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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을 통해 얻는 유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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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촉발점은 칭의론이다. 루터는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회는 분열되었고 지금의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의 근간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안에서 이런 전통적인 루터의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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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촉발점은 칭의론이다. 루터는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했지만 결국 교회는 분열되었고 지금의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칭의론은 개신교의 근간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안에서 이런 전통적인 루터의 칭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칭의 논쟁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 개혁(루터),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관점, 정교회(신성화), 로마 가톨릭 이렇게 다섯이다. 이들 다섯 신학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한 첫 번째 칭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한 발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다섯 관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와 이 개혁파와 입장을 달리하는 넷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 전통적 개혁파의 칭의론이 공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난 전통적 개혁파의 속한 장로교 목사로서 마이클 호튼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삶의 변화와 상관없이 내려진 무죄 판결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호튼의 말대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성화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는 여기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전 9:27).

 

바울의 새관점이나 진보적 개혁파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신성화는 이런 전통적 개혁파의 약점을 파고든다. 이들은 결국 선행이 구원과 결부되며 칭의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의를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성령과 함께 한 우리의 삶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중요한 요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희미해지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신학적 관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신학의 한계는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책에 소개된 신학자들은 칭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철회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짜피 중요한 교의학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이것이 개신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던 것을 개인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교파의 다양성은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바를 고백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서로 대화하지 않고 오해했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런 논쟁을 통해 결국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배우며 자신이 가진 견해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속한 전통적 개혁파의 견해가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네 가지 견해들을 읽으면서 특히 바울신학의 새관점과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칭의에 대한 다섯 관점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다. 개혁파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를 통해 이루어가든 나머지 네 관점처럼 그 변화(성화)를 칭의라고 하든 결국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칭의론에 대한 이런 균열은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두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연구한 열매들이지 않는가! 인간과 신학의 한계 때문에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의 논쟁을 통해서 합일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논쟁을 통해서 신학은 서로 배우며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런 대화와 논쟁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s******3 2015.04.07.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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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칭의 견해, 풍성한 구원의 관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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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주 목요일이면 캠퍼스에 올라가 복음을 전한다. 대표적인 도구가 사영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로 시작하는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마지막에 영접시키는 부분이 나온다. 그 선택의 찰나에 거부하는 영혼도 만나지만 받아들이는 영혼도 만난다. 거부하는 이를 만날 때면 순간 안타까운 맘이 든다. 그런데 영접하겠다고 할 때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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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주 목요일이면 캠퍼스에 올라가 복음을 전한다. 대표적인 도구가 사영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로 시작하는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마지막에 영접시키는 부분이 나온다. 그 선택의 찰나에 거부하는 영혼도 만나지만 받아들이는 영혼도 만난다. 거부하는 이를 만날 때면 순간 안타까운 맘이 든다. 그런데 영접하겠다고 할 때면 감사하기도 하지만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 짧은 시간에 영접기도를 따라한 저분에게 정말 구원이 임했는지 사실 혼란스러울 때고 종종 있다. 구원이 행위 없이 입으로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군대에서 집단으로 몇 천 명 세례를 준다는 발표를 마냥 좋아해도 되는 것 일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구원일까?

 

이신칭의논쟁은 신학적 문제를 넘어 우리 목회의 현장, 개인의 신앙에 이렇듯 직결되는 문제다. 구원이 법정적인지, 관계적인지, 예수에 대한 나의 믿음의 구원인지, 예수의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현재의 칭의가 미래의 칭의를 보장해 주는 지등 덮어 놓고 믿은 주제에 대해 칭의 논쟁은 자신 있게 논란의 중심으로 이끈다. 다른 견해이지만 설득적이고 타당하다. ‘이신칭의라는 주제로 역사적인 배경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혁파부터 진보적 개혁파, 최근의 바울신학의 새관점을 포함한 5가지 관점으로 큰 그림을 통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다르지만 틀리지 않고 그렇기에 오히려 풍성하고 깊다.

 

이런 논쟁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스케일로 우리를 넓혀 준다고 믿는다. 우선 구원을 위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행을 하거나 노력할 필요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렇기에 이신칭의는 우리를 겸손케 한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3:26-27) 그리고 그 은혜를 입은 자는 결코 삶이 방종으로 치닫지는 않게 된다. 은혜를 알기에 감사를 삶속에 표현하게 되고 그것이 순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열매 맺게 된다. 종말에 있을 최후 심판 때까지 이미-아직의 구도 속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한 가지 관점 속에 자신의 논리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한 풍성한 구도자의 자세를 갖게 될 거라 확신한다.

k*****k 2015.04.07.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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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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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칭의논쟁에 대한 단상   30여년 전 중등부 회장을 할 때였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정도 되었고 남다른 열심 이 있었고 나는 장차 목사를 꿈꾸는 청소년이었다. 그런 나를 지독지리 괴롭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의 언어 형태였다. 그 분들은 내가 보기에 예수 믿은 지 적어도 30여년은 넘었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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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칭의논쟁에 대한 단상

 

30여년 전 중등부 회장을 할 때였다. 예수를 믿은 지 3년 정도 되었고 남다른 열심 이 있었고 나는 장차 목사를 꿈꾸는 청소년이었다. 그런 나를 지독지리 괴롭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당시 교회의 목사님이나 장로님 같은 분들의 언어 형태였다. 그 분들은 내가 보기에 예수 믿은 지 적어도 30여년은 넘었고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에게서 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는 나를 혼란케 했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게 뭐지? 그 딜레마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다.

 

신학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얕고 좁은 신학체계에 있었다는 것을 곁눈질로 알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이신칭의라는 말을 수백번, 아니 수천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과 함께 오직 믿음으로써 천국간다는 말이 우리의 모토였다. 훗날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틀렸다기 보다는 절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그저 입으로 시인하는 수준, 말로써 예수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이해했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다. 어쨌든 천국을 갈 테니 삶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사실 천국을 간다는 것도 정확히 맞는 말이 아니었다. 천국은 이미 우리의 삶에 시작된 것이니.)

 

이신칭의라는 신학적 주제를 루터가 들고 거대한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내부의 잘못된 형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4세기에 절정을 이룬 신학 풍토인 via modrena적 관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행위를 강조하였고, 그것은 남발되어 헌금 강요, 선한 일 강요-선한 일은 결국 돈과 직결되었다-로 이어졌고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그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가 강조하고 들었던 무기가 이신칭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요 믿음에 있다.’ 물론 루터 역시 칭의의 법정적 선언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변화된 지위로서 우리에게 수반되는 선한 행위를 간과하진 않았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오직 믿음에 있었고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듯 하다.

 

최근 루터파와 카톨릭은 칭의에 대한 기초적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고 이는 또 다른 논쟁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제임스 던, 톰 라이트를 중심으로 (샌더스가 선구자이지만) 소위 새관점학파가 등장하고 이들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강조한 이유에 대한 새로운(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재해 왔던 관점의 발견일 뿐이라 주장한다.) 관점을 들고 나타났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논쟁해 왔던 것과 달리,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게다. 당시 갈라디아나 안디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정결의식(할례, 음식 규례법 등)을 행해야 된다고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교정의 일환으로 바울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이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게다. 오히려 우리는 개혁자들의 시대(16세기)를 지나 1세기 유대적 관점으로 회귀해야 바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다.

 

여기에 몇몇 신학자들이 더 뛰어 들었다. 보수적 개혁파 신학자인 마이클 S. 호튼, 진보적 개혁파인 마이클 F. 버드, 루터파 후예인 벨리-마티 카르카넨, 그리고 카톨릭 신학자 제럴드 오콜린스다. 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칭의를 다룬다. 핵심은 두 가지 정도다. ‘칭의가 법정적 선언인지, 신분의 변화인지, 칭의로 구원이 완성되는지 아니면 칭의와 함께 변화된 삶이 동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이다. 또 하나, 과연 바울 신학의 핵심이 칭의에 집중되는가, 아니면 칭의는 그가 가르친 칭의, 구속, 화해, 양자 삼음, 성령, 연합, 종말론적 선언 등의 한 단면인가? 머리는 더 복잡해 지고 이해력은 한계에 이른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다. 혹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 각각의 신학자들은 자기 입장에서 칭의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다 맞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편적인 부분에서 다 맞는 것 아닌가? 기다란 코도 코끼리고, 강한 다리도 코끼리고, 딱딱한 상아도 코끼리 아닌가? 단 그게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법정적 선언도 맞고 신분과 지위가 바뀌었으니 의로운 삶이 뒤따르는 것도 맞지 않는가?

 

물론 이들 신학자들은 참으로 예의 바르고 열려 있다. 자기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과 토론은 전문적 지식과 논증에 기초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상대의 말을 공감한다.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 나가면 좋을 듯 하다. 물론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할 듯 하다. “누군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 이해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강조한 신학자의 충고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울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바울 이해라기 보다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해다. 바울의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마땅할 게다. 바울조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성령의 지혜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책을 오독할 가능성이 무서워 전혀 읽지 않는다면 그게 더 오해와 맹신을 불러 일으킬 게다. 그러니 도전해 보자.

 

나는 지금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칭의논쟁을 읽어 나가면서 도무지 변하지 않는 나의 한계에 대한 딜레마요, 예수 닮지 못함에 대한 탄식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30, 40년을 예수 믿는다 자랑하는(고위 직분자들?)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돋힌 말이요, 삶에 우러나오지 못하는 신앙형태의 딜레마다. ‘칭의를 다시 가르쳐야 할까? 우리는 칭의를 과연 알고 있을까? 마크 트웨인의 탄식이 가슴을 친다.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우리는 언제쯤 칭의를 제대로 이해할까?(톰 라이트) 아니 언제쯤 칭의에 합당한 신자가 될까? 그것이 문제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m*****u 2015.04.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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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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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모난 놈은 정 맞기’ 십상이고, ‘말 많은 놈은 빨갱이’로 의심 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직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심지어 주문하는 음식도 통일시키는 것이 사회 생활을 잘하는 비결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무슨 안건에 대해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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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모난 놈은 정 맞기십상이고, ‘말 많은 놈은 빨갱이로 의심 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직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심지어 주문하는 음식도 통일시키는 것이 사회 생활을 잘하는 비결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무슨 안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보라. 자칫 믿음 없는 사람이란 의심의 눈총이 날아들지 모른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더욱 귀하다. 『칭의 논쟁』의 부제는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이다. 16세기 이후, 교회의 심장이자 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조항으로 받아들여지는 칭의에 대해 이토록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각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글과 다른 네 입장의 논평으로 정리해 놓은 이 책은 몹시 매력적이다. 논평에 참여하는 입장들은 전통적 개혁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신성화, 그리고 로마 가톨릭이다. 특별히 신성화로 대표되는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쉽게 접할 수 없던 부분이라 호기심을 자극한다.

칭의에 대한 이견은 이미 성경 안에서도 발견되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더욱이 교회의 에큐메니컬 상황과 소위 사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는 바울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더해지면서 칭의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칭의에 대한 논쟁과 질문들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칭의는 법적인가 아니면 효력적인가?’ ‘칭의는 과정인가 순간인가?’ ‘칭의는 분석적인가 종합적인가?’ 각 입장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성서주해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에 익숙하지만, 다른 주장들, 특히 진보적 개혁파와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해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칭의에 대한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의 끄트머리 어디쯤인가 보다.

그렇다고 내가 믿는 것에 혼돈만을 야기할까 봐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논평자들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서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참여한다. 다양한 관점에 대한 성찬으로 말미암아 내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 무엇인지, 또 다른 입장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다 선명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건설적인 토론 문화가 이 땅과 한국 교회에도 하루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다. 전통적 개혁파 입장을 견지한 마이클 S. 호튼은 한 논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진심 어린 기도는 우리가 성서로 함께 돌아가서 진리의 성령에 의지하여 성서 텍스트와 씨름하는 것이다”(443).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보색끼리 나란히 두면 각각의 색상이 더 부각되는 법이다.

 

s****4 2015.04.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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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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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지평   16세기에 치러졌던 칭의 논쟁의 불꽃이 진영의 분열로 인해 정돈되었다 여겼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당시보다 지금이 더욱 다양해진 입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 입장에 서 있던 내게 보다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과 쟁점들은 다양한 시각을 통해 여러모로 자극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진보적 개혁파의 바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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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지평

 

16세기에 치러졌던 칭의 논쟁의 불꽃이 진영의 분열로 인해 정돈되었다 여겼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당시보다 지금이 더욱 다양해진 입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 입장에 서 있던 내게 보다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과 쟁점들은 다양한 시각을 통해 여러모로 자극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진보적 개혁파의 바울서신의 석의와 논리에 관심이 가고 좀 더 깊이 살펴 볼 필요를 가지게 한다. 익숙한 인물인 마이클 호튼과 제임스 던과 같은 인물로 대변되는 다섯 진영의 입장에 대한 진술은 보다 칭의론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주는 교과서 같은 느낌이다.

이전에 관심이 없던 동방정교회 신학의 입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루터파의 법정적 선언과 동방교회의 신성화는 화해불가능한 칭의론의 대립으로 파악되었지만, 1970년대 헬싱키 대학교 투오모 만네르마(Tuomo Mannermaa)교수의 지도아래 생성된 만네르마 학파는 루터파와 동방 정교회의 대화를 낳았고, 이로 인해 루터파와 로마교회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롭다는 선언과 의롭게 만들어 짐을 융합시켰다. 신성화의 입장은 칭의가 성화뿐 아니라 선한 행위를 포함하고 믿음 안에서 이웃들에게 한 명의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는 점에서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에서 강조하던 이웃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베푸는 통로가 되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신성화적 칭의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신학교 수업에서도 칭의론의 주제를 이렇게 다양하게 접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세계적 거장들이 모여서 주제발표하고 패널토의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세미나의 분위기다. 최근에 이슈가 되는 새 관점에 대한 논의들도 보다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다 성실하게 변증할 수 있는 힘도 제공받는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분야여서 달콤하게 와 닿는다. 현대 칭의론의 복잡한 논의들을 일목요연한 정리로 인해 크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더불어 개혁신학적 관점의 칭의론을 보다 견고하게 변증해야 할 과제 또한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0*****l 2015.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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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논쟁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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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은 참 많이 기다리고 기대하는 책이었다.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스펙트럼을 공부하며 내가 배우고 있는 신학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그리고 보완하여야 할 점은 무엇인지 고민을 해봐야 하는데 그 고민을 잘 이해하며 만든 책인 것 같다. 각 신학적인 관점을 다른 신학자들이 비평하는 형식의 책으로 누가 맞다고만 주장하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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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은 참 많이 기다리고 기대하는 책이었다.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스펙트럼을 공부하며 내가 배우고 있는 신학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그리고 보완하여야 할 점은 무엇인지 고민을 해봐야 하는데 그 고민을 잘 이해하며 만든 책인 것 같다. 각 신학적인 관점을 다른 신학자들이 비평하는 형식의 책으로 누가 맞다고만 주장하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더욱 풍성하고 폭넓게 신학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으며 폭이 넓다는 것은 그 만큼 사고의 깊이도 깊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것만 주장하다보면 다른 누군가가 말하는 좋은 것을 놓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기쁘게 읽고, 내가 생각하는 관점은 어디 쯤인지, 다른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n******1 2015.03.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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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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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논쟁을 읽었다.한창 책 사기에 집중하던 시절(소장신학에 발을 들였던...)에, 읽기보단 사기에 집중했던 시절에, 부개사의 비교신학은 참 좋아했던 시리즈였다. 물론 읽는 족족이 소화를 할 수 있는 레벨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아직도 내 레벨은 그대로다!)이번 칭의논쟁은 간만에 내 구매욕을 활활 불태웠고, 좀 시간은 걸렸지만 어쨌든 다 읽었다. 근데 지금 머리속에 남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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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논쟁을 읽었다.

한창 책 사기에 집중하던 시절(소장신학에 발을 들였던...)에, 읽기보단 사기에 집중했던 시절에, 부개사의 비교신학은 참 좋아했던 시리즈였다. 물론 읽는 족족이 소화를 할 수 있는 레벨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아직도 내 레벨은 그대로다!)

이번 칭의논쟁은 간만에 내 구매욕을 활활 불태웠고, 좀 시간은 걸렸지만 어쨌든 다 읽었다. 근데 지금 머리속에 남는게 별로 없다.
아쉽지만 그럼에도 내가 분명한 것은 '진보적 개혁파'는 전혀 '개혁파' 같지 않았다. 뭔가 이래저래 설명은 가득했지만 호튼의 글에 대한 그의 논평과 던의 글에 대한 그의 논평에서 보면 그는 호튼보다는 던에게 더 가까웠다.
칭의논쟁의 다른분의 서평 중에도 그렇듯이 '전통적 개혁파' VS '그 외'의 대결처럼 보였다.
이번 책이 내게 큰 유익을 준 것은 '새관점'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새관점'의 관점이 뭐 나름 논리적이란 생각은 든다. 근데 아직 정작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 '새관점'이 칭의를 다르게 보는 근거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설사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그렇다고 치더라도 행위가 아닌 "전적인 은혜로 인한 구원"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 성경의 사실이 아닌가! 왜 거기에 우리의 행위가 들어가는 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새물결의 책 중 관심 가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였으나 사실은 좀 많이 실망스러웠다. 어째서 '진보적 개혁파'라는 파트가 굳이 들어갔는지 싶다.(아마도 원서가 그런 구조이기 때문에 그대로 가져다 썼을지는 모르겠으나..) '진보적 개혁파'라는 용어 자체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외국에선 '진보적 개혁파'라는 용어 자체가 많이 통용되는 가 보다.) 굳이 '개혁파'라는 이름은 안 가져다 썼으면 좋겠다.


p*******i 2015.06.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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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칭의 논쟁”을 읽고 로고스 연구원 김철휘       신학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신학논쟁 중 가장 예민하고 불편한 논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칭의 논쟁”이다. 초기 교회 때부터 시작된 칭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칭의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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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쯤 바울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칭의 논쟁을 읽고

로고스 연구원 김철휘

 

    신학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신학논쟁 중 가장 예민하고 불편한 논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칭의 논쟁이다. 초기 교회 때부터 시작된 칭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칭의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칭의에 대한 다양한 복음주의적 해석들이 전통적인 개혁파의 칭의적 개념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도전들은 전면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서로의 주장을 각자 비교분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몇 년 전에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의 칭의 논쟁이 관심을 끈 정도였다. 이렇게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지던 칭의 논쟁을 본서는 수면 위로 당당하게 끌어올렸다. 그리고 칭의에 대한 5가지 관점을 과감히 제시하였고, 각 관점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기고한 글에 나머지 4명의 신학자들이 논평을 단 획기적인 편집을 하였다.

 

    먼저는 칭의가 선언적, 즉 법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언약적, 관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서신학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칭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는 믿음에 대한 의미이다. 피스티스 크리스투라는 문구를 목적격 소유격으로 읽느냐 아니면 주격 소유격으로 읽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된다. 이 논쟁은 곧 칭의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과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중 어떤 것에 더 무게감을 주느냐의 논쟁이다.

 

   이 문제만큼 뜨거운 문제가 바로 행위에 관한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우선 종합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행위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기서 행위의 위치는 각 신학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 행위가 공로나 삯이 되는 건 경계하고 있다. 결국, 그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칭의가 어느 시점까지 우리를 보장하는가이다. 즉 현재적인가 아니면 종말론적인가이다.

 

    본서를 읽기 전에 먼저 드디어 제대로 한 판 붙는구나!” 하는 불손한 기대감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의 토론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끝내는 누군가의 의견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는 몹쓸 그림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협하고 공격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신학적 의견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훈훈한 모습이 인상깊었다. 한국의 신학적 토양에서는 비교적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서로를 세워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신학적 의견에 반하는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영역이 없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들기 전에 꼭 읽어야 할까 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영적지식들이 자칫 흐트러지지 않을까라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오히려 칭의의 다양한 신학적인 전통과 역사적 관점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깊고 넓은 칭의의 세계로 초대받았다고 자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잘 모른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관점들이 복음과 칭의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플 뿐이다. 제임스 던이 진보적 개혁파인 버드의 글을 논평한 마지막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바울의 복음 전체를 평화롭고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을까?”-p250

c******2 2015.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네가 칭의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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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가 뭐길래?여름날 저녁, 불빛에 날아드는 하루살이 마냥, 신학하는 이들이 저마다 한소리를 하며 날아 와서 나부끼는 것처럼 보인다. 칭의는 뭔가?칭의는 논쟁의 소재인가?칭의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또 어떤 이들이 어떤 곳에서 나서서 칭의를 말하는가? 책은 말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옛관점과 새관점으로 편을 나눌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학문한다는게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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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가 뭐길래?

여름날 저녁, 불빛에 날아드는 하루살이 마냥, 신학하는 이들이 저마다 한소리를 하며 날아 와서 나부끼는 것처럼 보인다. 


칭의는 뭔가?
칭의는 논쟁의 소재인가?
칭의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또 어떤 이들이 어떤 곳에서 나서서 칭의를 말하는가? 책은 말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옛관점과 새관점으로 편을 나눌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학문한다는게 의심한다는 것이고 의심을 합리적으로 묻고 답하는 학문이 신앙의 주제일 때는 자못 진중해지는가 보다. 
책을 읽노라면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묻게 되고 그 지점을 확인하면t서 나조차 의심하게 된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그런 나를 말이다. 그 때부터는 내편이 어떤 자인지 찾게 된다. 혼자라는 것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은 아닌가?


책을 읽노라면 나를 의심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의심하게 된다. 책은 이런 독자가 생기게 만들었으므로 그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한 것이다.


칭의가 뭐냐? 라는 물음에 그것은 단지 속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지, 아니면 결국 그분 앞에 서는 날에도 유효한 것인지  뭐라고 답하지 못한다. 
속함과 머무름을 함께 의미하는 단어인지, 그래서 그 뜻을 살피고,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본문주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주장이 크게 교차한다.


5개의 다른 지점에서 등장한 신학자들이 자기 이해의 "칭의"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단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기록으로 남기는 순간 기록에 갇혀 버리는 형국이지만 칭의란 옛관점과 새관점의 논쟁이 아니라 온전한 성경 이해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옳으면 네가 틀렸다고 해야 하기에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말은 오히려 더 나쁜 것임에 분명하다. 이것이 다만 이해의 측면이나 학문의 측면으로 제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는 그 끝은 훨씬 멀리까지 간다. 


책을 읽는 동안 너는 어느 편이냐? 고 묻는 자에게 제대로 답을 하려면 먼저 도대체 몇 개의 편이 있는지 알게 된다. 칭의에 관한 다양한 의견도 생소하지만 그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는 정직한 태도는 가져야 한다. 그런 예의는 차릴 수 있을게다.


하지만 칭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가 자칫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바울의 본문을 끌어오는 것은 심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나라는 사실에 당황스럽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삶이 곧 우리의 삶인데, 명확하게 내 편이 아니라서 모두다 "저주받을 놈"쯤으로 취급하려는 자세는 우려스러운게 분명하다. 차라리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위하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이 괜찮은 인용은 아닐런지? 이렇게 말하면 또 욕을 얻어 먹을까?


알아가려는,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귀를 열고 가슴을 열어 젖히고 다양한 소리를 들을 한다면 칭의 논쟁은 복불복이 아니라 빛아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마당에 나서는 셈이다.

e******0 2015.04.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