미없다. 취향이 특이하지 않고 세계 비판적이지도 않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일종의 유서이거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 무척 흥미롭지만, 문학적으로 대단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적지만, 자신없다. 실은 이런 식의 작법으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일종의 시리즈물이 나오면 어떨까.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르베 식의 자화상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면, 정말 가치있는 무의미의 축제가 될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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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프랑스 작가 르베의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고백소설…
자화상이란 자기 얼굴을 스스로 그린 초상화다. 화가치고 자화상을 그리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고 작가치고 자신의 외면이나 내면을 적어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자화상을 잘 그리려면 우선 자신의 모습을 잘 관찰해야 한다. 전체적인 비율과 위치, 크기와 색상, 가느다란 주름과 작은 점까지도 세밀하게 포착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마주하고 세세하게 그리다보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할 것이고 잘못 알고, 있던 자신의 모습에 새롭기도 할 것이고,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자신의 모습에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진작가인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궁금했다고 할까. 잘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세밀한 모습을 그린다는 게 자신과의 대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불을 끄기 전 반시간 동안 책을 읽는다. 나는 오후보다 아침과 저녁에 더 많이 읽는다. 나는 독서를 위해 안경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30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읽는다. 나는 5분 후에 정말 읽기 시작한다. 나는 신발이나 바지를 착용하지 않고 더 잘 읽는다. (37쪽)
매일 독서를 하면서도 독서 습관에 대해 적어본 적이 없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못다 본 책을 펼쳐서 읽는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읽기에 잠자기 전엔 TV시청으로 마무리하는 편이다. 밤에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안경은 늘 쓰는 것이고 눈과 책과의 적정 간격인 30센티미터는 나도 기본적으로 지킨다. 어디에서나 책을 들고 다니기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를 한다. 대개 허리는 쫙 펴고 읽는 편이다. 때로는 엎드려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걸어 다니면서 읽기도 한다. 때로는 차 안에서 조용히 읽기도 하고 때로는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에 읽기도 한다. 책의 표지를 보고 책의 매력을 느껴 독서를 하기도 하고, 무심코 펼친 책을 읽는 도중에 재미를 느껴 빨려 들기도 한다. 매일 새로운 책을 접하면서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읽고 싶은 목록이 빽빽해지곤 한다. 몰랐던 출판사, 몰랐던 작가, 몰랐던 블로그의 세계가 독서를 하면서 점점 영토 확장이 되고 있다.
솔직담백하게 자신을 그려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인간은 늘 단점은 숨기고 싶고 장점은 부각시키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기에 말이지. 아무리 객관적으로 그린다고 해도 자꾸만 주관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자화상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그릴 수 있다니. 자화상을 그리려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얼마나 많아야 가능한 걸까.
르베가 2002년 미국 여행 중에 쓴 『자화상』에는 자신의 우울한 면과 재미있는 면, 무심한 성격과 적극적인 성격, 인간관계와 가족관계, 취향과 성향, 습관과 고민 관이 태연하게 그려져 있다. 다양한 자신의 모습, 때로는 이율배반적인 성격과 모순적인 사고까지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르베의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고백적인 소설이다. 문단 구분도 없고 생각이 흐르는 대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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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화가이면서 사진사이자 작가인 저자는 번뜩이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지내온 약력과 함께 글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심상치 않다. 책은 처음은 자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음! 많고 많은 이야기 가운데 자살이라니……. 우울한 예술가의 감수성이 처음부터 무지막지하게 밀려온다. 예술가의 마음이 담담한 문체로 폭풍처럼 다가선다. 숨기지 않고 진솔하게 말하는 이야기들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헉! 안타깝게도 읽기 편하지가 않다. 산문인 것도 그렇지만 문단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빽빽하게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용은 예술가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어진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주변에 대해서 무척이나 민감하다. 너무 민감해서 사소한 사항으로도 피를 흘릴 만큼……. 너무 민감하면 그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된다. 저자의 감수성이 일반인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부분도 깊이 있게 파고든다. 위험하다. 한 줄기 얇은 실 위에 매달린 것처럼 저자의 삶이 위태로워 보인다. 타인에게 쉽게 보일 수 없는 성행위 와중에서 문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준다.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가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나고, 여자는 몰래 빠져나가려고 한다. 당사자만 평소처럼 행동한다. 어디 한 곳이 비어있어 보인다. 아니면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 사회규범과 질서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걸까 저자의 사고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비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감수성이 풍부한 저자는 정작 타인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상대방에 대해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뛰어나고 예민한 감성이라면 노력을 통해 충분히 상대를 헤아리고 배려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만을 돌아보기에도 바쁘다. 극도로 자신을 살피고 있기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보인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살피고 또 살펴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이 넘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절제를 모르는 듯 하다. 끝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자동차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와우~ 새로운 걸 알았다. 포르노그래피라는 것이 그의 구상들 가운데 일부였다. 내가 잘 알지 못 할 뿐이지 천재적인 부분인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일상들을 건조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화상은 읽기에 따라 지루할 수 있고 또 재미있기도 하다. 어느 쪽이 될 지는 읽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살아간 저자의 고뇌가 책에 가득 담겨져 있다. 그 내용들이 사실적이면서 과감하게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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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전에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말하자면 수식어를 제외하고, 그저 솔직함을 그대도 보여주는 대단한 글이다. 글을 쓰는 나는 언젠가 글을 써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평소에 쓰는 조금씩 쓰는 글에 솔직함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나의 글은 써두고,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어보면, 그저, 어디서 본 철학자나 작가의 생각과 글을 베껴놓은 앵무새 같은 글뿐이다. 그래서 인지, 정성스럽게 끓이지 못한 국밥에 기름이 떠있듯이 허영심과, 누린내가 난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이야기를 하던 도중 떠오르는 이야기 거리들은 실력 나쁜 요리사를 만나서, 서로의 맛의 조화는 물론이거니와, 개별의 맛도 잃고 있다. 하지만, 에두아르의 르베 “자화상”은 마음속 생각들이 솔짐함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쓰여졌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간결하고, 온전한 마음속의 문장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들었다. 이와 동시에 이 작가에 대해서 경외감이 들었다. 짧은 문장은 문장대로 힘이 있었고, 긴 문장 또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힘이 있었다. “자화상”이라는 책이기에 본인의 사색에 빠져, 문장에 요점이 없을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 작가 에두아르 르베는 달랐다. 본인 사색에 대한 요점이 분명했다.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본인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성찰이란, 본인의 추악한 점 까지 하나하나 들춰내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러기에, 나또한 개인 일기장일지라도, 솔직해지기가 많이 힘들다. 그렇지만,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읽다보면, 본인에 대한 성차를 얼마나 했을지 추측이 간다. 스스로를 계속 바라보고,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드려는 듯 계속 뼈와 살을 깍아 다듬어 내는 그의 모습이 “자화상”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사실 이렇게 서평을 쓰면서도, 과연 내가 에두아르 르베처럼 글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다. 항상 글을 솔직하게 쓰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솔직하게 써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에두아르 르베처럼, 문장에 어떠한 작문 기법이 아닌, 단백한 문장을 쓰고 싶다. 위대한 작가는 짧은 한 문장만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했다. 헤밍웨이도 그랬듯이, 어쩌면, 에두아르 르베는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작가 일꺼라 본인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많은 현대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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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된 편집자였다면, 아마도 원고를 읽자마자 저자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돈 벌어먹기 그리 쉬운 줄 아쇼!" 라는 외침은 덤으로 퍼부어주고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나에게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범위에 속하는 난해함을 지닌다. 그러나 내가 어려워 하는 것은 소설의 본문이 몽환적이거나, 아니면 심적표사가 많거나 하는 문법상의 어 려움이 아니라, '도데체 이 내용을 통해서 저자는 무얼 표현하고 싶은거지?' 하는 그 사람의 목 적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옮긴이는 저자인 '아두아르 르베'를 천재라 소개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저자란 나름 프 랑스의 조형예술가이자, 사진작가로서 유명한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의 검색엔 진을 통해 검색하여 보았다) 그다지 주목받는 인물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 그 리고 종종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살이라는 강제적이고, 자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한 사람의 괴짜? 라는 애매한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저자를 잘 알게 되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일상을 어 떻게 보냈는지, 휴일에는 무엇을 하였었는지, 가족과는 어떠한 추억을 만들었는지, 종종 자신 을 집어먹는 우울함과, 자살충동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왔었는지, 평소 그가 무엇을 타고 다 녔는지, 사고를 일으킨 적은 없었는지... 이처럼 시시콜콜한 그의 인생전반에 대한 모든 것을 책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자화상' 이라는 이 소설을 통해, 자 신이 표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일관성이 없이, 그저 마구잡이 식 표현이 난무한다. '즉흥성' 이 말 그대로 글을 쓰면서, 즉시 생각나거나, 자신이 쓰려고 한 내용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 적은듯한 느낌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많은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천재 사진가 '예술 가' 의 감성이 만들어낸 허무와, 욕망, 그리고 자살충동에 이르는 많은 감정의 범벅이 가리키는 죽음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저항하려고 했고, 또 이 책을 통해 서 표현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어렵다. 무엇보다, 저자 에두아르 르베 그의 본심을 파악하기 어렵다. 게다 가 나중에 천천히 그사람에 대한 인품을 알아보자 생각하여도, 그는 이미 고인이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더이상의 그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해 본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자, 유서이기도 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기 이 전, 그는 이 저서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남기려고 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자만이 알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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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것이 더 쉽기에, 내가 알고 좋아하지만 특별한 연결이 없는, 그들을 부를 단어를 생각할 수가 없는, 친구가 아닌 사람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기차에서 역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나는 사물들이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것만 본다. 나는 은퇴 후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나는 양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구멍이라고 생각한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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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이 말은 살면서 언제가 한 번쯤은 들어본 질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진짜로 자기 자신을 단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나는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이 말 한 마디가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정말로 항상 외향적이기만 한 사람일까? 때로는 내성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일까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내가 가진 모습이 한 가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냥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심하기도 하고, 유머가 넘치고 유쾌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과묵함이 지나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기도 하는 것처럼, 어떨 때는 정반대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제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보면 그 답이 보인다.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려진 모습이 참 묘하다.
소설은 140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으로 단편적인 말들이 문장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나는 ~~ 한다.’ 라는 메마른 문장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문단의 구분이 없기에 시작도 끝도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런 문장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그저 일상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모습,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이야기들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나를 지루하게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나는 항구도시에 살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서른아홉 살이다.
나는 침대에 들기 전에 가끔 그 밑을 본다.
수많은 조각들을 맞춰 하나의 온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는 직소퍼즐처럼 평범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나의 존재를 완벽하게 그려나가게 한다. 일상에서 보이는 하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이런 일상의 평범함이 모이지 않는다면 결코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은 일견 지루해 보이지만 완벽한 자서전이다. 완벽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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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렐렘 / 나더쉬 피테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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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누구일까? 아침에 일어나 눈을 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주방으로 들어가 싱크대에서 쌀을 씻는 나인가? 길에서 느닷없이 자전거의 가격을 물어보고 대답해주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어른을 보며 '저 어르신은 대답을 해주지 않는 아이가 버릇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 아이는 전혀 모르는 자신에게 갑자기 자전거의 가격을 묻는 저 어른이 황당하게 보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나인가? 검은 머리에 약간의 어두운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동그란 얼굴이 나인가? 레깅스와 면티를 즐겨 입고, 운동화를 주로 신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이 나인가?
이 책은 읽는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갑자기 낯선 형식의 문장들 속에서 독자가 길을 잃게 만든다. 게다가 문장은 마냥 건조하기만 하다.
나는 해외에서 3년 3개월을 보냈다.
나는 내 왼쪽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게는 나를 배신하고 떠난 친구가 있다.
이런 유의 문장을 맥락 없이 마구 연결해놓았다. 아니 연결하지 않고 늘어놓았다. 이 문장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설명도 없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원인과 결말은 이 작품에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다. 그저 작가인 에두아르 르베가 한 것, 하지 않은 것, 좋아한 것, 좋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 문득문득 읽는 독자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적어도 한 부분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작가가 이 작품 안에서 진술한 것처럼 작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변명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 나의 가족은 이러저러하다 등으로 분류하지도 않는다. 그저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내러티브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개되는 예술은 시간을 정지하는 예술보다 즐거움을 덜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사진을 찍는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이 작품은 작가가 좋아하는 딱 그의 스타일대로 쓰였다.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만들려는 시인의 시도보다는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의 중립성과 익명성이 더 흥미롭고, 사실적인 보고서가 가장 아름답게 비(非)시적인 시로 보인다고 한다. 그는 그래서 백색의 글쓰기(주관적 판단과 평가가 배제된)를 꿈꾸는데 이 작품이 그런 시도로 보인다.
계획을 가지고 설계도를 그려서 형상화한 기념물보다 생활의 흔적인 유적을 더 좋아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보다 친절한 자서전과 같은 형식의 글보다는 읽는 독자가 상상하고 찾아내는 유적과 같은 자화상 같은 글쓰기로 독자에게 상상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품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해가며 읽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일어나는 것보다 잠자리에 드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작가가 <자살>이라는 작품을 낸 뒤 열흘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이 작가의 작품에 환상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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