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은 어딘가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동은 살아있다는 증명이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그 과정이 목적인 삶도 있다고 이 이야기가 알려주었다. 비록 꿈꾸던 그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알고있더라도. 아니면 애초에 목적지가 없더라도. 떠나야 할 때가 있다. 결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
|
옛 청년들의 모험..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옛 시대, 모험의 시대를 다룬 작품들이 더 와닿는다. 그 시대를 잘 아는 것도 아닌데, 그곳에서 어떤 향수를 느낀다. 현대 사회의 10년동안 축적되는 변화와 혁신이, 19세기 전체와도 맣먹는 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고, 정신이 없다. 뭔가 낭만이 있었던 시대, 느렸던 시대를 여행0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언젠가, 지금 2019년도 더 미래 세대에게는 모험과 낭만이 남아있는 시대로 묘사될까? 흥미롭다. |
|
잭 케루악의 길위에서 2, 그냥 두껍게 한권으로 나와도 좋았겠다 싶다가도 한번 끊겨가는 덕에 끝까지 읽게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뭔가 이 상태가 계속 한번에 이어졌다면 중간에 조금 지쳤을 것 같기도... 길 위에서는 제목에 가장 충실하다. 길위에서 부유하는 삶, 욕심, 사랑. 그 모든 것에 얽매여있는 길. 워낙 나라의 문화와 분위기가 다른 탓도 있지만 길위에서의 인물들이 걷는 길은 삭막하게 느껴졌다. 삶에 있어서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점점 더 깨닫게 되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런 삶도 있었다 라는 정도로 기억에 남을 듯 하다 |
|
|
|
잭 케루악. 참 멋진 이름이다.상상했던 소설은 아니다.로드무비 같지만 나의 결은 아니었다.케루악이 대학을 자퇴하고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닐 캐시디 등과 함께 미국 서부 및 멕시코를 횡단한 체험을 소설로 썼다. 이 책으로 케루악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후 비트세대의 선두에 케루악이라는 이름을 날리게 된다.해제만 4편이 실려 있고 작품에 엄청나게 의미를 부여하고 온갖 어려운 분석이 더해져 있지만 난 그저 '호밀밭의 파수꾼'의 어른 버전 같았다. 뭐 이래저래 따지고 분류하고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공감가지도 뜨겁지도 않았다.시대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성격도 달라서겠지. |
|
책 속의 주인공 딘 모리아티는 현실의 세상이라면 한마디로 개망나니이다. 이런 개망나니가 있을 수가 없다. 일상의, 현실의 도덕윤리적 잣대로 그의 삶을 보았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딘 모리아티의 현실모델이 닐 캐시디라는 잭 케루악의 친구였다니. 비트세대의 중심인물이고.
말로만 듣던 <오뒷세이아>를 실제로 읽어 본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지 않을까? 일전에 T.V프로 {알.쓸.신.잡}그리스편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일리아드>얘기는 나왔는데 <오뒷세이아>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었다. 분명히 안나올 수가 없는데. 그 양반들도 <오뒷세이아>를 읽지 않았다고 볼 수 밖에는. 오뒷세우스는 여신 아테나의 보호를 받고 있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나온다. 그런데 읽다 보면 그는 노략질, 약탈의 해적 두목으로 수천년을 이어온 지중해 해적의 시조쯤 될 듯하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후로는 잔인한 살육전을 펼친다. 하녀 열 세명을 무슨 빨랫줄같은데 매달아 죽이는데 그 잔인성은 처절하다. 물론 기독교적 윤리가 확립되기 이전의 청동기말, 철기초기시대의 인간의 원형질이라는 점을 알고 읽어야 한다. 그렇지만서도 오늘날의 도덕윤리적 잣대로 볼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당혹스럽다.
잭 케루악은 청동기 시대 사람도 아닌데 그 여정이 오뒷세우스적이다. 아니 오뒷세우스 이전의 시대로의 회귀처럼 보인다. 하긴 길떠남 자체가 오뒷세이아이고 오뒷세이아는 모든 길떠남의 원형이다. 오뒷세이아가 아닌 길떠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는 목적성이 있다. 회귀, 그것이 목적성이다. 길떠남의 목적성은 회귀이다.
그런데, 케루악의 길떠남은 목적성이 없는 길떠남이다. 그래서 계획성도 없고 제대로 된 돈도 없다. 왜? 무엇때문에? 길떠남의 본질은 무목적성이었던가? 아니지. 목적성을 찾기위한 길떠남이다.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가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얻은 것은? 없다. 멕시코시티로 광란의 길떠남이 있지만 그 길끝에서 얻은 것은 이질 설사. 떠남과 돌아옴의 반복. 경로는 다르고 과정도 다르지만 결과는 회귀이다. 알 수 없는 설레임과 희망,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꿈틀거림으로 떠나는 길.
"짐을 둘러맨 키 큰 노인이 백발을 나부끼며 성큼성큼 다가와 스쳐 지나가려다 나를 보고 '가서 인간을 위해 한탄하라'라고 말하고는 다시 어둠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미국의 어두운 길을 걷는 순례를 게속하라는 뜻일까?" "그리하여 나는 해가 져 버린 미국의 어느 밤 낡고 망가진 강둑에 앉아 뉴저지 위로 펼쳐진 넓디넓은 하늘을 보고 있자면, 육지가 갑자기 믿기지 않을만큼 크게 부풀어 태평양연안까지 이어지고, 모든 길이 펼쳐지고,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오늘 밤은 별이 뜰 것이다, 당신은 신이 곰돌이 푸라는 것을 몰랐나? ... 누구도,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알지 못한다. 버려진 누더기처럼 늙어가는 것 밖에 알지 못한다. 그때 나는 딘 모리아티를 생각한다..."
이 책 <길 위에서>2권의 분량이 좀 많다 싶었었는데 웬걸, 본문은 짧게 끝나고 이 책에 대한 해제가 140여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재미있겠다 싶어 기대를 가지고 읽는데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하게 읊어서 어쩌자고. 그냥 읽기를 때려치우고 내식대로 이해하면 그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