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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 : 지극히 평온했던 1909년 어느 날
"서울 시민 : 지극히 평온했던 1909년 어느 날" 내용보기
그때 역사는1910년 8월 22일 일제는 순종황제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이 주도한 조선과 일본의 강제병합안을 가결한다. 병합조약은 일주일 동안 비밀로 숨겨지다가 8월 29일 순종황제가 옥새를 날인한 후에 포고되었다. 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이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한일병합이 발표된 8월 29일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일장기를 게양하고, 등불행렬을 벌이는 등
"서울 시민 : 지극히 평온했던 1909년 어느 날" 내용보기

그때 역사는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순종황제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이 주도한 조선과 일본의 강제병합안을 가결한다. 병합조약은 일주일 동안 비밀로 숨겨지다가 8월 29일 순종황제가 옥새를 날인한 후에 포고되었다. 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이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한일병합이 발표된 8월 29일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일장기를 게양하고, 등불행렬을 벌이는 등 축제를 벌였다. 한편 그 날  8월 29일에 조선인들은 조용했다. 아주 소수의 인사들이 자결을 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무일 없었던 하루였다. 사람들은 어제와 변함없이 장을 보았고 늘 하던대로 일하고 저녁에는 먹고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조선인에게는 아무일 없던 하루 였을 뿐이었다. 이미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1907년 7월 정미조약으로 조선은 모든 실권을 빼앗겼고 이름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남은 이름만 넘긴 별 의미없는 날이었다. 


그 때 일본인은

그 시절 조선 땅에는 명동, 충무로, 퇴계로를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공무원, 군인, 상인 등 다양한 일본인들이 주거 및 상업지역을 넓히고 있었다. 일부는 대일본제국의 대륙진출을 위해 왔겠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그들의 또 다른 일상을 위해 건너 온 사람들이다. "히라타 오지라"의 [서울 시민]에서 보여주는 서울 시민은 조선인이 아닌 조선 땅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다. 서울시민은 1909년 역사에서는 다루지 않는 아무일 없었던 어느 하루를 보여준다. 목수가 와서 문을 고치는 일을 상의하고, 딸과 펜팔하던 사람을 기다리며, 마술사가 방문했다가 집안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장남이 조선인 가정부와 가출하는 등 그저 그런 일상을 보여준다. 스무살 넘은 장남의 가출마저 네 번째라 가족은 크게 놀라지 않고 새로 찍은 가족사진을 들여다 보며 사진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다 무대 조명은 꺼진다. 1910년 8울 22일과 29일 그들의 일상에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1909년 어느 하루를 그린 이 연극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배운 발단-전개-위기-절정-대단원같은 흐름은 이 연극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들고 대화가 이어진다. 


우리가 배우는 거창한 역사란 이렇게 사소한 일상이 쌓인 것일까? 아니면 공적인 삶은 역동적이어도 사적인 삶은 조용한 것일까? 이들은 조선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고 장사를 해 부를 쌓았지만 조선에 대해 무지하고 또 관심도 없다. 이들에게 조선은 그저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거주지이고 삶의 터전일 뿐이다. 

"이 서울시민 연작은 제국주의나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자명한 폭력과 모순을 폭로해가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불분명한 애매모호함 속에서 은근한 폭력과 잠재되어 있는 모순을 드러내가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이 희곡을 읽다보면 이들 개개인에게는 침략의 잘못을 물을 수 없는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모두 자신의 일상에 충실했을뿐이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며 심지어 조선인 가정부에게 인간적으로 대우해준다. 심지어 장남이 조선인 가정부를 데리고 가출한다. 하지만 이 희곡을 멀리서 다시 읽어보면 이들의 대화와 인간관계는 오직 일본인들 끼리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된다. 조선은 철저히 타자화 된 채 이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그대로 대저택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영위한다. 울타리 밖에서 벌어지는 피가 흐르는 침략과정과 그에 대한 조선인의 투쟁 그리고 이들이 성공하게 된 자본주의의 침략은 희미하게 나마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대를 이어 조선에서 부를 쌓아 가는 과정이 어땠는지 대가족이 살고 있는 저택이 만들어지기 위해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는 무대 뒤에 숨겨져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만들어 가던 그들의 욕심은 철저히 가려져있다.


시노자키 가족은 결국

"*같은 나라가 되면~~~(조선인 가정부)토시코도 일본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일단.

  *아무렴 그런 의미에선 일단이 아니라 그냥 같아지는 거야.

  *같아지다뇨?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말야.

  * 그러니까 그렇게 당신과 토시코의 관계는 변하지 않고, 나이가 위라든가 그런 건 변하 

      지 않은 채로 같아지는 거야 그런 베이식한 부분이

  * 베이식이 뭔데요?

  * 근본적인 토대 같은 걸 뜻하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된다. 침략에 성공한 후 아무일 없다는 듯이 강제로 만들어진 상하관계를 계속 유지할 생각뿐이다. 국가의 잘못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나는 다만 먹고 살기 위해 소시민으로서 조선에 들어 온것일뿐이라는 개개인의 생각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판단을 그릇칠 수 있다. 일본인의 일상을 통해 들여다 보는 역사는 위험하다. 한 명 한 명의 순진한 삶을 보여 줌으로써 한일관계는 아픈 역사적 숙명이었다라는 식의 역사판단으로 이끌 수 있다. 이런 역사 인식은 얼마전 일본 아베총리가 주장한 위안부는 인신매매의 희생양이었다는 인식과 같이 궤도를 공유한다. 개개인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줌으로써 그 뒤에 숨어 있는 국가와 집단의 잘못을 뭉그러뜨리는 것이다. 국가의 죄와 개인의 잘못을 분리 시킴으로서 그들은 과거와 현재로 단절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아닐까?


히라타 오지라의 서울시민은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사실은 최대한 뒤로 숨기면서 자신들은 그저 일상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라고 역설하는 재판의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과거를 부정하는 우익보다 이런 역사적 인식이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고문기술자들이 실컷 고문을 자행하고 쉬는 시간에 고3 수험생 자식들 걱정을 했다는 일화가 기억난다. 


일상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기에 그 뒤에 숨어 있는 역사는 더 잔혹하다

   

* 희곡집"서울 시민"은  4편의 연작이다. 이중 1편 [서울시민]에 대해  쓴다. 




     

YES마니아 : 골드 l****0 2015.03.30. 신고 공감 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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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자신의 나라인 듯 살았던 한 일본인 가정 이야기-현암사
"서울에서 자신의 나라인 듯 살았던 한 일본인 가정 이야기-현암사" 내용보기
이 책의 글은 희곡이다. 연극의 대본이 되는 행동의 문학이다. 글로 보다는 실제 무대 위에 올려 그 가치를 평가 받는 성격이 강하다. 그러한 자료를 가지고 서평을 해보는 것은 온전한 것이라곤 할 수 없겠다. 어떤 장치들의 도움을 받고, 어떤 연기자에 의해 가정 적절하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무대 위에 상연될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읽고,
"서울에서 자신의 나라인 듯 살았던 한 일본인 가정 이야기-현암사" 내용보기

이 책의 글은 희곡이다. 연극의 대본이 되는 행동의 문학이다. 글로 보다는 실제 무대 위에 올려 그 가치를 평가 받는 성격이 강하다. 그러한 자료를 가지고 서평을 해보는 것은 온전한 것이라곤 할 수 없겠다. 어떤 장치들의 도움을 받고, 어떤 연기자에 의해 가정 적절하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무대 위에 상연될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읽고, 배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또한 재미가 있으리라. 글만으로 작품을 말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담고 있는 내용을 같이 얘기하면서 문제 삼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연작 형태로 된 4편을 싣고 있다. 서울시민을 시작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에 깔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서울시민은 한일합방 즈음의 시간을, 서울시민 1919는 3.1운동의 시점을, 쇼와 망향 편은 세계 대공황을, 연애의 2중주는 일제말기를 그 배경으로 집고 있다. 그러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상업을 하는 일본인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해나간다. 그 구성원들이 만드는 이야기는 그렇게 스토리를 담고 있지 않다. 난해한, 그리고 무의미한 이야기를 그리면서 독자들의 의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언어로 읽어서는 재미가 적다.

 

이 글은 조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일본 작가에 의해 그리고 있다. 무대는 서울로 하고, 그 서울에 들어와 사는 일본인의 가정을 소재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렇기에 당시의 조선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 작가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에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의식이 여과 없이 노출되어 미묘한 문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인다. 남의 땅에 들어와 살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부터 문제가 되고, 먼저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미개인들처럼 인식하는 잘못도 범하고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로도 조선인은 하인으로만 제시되어 구성되어 있다. 모든 조선인은 일본인들에겐 그들로 대변되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내용은 가정의 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일상을 적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수시로 변하면서 별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상이 전개 된다. 특별한 의미를 제시한다고 볼 수 없는 일반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그러면서 간혹 조선 사람들에 대한 대화가 제시된다. 그 말들이 어찌 들으면 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데, 한국인 독자로선 참으로 황당함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우리 집에선 아가씨랑 조선인 고용인이랑 이렇게 차로 마시고 그런다. 그랬더니 놀라더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상태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조선인은 미개한 민족으로 문화인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인식에 저변에 깔려 있다.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대사다.

 

<그치? 그렇지만, 뭐 이건 토시코한테는 몇 번 말했던 건데, 내 생각에 조선어는 역시 좀 문학에는 안 맞는 것 같아.>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지금까지 조선에 고유한 문학이 성립되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자구.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뿐만 아니라......음, 그 언어의 문제가 한편으로 있지 않냐는 거야.>

위의 두 글귀는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무지가 얼마나 심한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그러한 면을 슬쩍슬쩍 노출해 나간다. 아마 저자도 일본인의 시각이 존재하기에 조선이 역사적으로 일본보다 깊이가 있고, 언어도 세련되지 못하다는 의식을 잘 나타낼 수 있었으리라. 그들은 조선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진주군을 따라온 승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기에 조선어, 조선 역사에 대한 편협한 그들의 생각이 여과 없이 그냥 노출되어 나온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참으로 무지몽매한 문제가 있는 발상이다.

 

<그 저는 잘 모르지만요. 그건 역시 말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람한테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문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보인다. 일본인들을 우위에 두는

이러한 발상이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들의 위상으로 생각하는 듯한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이 글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부조리극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연극으로 상연되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고 있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미가 없다. 사건이 일목요연하지도 않고, 이야기의 흐름도 구심점도 없다. 의도된 것이라고 하여도 이런 내용에 흥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단지 번외적으로 던지는 언어에 더 솔깃할 뿐이다. 그 스쳐지나가는 언어들에 나타나는 의미가 민족성에 대한 감정적인 충돌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까지 심도가 있다. 하여 던져지는 말들을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된 모호함인가 생각도 해본다. 당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지각적이지 못하다고 이해해도 되겠다. 물론 일본인들의 주관적인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종류의 글이 번역되어 한국인 독자를 가진다는 것이 참으로 이해 안 되는 대목이다. 무력이 정신적인 모든 것까지 지배한 듯 착각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듯하다. 인디언들을 침탈했던 서구인들의 의식에 반성이 깃들지 않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글의 주제를 단적으로 ‘일상 속에 스며있는 차별의식’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몰이해와 편견을 감각적으로 포착해 내어 그려낸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이 당시 일본인들의 삶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되고,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한국 침략에 동참하는 의식이 보인다. 그들 자신은 별로 조선인들에 대해서 악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지만 무의식 속에 그들의 삶이 조선인들에 대한 지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악의 없는 소시민들이 얼마나 타민족에게 죄가 될 수 있는가를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절묘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내용은 없고, 재미도 적지만 글이 주는 충격은 상당하다. 그리고 그리고자 하는 의미도 잘 포착된다. 하지만 저자도 일본인이기에 처절한 반성 같은 것은 볼 수가 없다.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느껴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서울시민 1919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오시타: 당신들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조선인들까지 우릴 무시한다구요.

야마시나: 무시하니?

김미옥: 아니에요.

야마시나: 아니라는데.

기본적으로 조선인을 하인 취급하듯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연중에 격이 낮은 사람들로 취급당하는 조산인의 모습이 보이는 대사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합방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이기에 3.1 운동을 벌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황당한 그들의 의식이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그렇게 생각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그들이 패망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왜 쫓기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 글을 읽어나가는 한국인 독자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저자가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려나간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의 땅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려나가기에 그렀다. 아무리 한 집에서의 일일 지라도 한국인은 하인이 되어 그들의 편견과 무시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보이면서 순종하는 모습은 차라리 아픔이다. 저자는 군국주의가 빚어내는 소프트한 폭력에 초점을 맞춘 듯하지만 저자의 한국에 대한 지식의 부족은 어찌할 수 없는 한국인 독자의 아픔이 된다.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책이 번역되어 읽히는 것이 과연 민족적 자긍심에 선의가 되는가는 의문이다?

j****3 2015.05.0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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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이 사람 뭐야? -「서울시민」을 읽다!
"히라타 이 사람 뭐야? -「서울시민」을 읽다!" 내용보기
히라타 오리자가 쓴 「서울시민」 연작. 여기서 말하는 ‘서울 시민’은 일제 시대 식민지 수도 서울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을 말한다.이번 작품집 「서울시민」(희곡집이다)은 1권 「도쿄노트」와 2권 「과학하는 마음」(이상 2013년 현암사刊)에 이어 3권 째.「서울시민」 연작은 3대에 걸친 30년 동안의 가족사를 담고 있다. 작가는 2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5부작으로 완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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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오리자가 쓴 서울시민연작. 여기서 말하는 서울 시민은 일제 시대 식민지 수도 서울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을 말한다.

이번 작품집
서울시민」(희곡집이다)1도쿄노트2과학하는 마음(이상 2013년 현암사)에 이어 3권 째.

서울시민연작은 3대에 걸친 30년 동안의 가족사를 담고 있다. 작가는 2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5부작으로 완결되었다. 책 앞쪽에 실린 서울시민 가계도(18~19)를 확인해 두자.

1909
년을 배경으로 한 첫 작품 서울시민1989년에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서울시민 19192000년에, 세 번째 서울시민·쇼와 망향 편2006년에 초연되었다. 마지막으로 2011년에 서울시민 1939·연애의 2중주상파울루 시민이 새로 더해져 대망의 5부작이 완성되었다. 3권에는 서울 시민 연작 4(상파울루 시민제외)이 실렸다.

난 게중에서
서울시민 1919를 먼저 읽는다. 마침 2003년에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공연으로 서울에서 우리말로 상연된 바 있었다. 내용을 펼치니 등장 인물의 소개(21명이나 된다), 대사를 말하는 요령 그리고 무대 구조가 설명되어 있다. 희곡은 134쪽이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기에 적당한 분량이다.

 

▲「서울시민 1919」의 한 장면


이야기의 무대는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191931일의 ‘3·1 독립운동바로 그날 오전이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도쿄 칸다(神田)에서 독립선언을 한 내용도 언급된다. 하지만 서울시민들은 그날도 삼시 세끼와 스모 이야기로 여느 일상과 다를 바 없이 하루를 보낸다.

서울 시민들은 당시 조선 백성들이
만세! 만세!” 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 무슨 축제가 있느냐며 어리둥절해 한다. 당시 그들은 조선의 사정에 무심했다. 아니 애써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히라타 작품의 백미가 드러난다
.

 

가능한 한 웃음의 요소와 음악을 많이 넣어 시끌시끌한 연극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끄럽게 떠들면 떠들스록 식민지 지배자의 골계적인 고독을 부조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죠.” - 604

히라타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자
. “서울시민 시리즈에는 잔인무도한 군인도 극악한 상인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시민의 모습입니다. 그 시민들의 무의식이 식민지 지배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6)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연출가 성기웅도 적극 거든다
. “남의 나라 땅의 수도에 와서 너무나도 자연스레 일본인다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이 이방인들의 모습은 한국 독자들에게 이질감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이 이야기의 개연성이 퍽 높다고 여기고 있다.”(10)

 

▲김미옥과 박관례가 「안개 이슬을 부르고 있다.


앞서 히라타가 이야기했듯이 서울시민 1919에는 노래가 몇 곡 나온다. 가령 김미옥과 박관례가 함께 부르는 안개 이슬(the Foggy Dew)>(165). 이 노래는 아일랜드 독립을 상징하는 노래 아닌가. 히라타는 일제에 조국을 빼앗긴 김미옥과 박관례의 한을 노래로 대신한 것이리라.

마침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노래하는 무대 사진
(두 사람 모두 한복을 입고 있다)도 실려 있어 어딘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 히라타 이 사람 뭐야?’ 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무대는 일본인 등장인물 셋이
도쿄 타령을 부르면서 페이드아웃된다. 물론 가사는 조선과 경성을 배경으로 바꾸었다. 결국 서울시민들은 조선 지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으며 그 일상을 여흥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나저나 내 관심사도 있고 해서 내처 희곡집
2권을 읽으려 한다. 과학에 관련된 희곡이라니 도대체 히라타 이 사람 뭐야?

▲히라타 오리자(왼쪽)와 성기웅

YES마니아 : 로얄 h*******c 2015.03.17.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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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함 밑에 흐르는 격렬한 흐름과 주장
"잔잔함 밑에 흐르는 격렬한 흐름과 주장" 내용보기
예전 어학연수를 하는중 만난 세계의 여러나라사람들과는 성별, 나이차, 상대적 국가에 대한 지식수준을 가리지않고 무척이나 편안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한데, 그닥 일본과의 과거가 얽힌 조상도 없는 내가 유난히 가까워지기가 어려웠던 대상이 일본인이었다. 서먹한 나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이 일본문화에 대해 아는 것을 이야기만 해도 매우 반가워하며 나중에 음악을 녹음해서 보내
"잔잔함 밑에 흐르는 격렬한 흐름과 주장" 내용보기

예전 어학연수를 하는중 만난 세계의 여러나라사람들과는 성별, 나이차, 상대적 국가에 대한 지식수준을 가리지않고 무척이나 편안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한데, 그닥 일본과의 과거가 얽힌 조상도 없는 내가 유난히 가까워지기가 어려웠던 대상이 일본인이었다. 서먹한 나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이 일본문화에 대해 아는 것을 이야기만 해도 매우 반가워하며 나중에 음악을 녹음해서 보내주기까지 했음에도, 난 여전히. 그건, 나중에 언젠가 한 유학생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아마 정답일 듯 싶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너네 한국인은 일본인에 대해 강박적인게 있는거 같아." 음, 맞다. 서로 침략하고 전쟁하고 왕권이 얽힌 유럽인들이야 서로에 대해 어쩔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말이 정답이면서 아닌건, 직접 겪어보지않고서야 그 강박적인게 병적인게 아니라 얼마나 슬픈건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언급되는 다른 조선거주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하녀가 같이 식탁에 앉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하며 상대적 친한파로 보이는, 조선에 거주하는 상인집안 시노자키 일가의 3대에 걸친, 1909년에서 1939년까지의 10년간격의 희곡 4편에 나타난, 조선의 모습이 얼마나 엑스트라에 가까우며, 한국인에게 있어 가장 극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삼일운동마저 매우 실소가 나올 정도로 무지하고 무관심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서, 그게 바로 강박적으로 보는 외국인과,
"왜 기억도 안나고 내가 하지도 않는 식민지화와 위안부건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사과해야 하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일본인, 그리고 그보다 어쩜 더 심각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그냥 싫은 일본인의 모습에 겹쳐지며 더 강하게 서로간의 거리차가 느껴졌다 (어젠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바로 위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고, "상대방이 이제 됐다고 할떄까지 사과하는게 맞다고. 그리고 최근 독해연습을 하면서, 아사히신문 칼럼 '천성인어'를 읽는데 무라야마담화의 뒷배경에서 '종전'이 아니라 '패전'임을 꼭 명기해야 했다는 등에서 일부 일본지성인의 모습에 감탄과 존경을 느낀다).

 

4편의 희곡은 '서울시민'연작이며 다 이 단어가 들어가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서울시민은,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에 사는, 일본인의 모습인듯 하다.

 

조선인은 문어를 먹나?

조선인도 문학을 즐기나?

일본인의 세금으로 낸 제국대학생이 배은망덕하게 독립운동을 해?

 

등등의 부분은 솔직히 읽어가기가 힘들었지만, 이 작품과 공연을 본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꼈는지에 더 궁금해졌다. 과연 창피했을까? 아님, 아래처럼 말하는 부분이 현재 일본우익의 생각과 비슷하듯 저열하게 웃어버렸을까? (갑자기 예전에 한국에 놀러온 일본인 관광객 인터뷰가 생각난다 "김포공항에 오면 김치냄새가 진동한다는데 없더군요")

 

 ..일본인은 싸울거야, 동양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조선인은 이 싸움을 더 응원해줘야 할걸...p.165

 

...인도인들은 인도일을 인도사람들끼리 결정한다는 건가요?..인도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영국령이 된게 아니잖아요..그거만 봐도 조선과는 전혀 경우가 다르죠....p.204

 

하지만, 분노보다는 식모와 지나가는 인물, 일제의 혜택을 받은 친일파로 묘사되는 조선인의 모습이 차라리 더 슬프게 느껴진다.

 

....문어란 놈들은 밖에서 자극을 가하면 좁다란 곳으로 막들어간다는 거야...바위틈에 있는 문어를 잡으려고 하면 목이 잘려도 나오려고 안한대요...p.32

 

...그 집에서 맨처음 기르던 원숭이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었답니다....p.318

 

작가의 조심스러운 작품설명에도 느낄 수 있듯, 이 작품은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그 어떤 분노와 수치, 서로간의 반감을 일으키고자 한 것은 아니다. 제목과 달리 오히려 더 서울시민의 비중이 적을 수록, 조선에 살면서 조선인의 삶, 문화, 인성에 대해 관심도 없고 무지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무관심이 얼마나 큰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식민지 지배는 괴물이 한 것도 악마가 한 것도 아닙니다. 보통의 인간이 별 생각없이 거기에 가담하게 된다는...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p.598

 

전면적인 제목과 대비되는 인물비중, 그 격한 차이가 동일한 시대를 살면서도 엄청난 관심과 지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불편하다고 외면하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을 (해설에는 정말 뛰어난 지식인이자 문학인인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의 글이 인용되어있다. 스스로만을 위하는게 정말 위험하다는...), 감정적인 부분을 버리고 보다 관심을 다가가며 차이를 좁혀야 하는 건, 정치인같은 인물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 어떤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없어도, 매우 잔잔한듯 대사가 흘러도 그 아래는 매우 격렬한 흐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p.s: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번역자의 노력이 정말 한치의 부족함이 없이 좋았다. 인물관계도, 무대의 배치, 스틸사진, 원어인 일본어 표기, 주석, 역사연표 등.

 

YES마니아 : 플래티넘 k*****k 2015.04.2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서울시민 - 히라타 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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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출판사 현암사의 서평 지원 이벤트로 읽은 책입니다. > 히라타 오리자의 <서울 시민>은 희곡이라는 장르로서 4개의 시리즈를 묶은 작품이다.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점과 제목을 매치시켜보면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왜 일본인이 서울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일제 강점기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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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출판사 현암사의 서평 지원 이벤트로 읽은 책입니다. >

 히라타 오리자의 <서울 시민>은 희곡이라는 장르로서 4개의 시리즈를 묶은 작품이다.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점과 제목을 매치시켜보면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왜 일본인이 서울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일제 강점기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서울시민의 이야기는 결국 당시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거주하는 일본인의 가정사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의미를 깨닫고 나니 문득 염상섭의 <삼대>가 생각났다. 비슷한 시기의 부유한 조선인 가정의 3대의 이야기를 다루던 <삼대>와 히라타 오리자의 <서울시민> 4부작(총 5부작이라고 하나, 실제 서울시민 시리즈로서 4편이 소개가 되고 있다.)은 비교할만한 점이 많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히라타 오리자라는 극작가는 과연 <서울 시민>이라는 희곡을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첫번째 시리즈인 <서울시민>의 시간대가 1909년이라는 점과 마지막으로 소개가되고 있는 <서울 시민 1939, 연애의 이중주>가 1939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 4편의 이야기는 모두 우리의 식민지 시기와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자연스럽게 우리의 식민지 시대의 굵직한 사건과 연관지어 읽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모호한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경성에서 거주하면서 문구류 사업을 하고 있던 시노자키 집안의 이야기는 각 시간적 순서에 따라 4가지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등장인물의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희곡의 특징을 감안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무언가 뚜렷한 방향성을 찾을 수가 없다. 이들의 대화가 보통 가족간의 대화와 특별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는 듯한 내용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시민>에서는 마술사이자 시노자키 집안의 식객의 친구로 등장한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이라든지 <서울시민 1919>에서는 스모 선수가 돌아간다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종적을 감춘 상황, <서울시민 1939, 연애의 이중주>에서 가짜 독일인이 등장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그나마 소소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순식간에 끊어버리는 뉘앙스를 전해준다. 즉, 이 책에 실려 있는 4작품 모두 모호함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저자는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사실 식민지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한다면 분명 우리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지배자의 위치를 점하여 식민지의 도시에서 중산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인에게 어쩌면 당연히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시노자키 집안으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악의적인 부분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힘들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조선인들을 압박하거나 못살게 구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인 출신의 가정부라든지 식객(서생)과도 잘 어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뼈아픈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가 예상했던 지배자로서의 일본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당황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바로 모호함으로 묶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분명 당시 시대의 일본인은 악인이고, 우리는 약자라고 여길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게 묘사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 당황하고 있는 찰나에 모호한 이야기의 흐름(방문객의 사라짐 내지는 가짜 인물 소동과 같은)을 마주하니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히라타 오리자는 1980년대에 한국에서 1년간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또한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하여 점차 우호적으로 변해가는 양국 관계를 접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좀더 중립적인 입장에서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등장하는 일본인이 모두 악인으로 묘사하거나 또는 조선인을 미개한 민족으로 설정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설정으로 인하여 우리는 시노자키 집안의 등장 인물들을 통하여 평범한 일상과 더불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점을 느끼게 된다.


 <서울 시민 1919>에 실려있는 이 대목은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시각에 비친 3.1 운동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비폭력으로 전개가 된 3.1운동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모습은 당시 조선인에 대한 무지와 함께 은근히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히라가나를 발음하게 하는 장면은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가려내기 위한 방법을 연상시키게 하고, 조선의 쌀을 수탈하는 모습이라든지 창씨개명과 같은 일본의 억압을 이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시노자키 집안 사람들은 악의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도 모호하게 느껴지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시리즈가 거듭날수록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본인들도 아예 본토가 아닌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때문에 조선인과 비슷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인물도 있고, 조선인들은 초기 시리즈에서는 단순히 시노자키 집안의 가정부로 등장하지만, 점차 식객에서 총독부 관리가 된 사람이라든지 스스로 전쟁터에 자원하는 사람까지 등장하면서 은연중에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동조하는 조선인의 모습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히라타 오리자는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절대적인 것으로 표현을 하지 않은 셈이다. 분명 그도 일본의 식민지 수탈을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 조선인의 자발적인 식민지 지배의 참여도 있었으며, 일본인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 조선에게 호의적인 인물도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요즈음 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일본의 과거사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칼럼을 통하여 밝혔듯이 당시 눈에 보이는 식민지 시대의 폭력적인 모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와 억압을 자신의 희곡에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여기에 더하여 비록 일본인의 시선이지만, 우리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재구성도 이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애초에 염상섭의 <삼대>에서 볼 수 있었던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흐름을 기대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극적인 흐름은 차치하더라도 당시 일본인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재구성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g*******7 2015.04.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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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오리자 희곡집 - 서울시민- 같은시대의 불편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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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쪽 4편의 연작 희곡 - 히리타 오리자의 서울시민   지금까지 공연을 관람한 경험상 공연이란 장르가 보여지는것에 대해 참으로 흡입력이 강한 듯.. 그건 내가 미쳐 알지못했던부분일때 더욱 그러하지 싶습니다.   아 저랬었구나.  아 그런거구나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보여지는 이면에 많은것을 담고 있다할지라도 사전지식이 많지 않고 그 순간만을 즐기는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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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쪽 4편의 연작 희곡 - 히리타 오리자의 서울시민

 

지금까지 공연을 관람한 경험상 공연이란 장르가 보여지는것에 대해 참으로 흡입력이 강한 듯..

그건 내가 미쳐 알지못했던부분일때 더욱 그러하지 싶습니다.

 

아 저랬었구나.  아 그런거구나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보여지는 이면에 많은것을 담고 있다할지라도 사전지식이 많지 않고 그 순간만을 즐기는 문화예술인지라, 보통은 무대위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면서 그대로 믿어버리게 되니까요.

 

그래서는 아베 총리의 망언이 이어지는 요즘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영토침해에 역사왜곡까지 일삼는 그의 행보를 보면서 곱지않은 시선을 가지게됨에 작가와 연출가의 의도는 열설적인 부분이 분명 있음을 짐작케하지만 그래서 서울시민 연작희곡집을 만나면서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한일관계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ㅠㅠ

 

 

 

 

 

 

1909년부터1939년까지 이어지는총 4편의이야기는

1989년 강제병합이 일어나기 전

1919년 3.1운동 당시

1929년 대공황여파가 밀어닥친 때

1939년 일본이 침략의 광기를 보일때의 시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이 되는곳은 경성에서 대대로 문구점을 독점하며 살아가는 일본인 가정입니다.

 

 

 

 

 

 

 

우리민족에게 가장 고난의 시간이었던 당시 서울시민 ( 경성에 살고있는 일본인들) 들에게는 그러한 고통과 초조함은 결코 찾아볼 수 가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조선사람들도 문어를 먹을까?

조선어는 문학을 표현하는 데는 잘 맞지않아

조선과 일본의 강제병합은 어불성설 그들의 눈과 생각에는 무지한 조선이 원한 합병이었고

그로 인해 조선은 많은 덕을 보았을뿐이다.

 

그러한 사고는 3.1운동을 바라보는관점에서 두드러지고 1939년 침략이 고조된당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우수한 민족의 당연한 행동쯤으로 치부된다.

 

너무도 무심하게 당연한 듯 내뱁는 대사들은 그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있지 않는한 그대로 수용되지 싶었기에 불편하다 역사왜곡의 교과서와 하등 다를바가 없는 듯...

그렇게 시나브로 주입된 생각들이 집결되어서느 나라일에 사회에 관심없던 젊은이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자연스런 사고로 정차될 수 있겠구나 싶어졌던 것이다.

 

분명 의도는 그것이 아닌 듯 하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너무도 많은 세월동안 당해온 국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문학도 곡해하게 되는것

그건 두 나라의 굴곡진 역사속에서 같은 세월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려니

그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보고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그들은 그 시대를 이렇게 보았는데

그것이 분명 잘못되었다라는 사실까지 알려주었으면 그나마 나았으려나..

 

절대 좁혀지지 않는 두 나라의 관계에 있어

당시에서부터 정말 다른 차원속에서 그 시간을 보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을뿐....

 

그러면서 정말 우리의 것을 올바르게 찾고 지켜나가기위해서는

영원히 끝날것 같지않은 분쟁의 시발점이 처음부터 있었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하늘과 땅임을 상기하며

 

세뇌교육을 통해 더욱 멀어져가는 두 나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를 구하길 원하는 우리의 바램 자체가 어불성설이었 듯 ( 그들의 사고속에서는 강제병합이 아닌 감사의 합병이었으니 말이다  ㅠㅠ )

 

 

머나먼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현명한 지혜가 모아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d****0 2015.04.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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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들이 서울시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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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을 읽는 건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 정말 오랜만이다. 중간에 <햄릿>을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햄릿을 떠올린 건 이 희곡집 <서울시민>에 담긴 작품 가운데 '미친 척하며 부모의 원수를 갚는 연극'에서 햄릿이 생각났기 때문인 것 같다.희곡은 상연을 위해 쓴 글이기에 연상하기도 쉽고, 공감각적으로 체험하듯 읽을 수 있어 흥이 더함에도 좀처럼 읽지 않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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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을 읽는 건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 정말 오랜만이다. 중간에 <햄릿>을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햄릿을 떠올린 건 이 희곡집 <서울시민>에 담긴 작품 가운데 '미친 척하며 부모의 원수를 갚는 연극'에서 햄릿이 생각났기 때문인 것 같다.

희곡은 상연을 위해 쓴 글이기에 연상하기도 쉽고, 공감각적으로 체험하듯 읽을 수 있어 흥이 더함에도 좀처럼 읽지 않게 되곤 한다.

고전도 아니고 한국의 희곡도 아닌 일본의, 그것도 우리에게는 무척 민감한 시기였던 1909년부터 1939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희곡을 읽는 기분은 무척 미묘했다. 하지만 "무엇이 특히 미묘했는가?"하고 묻는다면, "글쎄요."하고 답하게 될 거다.


<서울시민>은 현대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의 세 번째 희곡집이다.(희곡집 1, 희곡집 2 현암사 출간)

이 희곡집의 첫번째 극인 '서울시민'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기 직전인 1909년이 배경이다. 이 희곡집에 담긴 네 편은 연작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가운데 '시노자키 가'의 30년을 담아낸 것이다.

연작이라고는 하지만 각각 배경이 되는 시간에 간극이 있고, 등장인물도 조금씩 달라지며, 저자의 말로는 실제 연극으로 상연했을 때도 연기한 배우가 매번 달라졌었다고 하기에 별개의 작품처럼 읽어도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이 배경을 달리하기에 재한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과 조국인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따라가며 읽으면 그 재미가 조금 더 풍부해진다.

희곡의 시작에 앞서 저자는 염려의 말을 거듭 더해 적었다. 

아무래도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시기다보니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적잖이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인용하자면 서문에 적은 글이다.


5쪽

물론 이 일련의 희곡들이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에게 오해나 반감을 살 수 있을리란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일본인 관객을 위해 쓴 것이지만, 어쩌면 한국인 관객들이 그 글들을 먼저 읽으신 후에 희곡들을 읽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서울시민' 시리즈는 어느 누구에게든 무척 오해받기 쉬운 작품이라고 저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받을 여지가 적은 무대란 재미도 없는 법이지요.


걱정이 적잖았던 것에 비해 자신감도 대단해 보인다. '누구에게든 오해받기 쉬운 작품'이라고 스스로의 작품을 평하면서도 '오해받을 여지가 적은 무대란 재미도 없는 법'이라고 더해 적으므로써 '이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작가도 재밌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작품은 읽는 맛이 나는 법이다.


각각의 작품을 설명하기엔 나의 이해가 너무 좁고 짧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감상을 적기로 한다.


네 작품 속의 모든 이야기,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는 모두 동일하다. 

무대 한 가운데에 의자 일곱 개가 놓여있고 큰 식기장과 찬장이 있으며 식기장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

"대지란 무릇 넓은 것,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좁게 할 뿐."


신기한 것은 네 편의 희곡 앞머리에서 위의 표어를 읽어주지만, 극 중 누구도 그 표어에 주목하는 일이 없으며, 작가 역시 작품 속에서는 한 번도 언급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작품을 읽는 이에게는 그야말로 하나의 표어가 되어 읽는 내내 그 표어가 무슨 뜻일까를 궁리하게 된다. 


<서울시민> 속 네 편의 희곡은 정말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 어느 하루, 그 하루 가운데 어떤 시간, 그 시간 속에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크게 의미를 두거나 주목하는 것도 없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이게 이 희곡의 주제임이 틀림 없어!"하고 확신하거나 짚어낼 단서를 던져주는 일도 없어 보인다.(독자의 눈이 멀어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첫 번째 작품인 '서울시민'에서는 시노자키 가의 딸인 유키코의 펜팔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시노자키 가에 서생으로 머물고 있는 타카이의 친구 '타케하치로 야나기하라'가 찾아오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야나기하라는 마술사이기도 한데 그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고 나간 후 가방도 신발도 둔 채 사라져버려서는 그를 찾기 위해 소동이 벌어지는 거다. 야나기하라의 조수도 찾아오지만 그 역시 아는 게 없다. 

야나기하라 외에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노자키 가의 장남인 켄이치와 조선인 가정부인 김숙자, 일본 이름으로 토시코 역시 사라진다. 정확히는 사라졌다기 보다 쪽지를 남기고 가출한 켄이치를 김숙자가 따라갔다는 흐름이다. 


마술사인 야나기하라를 찾기는 하지만 그들 가족에게는 '없어진 것은 없는가?'하는 것만 확인하면 찾아도 그만 찾지 않아도 그만이다.

장남인 켄이치가 집을 나갔지만 그의 가출이 처음도 아닌데다, 열차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남겨둔 쪽지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말려달라', '나에게 관심을 좀 가져달라'고 보채는 것 같은 철없는 젊은이로 그려진다. 김숙자의 동행에는 의문이 많지만 그 의문 역시 심각하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김숙자가 다른 집 가정부에게 들려보낸 가족 사진을 보는 일에 열중하는 것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희곡이다보니 어느 부분만 떼어내서 읽어서는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이 집안 사람들은 식민지에서 생활하는 지배국의 일원으로서의 우월감과 함께 생활의 안락함을 오래 누려온 이들에게 엿보이곤 하는 무신경함, 그들이 내지라고 일컫는 일본과의 인식의 차이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주목해서 읽는다면 조금 더 재미가 더해질 것 같다.


등장인물 가운데 소이치로의 이런 대사가 있다.

"그러니까요, 그게 조선도 같은 일본이 돼버리면 재미가 없어져버릴테죠."

소이치로의 아버지의 책을 내는 일로 이야기가 오가다 '이런 유의 책은 외국에서의 고생담이 중심'이 된다는 말에 이어 나온 대사다.

이 대사는 '일본이 재미가 없다'는 말로도 들리고, '조선은 재미가 있다'는 말로도 들리며, '조선이 곧 일본이 될 것이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는 암시와 함께 '조선도 재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결과까지 말하는 것 같다.


'서울시민 1919'는 3 . 1운동이 있던 날을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들로 가득하다', '다들 웃고 있다',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오늘은 외출을 삼가야겠다'

무신경하다. 무관심하다. 그저, 외출이나 삼가면 되겠지 하고 만다.

가정부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사라지고, 상점의 조선인 직원들 역시 만세 운동 현장으로 달려가지만 특별히 걱정한다거나 염려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알 필요도 없다"는 식의 반응이다.

일제는 3.1운동을 폭동으로 보고 진압하고, 총을 쏘고, 연행하고 죽였다. 그리고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태도를 바꾸어 동화 정책으로 선회한다.


작가는 유럽과 미국 등의 식민지배 방식과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식민 지배 방식을 비교하면서 서양과는 다른 '동화형' 식민지배 방식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식민지를 경영했던 각국의 논리를 두고 이렇게 평한다.


595쪽

무릇 어느 정부든 자국의 식민지 지배 역사를 정당화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 경우 반드시 제시되는 게 '다른 나라보다는 나았다'는 논리다. 프랑스나 영국은 늘 '그러니까 우리들의 방식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보다는 나았다'고 말한다. 그 논리대로라면 확실히 일본의 방식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나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건 지배당한 쪽에서 봤을 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건 '지금 범죄자를 그쪽으로 보낼 건데, 강도범하고 강간범하고 방화범 중에 누가 낫겠어?'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당연히 다 싫은 것이다.


일본의 망언 가운데 "우리가 무지하고 낙후된 조선을 개화하고 계몽했다"거나 "우리가 발전을 도와줬는데 왜 오히려 비난을 하는가?"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당연히 다 싫다. 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당한 쪽의 입장이다.


'서울시민 1919'의 마지막 장면은 그날의 반찬을 물어보는 것이다. 아, 이런 밖에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이 벌어지고 있건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조선인이 몰려나온 것으로, 웃으며 만세만세 부르는 것으로, 그저 일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거다.


'서울시민 쇼와 망향 편'은 세계대공황 직전을 배경으로 한다. 

시노자키 신이치가 '정신병원'에서 간호부를 대동하고 퇴원해 오는데, 나중에 간호부가 '가짜'라며 또 다른 간호부가 찾아온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된 시노자키 가 사람들은 병원에 연락을 하지만 병원의 대답은 둘 다 가짜라는 말이었다. 둘의 이름이 간호부 가운데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이치는 병원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가짜'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도무지 진짜가 없다는 이야기다.


은행이 늘어나고 주식의 거래가 활성화되고 간단해지던 시기였다. 뭘 해도 돈이 되고 뭘 해도 남는, 영원히 나아지기만 할 것 같은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바로 앞에 대공황의 늪이 기다리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무엇이 가짜고,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된 순간 구분의 의미는 사라졌다. 


'서울시민 1939 연애의 2중주'는 제 2차 대전 전, 중국과의 전쟁에 지원병으로 나서는 조선인 신고철과 차출병으로 전쟁터에 다녀온 후 조금은 이상해진 시노자키 가의 데릴사위 아키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터에 나가면 살아돌아오는 것이 불명예'라고 했단다. 승리하고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그렇겠지' 하고 답하고 만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광기를 무심하게 들춰 보여줌으로써 더 생생하게 실감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조선에 대한 강제 차출 이야기는 오래도록 일본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고철이 지원병으로 입대하는데 그 경쟁률이 몇십 대 일 이었다는 식으로 조선인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일본이 선전을 벌인 까닭이다. 하지만 밝혀진 것처럼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강제로 징용되어 총알받이 혹은 노동자로 전쟁터에 끌려가 목숨을 잃어버렸다.


시노자키 가에 점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집안이 좋은 주원은 일본인 여성인 타케다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본인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은 신고철과 이미순이다. 둘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조용히 뜨겁게 마음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도 '가짜'가 등장하는데 히틀러 청소년단의 인원 가운데 가짜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설정상인지 시노자키 가에 홈스테이를 하게 된 독일인 잉케보르크 아헨바흐가 가짜다. 하지만 그녀의 박력과 이해할 수 없는 독일말로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고 작품은 끝이 난다. 

히틀러의 나치는 '선동'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상당부분 관철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이기적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울시민> 속 서울시민은 지금의 서울시민과는 그 의미도, 내용도 다르다.

1909년에서 1939년까지의 조선에서 조선인은 '시민'이라기 보다 '지배당하는 계층'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동화정책을 펴는 일본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은 조선인이지 일본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다. 창씨개명이니 내선일체니 해도 껍데기를 뒤집어 쓰는 것만으로 알맹이까지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지' 즉 일본 본토에서의 풍습이나 생활을 종종 끌어다가 비교하는 것도 같은 이유처럼 보인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다."는 거다.

하지만 일본인들 가운데서도 일본 내지보다 조선을 더 자유롭다고 여기고 좋아했던 이들도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유럽의 귀족들의 풍습을 따르던 일본에서는 여성들끼리의 외출을 꺼렸고, 이혼한 딸의 외출 역시 용인할 만한 것이 못 됐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더 자유롭다고 느꼈던 것이다. 

1945년 2차 대전의 패배 후에는 강제로라도 돌아가야 했겠지만 전쟁 통에도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그런 자유로움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작가가 염려한 것과 같은 오해를 살만한 내용은 작품 안에 들어 있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그 당시의 일본인들의 생각을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잘 표현함으로써 '가해측'이 '피해측'을 대할 때의 인식의 차이를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09년에는 조선어를 금하지 않다가 1939년에는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나, 1909년 조선인 식모는 조선어를 잘하지만 1939년 조선인 식모는 조선어가 일본어보다 서툴게 되는 모습이 일본의 정책의 효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증거인 셈이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고, 크고 강한 대립이나 대결 구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분명히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정치가들 혹은 천황만이 획책한 것이 아니다. 

재한 일본인들 역시 그들이 말하는 대로 조선인을 인식했고 조선을 대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적은 것처럼 악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우는 것이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그랬다. 


나중에라도 한국에서 이 작품들이 상연되면 직접 보러가고 싶다. 

아니, 오히려 일본어로 듣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뭔가 번역에 보태 적은 주석들을 보니 의역도 많아 보이고, 그 분위기나 상황을 적절히 옮기지 못한 것도 많아 보였기에, 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일본어 공연이 더 나을 것도 같다는 거다.


지금의 서울시민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1909년에서 1939년의 일본인 서울시민들처럼, 아, 그때는 경성부시민이었겠지만, 그렇게 무심히 무관심하게 나만을 보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감상은 현암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제 맘대로 쓴 것입니다.

c*********p 2015.04.19.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7. [서울 시민] 너무 가볍게 다룬 일제치하, 그때 그 시절
"7. [서울 시민] 너무 가볍게 다룬 일제치하, 그때 그 시절" 내용보기
얼마 전에 의욕상실을 겪으면서 읽었던 <빌린 책/산 책/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필자가 희곡을 거의 책으로 접할 수 없는 우리나라 현실이 무척 씁쓸하다면서, 그래서 희곡이 출판되면 그냥 반갑다는 글 덕에 이 책에 욕심을 냈고 그렇게 인연이 닿았다.   희곡집이란 것도 그러했지만, 일본인이 쓴 희곡집에 제목이 ‘서울시민’이라~ 무엇보다도 1909년부터 1939년까지
"7. [서울 시민] 너무 가볍게 다룬 일제치하, 그때 그 시절" 내용보기


얼마 전에 의욕상실을 겪으면서 읽었던 빌린 책/산 책/버린 책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필자가 희곡을 거의 책으로 접할 수 없는 우리나라 현실이 무척 씁쓸하다면서, 그래서 희곡이 출판되면 그냥 반갑다는 글 덕에 이 책에 욕심을 냈고 그렇게 인연이 닿았다.

 


희곡집이란 것도 그러했지만, 일본인이 쓴 희곡집에 제목이 서울시민이라~ 무엇보다도 1909년부터 1939년까지 일제치하에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가족 3대에 걸친 30년 동안의 가족사를 담고 있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 5부작을 완결한 작품이다. 초연이 1989서울시민에서 시작하여 두 번째 작품 서울시민 1919>2000년에, 세 번째 서울시민 쇼와 망향 편2006년에, 네 번째 서울시민 1939 연애의 2중주2011년에 상연되었다.(이 책엔 4부작까지 실렸고, ‘번외 편같은 작품인 5부작만 빠졌다.) 그리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전편들과 함께 연속 상연의 형태로 상연되었던, 그 시작부터도 독특했건만 과정 내내 대단한 작업이었다. 민감한 식민지 역사를 과연 일본인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3대에 걸친 30년 동안의 가족사를 ‘5부작 연극으로 공연했다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이 컸기 때문에 그만큼 호기심이 증폭된 작품이었다.   


 

4부작 내내 특별한 사건을 담고 있지도, 한국 땅에 살면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에(1919년 삼일운동 때도 이 희곡에선 밖에 한국인들이 많이 몰려있어, 뭔 일이지?’ 정도로 의식하는) 귀 기울이지도 않는, 한국 땅으로 건너와 장사로 돈을 벌게 된 어느 부잣집 일본인 가족의 일상들을 보여주는 희곡이다. 한 가족사다 보니까 공간은 늘 한결같은 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집에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손님의 행태와 가정부, 서생, 점원으로 그 집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행태를 통해서 그 시대와 일본인들의 생각을 유추할 수 있는 정도이다. 참으로 잔잔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지배계층인 일본인들의 부조리한 생각들이 어이없이 터져 나오는 해학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은근 지루하면서도 쏠쏠하게 재미있다.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일본만의 특색, 큰 사건 없이 동네 사람들과 투닥투닥 이야기 하는 일상만으로도 스토리가 잘잘 흘러가는, 그런 스타일로 만들어진 연극이랄까! 

 

작가는 식민지는 무조건 갑(나쁜 놈)과 을(불쌍한 사람)의 관계로만 표현하는 그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인간관계의 왜곡, 뒤틀린 기억, 그런 문제들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의 식민지 문학 작품을 시도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이 희곡을 읽다보면 그 의도가 어떤 것인지 절로 느껴진다. 


 

다만'식민지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이렇게 가볍게 표현해서야 나원 참! 여전히 역사 왜곡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과연 무엇을 남겨줄 수 있는지 그게 의문이다. 가정부나 점원 그리고 서생으로 등장하는 한국인은 이 부잣집에서 피지배 계층으로 살아가지만 평안한 삶을 누리는, 그래서 20대 1의 경쟁을 당당히 뚫고 자랑스럽게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기도 하고 등등 분명 그렇게 살았던 일본인도 한국인도 그 시절엔 존재했겠지만, 이런 희곡이 오히려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자기들은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왜곡된 해석을 낳게 하는 건 아닐까 심히 염려스럽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선진의식이 우선되지 않은 일본에서 이런 희곡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t****o 2015.04.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