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10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6.0
  • 40대 0.0
  • 50대 0.0
리뷰 총점 종이책
[내 영혼의 델리카트슨-드와이트 가너] 260416_대여_내 영혼의 마약성 진통제??
"[내 영혼의 델리카트슨-드와이트 가너] 260416_대여_내 영혼의 마약성 진통제??" 내용보기
의식주는 사람이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특히 식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와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의 욕구 충족을 넘어서 인간에게 행복감을 준다. <내 영혼의 델리카트슨>이라는 제목은 책이 만찬이고 음식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저자는 먹는 것과 읽는 것을 구분할 수 없는 행위이자 본인을 구성하는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저
"[내 영혼의 델리카트슨-드와이트 가너] 260416_대여_내 영혼의 마약성 진통제??" 내용보기

의식주는 사람이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특히 식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와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의 욕구 충족을 넘어서 인간에게 행복감을 준다. <내 영혼의 델리카트슨>이라는 제목은 책이 만찬이고 음식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저자는 먹는 것과 읽는 것을 구분할 수 없는 행위이자 본인을 구성하는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저자에게 먹고 읽고 사는 게 독서이자 삶이라면, 내게 독서는 불안감을 잠재워주는 무언가다. 생존과는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관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놀고 있지 않다,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다는 자기변명이나 존재의 소명 정도랄까. 어쩌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마약이나 진통제와 같다.


마약이란 게 그렇다.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잡으려는 행동 말이다. 잡을 수 없음에도 어떻게든 아래에 손을 받쳐서 조금이라도 쥐고, 다시 반대 손을 아래로 옮겨 한 톨의 모래라도 건지고자 하는 몸부림 말이다. 이룰 수 없는, 부질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안타까운 손짓과 같은 게 나에게는 독서다.


그렇기에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다고 억지로 저자처럼 살고자 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내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독서 세계와 글의 구조를 보며, 내게 맞는 삶, 나만의 독서, 가장 아끼는 책들을 떠올려본다. 불안감에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겨 본다.

더불어 내 세계가, 나의 독서가 얼마나 좁은지 느낀다.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책이 탄생하고, 읽혔는지, 그만큼 책 안에 많은 세계가 담겨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먹는 얘기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긴 시간,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왔고 앞으로도 만들어져 갈 것인지 흥미진진하다.

.

그러다 문득 아쉽기도 하다. 내가 모든 세계를 가보지 못하듯,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 또 읽지 않아야 할 책도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책 한 권 읽는다 해도 일 년이면 50권 남짓, 80년을 산다고 해도 400권을 넘기기 힘들다. 어느 시대보다 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내가 평생 읽은 책이 오늘 하루 발행되는 책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집어 든 이 책은 나에게 얼마나 귀한 인연(서연이라 해야할까?)인가. 나의 독서를 한번 돌아본다. 독서는 가성비 좋은, 죄책감을 덜어주는 행위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그 이상의 행운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덕분에 책이라도 읽고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시대였으면...책은 커녕 배고파서 굶어 죽었을 운명일지 모르겠다. 이 기막힌 행운, 행복한 고민 앞에서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책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본다.


그럼에도 책 자체에는 큰 흥미가 돋지 않는다. 아무래도 해외 사례, 읽어 본 적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고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유머나 고유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클로드에게 물어보니 그게 이 책의 호불호이자 장단점이라는 데 아마도 내가 문학적 깊이가 낮은 것도 한 몫 할 테다. 클로드는 감정 이입이 어려워도 골격 관찰(어떻게 인용하고, 사고가 흘러가는지)이나 번역의 빈틈을 메움으로써(토스트를 엄마가 만들어준 누룽지라고 바꿔서 상상한다든지) 읽어 보는 걸 추천해 준다. 그래도 나랑 안 맞는 책인 건 어쩔 수 없다. 기회가, 서연이 된다면 또 만나겠지.


일독일자 250730 작성일자 260424 / ㅁㅁㅁㅁ 정보자료실

-----------------------------------------------------------------------------

사랑이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로 “밥 먹었어?”라고 묻는 것인가. -말런 제임스 p.13

너무 많은 좋은 취향에 둘러싸여 자라난 사람들은 늘 뭔가를 놓치고 만다. 그들은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열심히 애쓸 필요가 없다. p.69

-> 행복도 마찬가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작 그들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그렇기에 지금을 즐기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뭔가를 하려고 애쓰고, 나아지려고 노력한다. 그저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느끼기만 해도 되는데... 그렇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그 거실 마루에서 오후를 보낸 날들 이후 사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소설에서 음식과 소박한 인간성을 발견하려 하고 있다. 마치 “인간이라는 동물은 언제까지나 신체 부위와 영혼이라는 센서의 혼란스러운 복합물, 성가를 트림하는 사람, 방귀를 뀌는 천사다”라는 [미국의 음식사 연구자이자 에세이스트] 베티 퍼셀의 말을 스스로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말이다. 음식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결코 음식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이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음식은 사회 계급과 이념적 경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다. 그것은 미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것은 본능적, 학술적, 신화적, 유대적, 영적, 그리고 경제적 차원에서 우리를 건드린다. 그것은 섹스처럼 무언가를 드러내고,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성적인 보완물이 되어준다. 먹고 먹이는 존재로서 우리는 음식을 우리 입안에 넣음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필립 로스의 주인공 주커먼은 말한다. “당신의 입이 곧 당신 자신이다.” 문학비평가들은 음식과 그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들을 오랫동안 추적해왔다. “후기 구조주의 비평가의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음식은 선물, 위협, 독, 보상, 물물교환, 유혹, 연대, 질식 등으로 끝없이 해석될 수 있다”라고 테리 이글턴은 썼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문학비평가] 모드 엘먼은 음식을 “모든 기분과 모든 감각의 유의어 사전”이라고 부른다. 롤랑 바르트에게 음식은 “소통의 체계, 이미지 덩어리, 언어 용법과 상황과 행위의 통신 규약”이다. 그보다 덜 고상한 차원에서 짐 해리슨은 “만일 당신이 형편없이 먹고 있다면, 아마도 아주 형편없이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라고 썼다. p.69~70

이 책을 음식에 대한 통찰력과 감각을 지니고 글을 쓴 작가들에게 바치는 헌시 – 내가 스스로 세운 조각상들 – 로 여겨주시길. <내 영혼의 델리카트슨>은 내가 평생 읽고 먹은 것에서 얻은, 생물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교훈들에 관한 얇은 책이다. p.71

차를 마실 때면 두 번 읽은 유일한 자기계발서에서 들은 충고를 떠올린다. 그 책은 바로 톰 호지킨슨의 <언제나 일요일처럼>이다. 호지킨슨은 커피를 혐오한다. 그는 커피가 “죄의식에 사로잡힌 노력형 인간들, 돈에 사로잡힌 자들, 지위 지향적이며 영적으로 텅 빈 미치광이들”을 위한 음료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차는 그가 생각하기에 “시인과 철학자와 명상가의 오래된 음료”다. p.83

우리가 아침 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가장 크게 인정받던 걸음마 시절에 느낀 맛과 감각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나를 먹여줘’와 ‘나를 사랑해줘’는 사실상 동일한 요구이다”라고 제니 디키스는 썼다. 우리가 어릴 때 우리의 입은 우리의 마음이 모르는 것을 안다. p.91

나는 책을 파는 일에는 유령 같은 감정의 무게가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손에 들고 계산대로 온다. 우울증이나 암, 외로움이나 이혼, 성적이 낮은 아이나 폭력적인 배우자에 관한 책, 혹은 슬프면서도 웃긴 <게실염 환자용 요리책> 같은 책을 들고 와서 계산대에 내려놓는 것이다. ‘런던스 리버 카페’의 소유자이자 운영자인 루스 로저스는 식당도 비슷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식당을 보통 축하하러 가는 곳으로 여기지만, 프리제 라돈 샐러드를 먹는 도중에 이혼이나 해고 통보를 받는 손님도 적지 않다. 로저의 말에 따르면 식당은 눈물이 많은 곳이다. p.111~112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라. 점심으로 뭐가 나오는지를 물어라. -오슨 웰스 p.127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 스트리트>에서 고든 게코는 점심에 대한 미국적 감수성을 네 어절로 요약했다. “점심은 약골들이나 먹는 거야.” p.130

훌륭한 점심은 인생에서 우리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수다를 한껏 즐긴 후 자신의 수다로 그것을 마무리해줄 친구와 함께하는 식사다. p.132

“죄책감은 마법과도 같다”라고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제임스 디키는 썼다. p.137

패스트푸드는 미국의 풍물이자 종이 포장지에 싸인 민주주의다. p.146

저널리스트 토미 톰린슨은 오웰과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갈망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톰린슨은 가난하게 자랐다. 그의 부모는 수산물 가공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그의 회고록 <방 안의 코끼리>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패스트푸드를 업신여기긴 쉽다. 하지만 그건 값싼 외식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정말 큰 의미를 지닌다.” p.147~148

밤에 가게 문을 닫는 시간도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쓸고 닦고, 벌레를 죽이고, 쓰레기 봉지를 밖으로 내는 일. 당시 모텔스의 히트곡 후렴구는 “‘lover(연인)에서 ’l’을 빼면 ‘over(끝)’가 되지”였다. 늦은 밤 도미노피자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바닥을 닦으면서 우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바꿔 불렀다. “‘closer(가게 문을 닫는 사람)’에서 ‘c’를 빼면 ‘loser(루저)’가 되지.” p.155

인간의 영혼이란 결국 하나의 체인점이 아닐까, 하고 스탠리 엘킨은 물었다. p.160

아라빈드 아디가는 소설 <선택의 날>에서 “오직 아픈 사람만이 나머지 세상이 얼마나 따뜻하고 환한 곳인지 알 때가 있다”고 썼다. p.186

아침에 장을 보면 집으로 돌아와서 나중에 수확할 몇 가지 희망의 씨앗(양념에 재우기, 소금물에 절이기, 해동하기)을 뿌릴 수 있다. 이런 부차적인 활동은 하루의 배경에서 계속 뭉근히 끓으며 미래의 가능성을 키워준다. 만일 친구로부터 나쁜 소식을 전해 들었거나 도저히 감당히 어려운 청구서를 받았다면, A.J.리블링의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말을 떠올려보자. “어려운 시기에 하는 훌륭한 식사는 늘 그만큼 우리를 불행에서 구해준다.” p.189~190

그러고서 장바구니를 차에 싣고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한 시간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나느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직업이 서평가라는 것은 때로 내리 여섯에서 일곱 시간씩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일이긴 하지만, 한번 직접 해보시라. 스태미나가 꽤 필요한 일임을 알게 될 테니까. 안락한 의자에 몸을 묻는 순간, 책이 아무리 훌륭해도 곧 졸음이 밀려올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정신을 깨어 있게 하려고 계속 돌아다닌다. 카페에서 읽다가 도서관으로 가고, 다시 다른 카페로 간다. 카페에서 나와서는 차에 올라 바다로 달려간 다음 앞좌석에 앉은 채 운전대 위에 책을 올려두고 읽는다. 그러고는 다시 차를 몰고 슈퍼마켓 주차장으로 가서 챕터 하나를 끝낼 때마다 사람들이 들쥐처럼 눈을 깜빡이며 햇빛 속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곳에서는 삶의 풍요로운 야외극이 펼쳐진다. 사람 구경하기에는 메트 갈라의 레드카펫보다 여기가 더 낫다. p.242

침대로 가서 자라. 피곤한 건 바보 같은 일이니까. -어슐러 K. 르 권, <어시스의 마법사> p.243

“왜 모두가 술을 마시지 않은 걸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나의 투쟁> 4권에서 그렇게 물었다. “술은 모든 것을 커다랗게 만든다, 그것은 의식을 통과해 불어오는 바람이고, 부서지는 파도이며, 흔들리는 숲이다, 술이 투과시키는 빛은 보이는 모든 것을 금빛으로 물들인다, 심지어 가장 흉하고 혐오스러운 사람조차도 어딘가 매력적으로 변한다, 마치 모든 반감과 판단이 크게 휙 내젓는 손길로, 극도의 너그러운 행위로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것이 아름답다.” / [미국의 소설가] 던 파월도 일기장에 비슷한 말을 남겼다. “사람은 비밀 문자가 적힌 백지와도 같다. 그 비밀 문자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기이한 화학물질에 의해 드러나기도 한다.” 미셸 우엘벡은 소설 <복종>에서 이렇게 썼다. “타인을 이해하기란, 그들의 속마음을 아기란 어려운 일인데, 술의 도움이 없다면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킹슬리 에이미스는 – 그의 책 <일상적 음주 : 증류한 킹슬리 에이미스>는 모든 집에 한권쯤 있어야 한다 – 이렇게 말했다. “인류가 서로 장벽을 허물고, 상대를 빠르게 알아가고, 어색함을 깨뜨리고자 고안해낸 방식 가운데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 비슷한 속도로 맨정신을 내려놓는 일만큼 간편하고 효율적인 것도 없다.” p.262~263

나는 줄리언 반스가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에서 내린 요리의 정의, 즉 요리란 “호들갑을 통해 불확실성(레시피)을 확실성(요리)으로 바꾸는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한다. 나는 확실성을 좋아하고, 호들갑도 개의치 않는다. p.293

이제 오십 대 후반에 접어들고 보니, ‘나는 곧 인생의 3루를 지날 것이며 홈은 땅속 구멍일 것이다’라는 짐 해리슨의 말이 부쩍 자주 떠오른다. 노라 에프런은 우리 중 누구도 “최후의 만찬”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썼다. 지금 당장 먹고, 또 언제든 먹으라. 그렇지 않으면 중환자실 침대에서 먹는 병원 오트밀이 최후의 만찬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p.330

필립 로스는 <죽어가는 짐승>에서 섹스, 음식, 책, 경험 등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썼다. “맛보는 것 말고 뭘 더 얻을 수 있겠어요? 그게 인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전부고,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전부예요. 맛보기. 그 이상은 없어요.” p.333~334

YES마니아 : 플래티넘 s*******1 2026.04.24. 신고 공감 0 댓글 0