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버드대학교 강의실에 예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십자가도, 후광도 달고 오지 않았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먼지를 털고 들어온 한 명의 랍비였다. 하비 콕스가20년간 진행한 이 강의는 예수를 신학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윤리의 현장으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예수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1980년대 하버드가 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배경은 아이러니하다.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사실과 논리를 배웠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사회로 나가 부정과 비리에 가담했다. 지식은 풍부했지만 판단력은 부재했고, 논리는 정교했지만 양심은 무뎌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하버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교육 시스템 전체가 '무엇을 아는가'에 집중한 나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방치해온 결과다. 콕스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예수라는 독특한 교사를 소환한다. 그런데 그가 소환한 예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익숙한 구원자가 아니다. 유대인 학생들은 그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전통을 잇는 예언자로 보았고, 불교도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로 인식했으며, 무슬림들은 꾸란에 등장하는 선지자로 받아들였다. 예수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윤리 교사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콕스는 강의에서 추상적 윤리 원칙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을 강의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가 했던 방식대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탕자의 귀환, 잔치에 늦게 온 손님 등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장치다. 현대 사회는 명확성과 효율성을 숭배한다. 매뉴얼이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으며, 정답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윤 리적 선택의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A와 B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옳거나 어느 정도 그른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원칙을 암송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예수의 비유들이 지닌 힘은 바로 이것이다. 그 것들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안을 거부하고 슬픔에 빠져 돌아갔을까? 왜 형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못했을까? 왜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일꾼에게도 같은 임금을 주었을까? 이 이야기 늘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며,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콕스는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유대교의 미드라시 전통이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속 인물이 되어보라고 한다. 그때 비로소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윤리적 딜레마와 공명하기 시작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다루는 장면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 구절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신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콕스의 해석은 신학적이기보다 실존적이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위기의 순간마다 개입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느낀 버림받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겪는 고독, 무력감, 절망의 순간을 예수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종종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외롭다. 정답이 보이지 않고,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으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존재의 명확한 지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이들의 선례와 연대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은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 취약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윤리적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는 정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질문 앞에서 떨었던 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자였다. 산상수훈에 대한 콕스의 해석 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학생들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콕스는 온유함을 나약함과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온유함은 인내이고 신뢰이며,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더 도발적인 것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버전이다. 거기서 예수는 가난한 자를 축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유한 자를 저주한다. 이는 하버드 학생들, 즉 미래의 엘리트들에게 불편한 메시지였다. 그들은 성공을 꿈꾸고 있었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가치 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콕스는 이것을 금욕주의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가 만들어내는 권력 구조와 불평등이다. 부는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고, 특권을 정당화하며, 타자에 대한 무감각을 낳는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런 구조에서 한 발 물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절실한 질문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 배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 누구를 밟고 올라섰는가? 어떤 관계를 희생했는가? 예수는 이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말 라고, 불편해도 직면하라고 말한다. 하비 콕스의 강의가 2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여전히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던졌던 질문들이 21세기 하버드 강의실에서도 여전히 큰 화두를 전달한다.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부와 성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책은 기독교 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성찰을 위한 초대장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그가 던진 질문 앞에서는 동등하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하며,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져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콕스는 답을 주지 않는다. 예수도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 질문하고, 상상하고, 공감하며, 결국 선택하도록 만든 다. 그것이 윤리적 삶의 출발점이다. |
|
<이 글은 책과 콩나무를 통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그것은 분명 종교적 인물로서의 예수와는 다르다. 그런데 현대에 있어, 전자의 예수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예수는 이미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으로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가 없이, 후자가 가능할 수 있을까. 예수의 인간적인 삶, 한 인간으로서의 발자취, 이것들이 없이는 예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소중한 관점과 질문을 제시한다. 이 책은 예수의 삶과 우리의 윤리적 물음들을 연결하는 이야기이다. 가장 큰 장점은 예수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과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있어, 예수를 제일 잘 표현하는 말은 '친구'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예수를 높이 걸려 있는 십자가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하나의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시점에 기반하여, 예수가 살아간 삶에 주목하고, 그의 말과 가르침을 되새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이 오늘 되돌아오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행동하실까. 아울러 이런 물음을 우리가 인생에 있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사안들과 연결한다. 예수를 신앙 및 숭배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 기준과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의지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인간적 대상으로 대치한 것이다. 다음으로, 학교에서 강의하는 저자답게 학생들과의 피드백을 담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 책의 기반이 되는 것은 저자가 하버드대에서 한 강의이다. 따라서 그 강의를 통해 학생들과 나눈 대화, 아이디어, 피드백 등을 함께 서술한다. 이는 신학적인 주제에 함몰되어 대중적인 접점을 잃어버리는 많은 책들과 다르게 독자에게 친근함을 선사하는 이유가 된다. 오랜 기간 끊임없이 학생이라는 상대편을 고려하고 염두해둔 저자의 노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경험한 생각들, 예컨대, 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들을 만나기 전과 후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들의 입장은 무엇인지 등이 있어 이 책의 내용이 한층 더 풍성해진다.
|
|
★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2000년전 머나먼 근동지방 갈릴리라는 동네에서 있었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직접 글한줄 남긴것 없음에도 온세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이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었다 이와 같은점을 하비콕스 박사님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예수 하버드에 오다" 라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일생을 통한 행적을 신앙적고백이나 교리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적예수로써 도덕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게 하므로써 현대인들이 윤리적인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특정종교에 매인다기 보다 스스로의 것을 비우고 깨달음을 찾을때 기독교에서는 내려놓음 이라고 말하는것 처럼 불교에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 관점에 얶메이지 않더라도 경험적입증이나 반증으로 실존적 인간의 내면을 찾아볼수 있기 때문임을 서술해주고 있었다 예수와 윤리적사유를 전개하기 위하여 과거나 현재의 인간군상속의 예수를 연결시키는 1절~3절 이외에도 1장의 세상사람들의 입장에서 예수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전 예수와 윤리적 삶을 바라보는 이야기가 4절~10절 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2장은 예수공생애 가운데 있었던 비유의 교훈을 주된 내용으로 비록 각시대마다 사람들의 다른 반응을 보일지라도 저마다의 윤리적사유에 방향을 모색하도록 7개 절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3장의 9개 절은 이지상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이 마무리 되어 성육신에 이르며 그리스도사상과 신학을 서술함에 예수전으로 이해하고 접하려 했던 독자라면 폐이지를 넘길적마다 의미하는 바가 깊게 느끼리라 생각 되었다 #예수하버드에오다 #하비콕스 #문예출판사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오늘날 세계 종교는 약이 아니라 병이다. 세속종교의 근본주의와 맹신주의가 극단의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종교는 구원을 빌미로 우익화, 보수화, 세습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여전히 과학과 합리성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종교가 윤리적인 행위의 든든한 기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종교 신앙과 도덕성은 관련이 없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종교와 정의는 그리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종교인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신앙심으로 소문이 난 유명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사적인 도덕성에 의심을 품어볼 만하다. 정치 엘리트는 지위에 따른 권력 효과에 의해 비윤리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으니 말이다. 비근한 예로, 내란 세력의 말로를 보라. 종교적 맹신자도 그리 다르지 않다. 명동 거리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신도들이 과연 도덕적이고 이타적이고 정의로운가. 이들의 억지스런 행동이 정녕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정녕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을만한 그런 선행인가. 종교학자 하비 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문예출판사, 2026)는 20여 년 동안 저자가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개설한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교양 강의를 토대로 한다. 저자는 역사적 예수를 1세기 갈릴리의 유대인 랍비로 자리매김하고, 예수의 영적 가르침은 당연히 랍비 전통의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랍비 전통과 교수법의 핵심은 기존 전통에서 내려오는 고정된 윤리 강령이나 지침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비유나 반문을 통해 듣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나 인습적 관행을 뒤흔들어 그들 스스로 삶과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는 각성을 통해 사랑과 정의의 길을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자력구원의 서사와 상통한다. "랍비 예수는 전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이야기꾼이었다." 예수는 이야기(설법과 대화)를 통해 어떤 윤리적 지침을 전달하려는 것보다는 민중에게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려 했다. 예수 설교는 대부분 유대교의 정신적 유산에 기반하고 있고, 언어와 행동을 통해 민중들의 윤리적 상상력을 일깨웠고 윤리적 근본주의와 무책임한 상대주의라는 두 극단을경계하도록 이끌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이전에, 또한 종말의 복음 이전에, 살아있는 유대 랍비인 예수의 가르침은 공정, 공동체, 관용, 연대, 정의로운 선택, 생명 윤리 등 현대 사회의 윤리적 문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참고로 책의 역자인 종교학자 오강남은 예수를 "개인적 영성을 함양함과 동시에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의 도래를 위해" 힘쓴 '개벽 운동가'로 파악한다. |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쓴 후기입니다. 읽으면서도 8~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대까지만 해도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고 보수적인 종교관을 갖고 신앙생활을 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고등학교 다닐 때 보신각 옆 2층 버거집에서 학교 친구들과 창조론 vs 진화론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을 때이다. 그때는 시야가 좁았고 교회 학교에서 배우고 알던 것이 전부였다. 최근 괴베클리 테베처럼 기원전 1만여 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이 발굴되고 440만 년 전 유인원 화석들이 나오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던 참이다. 20년간 하버드대학교에서 사랑받은 명강의를 읽을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고 유익했다. 성경 속 이야기를 더욱 객관적인 시각에서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현재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실제적인 윤리적 삶과 문제를 고민할 때 성경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놓고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은 후 조금은 타 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로 바라보게 되었고 중심만 바로 선다면 종교관이 보수적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쓴 대로 요즘 시각에서 예수와 그 시대 상황을 바라본다면 맹목적이고 불필요한 상상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책에서 좋았던 점은 현학적이지 않고 가독성이 높으면서 매우 현실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반드시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기보다 교양서에 가깝다. 과거 사회와 달리 현대에 와서는 비대해지고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이 많다 보니 기술의 발전 속도만큼 생각하고 판단을 내려야 할 일들로 넘쳐난다. 과도해진 정보량과 매일 들려오는 사건·사고들로 인해 무관심과 정신적 공허함도 심각하다. 낙태와 안락사 등 윤리적 딜레마를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리며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 갈등, 공정, 연대, 죽음에 관한 문제까지 무엇 하나 쉽지 않다. 해답은 항상 멀리 있고 비윤리적인 문제 앞에 시험당하는 기분으로 살아간다. 만약 이 책이 처음으로 출간된 2004년에 읽었다면 아마 지금쯤은 종교관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 각자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했을 것이며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읽었을 것이다. 좁아진 시야로 믿음을 강요받기 보다 예수의 지혜를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편협하지 않고 유대 랍비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비유를 묵상하며 지냈을 거라 생각한다. 아껴가며 읽고 싶을 만큼 매우 훌륭한 책이다. 기존 방식과는 분명 달랐고 윤리적 선택의 문제를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가 되어준 책이다. #예수하버드에오다 #하비콕스 #문예출판사 #추천도서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명한 신학자 하비 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판이 2004년에 나왔으니 22년 만의 출간이다. 2000년 이후의 20년이 1990년대 이후 20년과 비교하여 더 크고 빠른 변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거의 30년 정도는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다. 번역은 역시나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다시 다듬었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하버드에서 하비 콕스가 20년간 강의했던 내용을 담아 정리한 책이다. 예수가 왜 하버드에 왔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래 문장으로 갈음한다. '1980년대 초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나에게 새로 도입된 학부 교과 과정인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 분과에서 예수에 관한 과목 하나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을 당시, 나 스스로가 이런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다.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이런 분과를 창설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점점 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온갖 현상을 더는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부정한 거래, 불의한 범법 행위, 환자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많은 의사들, 자기들의 연구 자료를 날조하는 과학자들 등에 대한 이야기가 왜 이리도 많이 들려오는가? 더욱 한심한 것은 왜 이런 엉터리들 중 더러가 바로 우리 대학 졸업생들이란 말인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왜 그다지도 많이 그렇게 엄청나게 나쁜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 학생들이 받는 교육에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초판을 읽었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어서 거의 새로 읽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책의 이름이나 저자, 번역자의 이름이 생소한 분들이라면 미리 알아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신학자, 비교종교학자, 음 그리고 예수가 하버드에 온다니 이게 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할 텐데 이런 분들을 위해 친절한 추천사의 한 대목이 필요해 보인다. 이 책은 1912년을 끝으로 예수에 대한 과목이 자취를 감춘 하버드 대학교에서 70년 만에 무조건 믿습니다를 외는 믿음 좋은 크리스천들과는 달라도 너무도 다른 젊은이들의 도마 위에서 예수가 어떻게 요리되는지를 보여준다. 처녀가 남자 없이 임신을 하고, 하나님이라면서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음을 한탄하고, 그런데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을 믿지 않으면 신앙심이 없다고 단박에 질타를 당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이 책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책이 아님을 알고 읽어야 덜 놀랄 것이다. 나아가 개정판 옮긴이의 말을 새로 쓴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선생의 말을 덧붙이자면 최근 한국 토속 종교인 동학과 원불교가 주장하는 개벽 사상을 연구 중인데 예수님도 개벽 운동가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도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 압정에 시달리는 유대인들에게 식민 정치를 종식시키고 정의와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통치 원리가 작동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쓰라고 선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히고 있다. 아,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제발 주여, 이게 무슨 천지개벽할 소리입니까! 이렇게 외치지 말고 이 책은 예수가 유대인 랍비로서 삶의 여러 난관과 질문에 대해 스스로 성찰해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저자가 어떻게 종교(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는지, 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을 전공하고 이를 하버드에서 윤리적 사유를 위한 강의로 시작하여 초대형 강의실이 필요한 초인기 강좌로 20년 동안 이끌며 수많은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배운 점, 스스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하는 빌라도 역할을 맡아 재판에 참여하는 수업을 했던 이야기 등이 흥미롭게 읽힌다. (수업에서 모의로 연 재판에서도 결국 예수가 유죄를 받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예수가 무죄가 되면 성서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것이라 보수적인 크리스천 학생들이 유죄 표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 읽지 못한 저자의 첫 책 <세속 도시>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책 내용과 크게 관련은 없지만 들어가는 말에 실린 한 줄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세상이, 혹은 미국이 언제 악의에 찬 경쟁 국가들 없이 살아본 적이 있는가? 2026년의 세상을 보면서 저자는 뭐라고 말했을까? 이 한 줄의 글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냥 이 글에 눈길이 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무척 궁금해졌다. 이 책은 저자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진행한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강의의 내용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를 넘어 유대교의 랍비이자 이야기꾼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순히 정답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윤리적 문제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 각자가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사고방식을 알려주신 분이다. 랍비로서 예수님은 율법 조항을 나열하는 대신,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다.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이성적인 논리보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도 딱딱한 교리나 도덕 규칙이 아니라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고 ‘도덕적 상상력'을 자극한 놀라운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에 우리의 삶을 결합시켜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오늘의 삶을 써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인 내게 이 책은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그대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할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에게도 정답이 없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과연 윤리적으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삶의 기준이 무엇일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으로 한 번쯤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하비 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예수를 신앙의 교리 체계 속에 가두기보다,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한 사상가이며 랍비로 다시 불러낸다. 저자가 하버드라는 현대 지성의 공간으로 예수를 끌어들인 이유는 예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선택의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겠다. 과연 그 유효한 선택의 질문, 윤리적 판단을 위한 질문이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예수를 유대교 전통 속의 랍비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당시의 다른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구별한다. 기존의 랍비들이 율법이라는 규칙의 해석과 준수를 중심에 두었다면, 예수는 그 규칙이 지향해야 할 목적, 즉 인간의 삶과 관계의 회복을 문제 삼았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이는 윤리를 ‘지켜야 할 규범’으로 이해하는 의무윤리적 태도에서 벗어나 규범이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는 방향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전환은 저자가 강조하는 ‘이야기와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고 보인다. 예수는 명령문 대신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옳고 그름을 외부에서 강제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의 처지를 상상하게 된다. 이는 행위의 규칙보다 성품과 판단 능력을 중시하는 덕윤리적 접근과 유사하다고 보인다. 예수의 윤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나열하기보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산상수훈은 이러한 윤리관이 가장 밀도 있게 드러나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겉으로 보기에 산상수훈은 실천 불가능한 이상주의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행동 지침이 아니라 판단 기준의 재구성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살인보다 분노를, 간음보다 욕망을 문제 삼는 태도는 결과 중심의 윤리가 아니라, 선택이 발생하는 내적 조건을 성찰하게 한다. 이는 윤리를 외적 행위의 평가가 아닌 책임 있는 판단의 과정으로 이해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의 생각이다. 특히 원수 사랑과 비보복의 요구는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예수는 개인의 도덕적 완결성을 강조하기보다 선택이 만들어 낼 관계의 결과를 묻는다고 읽힌다. 응징은 즉각적인 정의감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폭력의 연쇄를 낳는다고 말이다. 예수의 윤리는 바로 그 연쇄를 끊는 선택을 요청하면서 더불어 이는 현실을 외면한 이상이 아니라 결과까지 고려하는 윤리적 책임의 표현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인식하면서도, 군중과 정치적 압력 앞에서 판단의 결과를 회피한다. 그는 손을 씻음으로써 책임을 내려놓으려 하지만, 윤리적으로 볼 때 이는 중립이 아니라 명백한 선택이다. 질서 유지와 다수의 안정을 이유로 한 결정은 결과주의적으로는 이해될 수 있으나, 무고한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깊은 윤리적 결함을 드러낸다. 이 장면을 통해 윤리의 어려움이 ‘옳고 그름을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는 침묵 속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감당하는 인물로, 빌라도는 판단을 타인에게 넘김으로써 책임을 유예하는 인물로 대비된다. 콕스는 이 대비를 통해 윤리를 규칙이나 결과가 아니라, 회피하지 않는 판단의 태도로 다시 정의한다. (저자는 예수의 재판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유대인의 책임이 아니라 로마인에게도 책임을 지울 수 있다고 말한다. 널리 퍼져있는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적인 책임론을 반대하고 있는 게다. 하지만 유대인의 무리는 유대인을 대표할 수 있을만큼의 권위를 가진 계급들을 포함한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빌라도는 개인으로 치부되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에게 로마의 책임론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결국 <예수 하버드에 오다>가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은 의무윤리의 규칙, 덕윤리의 성품, 책임윤리의 결과를 하나의 긴장 속에서 엮어 낸다. 예수는 완벽한 도덕적 인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선택이 어떤 인간을 만들고 어떤 관계를 남길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가를. 저자는 예수를 통해 윤리가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임을, 그리고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윤리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예수의 가르침이 나에게 더 어려워진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실천의 난이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핑계 뒤에 숨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앙의 확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내가 어떤 이야기 속에서 판단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그 질문이야말로 이 책이 읽는 이에게 남기는 가장 윤리적인 요청이 아닌가 싶다. #예수하버드에오다 #하비콕스 #오강남 #문예출판사 #매일책읽기 #독후감쓰기 #도서리뷰 #서평단 #인문학 #교양인문학 #종교 #역학 #종교의이해 #예수의가르침 #윤리학 #하버드강의 #랍비 #윤리교육 #윤리철학강의 #어떻게살것인가 #무엇을할것인가 #삶의지침 #불안한현대인 #윤리적선택 #도덕철학 #행동윤리 #방황하는현대인 #예수의질문 #종교와문화 #사회윤리 #삶의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